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하지 않는 표적보다는 명백한 복음을 붙잡아야 한다.

1. 손기철 장로 집회를 보면서-넘어짐에 대해서

   
   ▲ 이세령 목사

   코닷 연구위원장
근래 한국에서 신유 집회를 정기적으로 가지는 손기철 장로가 지난 해 필자의 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민 교회인 필자의 교회는 장로교 신앙고백과 정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일관성 있는 교회 행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집회에 대한 공고가 코닷을 통해서 나간 후 필자에게 직간접으로 어떻게 그런 집회를 하게 되었느냐는 문의가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과정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손기철 장로를 모시고 집회를 가졌다. 


손기철 장로의 집회가 끝나고 나면 교회가 두 편으로 갈려서 홍역을 치르는 일들이 많다고 한다. 소위 은사를 중시하는 무리와 냉랭한 무리들이 서로를 향해서 가진 입장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평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필자의 교회에서 다행히 생기지는 않았다. 


어느 교회나 병든 성도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성도들이 교회의 직분자들인 경우에 이런 신유 집회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집회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형성하게 만든다. 실제로 필자의 경우도 이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집회가 진행되었을 때 손 장로의 집회에서 볼 수 있는 병명을 호명하면서 오늘 치료받았다는 장면은 하나도 없었다. 특별히 외부에서 아픈 분들이 많이 참석해서 개인적인 기도를 받았지만 전체 집회에서 호명되지는 않았다. 손 장로의 명성을 듣고 유럽 각지에서 모인 분들이 있었지만 한국과 같이 많은 수가 모이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이 분을 모시면서 그가 매주 한다는 모임의 동영상을 여러 개 보면서 학습을 하였는데, 그런 장면은 있지를 않았다. 


아주 많은 성경을 인용하면서 강론을 했다. 자신이 목사가 아니어서 무시를 당한다는 표현을 가볍게 써가면서 오히려 성경만을 말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리고 강론이 끝이 나면 사람들을 앞에 나오라고 해서 쓰러뜨리는 일이 일어난다. 금 토 이틀간의 집회에서 첫날은 외부 손님들과 일부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갔는데 쓰러지지 않는 성도들도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오전에 개인 성도의 집에서 쓰러짐을 위한 모임이 있었다. 거기에 참석한 성도들은 모두 쓰러졌다. 그리고 둘째 날 밤에는 저를 제외하고 모든 성도들이 나갔고 모두 쓰러졌다. 심지어는 있는 자리에서 일어 선 성도들도 쓰러지기도 했다. 


필자는 그냥 앉아서 모든 과정을 살펴보았다. 말로만 듣던 쓰러짐이 눈앞에 일어나니 속였다고도 할 수 없고 잠시 멍하는 분위기를 과정을 지켜보았다. 


주일까지 지나고 모든 성도들의 관심은 이 집회에 대한 담임 목사인 저의 평가이다. 장로와 권사들의 연석회의가 정기적으로 열리는데, 거기서도 질문을 한다. 이런 분위기를 계속 이끌고 싶은 무리들도 있을 것이고, 상당하게 반발하는 무리도 있었다. 남자 성도들은 회의적인 분들이 상당수 있었다. 


필자는 쉽게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손기철 장로 집회를 한다고 할 때부터 교회는 시끄러웠다. 인터넷 검색을 한 분들이 이단 시비에 말린 사람이라고 주장을 했다. 필자가 살펴보니 아주 특정한 사이트가 손 장로를 이단으로까지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한 판단이라고 옹호해 주었다. 객관적인 판단은 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손 장로와 같은 신앙 색체가 아님을 아는 성도들은 질문을 시작했다. 


그런 다음 필자는 이런 판단을 했다.

넘어짐이 성령의 역사인 증거가 있는가? 도대체 왜 넘어지는가?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나 하나님의 능력의 어떤 측면을 현시하는가?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반대로 질문을 한다. 넘어짐이 성령의 역사가 아닌 증거가 확실히 있는가? 역시 답을 하지 못한다. 필자는 성도들에게 말했다. 우도 좌도 분명히 말할 수 없다면 기다려보자. 그리고 이런 체험을 한 것이 교회를 세우는 유익을 주는지를 살펴보자. 그리고 판단하자는 것이다. 


이런 필자의 판단으로 더 이상 논란이 되지 않고 양자를 아우르면서 그 상황을 지나갔다. 분명하지 못한 넘어짐의 현상 개인적으로는 권할 만이 것이 못되었다. 


영적인 능력을 경험한다는 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권세를 실제로 보여주겠다는 손 장로의 넘어짐의 역사는 그렇게 능력 있게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초라해 보였다. 


죄를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오해하는 것 같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은 병을 고치는 현장을 보고 싶었지만 그런 일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개인적인 기도에서 약간의 기분적인 진전을 보인 사람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증거를 얻지는 못하였다. 담임 목사가 전심으로 협조하지 않아서 생긴 결과일까?


