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자정능력이 있는가? - 목회자의 입장에서

 

이성구 목사    /구포제일교회

 

1. 있을 수 없는 질문


한국교회는 지금 선교 130년 역사에 가장 어려운 시점을 통과하고 있다. 전국의 대표적 일간신문들이 일제히 한기총 대표회장의 직무정지 기사를 내 보내면서 “돈 선거 휘말린 길자연 목사 직무정지 … 흔들리는 한기총”(중앙일보, 3/30), 이라는 제목까지 내 걸고 있다. 인터넷 토론방에서는 “이명박, 김윤옥 무릎 꿇게 만든 길자연 한기총 회장 직무정지”라는 제목에다 “X 목사님들 좀 조용히 좀 삽시다, 어째 한 달에 한 번씩 언론 타는 거 같네요.” 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한기총의 금권선거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 역사적 증언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주최한 행사에서 나왔다. 한기총은 3월 25일 오후 2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대강당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특별 기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설교자로 참석한 이만신 한기총 명예회장은 “나는 한기총 선거에서 금년에도 금권 선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금권 선거에 연루된 사람들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했다고 뉴스앤조이가 보도하고 있다. 이날 한기총 명예회장 4명이 연속으로 설교한 자리에서 이만신 목사는 첫 번째 설교자로 나섰다. 이 목사는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에서 돈을 쓰는 것은 관행이다. 나는 재작년, 작년 그리고 금년에도 선거에서 돈을 썼다는 분명히 사실을 알고 있다. 금권 선거 관행이 우리 한기총에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금권 선거를 한) 엄신형·이광선·길자연 목사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다.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가 교회가 보는 눈에 대하여 아파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가 교회를 어떻게 보는가는 별 문제가 아니다. 사회란 교회를 좋게 보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가 적어도 “한국교회, 자정능력이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님이 다스리는 교회여야 한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몸은 머리를 통제를 받아야 한다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어떡하라고 교회더러 자정 능력이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솔직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교회의 자정능력 여부를 논하는 것을 용납하기가 어렵다. 교회는 그 어느 공동체보다 맑고 투명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교회야 말로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어야 한다. 교회는 최고의 자정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미국을 흔히 인종적 용광로(melting spot)라 부르지만 교회야말로 모든 사람이 용해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한국교회더러 자정 능력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교회는 존재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마태복음 13장에서 읽는 좋은 씨와 가라지 비유에서 조금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게 교회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가라지들이 섞여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라고 하신다. 밭의 가라지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지만 교회에서 자라는 가라지는 그냥 두라고 하신다. 좋은 씨에서 난 곡식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추수 때가 되면 자연히 정리할 수밖에 없으니 그 때까지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약간은 피할 길을 열어 둔 것 같다. 그러나 가라지가 좋은 곡식을 대신할 만큼 되어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가라지는 드문드문 있는 법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보수교회 대표회장’이 시커멓게 먹칠을 하고 있는 꼴이다.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교회의 근본을 부정하는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질문, ‘교회가 과연 자정 능력이 있는지’에 대하여 성실하게 대답해야 한다. 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 사태가 심각하다. 오늘의 교회는 마치 하나님이 내버리신 것 같고, 머리되신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몽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과연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정화시킬 수 있는가? 일반신자들은 이미 한기총에 대해 손을 들었다. 해체하라는 것이다. “한기총 해체를 위한 기독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해체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안 계신 한기총에는 누가 있는가?”라는 극단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2.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 감당하기 어려운, 교회의 교회됨을 부정하는 질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냉정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1) 한국교회가 갈수록 소프트해지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는, 80년대까지 주일성수, 십일조, 성경읽기, 새벽기도, 전도 등 눈에 보이는 개인의 신앙 양식을 단순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회의 주보 전면에는 늘 이런 원색적인 구호들이 등장했다. 한마디로 개인의 삶의 방식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교회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주일성수와 십일조의 강조는 다른 말로 하면 시간과 물질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내 것이 없다는 사상이 그 속에 있었다. 매우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구호는 교회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전도와 복음화에 대한 강조는 있지만 개인의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강조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제자훈련, 두 날개, 가정교회 등 요즘 강조되는 교회안의 조직과 훈련은 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해 갈 것인지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신앙의 평가를 주일 성수나 십일조 등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도대체 개인의 신앙생활을 달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데 있다. 거저 예배 참석하고 헌금 조금 하면 적당히 살아도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느낌이다. 성경공부, 설교, 훈련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정말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달게 받도록, 내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인식하며 살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도대체 한국교회는 지금 성도들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고 있는가? 일신의 영달, 행복하고 안락한 삶만 가르치는, 지나치게 소프트한 내용으로 신앙이 아니라 문화의 한 양식으로 변질된, 이 세상에서의 누림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그런 하나의 종교적 생활양식을 가르치는 것은 아닌가? 성도가 희생과 고난을 마다하는 순간, 세속적 가치의 유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금권선거가 횡행하는 것은 결국 고난과 상관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오늘 우리는 복음을 지나치게 달콤하게만 설명하고 있는 것 아닌가? 목사들이 지나치게 달콤한 설교만 하려 하는 것 아닌가? (2) 교회가 다분히 권력 지향적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말이 ‘고소영’이라는 말이다. 소망교회 장로가 대통령이 되면서 교회와 정치가 뒤죽박죽이 된 측면이 있다. 교회가 권력의 산실이나 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빈민의 대부로 알려진 김진홍 목사의 이름이 대통령 만들기 공신이라는 말과 뒤섞여졌다. 개 교회를 담임목사가 아니라 유명인사들, 권력자들과 연상하는 (‘ㅇㅇ이 출석하는 교회’) 경우가 많아졌다. 대형교회 목사의 세습이 강행되어왔다. 세습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힘과 권력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교회가 장(長)을 생산하는 도구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한기협, 한기총, 한장총, 전기총, 한국교회지도자협의회, 지역기총, 전국 장로연합회, 지역 장로 연합회, 노회장로연합회 등등 헤아일 수 없이 많은 연합체를 만들어 장(長)을 무한대로 생산해내었다. 연합체가 오히려 연합을 해치는 결과를 빚고 있다. 무엇 때문에 온갖 종류의 연합체가 만들어지며 교단이 생겨나는가? 교회 분열은 다른 말로 설명이 어렵다. 성경적, 신학적 차이를 말하는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이유다. 그냥 부끄러울 뿐이다. 오직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교회가 어느 새 권력의 자리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오늘 한기총의 부패를 어떻게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3) 한국교회의 선교조차 다분히 금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나 선교사가 어떻게 살고, 어떤 모습으로 선교하고 있는 지 정확하고 정직하게 알고 있는가? 선교조차 공적주의, 금력에 의지하지 않는가? 한국교회 선교는 돈으로 하는 선교라는 비판이 제기된 지 오래다. 선교 현지에서 금력을 휘두르며 사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에 관한 관심은 매우 피상적이고 그저 돈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선교 기도회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교회를 보기 어렵다. 선교본부들이 구체적인 기도 프로그램이 진행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 그저 돈을 보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선교현장이 온갖 종류의 다툼으로 얼룩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선교지 대도시, 혹은 환경이 좋은 곳에만 선교사들이 수백명씩 모여 있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교단이 다르다보니 통제와 조정이 불가하다. 선교사의 편리가 우선되는 선교에서 무슨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가? (4) 교회가 외형에 집착하고 있다. 대형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모든 대형교회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모든 목사가 대형교회를 모델로 삼는다는 점이다. 커야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논리에 빠져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바른 말씀의 선포와 성찬과 권징의 시행고 같은 개혁교회의 표지가 ‘무엇을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가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간다고 하면서 교회의 내용보다는 교회의 외형에 더 집착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이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아닌가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다보니 결국 권력지향적이 될 수밖에 없다. 작은 것은 힘이 없고, 초라하고, 그래서 마치 주님도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실제로 작은 교회 목사들은 제대로 설교를 하지 않는 느낌이다. 적은 수를 가진 교회는 자연스럽게 무시당하는 현실이다. 작은 것은 권력을 쟁취할 수 없다. (5) 목사의 도덕성과 인격성이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구제품 옷을 입을 때 목사는 그래도 신뢰감이 있었다. 돈이 없는 것이 흠이었지만 적어도 도덕성에는 의심 받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다. 적지 않은 목사들이 돈 문제, 성추문, 가짜학위, 거짓말 등으로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도덕적 파탄상태를 보여 왔다. 소수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교단마다 곳곳에서 목사의 도덕성과 인격성의 문제로 파열음이 나타나고 있다. 목사들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주범이다. 목사 없으면 분열도 거의 없을 것이다. 소속교회들도 별로 없는 교단들이 난립한 것은 전부 목사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6) 죄에 대한 인식능력이 약해졌다. 갈수록 목사와 교인들이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고신의 기독교보는 사설을 통해 한기총 돈 선거에 대하여 양심 고백한 사실을 두고 늦게 고백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비난할 정도이다. 죄를 죄로 보지 않는다. 일반 고위 공직자들은 돈을 유용하거나 뇌물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법처리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사표를 낸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교회 안에서 금권선거가 벌어졌다고 하는데도, 돈을 받았다고 시인하는 데도 사표를 내는 사람도 없고, 어느 교단에서도 재제를 하려 들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완전 양심 마비상태다. 교회나 연합기구 안에서 돈이 유용되고 남용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회계사고도 빈번하다. 감리교는 하나의 교단인데도 왜 저렇게 오랫동안 감독회장도 뽑지 못하는 절름발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가? 감독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크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교회가 권력화되니 분쟁조정 능력조차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3. 한국교회는 자정능력이 있는가?


