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우제 교수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어떤 사람의 멋진 표현처럼, 현대는 ‘미소 띤 허무주의’ 정신이 주인 노릇하는 시대다. ‘미소’와 ‘허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단어들의 합성어로 정의되는 현대는 아이러니와 역설로 가득 찬 모순적 세상이다. 지금 우리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명품족의 고상한 외모를 드러내면서도 내면적 공허를 경험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단 1분도 재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게임과 오락에 중독돼 있으면서도 권태를 맛보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역사 이래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문명의 이기와 풍요를 구가하면서도 심령 깊이 느껴지는 허기를 달래야 하는 공허한 몸짓으로 살고 있다.

     

수년 동안의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맞이하게 된 한국 사회는 필자에게 너무나 커다란 충격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땅으로 변해 있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허무의 끝자락에서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자살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것도 일가족이 함께 죽음을 선택하는 집단 자살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다. 매스컴이 규명하고 있는 대다수 자살의 원인은 실직이다. 생계의 수단이 되었던 삶의 터전인 직장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인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절대적 빈곤의 시대에도 꿋꿋이 견뎌왔는데, 잠시 만나는 상대적 빈곤감이나 박탈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포기해야만 했을까? 세상이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 원인이 전적으로 환경에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필자가 이런 슬픈 뉴스를 들을 때마다 던지게 되는 가슴 아픈 질문들이다. 어둡고 눈물나는 환경은 모든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현실임이 분명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자살로 인도하는 극단적 허무의 주범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보다 중대한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잃어버린 꿈으로 인해 삶에 대한 비전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의 한복판에 몰아닥친 한파로 인해 삶의 의미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비극이 찾아온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졸업>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벤자민은 그의 어머니보다 더 나이가 든 매력적인 여인인 로빈스의 아내와 성관계를 갖는다. 침대에서 몇 주를 보내면서 벤자민은 그녀를 더 깊이 알고자 한다. 그가 대화를 시작한다. “우리, 미술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죠.” 그녀가 정색을 하면서 싫다고 한다. 벤자민은 아랑곳없이 계속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길 고집한다. 마지못해 몇 마디의 대화가 진행되다가 끝내 대화가 중단되고 만다. 그녀가 미술에 대해 흥미가 없음을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벤자민이 “당신은 어디에서 남편을 만났습니까?”라는 질문으로 화제를 돌린다. 그녀는 “대학에서요…. 그는 의과대학생이었고, 나는 그와 사귀는 과정에서 임신했지요. 그때가 대학 2학년이었는데 우리는 마침내 결혼했습니다.” 벤자민은 “그때 전공은 무엇이었나요?”라고 묻는다. 그녀는 “미술이었죠”라고 대답한다.

     

꿈을 상실한 후에 무미건조한 권태 앞에서 탈출하고자 낯선 이방 청년과 불륜을 저지르는 여인의 삶은 미소 띤 허무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인간은 환경이 어두워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비전을 상실했기 때문에 절망하는 존재라는 것이 이 영화가 던져주는 자극적인 메시지 중에 하나다. 비전을 잃은 모든 사람들은 생을 포기하든지 서서히 생을 포기하게 된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과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비전을 구현하는 설교를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허망한 세상 나라의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제시하는 비전의 책이다. 성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광야에서도 노래하게 만드는 책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절망의 환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희망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터가 무너진 시대에 신음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을 제시하라고 우리를 설교자들로 세워주셨다. 세상 그 어디에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진정한 희망은 없고 오로지 허상의 그림자만이 존재한다. 이런 세상에 희망의 실체를 전달하는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교자로 부르신 것이다.

     

우리 시대를 위한 설교자의 사명을 마치 사무엘상 17장의 골리앗의 도전 앞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다윗이 감당했던 역할로 설명할 수 있다. 다윗은 철옹성과 같아 보이는 거대한 벽 앞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와 삶으로 드러내주었던 설교자의 모델을 제기한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현대 설교 사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희미해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제가 선포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제시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김운용 교수는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신학계에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했지만, 강단에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는 깜빡거리는 희미한 불로 남아 있다. 여전히 반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주의 기도를 암송하지만 그 정확한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읊조리고 있고, 별다른 감동이나 기대나 기다림도 없이 반복된다.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언어들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넘치는 경이감은 이미 상실했다. 이런 현상과 함께 설교는 그 대신에 늘 과거적인 사건에 얽매여 있게 된다. 버트릭은 이런 현상에 대해 “오늘날의 설교는 마치 어떤 강박관념에 묶여 있듯이 ‘옛날 옛적에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인 성경의 역사’에 묶여 있는 상황으로 묘사한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펼쳐 가시는 현재적 사건이나 미래적 사건에 대해선 감격이나 흥분을 잃어버린 채 오직 과거의 사건에 집요하게 고착돼 있다. 그래서 오늘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역사하심이나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로운 사건에 대해 별로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이번 호의 주된 관심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그동안 희미해졌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드러내는 설교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구체적으로 설교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측면

