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님의 이야기 입니다. 어느 교회에 새로 부임을 했는데 교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늘 생글 생글 웃고 다녔답니다. 그랬더니 얼마 있다가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 “우리 목사님은 주님 십자가의 고난도 모르는가 봐. 늘 경박스럽게 웃고만 다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 때부터는 표정을 바꾸어서 엄숙하게 해서 다녔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들려오는 말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구원의 기쁨도 없는 가봐. 저렇게 얼굴이 은혜롭지 못해서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웃는 얼굴이어야 합니까? 엄숙한 얼굴이어야 합니까? 옛날 우리 목사님들은 주로 엄숙했습니다. 제가 옛날에 보았던 목사님 얼굴 중에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없었습니다. 다들 엄숙하고 근엄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목사님들 단체사진 찍으면 웃는 얼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목사님들뿐 아니라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기념자신 찍으면 다들 화난 얼굴이거나 아니면 무표정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목사님뿐 아니라 모두가 근엄해야 권위가 있던 것으로 여겼 습니다. 서양 사람들도 옛날 사진은 웃는 얼굴이 없는 것 보면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요즈음은 목사님들도 교인들도 웃는 얼굴이 많아졌습니다.


사진도 대부분 웃고 찍습니다. 단체 사진이나 개인 사진을 웃고 찍게 된 것은 서양문화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부터 권위주의가 무너지면서 웃는 얼굴로 자신을 찍기 시작했고, 우리는 서양에 갔다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먼저 웃으면서 사진 찍기 시작해서 요즈음은 다들 웃고 찍게 되었습니다. 한 20년 전에 교단 총회의 모든 회원이 참여한 기념 자신에 딱 한 사람이 웃고 있었는데 그분은 미국에서 생활하시다가 오신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의 얼굴,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밝아야 합니다. 웃는 모습, 즐거운 모습, 은혜로운 모습이어야 합니다. 기독교 자체기 본질적으로 기쁨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 슬퍼하라는 말씀 있습니다.


산상보훈에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도 있고(마 5:4), 누가복음에는 우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눅 6:21). 야고보서에는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말씀도 있습니다(약 4:9). 이런 말씀은 신앙생활의 본질이 슬픔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슬퍼해야 할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다른 사람의 죄를 생각할 때, 멸망으로 달려가는 이웃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은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본질은 기쁨입니다. 신앙이란 죄와 사망과 율법에서 자유를 얻는 심령들이 신부로서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얼굴에 근심 빛이 가득한 사람 있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얼굴이 무서워지는 사람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으면 얼굴이 밝고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내 얼굴은 어떠한지 한번 살펴보십시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