이 심각한 질문 앞에서 한국교회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현재의 상황은 매우 비관적이다.


(1) 한국의 공교회는 자정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 안에서 동일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같은 사건이 늘어나는 것은 자정능력이 없음을 반증한다. 이미 감리교가 선거문제로 법원의 관리에 맡겨졌다. 감리교회가 장로교인 변호사의 손에 들어가 있다.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한기총이 같은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금권선거에다 관리권조차 목사나 장로가 아니라 변호사의 손에 넘어가 있으니 자정능력이 전혀 없다고 해야 마땅하다.


사람이 모인 교회 안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런 문제는 매우 드문 일이어야 하고, 문제가 발생하여도 즉각 해결되고 잘못은 시정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사정없이 단죄될 수 있어야 한다. 죄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도록 조치하고, 범죄에 대한 대응이 갈수록 더 엄격해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자정 능력이 없다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교회의 자정능력이 없다는 것은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사회법정의 재판에 맡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좀처럼 교회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폰서 검사, 전관예우 판사 등 사법부의 부조리가 연일 보도되고 있지만 교회의 문제를 그런 사법부로 끌고 간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보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기총 감리교본부 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법정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


치리가 이루어지 않는 것은 한국 모든 교회의 보편성 현상이다. 목사에게 문제가 생기면 노회의 목사들은 철저히 목사 편을 든다는 것이 교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실제로 그래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 교단의 재판은 자주 정치재판으로 변질된다. 교회는 자정능력을 잃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2) 공교회는 자정능력을 잃고 있으나 곳곳에 샘물은 존재한다.

수년 전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옥한흠 목사와 강원용 목사가 한목협의 대화마당에 나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그 때 주어졌던 ‘한국교회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한국교회에 비관적이던 강원용 목사는 놀랍게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국교회 안에 샘물이 있다. 어디선가 새로운 샘이 솟아나고 있다. 결코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충 그런 요지로 이야기해 주었다.


