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자주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신실하신 분’이라고 표현한다. 정말 그런가? 혹시 하나님이 내게 신실하지 않으신 분처럼 여겨질 때는 없었는가? 특히 이번에 일어난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 사고로 인해 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신실하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일에 신실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신실함을 찾아보기 힘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마음과 뜻과 우리의 삶을 다해 신뢰할 수 있다”고 한다.


필자는 작년에 한국에 안식년으로 들어와서 다른 사람과의 연락을 위해 핸드폰을 구해야만했다. 그런데 나는 오래전부터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내 이름으로 핸드폰을 구할 수가 없어서 종종 다른 사람의 명의로 된 핸드폰을 사용하곤 했다. 지금은 어머니가 쓰시던 핸드폰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 이 핸드폰은 내게 늘 과분했다. 다른 사람들과 연락을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한데 핸드폰에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능이 있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걸고 받는 것 외에는 사용할 줄 몰랐다. 그런데 놀라운 발전은 전화를 걸고 받는 것 외에도 문자를 보내고 받는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한동안 나는 이 재미에 푹 빠져서 전화를 꼭 걸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문자를 보냈다. 여간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재미를 깨뜨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스마트폰의 출현 때문이었다. 아이폰이 출시되었다는 말을 들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마치 일본 동북부 지방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센다이 지역을 한 순간에 덮듯이 스마트폰의 홍수에 핸드폰 시장이 급속도로 잠식되어 이제는 핸드폰을 들고 다니면 구시대 사람같이 느껴지게 되었다.


이 물결이 선교본부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안식년으로 귀국한 젊은 선교사님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한 두 사람씩 스마트폰으로 바꾸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훈련원장과 필자만 남았다. 후배 선교사들은 만나기만 하면 핸드폰을 좀 보자고 한다. 왜 그러냐고 하면서 보여주면 “이게 뭔가요? 아직도 핸드폰을 쓰시나요? 좀 선교사회 회장님의 품위에 맞게 스마트폰으로 바꾸시죠,” 라고 하면서 은근히 협박을 한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핸드폰을 고집한다. 그것은 이것도 잠시 후에는 다른 새 모델이 나올 것이고 그것도 곧 출시될 다른 업그래이드 된 모델에 밀려서 책상 속으로 들어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올해 말이면 선교지로 가기 때문에 지금 스마트폰을 구입하면 손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새롭고 편리한 것이 나오면 이전에 사용하던 익숙한 것들을 과감하게 버린다. 이전 것에 대한 의리는 미련 없이 버린다. 스포츠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에는 잘하든 못하든 자기가 좋아하는 팀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러나 요즘은 누가 계속 지기만 하는 팀을 응원하겠는가? 이것은 비단 팬들만이 아니다. 운동선수들도 마찬가지이다. 프로선수들도 한 팀에서 다른 팀으로 쉽게 옮겨간다. 돈을 더 많이 주겠다면, 좀 더 기회가 보장되는 곳이라면 쉽게 팀을 바꾼다. 우리는 지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신실함이란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아주 신실하신 분이시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변하고 나라도 변하고 시대도 바꿔지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변치 않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우리에게 자주 이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신다. “너희들이 대단해서 내가 너희들을 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숫자가 많아서 택한 것도 아니다. 너희 수가 비록 적고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사랑함으로 택했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우리의 상태를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심이고 둘째는,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모두는 제일 좋은 것만 추구하는 지상제일주의에 사로잡혀서 산다. 이런 세상에 과연 신실함이란 존재하기나 할까? 우리는 서로에게 마치 친한 친구인척 하지만 진짜로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할까? 또 그에게 나의 신실함을 얼마나 지키려고 하는가?


이건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몇 퍼센트의 교인들이 이전부터 다니던 교회를 지금도 다니고 있는가? 우리는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교인들을 본다. 내가 사역하는 파라과이에서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돌아다니는 교인들(Cristianos ambulantes)'이라고 부른다. 전통에 식상해 있고 한 교회에 충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굳이 한 교회만을 고집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되묻는다. 다른 교회에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더 좋은 시설과 프로그램이 있는데 왜 이 교회에 계속 다녀야만 하는가? 라고 한다.


스포츠계에서도 그렇다. 유명한 선수가 다른 팀으로 쉽게 이적해 가는 것을 본다. 아직 계약기간이 남았는데도 더 나은 기회를 찾아서, 더 나은 보수를 찾아서 어렵지 않게 옮긴다. 필자와 같은 목사들도 그렇다. 소비지상주의의 사회에서 살다보니 어느새 때가 묻었는지 위임식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더 조건이 나은 교회가 나면 미련 없이 떠난다. 그래서 오죽하면 ‘위임식이 곧 이임식’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더 슬픈 일은 오늘날은 더 이상 목사가 위임식 했다고 오래 있겠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없다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기관에도 충성을 다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은 ”나는 신실하니 내게 배우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대까지 자신이 하신 언약을 지키시겠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따를 수 있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언제나 하신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지금 처한 상황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나아가자. 그리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우리의 영혼 속에 새겨달라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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