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잡힌 신학교육

 

4월의 기획기사 주제는 신학교육입니다. 다루고 싶은 것은 일차적으로 목사 후보생을 양육하는 신학 교육입니다. 이를 위해서 신학교수의 입장에서 그리고 일선 목회자의 입장에서 신학교육을 평가하고 바람직한 상을 제시해 봅니다. 그리고 목사 후보생의 수급과 관련한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또한 목사가 된 후에도 신학연장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재교육 프로그램들 속에서 어떤 필요들이 있고, 이를 만족시켜주는 현장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학교육이라고 할 때 첫 번째 떠오르는 것이 신학대학원입니다. 그러나 목사 후보생을 양육하고 목사의 신학적 소양을 검토하는 첫째의 주체는 신학교가 아니고 교회입니다. 장로교 정체상 노회에 있습니다. 이런 주체적 의식과 함께 위탁기관으로서 신학교를 조명하고 이해하는 작업을 해 보려고 합니다.

-코닷 연구위원장 이세령 목사

 

   
  ▲ 변종길 교수

  서울대학교(B.A.)
  고려신학대학원(M.Div.)
  화란캄펜개혁교회신대원(Drs)
  화란캄펜개혁교회신대원(Th.D)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교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10년 후, 20년 후의 교회 모습은 현재의 신학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소위 ‘신학교(Seminary)’를 중심으로 신학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무사히 졸업하면 목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목회자 양성은 곧 신학교육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I. 신학교육의 역사


그러나 이런 신학교(세미너리) 중심의 교육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네덜란드를 예로 들면 신학교를 세워서 목회자 양성을 한 역사는 약 150여년 정도 된다. 그 전에는 주로 두 가지 방법으로 목회자 양성이 이루어져 왔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대개 일반대학에서 신학교육을 담당해 왔다. 서양의 많은 대학들이 처음에는 신학대학으로 출발했다가 나중에 종합대학으로 발전하였다. 대학 전체로 보면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신학부만 따로 떼어서 보면 퇴보 내지는 타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종합대학에서의 신학교육에 불만을 가진 소수의 교회들이 따로 목회자 양성을 하기도 했는데, 대개 몇몇 목사들이 중심이 되어 도제식 교육을 하거나 아니면 소규모의 사설 신학교에서 교육하였다.

  

종교개혁 이전에 중세교회에서 성직자 양성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교회(성당)에서 작은 일을 맡아 봉사를 하면서 상급 성직자에게서 도제식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고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어거스틴이 무슨 신학교를 졸업한 것은 아니고 암브로시우스나 크리소스톰도 마찬가지다. 디모데나 디도가 신학교를 다니며 신학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직접 보고 듣고 배웠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듣고 함께 생활하면서 배웠다.

  

이런 긴 역사의 맥락에서 생각해 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세미너리’ 중심의 신학교육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런 근본적인 고찰을 도외시한 채 입학정원을 몇 명으로 할 것인가 또는 신학생의 자질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하는 논의는 한계를 띨 수밖에 없다.


II. 현행 신학교육의 문제점


현행 신학교육의 문제점을 한 마디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제일 중요한 문제는 균형의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균형의 상실이란 목회자가 되기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 가운데 한쪽으로 치우친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적 요소와 인격적 요소와 지적 요소를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개교회가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 어떤 목사를 원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개 교회는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잘 준비된 목회자를 원하고, 또한 인격적으로 흠이 없는 목회자를 원하며, 마지막으로 지적으로 잘 훈련받아서 말씀을 잘 전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를 원한다. 이 세 요소 중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며 골고루 있어야 훌륭한 목회자가 될 수 있다.

  

그러면 현재의 신학교육은 이런 균형 잡힌 목회자를 배출해 내고 있는가?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신학교(세미너리) 중심의 교육은 부득불 지적인 요소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다. 물론 영성 훈련과 인격 지도를 위해 많이 애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왜 그런가?

  

첫 번째 이유는 학생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 학년 당 120명씩 총 360명의 정원으로는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인격적인 지도가 불가능하다. 이 문제는 교수 정원을 늘린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무리 교수 숫자를 늘려도 현재의 강의실 교육으로는 전인교육이 어렵다. 또는 입학정원을 줄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혹자는 입학정원을 80명으로 줄이면 질 높은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전체 인원은 240명으로 여전히 많다. 학생 개개인을 인격적으로 알고 전인교육을 할 수 있는 정원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총 50명 이내이다. 구약시대에 엘리사가 운영했던 선지학교들의 정원은 각각 50명 정도였다. 당시에 벧엘과 길갈과 여리고에 있던 선지학교는 정원이 각각 50명 정도였다(왕하 2장). 가족들과 직원들을 다 합쳐서 일백 명을 넘지 않았다(왕하 4:43). 이처럼 엘리사가 여러 곳에 작은 선지학교들을 운영한 것은 무엇보다도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고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모방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오늘날 세미너리 교육이 전인교육을 하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현장에서 유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의 정원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결정적인 문제이다. 물론 신학생들은 주말에 교회에 가서 봉사를 하지만, 주중에 학교에 오면 현장과 유리된 강의실에서 칠판식 수업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을 현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현장수업을 하셨다. 같이 전도하고 같이 병고치고 같이 토론하고 밤낮으로 같이 생활하면서 현장교육을 하셨다. 이렇게 3년 동안 현장교육을 한 결과 제자들은 능력 있는 일꾼으로 변화되어 기독교회를 지도하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미너리 중심의 교육은 현장에서 유리된 강의실 교육이며, 지적 훈련에 초점을 둔 일면적인 교육이다. 이 문제는 실천신학 과목을 많이 개설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실천신학 과목도 여전히 강의실 교육이며 현장에서 유리된 것이다. ‘실천신학’은 결코 ‘신학 실천’이 아니며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현장에서 괴리된 교육은 어디까지나 강의실 교육이며 지식과 이론에 치우친 교육이 될 수밖에 없다.