한국의 공교회는 대부분 자정능력을 상실했다. 공교회에 대한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서로 죽지 않으려 겨우 엉겨있는 느낌이다. 교단이 실망스럽지만 달리 대안이 없어 그냥 붙어있는 형국이다. 그렇게 느끼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


어딘가에 샘물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수많은 성도들은 교회의 소위 ‘상층구조’에는 전혀 상관없이 아침마다 한국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가르치는 대로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곳곳에서 기윤실, 좋은 교사, 뉴스앤조이, 바른교회 아카데미 등 각양의 형태로 자신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샘물노릇을 하려고 애를 쓰는 개인과 단체들이 존재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대로 가면 망하므로 이대로 가지도 않을 것이다.



(3) 공교회의 조직적 구조변화가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현재 구조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미국 전체교회의 대표회장을 전혀 알지 못한다. 들어본 적도 없다. ‘한국개신교회는 추기경과 같은 독보적인 존재가 없어 힘이 없다’는 소리를 한다. 한국교회가 힘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힘이 너무 많아 탈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신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문자 그대로 주님이 머리로 존재하시도록 해야 한다. 스스로 머리가 되려는 무례한 행위를 그쳐야 한다.


총회장, 노회장, 이사장 같은 명예욕을 채우는 자리를 없애야 한다.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 Moderator, Chairperson과 같은 용어를 우리도 만들어 내야 한다. 호칭부터 바꾸어야 한다. 모든 목사들이 주께서 세워주신 ‘목사’되었음에 감격하고 흥분해야 한다. 목사들이 조정, 중재자의 자리, 의자에 앉아서 정리하는 사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필자는 그래서 오래전부터 총회장을 ‘총회종’으로 바꾸면 어떤가하고 다소 엉뚱한 제안을 해보기도 하였다. 총회 대표 ‘섬김이’는 어떤가? 어떻게 하든 철저하게 명예욕, 권력욕을 깨뜨리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다.


존재방식에 한계를 보인 한기총은 조직을 접어야 한다. 마구잡이 교단영입, 각종 형태의 연합기구영입으로 세만 불린 현재의 형태는 금권선거를 부르게 되어 있다. 한목협이 설정했던 교단장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과 같은 표준을 만들어 공교회 연합회를 구성하고, 총무중심의 체제가 아니라면, 유엔이 사무총장을 강대국이 맡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대형교단은 아예 회장을 맡지 못하도록 만드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이번 한기총 사태도 합동과 통합이라는 대형교단의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목사들이 되었는가? 성경은 이미 구약에서 우상숭배를 제1계명으로 금지해 놓았고, 신약에서 탐심을 우상숭배로 규정했다(골3:5). 목사들의 의식 전환이 없이는 변화가 불가능한 일이다. 탐심을 우상숭배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이 극도로 경계하는 우상숭배에 빠져드는 원인이 탐심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죄를 죄로 아는 가장 근본적이 의식개혁이 시급하게 일어나야 한다. 죄인이라야 다시 주님을 찾게 될 것이다.

 

 

 

복음 전파의 장애물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의 대안에 관하여

 

백종국 교수  /경상대학교

복음 전파의 장애물인 한기총


현재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는 국내전도와 해외선교 즉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있어서 크나큰 장애물이다. 한기총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KNCC)」의 사회선교방침에 반발하고 정교분리를 강조하는 교파들의 연합체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기독교의 어느 단체들보다도 더 정치권력과 밀착하고 있다.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는 성경적 기준과는 대치되는 가치를 옹호하고 지원하는 세력의 대명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삼가고 있는 금권타락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함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게 만드는 데 공헌하고 있다.


최근 상황은 한기총의 해체운동이 시작될 정도로 심각하다. 한국언론재단(KINDS) 검색 창에서 정확도 33% 이상의 한기총 관련 기사 146건은 사태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http://www.kinds.or.kr/ 2011년 3월 27일 검색. 다음의 아고라에서 진행하고 있는 한기총 해체서명운동은 현재 6,513명에 이르고 있다.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104373, 2011년 3월 27일 검색.)

 

일반 주요 언론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기사들 중 금권선거/해체/갱신 등에 대한 기사가 80건으로 1위(57.1%)이고, 한기총의 대북강경 발언에 관한 기사가 26건으로 2위(17.8%)이며, 이슬람채권법 기사가 9건, 템플스테이예산을 둘러싼 불교와의 갈등 기사가 8건, 재개발문제 기사가 7건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이티 우물 100개 파기, 재중 탈북고아, 인공관절수술 지원 등 하나님의 성품인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실천에 해당하는 관련 기사 내용은 6개(4.1%)에 불과하다.