2. 표적과 말씀의 관계에 대해서

넘어짐의 현상을 대하는 필자의 태도를 제시했다.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그게 아닌지가 불분명하기에 판단할 수 없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는지를 지켜보자는 필자의 태도이다. 일과성의 집회가 지나가고 수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조금씩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설교로 평가하면서 말씀을 나누고 있는 중이다. 


먼저 표적과 말씀의 관계이다. 표적은 말씀을 이해하도록 돕는 지침에 불과하다. 그런데 표적이 더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성경이 의문을 표시한다. 대표적인 본문이 요2:23-25절이다.  


많은 사람이 그의(예수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여기서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를 예수님께서 신뢰하지 않으셨다. 이런 입장은 요한복음을 계속 견인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수가성 여인의 증언으로 예수님께 왔지만 그러나 4:42절에 보니,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진술한다. 


또한 갈릴리 가나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는 장면이 있다. 요4:48절에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런 말씀을 듣고 난 후에 왕의 신하는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하신 말씀을 믿고 갔다고 진술한다. 표적보다는 분명한 말씀이 더 권위 있고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진술들이다. 


요5장의 38년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보고하여 핍박을 받게 만든 사건이 있다(요5:15). 일부 학자들은 이 병자가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의 죄를 범하지 말라는 권면보다는 유대인들에게 보고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하고 믿지 않는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표적이 목적하는 바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말씀에 착념하지 않은 사람이란 평가이다. 


이제 표적 혹은 성령의 역사라 불리는 여러 현상들, 혹은 환상이나 비전과 같은 일들과 분명한 복음과의 대조를 이해해보자. 


바울 사도는 고후12장에서 삼층천의 환상을 경험했다고 진술한다. 특별한 신적 경험을 자랑으로 삼는 무리들에 대한 바울 사도의 반박에서 나온 언급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에 유익이 하나도 되지 않는 경험이라고 잘라 말하면서 언급한다. 그리고 그것은 낙원의 경험이었다. 고후12:4절에서 낙원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낙원은 에덴동산을 일컫는 말이다. 회복된 에덴일 것이다. 소위 천국을 다녀온 사람이다. 이런 책자들이 최근에 많이 출판되었다. 바울 사도는 그곳의 경험을 제 삼자 '그'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들은 말은 사람이 표현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분명하지 못한 말이다. 이런 분명하지 못한 신적 경험과 대조가 되는 같은 단락에 사건이 있다. 바울이 진정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바로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위해서 세 번 기도했지만 분명하게 들려진 하나님의 응답이다.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고후12:9)


이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의 본질이다. 우리의 부족과 연약과 죄악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의 적용이다. 


복음은 분명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잘 이해되고 전달되어야 한다. 얼마나 분명한가? 왜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 낫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주신 은혜가 많아서 자고하지 않도록 연약한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담아내는 복음의 그릇이 되기 위해서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두었다. 그래서 연약을 자랑한다. 이런 분명한 복음이 성도들의 삶의 현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참된 성령의 역사이다. 


이런 논의는 심지어 구약에서도 뒷받침된다.

민12장에 보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사건이 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편에 서신다. 모세의 특별함을 옹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먼저 아론과 미리암에게 말씀하신다. 민12:6절이다.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이어서 모세에 대한 말씀이다. 7절 이하이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선지자와 같이 꿈이나 환상으로 알리지 않으신다).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미리암은 여 선지자이다(출15:20). 그리고 아론은 모세의 입으로서 대언자 즉 선지자이다(출7:1). 그런데 이런 선지자들과 모세는 차별된다. 차별의 중심은 바로 명백성이다.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는다. 그러나 누가 더 명백한 말씀을 받느냐가 차별의 핵심이다. 더 명백한 뜻을 전달받는 자가 전하는 자와 가까운 것이다. 마치 대통령에게 직접 명령을 전달받는 사람이 더 대통령의 뜻을 잘 전달하는 것과 같다. 


모세가 행한 수많은 이적과 표적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가 받은 분명한 말씀과 복음이다. 은밀하지 않은 복음이다. 선지자들의 환상과 꿈이 아닌 해석이 필요 없는 명백한 복음의 말씀이 모세를 차별시킨다. 


성도들은 이런 환상과 꿈을 가진 사람이 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심지어는 구약적인 태도도 환상과 꿈보다는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더 우월하다고 진술한다. 


이제 이런 표적과 명백한 복음과의 관계는 성령의 사역에 관련되어서도 적용이 된다. 우리의 주된 관심사인 신유의 은사로 나아가자. 


3. 신유의 은사와 마8:17절에 대한 오해

최근 제 삼의 물결, 혹은 능력 대결이란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새로운 경향이 있다. 이것은 성경신학적인 관점을 성령의 사역에 접목한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능력을 은사의 현시로 이해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에 역사하는 현장이 병 고침과 같은 이적으로 이해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서 병 고침을 보는 시각의 강력한 뒷받침이 바로 마8:17절이다.


