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함이다.

   
   ▲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교수
   코닷 연구위원
고신에 속한 이들 가운데, “고신교회는 성령론이 약하다.”는 근거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필자가 근거 없다고 단언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헛소문은 성령의 충만과 관련하여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성령충만에 대한 목소리는 높은데, 가만히 들어 보면 대부분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혹은 어떤 특정 교파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령충만을 향한 강단의 요란한 목소리와는 달리 성령충만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성령충만이라는 것이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성령충만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본문은 엡 5장 18절이다: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이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본문들은 주로 성령 충만이 특별한 구속사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지만(그래서 우리에게 적용하기가 쉽지 않지만), 이 본문은 에베소 교회에 주는 일반적 명령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주 간단한 명령문을 한국인으로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원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첫째 오해: “받으라!”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에 근거한 설교를 듣게 때 뭔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원문에는 ‘받는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번역이 생겼을까? 그것은 바로 한국말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원문의 수동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직역을 하자면 “성령으로 충만해져라”라는 뜻이다. 이 표현이 부자연스러우니 “충만을 받으라!”고 번역한 것이다. “받으라”가 수동태의 한국적 표현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복을 받는다(blessed)” 혹은 “구원을 받는다(saved)”도 뭔가를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상태에 들어간다.’를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는 번역은 상당한 오해를 준다. 무엇보다 성령을 인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야 할 어떤 영적인 물질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령과 관련하여 우리가 무엇보다 가장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니케아 신경이 가르치듯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를 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예수를 믿고 나서도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데, 이것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령을 어떻게 하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할까를 고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떻게 성령님을 예배할까?”라는 고민이 없이 “성령님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는가?”만 하면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된다.


둘째 오해: “내”가 성령 충만을 받는다. 충령 충만과 관련하여 우리가 던져야 할 또 하나의 질문은 ‘누가 성령 충만을 받는가?’이다. 소위 부흥강사들이 강단에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하면 청중들은 경쟁적으로 “아멘!”하고 외친다. 어떻게 보면 성령충만을 서로 먼저 받으려고 경쟁을 하듯이 더욱 더 큰 소리로 응답한다. 한글 성경 번역은 누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한국어 명령문에서는 주어가 거의 대부분 생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어는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데 바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할 대상은 “너희”이다.


이것은 성령 충만을 이해함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본문을 개인적으로 이해한다. 그 결과 성령 충만을 혼자서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물론 개인적인 성령 충만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에베소서에서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성령 충만은 한 개인의 충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성령 충만이다. 즉 성령 충만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문제이다. 즉, 성령 충만은 주위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한 몸으로서 받는 것이지 다른 형제는 성령 충만하지 않는데, 자기만 혹은 자기라도 성령 충만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셋째 오해: “성령으로?” 개역 개정판에서 “성령으로 충만”이라는 번역은 모호하다. 물론 “성령의 충만”이라고 번역한 이전의 개역 성경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의 모호성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잘못 이해하면 성령으로 우리들을 가득 채우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 드럼통을 기름으로 가득 채우다.) 그렇게 되면 성령을 “받는다”는 개념이 그대로 남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서 “성령으로”라는 말에서 “으로”는 문법적으로 수단적 여격에 대한 번역이다. 그렇다면 “성령으로”는 “성령에 의하여”로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는 “성령님에 역사에 의하여 너희들이 충만해져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인 성도들이 가득 채워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이 부분에서는 단순히 원문에 대한 낱말풀이만으로 성령충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없다. 신학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핵심적인 것은 바울 사도가 이 부분에서 구약의 성전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 성전은 뭔가 가득 채워지는 곳이었다. 그것은 구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성전인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교회 역시 구약의 성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 이 충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죄인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한 몸이 되어서 삼위 하나님과 가장 큰 친밀한 교제를 누린다. 이것이 “너희가 충만해져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충만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만이 특별한 비법을 통해서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이 성경의 가르침을 잘 이해한다면 고신교회야말로 아주 풍성한 성령론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고신교회는 일부만의 성령충만을 조장하는 개인적이고, 부분적이고, 배타적인 성령론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고신교회가 풍성한 성령론을 누리게 된 것은 바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성령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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