한기총의 기원 한기총은 출발에서부터 한국교회의 분열과 보수화를 대변하고 있다. 한기총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군사 정권 퇴진 운동이 한창이던 1989년 2월에 당시까지 한국교회의 대표적 연합 기관이었던 KNCC의 사회선교 방침에 반발하고 정교분리를 강조하는 교파들로 시작되었다. 1989년 1월 7일자 동아일보는 이 단체의 창립 이유가 “KNCC내의 보혁 갈등”이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분열은 외부 정치세력들이 추동하였다는 주장들이 있다. 「뉴스앤조이」의 이승균 기자는 제5공화국 세력들이 진보적 종교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운영한 종교대책반의 작품이라고 보도했다. 이를 입증하는 문건도 있고, 당시 정부비서관인 박철언이나 「국정원과거사진실위원회」 위원장인 오충일 목사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분열의 씨앗은 이미 한국교회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한기총이 설립될 당시 이미 한국교회에는 KNCC라는 정통성있는 연합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1924년 9월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설립되어 한국교회의 대표적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한국교회의 특수성을 가볍게 여기고 세계 교회의 보편성에 몰두함으로써 보수적 견해를 가진 교회 내부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북장로교 계열의 근본주의 신학을 수입했을 뿐 아니라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반공주의가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또한 한국사회는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갈등 때문에 영적 위안을 갈급하고 있었다. 따라서 세계교회의 보편성에 보조를 맞추려는 사회복음이나 에큐메니칼 운동은 매우 성급한 것이었다. 한기총은 정치참여 보다 복음전파가 먼저라는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실질적인 교단 연합체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대해 장금현 목사가 편집한 회고록에서 정진경 목사는 “남북관계가 자꾸 엉키고, 운동권이 일어나고, 광주사태가 일어나는 동안에 NCC가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나서 한국복음화보다 인간화 운동으로 기울어졌어요. … 그래서 안 되겠다 생각해서” 한기총을 설립하게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문제는, 정진경 목사가 후회하는 「전두환 조찬기도회」 사건처럼, 한기총의 창립도 정치적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한기총은 66개 교단과 19개 단체를 포괄하는 조직으로 성장한 데 비해 KNCC는 8개 교단과 11개 단체가 참여하는 조직으로 머물게 되었다. 현재를 기준으로 본다면 한기총이 이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조직임이 분명하다.
비록 KNCC의 정치참여를 비판하면서 설립되었지만 한기총도 내부의 역동성으로 인하여 정치참여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어느 단체든지 규모가 성장하면 조직의 존재를 알리고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내부의 역동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사회 제 세력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 정부들이 들어서자 한기총은 그 규모로 인해 개신교의 대표 조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특히 언론의 자유를 한껏 보장하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하에서 한기총은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았다. <표 1>을 보면 2003년에서 2007년 사이에 주요 언론에 한기총이 언급된 횟수는 무려 1,095회에 달했으며, 그 중 73.5%가 정치사회 활동이었다. 특히 정치 분야 590건 중에서 실질적으로 대정부비판이라고 볼 수 있는 활동이 69.8%였다. 군사독재 시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대로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KNCC는 민주 정부 하에서 조직의 세도 약할 뿐 아니라 언론의 주목을 끌만한 요소를 만들어 낼 수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한기총은 KNCC가 희생적으로 추구한 민주화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된 셈이다.


이제 한기총은 한국사회 내 보수적 세력의 대명사가 되었다. 주요 언론의 활동 보도 범주를 볼 때 이 경향은 뚜렷하다. 한기총의 주요 인사들이 삭발까지 하면서 추진한 사학법 개정 규탄은 사학법 개정 반대와 재개정안 추진을 포함하고 있고, 북한 규탄에는 북한 퍼주기 규탄, 북핵 규탄, 북한 인권침해 규탄 등이 있으며, 친미 활동에는 전작권 환수 반대, 미군철수 반대, 미군장갑차사건 촛불 시위 반대, 등이 있고 대정부 비판에는 민주 정부를 규탄하는 시청앞 집회와 함께 보안법 개정 반대 및 대통령 탄핵 운동 참여 등이 있다. 기타에는 기독당 출범과 한나라당과의 연합 활동 등이 있다. 각종 문화 현상 반대에는 다빈치코드 상영 반대, 단군상 설립 반대,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 출간 비판, 동성애 반대, 월드컵의 붉은 악마 응원 반대, 성전환 반대, 양심적 병역 거부 비판, 배아줄기 세포 개발 반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요컨대 한기총의 설립인사들이 밝힌 순수한 복음전파를 위한 협의체로서의 성격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한기총이 추진한 사회운동의 성격을 보면 1990년대까지 한국교회를 대표하던 KNCC의 경우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표 2>는 1990년에서 1999년까지 검색 가능한 주요 언론에서 나타난 KNCC 관련 보도이다. KNCC도 정치사회 활동이 언론 보도의 68.1%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에서 인권보호와 민주화 및 파병반대 등 대정부비판적 성격을 가진 활동이 59.7%를 차지하고 있으며 남북화해 노력도 군사독재정부의 기조와 충돌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치활동의 100%가 정부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교컨대 한기총의 설립동기가 KNCC의 정치활동에 대한 반감이었다면 지난 민주정부 시절에 보여준 한기총의 대정부비판 활동은 이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주요 언론의 보도를 분석해 보면 한기총이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반대하는 세력 즉 “역사회선교(逆社會宣敎)”의 주체세력이 되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선교(社會宣敎)가 교회의 사회적 활동 즉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인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실천을 통한 복음전파라면 역사회선교(逆社會宣敎)란 이 속성을 거스리는 교회의 사회적 활동으로 인하여 복음의 영역이 축소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인권보호와 민주화와 남북화해는 대체로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실천이라는 맥락과 일치한다. 그러나 사학법 개정 반대나 친미활동 혹은 보안법 개정 반대와 같은 사회운동들은 이러한 맥락에 역행하거나 혹은 관계가 없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주장들은 대체로 기득권층을 옹호하고 고통받은 자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도리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입장과 상통한다. 물론 한기총의 활동이 이러한 일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한기총도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나 각종 국내외 봉사활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주요 언론들의 눈에 비친 한기총의 활동은 위에서 적시한 바와 같이 역사회선교적이었다. 특히 한기총이 적극 추진한 북한주민의 인권보호 활동은 인권보호라는 본질적 목표보다는 대정부 비판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공세라는 맥락으로 이해되었다. 역사회선교는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교회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추락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각종 사회조사의 결과를 보면 젊은이들 다수는 대체로 현실보다 이상을 선호하므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경향을 갖는다. 종교의 선택도 이러한 맥락과 함께 이루어진다. 한국교회는 1990년대 초까지 젊은이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었다. 구한말과 일제하와 건국의 시기에 서구화와 근대화의 상징이며 인도자였기 때문이다. 2004년 10월에 실시한 「KBS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의 42.7%가 한국 기독교야말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종교라고 답변한 이유이다. 그러나 동일한 조사에서 응답자들의 53.9%가 한국교회는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답변했으며, 47.6%가 한국교회가 이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라고 답변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신교에 대한 젊은이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2008년도 한국교회 신뢰도 조사」를 보면 한국의 20대와 30대 젊은이 중에서 절반 이상은 한국교회를 매우 신뢰하지 않는다. 가장 신뢰하는 기관으로 시민단체를 거론하는 반면 교회를 손꼽은 응답자는 각각 7.4%와 9.0%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에 대한 호감이 19%대인데 비해, 천주교에 대한 호감은 30%에 가깝다. 개신교인들의 천주교 개종이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예시해주는 현상이다. 이러한 평가는 <표 3>에서 나타나는 바처럼 한국 기독교 인구가 자의식이 깨어나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줄어드는 현상과 일치한다.