이 본문은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사건과 연결된다(마8:14-15). 그리고 나서 그 밤에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치셨다. 이렇게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이적을 행하시면서 그 근거로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한다. 사53:4절의 종의 노래에 나오는 말씀의 인용이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침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태복음의 특징을 따라서 예수님의 행위를 구약의 성취로서 보면서 증거 본문과 인증 공식을 제시한 것이다. 


필자가 앞서 소개한 손기철 장로의 경우도 이 본문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주 언급한다. 그가 빈야드 운동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그의 자서전적인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빈야드 운동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 측면, 그리고 능력 대결의 양상과 관련됨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는 선언을 통해서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든 것을 다 짊어지셨기에 우리가 낫는다는 선언을 하고 있다. 이것이 진실인가?

먼저 필자의 입장은 아니다. 그리고 지나친 아전인수이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자.

이사야 53:4절 말씀은 고난당하는 종의 노래의 일부이고, 예수님을 예언한 말씀으로 수난 주간에 묵상되는 대표적인 말씀이다. 병을 짊어지셨다는 표현을 표준 새번역은 "병을 앓으셨다"로 번역하여 예수님께서 병자이었냐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병과 깊이 관련된 말씀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사야서에서 언급하는 질고와 슬픔(병)은 사53:5절에 우리의 허물과 죄악과 연결이 된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종이 어린양과 같이 이런 죄를 담당하신다(7). 8절도 내 백성의 허물을 언급한다. 악인과 같이 취급된다(9). 11절에는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신 사건이다. 12절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였다고 말씀한다. 이게 11절 초반부는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긴다. 이는 죄를 담당하는 일을 성공하셨음을 말한다. 이것이 종의 노래의 첫 시작인 사52:13절에 형통이란 말로 제시한다. 


형통하신 고난을 당한 종의 모습은 바로 죄를 담당하는 고난이다. 그리고 그 죄가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질고와 슬픔, 병을 짊어지신다. 이것이 이사야 본문의 의도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시면서 바로 자신이 그 고난당하는 종으로서 백성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마태복음을 선포한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는 종으로서 병을 고치시면서 목표하시는 것은 죄를 담당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병으로 상징되는 죄를 짊어지셨다. 


병을 짊어지신 것은 죄를 짊어지는 것의 표적이다. 이정표인 것이다. 이사야 말씀의 병을 짊어지는 것은 병의 원인으로서 죄를 짊어지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는 죄의 결과로서 오는 병을 다 해결해 주신 것이다. 즉 죄를 짊어지심으로 죄의 한 부분으로 드러나는 결과인 병만이 아니라 모든 연약을 예수님께서 해결하신 것이다. 


모든 예수님을 속죄의 복음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죄의 결과로서 오는 병에서부터 모두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 신약 시대에 성도들은 병에 걸리는 것을 죄의 결과로서 영원한 사망의 증거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짊어지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병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의 연약에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를 담는 수단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와 같이 병에서 낫지 못함을 은혜로 여기고 자랑으로 여기기도 한다. 


물론 우리가 범죄함으로 육체의 연약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마8:17절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죄의 결과로서의 질병에서 벗어났음을 선포한다. 


그러면 성도들의 질병은 무엇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질병을 통해서 인간에게 미친 죄를 이해하고, 거기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서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이 연약의 과정이 죽음에 의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의해서 영원한 생명에 의해서 극복된다는 것을 고백한다. 


필자가 마8:17절을 해석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의 적용으로서 성도의 질병이 낫는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사용하는 운동에 대해서 반론을 가한 것이다. 성도의 질병이 낫는다는 보장이 결코 아니다. 성도의 질병이 있지만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우리가 망하지 않는다는 약속의 말씀이고 보장이다. 


이제 한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당신은 병자들이 아프고 괴로워서 짐승같이 부르짖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치매 환자나, 혹은 암의 고통으로 아파하는 이들의 고통을 보았는가? 이들이 낫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능히 가리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에 있음을 기억하자. 아들의 병을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질병이 더 이상 저주의 병이 아니다. 외견상 치매나 자살로 몰아가는 우울증 그리고 극심한 고통의 암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저주의 병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관문이 된다. 이런 비참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참된 복음이다. 이런 분명한 복음을 붙잡고 사는 것이 필요하다. 


신유의 은사가 특정하게 일정한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특정한 것이다. 마8장의 병을 짊어지심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다. 그 말씀의 진정한 적용은 우리 모두에게 드러나는 복음의 말씀이다. 


개혁교회들이 고백하는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 1문은 이렇게 문답한다. 사나 죽으나 우리의 참된 위로는 무엇입니까? 사나 죽으나 우리의 참된 위로는 더 이상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것이기에 우리의 삶에 미치는 질병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과 위로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는 특수한 은사에 집착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잘못된 이해에 근거하기보다 분명한 복음의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