III.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앞에서 제시한 근본적인 문제점 두 가지는 어느 것 하나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생 정원을 50명으로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것은 입학정원을 15명 내외로 줄이자는 것인데, 그러면 목회자 수급도 안 되고 교단의 축소를 가져올 것은 뻔하다. 그렇다고 각 지역마다 소규모의 신학교를 여러 개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현행 체제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실현가능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역별 강도사 교육원’ 설립이다. 이것은 현행 신학교 중심의 교육을 보완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다. 곧 신학교를 졸업하고서 목사 안수를 받기까지 2,3년간의 기간이 있는데, 이 기간을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각 노회가 중심이 되어서 강도사 교육을 하자는 것이다. 각 노회에 소속되어 있는 강도사들을 잘 교육해서 목사 안수를 받게 하면 여러 모로 유익이 많을 것이다. 각 지역별로 몇몇 노회가 연합하여 ‘강도사 교육원’을 설립하여 매주 월요일마다 성경 과목과 실천신학 과목 중심으로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30명 이내의 적은 학생들을 상대로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지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면 각 지역별로 필요한 ‘맞춤식 교육’을 할 수 있다. 각 지역별로 필요한 전도법과 목회법, 주일학교 인도법 등을 가르치면 교회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아울러 개교회의 담임목사(당회장)가 자기에게 속한 강도사를 책임지고 영적, 인격적 훈련과 목회 훈련을 한다면 옛날의 도제교육의 장점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노회의 역할 강화’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신학교육의 책임을 거의 전적으로 신학교(신학대학원)에 맡기고 있다. 노회는 그저 목사후보생 교육 위탁을 하고 1년에 한 차례 신학 계속 청원을 허락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거의 끝나고 만다. 학생을 신학교에 보내면 신학교가 알아서 ‘모든 교육’을 다해 주리라 기대한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이래저래 불평을 하거나 아니면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주문을 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미너리 교육은 어차피 지적 교육 중심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신학교육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학교육의 주체는 근본적으로 ‘교회’이며 ‘신학교’가 아니다. 장로교에서는 실제적으로 ‘노회’가 중심이 되어 목사후보생들과 목사들을 관리하고 있다. 신학교는 단지 노회의 위탁을 받아 교육을 대행해 줄 뿐 신학교육의 주체는 아니다. 각 노회가 신학교육의 주체이며, 신학교육의 최종적인 책임도 노회에 있다. 목사 안수를 하는 것은 결국 노회가 아닌가? 그렇다면 노회는 단지 목사후보생을 위탁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목사후보생 교육에 책임을 져야 한다. 노회는 그저 신학교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목회자 양성에 책임을 지고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목회자 양성에 있어서 신학교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50%도 안 된다. 그렇다면 각 교회와 노회가 나머지 절반 이상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노회가 주체가 되어서 각 지역별로 ‘강도사 교육원’을 설립하는 것이 중요한 한 방안임은 이미 말하였다. 그 외에도 노회가 중심이 되어서 목사후보생이 개 교회에서 얼마나 훈련을 잘 받고 있는지, 교회 봉사는 잘 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세심한 지도와 평가 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개교회의 담임목사의 역할이 중요하게 된다. 개교회 담임목사는 목사후보생을 그저 부리는 부교역자로만 생각하지 말고, 자기가 책임지고 지도해야 할 제자로 생각해야 한다. 곧 도제관계로 목사후보생의 영적인 생활과 설교, 심방, 행정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구체적으로 지도하고 교육해야 한다.

  

이런 지도와 교육에는 또한 보살핌과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따뜻한 사랑과 격려가 있어야 하며 또한 재정적인 지원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원칙적으로 노회가 목사후보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다 감당하는 것이 옳다. 신학교육을 위탁했으면 당연히 재정을 주면서 위탁해야 하는 것이다. 위탁의 주체가 노회라면 노회가 모든 학비와 생활비를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 개 교회는 재정형편에 차이가 있으므로 노회 안에서 큰 교회는 많이 부담하는 식으로 할당을 해서 그 노회에 소속된 목사후보생들의 재정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신학교에 다닐 때뿐만 아니라 목사가 될 때까지 전과정에 걸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런 사랑과 돌봄이 있는 가운데서 전인교육을 할 때, 교회는 교회가 원하는 교역자를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학교육은 단지 신학교만의 책임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학교육은 교회 전체의 책임이며, 구체적으로는 노회가 그 교육의 주체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신학교(세미너리)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만, 이것은 긴 기독교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최근의 일에 불과하다. 물론 고도로 전문화되고 복잡한 사회에서 세미너리 중심의 교육은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전적으로 여기에만 의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세미너리 중심의 교육을 보완하는 것으로서 노회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 엘리사 시대와 같이 50명 이하의 인격적 교육, 예수님의 제자교육과 같이 현장이 있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각 노회와 개교회가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개교회와 노회와 신학교가 합력하여 노력할 때, 교회는 좀 더 나은 교역자를 공급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혜택을 보는 것은 교회이며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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