 

 

 

 

 

 

 

 

 

 

 

 

<표 3>을 자세히 보면 한국교회로서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이 발견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즉 복음화와 민주화가 동시에 강조되는 시기에 급성장하였다. 1985년에서 1995년의 10년 사이에 227만 명이 증가하였고 복음화율도 16%에서 약 20%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한기총이 한국교회의 대변자를 자임하기 시작한 시기 즉 1995년과 2005년 사이에는 약 14만 명이 감소했고 복음화율도 도리어 18%로 감소했다. 이 시기에 전체 종교 인구는 237만 명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복음주의자들로서 참으로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신교 인구의 연령별 감소율을 보면 사회적 인식이 분명해지는 20대에서 30대 사이에서 뚜렷하다. 이 연령의 복음화율은 1995년 인구조사에서는 20%에 가까웠으나 2005년에는 17%대로 떨어졌다. 이러한 하락세는 50세 이상의 복음화율이 도리어 높아지고 있는 현상과 대조적이다. 즉 현재 상황은 한국교회가 젊은이들을 상실하고 고령화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물론 한기총의 역사회선교 활동만이 한국교회 침체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KBS의 조사에서 나타난 바대로, 교단중심/자교회이기주의, 교회의 대형화 및 성장제일주의, 자질이 부족한 목회자, 비민주적 의사결정과 불투명한 재정운영, 세습이나 성추문 등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단체에서도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로 인해 그토록 극심한 반기독교적 정서가 조성될 리가 없다. 안희환 목사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사회에 안티기독교 세력들이 10여 개 이상의 포털사이트와 홈페이지, 카페, 문서, 오프라인 회합, 법제화 운동 등을 통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한국 개신교에 대해 적극적인 적대세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후 맥락을 검토해보면 주요 언론 매체를 장식하는 한기총의 역사회선교적 행동이야말로 한국교회 쇠퇴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기총은, 이 단체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분들에게는 참으로 유감이지만, 그 존재 자체로서 복음 전파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는 모든 조직에 적용되는 매개의 변증법을 피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어떤 조직이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수단이 목적을 대신하는 매개의 변증법이라는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감시하는 체제를 갖추지 못한 조직들은 쉽사리 이 함정에 빠지고 만다.


한기총 대표회장의 10억 기부 사건은 한기총 내부에서 매개의 변증법이 얼마나 심화되고 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설립 취지에 따른다면 한기총의 대표회장은 한국의 복음화를 추진하고 한국교회의 화합을 이끌 수 있는 신앙적 인격을 인정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각종 보도에 따르면 2008년의 대표회장 선거를 앞두고 한 후보자는 10억의 기부를 약속했으며 당선되었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한기총 회관 건축을 위한 기부 약속이었으며, 임기 초 3억 원을 내고, 우연챦게도 연임 선거 마감일 직전에 7억 원을 냈다고 한다. 따라서 이 후보의 대표회장 당선과 연임 당선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나 결과적으로 후보자의 재력이 당선을 좌우한 전형적 금권선거였다. 아니 금권선거 논란 이전에 조직의 대표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전근대적 매관매직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66개 교단의 수직적 통합 단체라는 구조도 한기총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다보니 무엇하러 그 대표성을 추진했는지를 잊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회장만 무려 35명이 되었는데, 명예회장이 11명, 대표회장이 1명, 공동회장이 23명이라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주의 종”과 함께 한국사회에서 빈축을 사는 일종의 개그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각 교단의 대표자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한기총의 운영조직들은 대체로 연로하고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자신들의 보수적 정치 견해를 한국교회의 전체의사라고 주장하는 한 한국교회에서 진보적 정치 신념을 가진 젊은이들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한기총이 대표하는 이러한 모습으로서는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다. 한기총의 역사회선교 행태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한국사회가 지적하는 교단정치와 개교회이기주의 그리고 목회자의 자질 부족도 한기총의 이러한 행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희망일 뿐 아니라 제3세계 국민들에게도 큰 희망이 될 수 있다. 과거 구한말과 일제시대와 경제성장기에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희망이었다.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제공하고 내세의 소망을 심어주었다. 이제 한국은 제3세계 중에서 가장 빨리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세계 유일의 모델로 뭇 사람의 칭송을 받고 있다. 만일 한국교회가 이 한국 모델을 가능하게 한 정신적 기반이었다면, 한국교회 모델은 앞으로 제3세계 국민들이 꿈꾸는 새로운 희망일 수도 있다. 이것은 또한 제3세계 선교를 위한 한국교회 모델이 될 수도 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희망이 되려면 초심을 회복해야 한다. 이 초심 회복은 먼저 이웃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는 데서 시작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인식이야 말로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자신을 돌이키는 계기이다. <표 4>는 이원규 교수가 작성한 인간고통지수와 교회의 성쇠에 관한 상관관계이다. 이 표는 지난 1백 년 간 사회적 고통이 적은 나라일수록 교회는 쇠퇴하고, 사회적 고통이 큰 나라일수록 교회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물론 이것이 한국교회가 최근에 상대적으로 감소한 이유를 말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같은 시기에 전체 종교인들의 수는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 표가 말해주는 바는 한국교회가 부흥하려면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이다. 국내전도의 방향뿐만 아니라 해외선교의 방향을 말해주는 중요한 도표이다. 한기총의 가장 큰 문제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견해와 입장을 지지하고 이 것 때문에 교세가 성장했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많은 돈을 들여 좋은 예배당을 지으면 성도들이 모여든다고 생각하는 풍조나, 권력자들을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어 아낌없이 축복을 내려주는 일에 분주한 것이나, 10억씩 내는 사람 열 명을 모아 100억짜리 한기총 회관을 짓겠다는 발언 혹은 대형 기념비와 건축물로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동이 이를 말해준다. 이에 대해 김동호 목사는 2009년 9월의 「연세대조찬기도회」에서 한국교회가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는 이기주의적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1984년 한국교회는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40억 원을 모금하여 집을 지었고, 같은 해 선교 200주년을 맞이한 천주교는 11억 원을 모금하여 전국적으로 맹인 개안수술을 해주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물론 이 논리의 엄밀한 인과관계는 아직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아 한기총이 대변하는 한국교회의 행동은 아말렉 전쟁의 승리를 자신의 공로로 돌리고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간 사울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첫째로 한기총의 조직 체계를 개혁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주로 교단의 대표들이 참여하고 있는 수직적 참여 체제를 지양하고 연령별 성별 참여를 보장하는 수평적 참여 체제를 보장해야한다. 이를 통해 한기총은 목회자들만의 단체가 아니라 평신도를 포함한 보편적 교회의 단체로 변화할 수 있다. 특히 전문가 단체들과 연합하고 그들의 대표성을 보장하는 게 좋다. 예컨대 정치에 대한 관심은 「희망정치시민연대」와 같은 기독교시민단체를 활용하는 게 좋다. 정치의 구조와 역학에 문외한인 목사들이 정치판에 뛰어들면 무지와 독단의 비극에 빠지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내부 구조의 개혁을 통해 나타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한기총에 좋은 것이 하나님께 좋은 것이라는 왜곡된 사고를 수정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잘 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둘째 방안은 KNCC와 통합하여 「한국기독교총회(가칭)」라는 새로운 연합체를 만드는 것이다. 첫 단계는 교단간의 연합이지만, 최종 목표는 교단의 혁파와 한국교회의 일치이다. 연합체의 구성은 수직적 연합과 수평적 연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보편적 신앙공동체이어야 한다. 수평적 연합이란 각종 치리회를 통한 대표 체계의 연합이며, 수평적 연합이란 연령별 성별 공동체의 대표권을 허용함으로써 각양의 의견이 최종결정에 반영되도록 하는 연합이다. 이 세번째 방안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고 있다. 새로운 연합체는 교단별 조직을 지역별 조직으로 전환하면 된다. 현재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역별 기독교협의회」는 한국교회 일치와 연합을 위해 좋은 모델이다. 각 지역 공동체의 다양성을 실천하고 가장 현실적인 대안들을 수립하는 데 유리한 조직 체계이다. 실제로 각 지역의 기독교협의회는 교단의 차이를 거의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각종 수평적 기독교 공동체들을 정식 대표로 인정하는 지역협의회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 문제는 한국교회 내의 당파성으로 볼 때 이러한 방안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KNCC가 있는 데도 명분을 마련하여 한기총을 만들거나, 이 두 기관이 있는 데도 막 전국기독교총연합회(전기총)을 출범하여 감투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전기총 출범하자마자 ‘감투 다툼’” [국민일보] 2010-08-28) 한국 기독교가 이렇게 이전투구를 벌이는 사이에 복음화율은 급전직하 떨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 상황을 보아 한기총 해체라는 마지막 방안이 가장 바람직하다. 한기총을 일단 해체하여 이 단체가 더 이상 복음의 장애물 역할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손봉호 교수는 이 점에 대해 아주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943, 2011년 3월 27일 검색) 한국교회가 부흥하려면 성경말씀대로 살면 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인애를 행하고 정직하게 살면 전도의 문이 다시 열린다. 구태여 연합단체를 꾸려야 성경말씀대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기총 해체는 비교적 간단하다. 이 단체에 적을 두고 있는 각 교단과 교회들이 한기총 탈퇴를 선언하면 된다. 개별 교회나 교단에 아무런 해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부당하게 투입되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소멸되는 것은 아마 100여 개에 이르는 전국 단체 명의의 감투일 것이다. 이 감투의 존재에 비하면 한국사회에서 복음의 대로를 다시 개설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우리가 명백하고 현존하는 오류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다른 대안을 논의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한기총이라는 역사적 오류를 극복하고 한국과 제3세계의 미래를 위한 한국교회의 모델 발전에 참여한다면 한국사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한국교회 자정능력을 점검한다 - 언론의 입장에서 권혁률 국장 /CBS선교기획국 1. 들어가는 말 - “도래한 재난과 무력한 기독교” 한국교회는 2011년 연초부터 안타까운 사건을 접하면서 새해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장로 대통령’을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 교회에서 오래된 교회내분의 결과로 담임목회자 폭행사건이 벌어지는가하면, 최근 급성장한 분당의 한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재정문제와 여성문제가 불거져 나와 언론을 장식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닥친 시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위상이 급상승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대표회장 선거를 둘러싼 내홍으로 신.구 회장 측이 가처분소송을 벌이는가하면 이 과정에서 스스로 금권선거 실태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대지진은 하나님을 멀리한 탓”이라는 조용기 목사의 발언이 일파만파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해당 발언을 게재한 매체는 자신들이 잘못 정리한 것이라고 사과했지만, 이번에는 조용목 목사가 “하나님이 요것 봐라 하는 마음으로 일본을 흔든 것”이라고 말한 사실까지 더해지면서 파장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처럼 교회 내 갈등과 추문, 잇따른 ‘설화’(舌禍)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는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가 갈수록 땅에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가운데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사람은 17.6%에 불과해 6명당 한 명꼴이었으며, 해마다 신뢰도가 하락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런 현실탓인지, 최근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어떤 크리스천지식인 모임에서는 “도래한 재난과 무력한 기독교”라는 표현이 발제제목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세상에서는 일본이 대지진과 쓰나미, 방사선피해로 시련을 겪고있지만, 한국땅에서는 교회가 대재난을 맞은 꼴이다. 2. 한국교회언론회의 2010년 언론보도 분석 한국교회언론회가 얼마전 중앙일간지(국민, 경향, 동아, 문화, 서울, 조선, 중앙, 한겨레, 한국, 한국경제)의 종교와 관련된 보도 내용을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불교 관련 보도가 가장 많아 중앙일간지 전체 보도의 40%를 차지했다. 뒤이어 기독교가 25%, 천주교가 20%, 기타 종교가 1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론의 종교편향이라는 지적이지만, 더 큰 문제는 ‘양’보다 ‘질’에 있다. 3대 종교에 대한 보도에서, 국민일보를 제외한 9개의 언론사 모두 불교에 대한 보도가 1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독교에 대한 보도가 2위를 차지하는 언론은 문화·서울·조선·중앙·한국일보에 불과했다. 경향신문은 다른 종교 보도보다 불교 보도를 2배 이상으로 늘렸고, 동아·서울·조선·한겨레·한국·한국경제일보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보도한 내용 중에서 기독교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보도를 한 언론은 한겨레로 20.41%를 차지했다. 다음이 한국일보로 8.63%, 세 번째가 경향으로 7.25%, 4위가 문화일보로 5.37%, 서울신문이 5위로 4.55%, 중앙일보가 3.7%로 6위이며, 동아일보는 1.4%를 할애하고 있으며, 조선일보와 한국경제는 부정적 보도를 자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불교에 대한 부정적 보도는, 한겨레 6.1%, 한국일보 2.54%, 경향신문 1.19%에 불과하였다. 한국교회언론회가 집계한 이 통계는 2010년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모든 언론을 직접 모니터하여 통계화한 것이다.

3. 2011년, 언론보도에 비춰진 한국교회

- “조선일보여 너마저도”


필자는 최근 우리 언론에 비춰진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20년이 넘는 필자의 언론인생활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움을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 한국교회언론회에서 개신교에 대한 비판적 보도를 자제하고 있는 언론으로 조선일보를 거명했지만, 필자가 최근의 기사를 들여다 보니 그같은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음을 역력하게 느낄 수 있었다.


● 1월 20일 조선일보 아침논단 윤평중 한신대 교수

<열린 교회에 성역 없다> 부제; 불미스러운 교회엔 공통점..카리스마 지도자/ 종교재벌

● 조선일보 2월 15일 사설 <여권법 개정과 ‘위험한 선교’ 문제>

 고 이태석 신부의 사례를 들어 높이 평가하면서 “정부가 법으로 여행자유를 제한하는 선택을 하기에 앞서 종교계가 스스로 해외선교 방식을 바꾸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 결론

● 2월 16일 김성영 전 성결대 총장 기고 <한국교회, 스스로 개혁해야 산다>

● 2월 19일 조선닷컴 블로그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강도의 소굴이 된 교회, 이대로면 기독교 신자는 ‘지옥불’ 신세>

비록 조선닷컴 블로그회원의 인용 게시물이기는 하지만 조선일보 사이트에 게재됐으리라 상상하기 어려운 글.



   

 

4. 한국교회는 자기정화를 해왔는가?


(1) 반복, 또 반복되는 사건


필자는 <기독교사상>2010년 11월호 특집 ‘한국교회 걸림돔, 디딤돌’이란 주제의 여는 글로 한국교회의 걸림돌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자료를 뒤져보았다. 그러다가 필자가 어느 잡지 2004년 신년호에 기고한 글이 눈길을 끌었다. ‘2004 한국교회 경계해야할 것과 추구해야할 것’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이 글을 다시 읽어 보면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점은 해결되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더욱 악화되어가고 있는지,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 들었다. 필자는 7년 전 글에서 새해를 앞둔 기독교인 사이에서 화제가 된 사건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사석에서 조용조용하게 그러나 어느 이야기보다 큰 확산력을 갖고 회자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인 인천 ㅍ교회 장아무개 목사의 ‘과로사’ 소식이었다. ‘과로사’라는 교회 측의 공식발표와 달리 장아무개 목사가 30대 여신도의 오피스텔에 밤늦게까지 단둘이 있다가 남편이 찾아오자 베란다로 피신해 매달려있던 중 결국 힘에 겨워 추락사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은 주요 언론의 익명보도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소문이 확산되면서 목회자뿐 아니라 알만한 모든 기독교인들의 연말 최대 화제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 사건을 화두로 내세우며 ‘한국교회가 경계해야 할 요소’로 무엇보다도 먼저 ‘실종된 기독교윤리’를 지목하였다. 또 우리가 경계해야 할 목회자들의 도덕성문제는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문제뿐만이 아니라면서 일부 목회자의 ‘교회의 사유화’ 논란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임을 지적하였다. 세 번째로 지적한 한국교회에 만연된 또 한가지 비윤리적 모습은 바로 선거와 관련된 문제였다. 총회장 선거열풍에서 비롯된 금권선거 시비는 급기야 교단과 기관의 주요 직책의 선거에까지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필자는 7년 전의 글에서 개탄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도덕성 문제와 더불어 필자는 당시 인터넷에 확산되기 시작한 ‘안티기독교운동’의 원인을 분석하며 한국교회의 게토화 현상에 대한 큰 우려를 표명하였다. 필자는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속에서 게토화되어가는 이유로 전통문화에 대한 배타적 행태와 더불어, ‘붉은 악마’처럼 기독교 교리와 어긋나보이는 사안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을 설득하는 보편적 논리를 앞세우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도취해 기독교적 논리로 비기독교인들을 강압적으로 설득 내지 압박하려 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런 상황을 7년만에 반추해 보면서 필자가 안타깝게 내린 결론은 한국교회 현실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욱 퇴보하는 느낌조차 들었다는 것이다. 교계기자로 20년이상 지내온 필자의 주변 동료들이 한결같이 하는 푸념이 “교계는 안돼”라는 자조적인 말이다. 교계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도를 해봤자 “교계언론이 은혜로운 기사를 써야지 왜 그러느냐”면서 넘어간다는 것이다. 은혜를 잃어버리게 만든 문제점은 슬쩍 덮어버리고 그 사실을 보도한 언론만 문제삼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초년병 시절에는 교회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에 불타올라 열성을 보이던 기자가 5년, 10년차가 되면서 냉소적으로 변하고 사명과 보람을 못찾겠다며 교계 언론을 떠나는 경우조차도 목도하게 되는 현실이다.



(2) 실종된 교회법, 대신 사회법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3대 교단의 하나인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지금 2년이 넘게 법적 소송에 휘말려 심각한 내홍을 겪고 있다. 교단선거법에 의해 피선거권자 자격이 없는 인물이 정치력을 발휘해 감독회장 선거에 끝까지 나섰고, 이로 이해 파행으로 치러진 선거는 결국 법적 논란에 휘말려 무효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지금 6천 교회에 교역자 만여 명, 신도수 백육십만 명에 이르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대표자를 법원이 선임한 예장합동 측 장로가 맡아서 교단을 치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개 교회나 단체들이 교회법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법적 소송으로 가는 경우는 이미 한국교회에서 드물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심지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의 하나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조차도 지금 대표회장 선거절차의 정당성 문제로 법정소송에 휘말려있다. 대표회장 선출 과정에 하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전 대표회장 측 인사들이 길자연 목사의 대표회장 선출을 인정할 수 없다고 법정소송을 제기하였고 법원은 이같은 주장을 이유가 있다고 받아들이면서 중립적 인사로 직무대행을 선정해 선출 절차를 다시 밟으라는 중재안을 내놨다. 하지만 이를 당사자들이 수용하지 않고 있어 자칫 대표회장을 둘러싼 갈등이 장기화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는 교회가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례가 갈수록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 할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는 스스로의 도덕적 규법을 준수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발생한 사건조차 스스로의 규율로 해결하지 못하며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3) 그래도 희망이


이처럼 한국교회 현실은 날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동시에 최근 들어 분명 달라진 점 하나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으니, 그것은 “이대로는 안된다”는 위기감이 교회 안에 널리 퍼지면서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분위기는 복음주의권의 대표적 평신도지도자인 손봉호 교수가 ‘한기총 해체’ 발언을 한 데서도 상징적으로 감지된다.


‘온화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진 손 교수는 10여 년 전 이른바 ‘교회세습’ 문제로 교회 안에서 개혁의 목소리가 고조될 때 교회 개혁 운동과 일정정도 거리를 두면서 교회개혁실천연대가 기윤실에서 별도로 독립하도록 했었다. 그런 손 교수가 이번에는 직접 교회 개혁의 깃발을 든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교회안에 공감대가 확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오늘같은 자리를 마련한 것도 한국교회 스스로의 노력에 희망을 걸게 하는 작은 움직임이라 할 것이다.



5. 나오는 말

- 드라마 시크릿가든 “이게 최선입니까?”


한국교회는 분명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과도하게 비판을 받는 측면도 없지않다. 예를 들어 장로 대통령이 되면서 한국교회가 큰 특혜를 받은 것처럼 비난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측근 몇 사람이 혜택을 받았을지언정 한국교회 전체가 덕을 본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정부가 기독교 편향 오해 때문에 다른 종교를 더 의식하고 배려한다는 지적도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이같은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일부 교계 인사들의 ‘경솔한 언동’ 때문에 오해를 받는 면이 크다. 그렇게 보면 이 역시 한국교회가 스스로 자초한 면이 크기는 하다.


‘장로 대통령’을 내세워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하거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신앙으로 포장해 길거리에 나서는 인사들로 인해 한국교회가 정치화. 권력화 됐다는 비판을 받고, 봉은사 땅밟기 동영상 같은 돌출적 행동으로 인해 공격적. 적대적이라는 지적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 예전 같으면 조그만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일도 이제는 전국민적 화제로 부각되는 것이 인터넷과 SNS가 기성언론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디지털미디어 시대의 현실이다. 그만큼 교회 지도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언행이 한국사회에 어떻게 비춰질지, 그리하여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며 사려깊게 행동해야 할 상황인 것이다. 지금은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어때’라는 식으로 하는 발언과 행동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시대다. 선교 초기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선교하기 위해 지혜를 짜냈던 것처럼 한국교회는 기독교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우리 사회 환경 속에서 선교적 지평을 넓히기 위한 지혜로운 처신을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우리가 덮으려 한다고 덮어지는 내부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전도의 문을 닫는 결과를 초래하는 크나큰 신앙적 범죄임을 명심해야 한다.


얼마 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TV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유래해 요즘 유행하는 대사가 하나있다. “이게 최선입니까?” 남자주인공 김주원이 백화점 임직원들이 제출한 계획서를 받아보면서 하는 말인데, 요즘 언론에서는 아니, 우리 국민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한국교회, 이게 최선입니까?”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