복음서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 그리고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 나라’라는 표현은 113회 사용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72회가 예수님 자신의 말씀 중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정초된 가르침과 선포 사역에 집중하셨는지를 방증(傍證)하고 있다.2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교회가 다양한 사역을 땅 위에서 펼치지만 궁극적으로 염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들이 수많은 말씀을 다른 주제와 제목으로 전파하고 가르치지만, 그 모든 설교 사역의 초점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의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위에 정초돼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신학의 중심 이슈로 급부상한 하나님 나라의 신학 공헌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하나님 나라를 단순히 미래에 죽어서 가게 될 피안의 장소로서 천당으로 제한하는 좁은 이해를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장소의 영역을 포함하지만 거기에 국한돼선 안 되는 통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왕적 통치가 될 때, 이 주제는 구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전체 성경의 중심 주제임을 알게 된다. 비록 구약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등장하진 않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된 하나님 나라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개념인 ‘하나님의 오심’, ‘주의 날’, ‘하나님의 왕권’은 풍성히 소개돼 있다. 천당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견해와는 달리, 하나님 나라는 지역적이고 환경적인 나라 개념을 넘어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 즉 왕의 권세와 능력이 행사되는 모든 영역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 나라는 신자들이 죽어서 가게 될 다음 세상에서 경험하는 실체가 아니라, 주님의 통치를 받는 이 세상에서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실체다. 즉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 국면뿐 아니라 현재적 국면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예수님께선 하나님의 영에 의해 자신이 기적을 베풀게 되는 사역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에 대한 구체적 증거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설교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설교의 주제로 선포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단지 미래적 천국에 대한 소망의 언어를 제시하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시공적 개념을 넘어서는 현재적 변혁의 사건과 현상을 지향하는 말씀 선포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세윤 교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주는 두 가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는 역동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려면 하나님 나라의 현장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분의 백성을 전제한다. 결국 하나님 통치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탄의 뜻을 대치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뤄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위의 결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아담적 숙명이 전적으로 뒤엎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적 숙명이 전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은 죄용서와 인간 자원 부족의 결핍으로부터 해방을 뜻한다.

     

결국 예수님의 선포와 사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신 사건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실 때마다 일대 변혁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목도한다. 세상의 가치관과 운명이 뒤집혀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변혁적 사건은 교회의 말씀 선포로 미소 띤 허무주의 시대의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음성이 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비전은 단순히 세상에 있는 수많은 문화의 소리나 다양한 담론들 중에 하나가 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곳에는 세상/ 사탄의 나라가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인생들을 속박하고 지배하는 악의 통치를 종결하고 새로운 통치 시대를 열게 된다. 그런 삶을 도전하고 마침내 그런 도전을 받아들여 살아가도록 만들어 놓는다. 말씀의 사역자로서 우리가 품게 되는 비전이 있다면, 세속적인 가치 체계에 도전하는 하나님 나라에 정초된 말씀 선포와 가르침을 통해 성도들을 사탄이 유혹하는 거짓된 삶의 길을 물리치게 하는 말씀의 사건화라 할 수 있다. 거기서 기독교의 복음이 이 시대의 현대인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됨을 분명히 목도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구현하는 설교의 본질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비전을 추구하는 말씀 사역의 진로를 위해 무엇보다 우선 점검해야 할 사항은 우리의 말씀 사역에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규명하는 일이다. 설교의 본질에 대한 규명 없이 형태적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말씀 사역의 존재론적 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전통적 설교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등장하는 현대의 신설교학(new homiletic)의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설교의 본질에 대한 심도 있는 신학적 반성 없이 제시되는 현대 청중의 귀를 사로잡는 효력 있는 실용적 방법론의 추구는 설교가 무엇이고 설교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상실한 채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과도하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윌리엄 윌리몬3은 이런 설교적 경향의 심각성에 대해 우려 섞인 목소리로 개탄하고 있다.

    

 “오늘날의 설교학은 테크닉, 이미지, 이야기 등에 관한 논의에 관심을 가져왔고, 이런 설교를 통해 어떤 종류의 사람들로 형성되는가 하는 정치적 질문들에 관해선 어떤 관심도 갖지 않았다. 우리는 설교자의 역할이 청중에게 감동을 주는 데 있다고 가정해버린다. 은혜를 받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말이다. 아! 미학적인 기술이 교회 설교의 정치적, 목회적 기능을 대신해 버리고 있다.”

     

나중에 논의하겠지만, 윌리몬의 지적은 일방적인 면이 있지만, 이 시대의 말씀 사역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권고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설교가 기술적인 면이나 오락 혹은 즐김의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형태의 새로움에 의존하는 말씀 사역을 논하게 될 때 교인들의 즐거움에 호소하는 태도로 나아가게 되어 궁극적으로 진리를 전하기를 포기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심각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설교 사역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규명해 보는 것이다. 오늘 주제와 관련해 이야기한다면 설교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임재를 위한 방편이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신학적 도전은 말씀을 통해 청중의 급진적 변화를 요청한다는 점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에 정초된 말씀 사역은 두 세계 즉 세속적인 가치관·거짓된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세계관의 불가피한 충돌을 야기한다. 이 충돌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제시하는 희망적이고 최종적인 가치관은 이 세상 나라가 제시하는 절망적이고 일시적인 가치를 극복하고 정복하게 만든다. 이렇게 대안적 하나님 나라의 변혁성에 근거한 선포는 현 세상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대안적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입각한 설교 사역은 우리를 둘러싼 세속적 가치관의 실제를 폭로하고, 그 세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의 찾아옴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입술로 신앙 고백을 암송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으나, 그들의 마음은 온통 일주일 동안 부딪힌 세상의 가치관에 세뇌되고, 세상의 거짓된 이념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설교는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통해 드러난 참된 삶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독려하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의 중심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인생들이 세상을 통해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듣고, 보고, 수용하고, 부러워했던 세계가 거짓된 세계이고 진실로 참된 세계는 바로 성경이 묘사하는 세계임을 알게 해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제시하는 설교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청중을 이 비전에 응답케 함으로써, 왜곡된 세속적 가치관을 붕괴시키는 현실 변혁적 설교 사역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 비전의 중심 되는 말씀 사역은 복음 전파에 대한 본질로서 두 가지를 근본적 요소로 전제하도록 한다. 첫째는 우리가 세속적인 세계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이 세계는 우리의 설교를 죄와 타락의 요소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여기서 인생들의 모순 상태를 알게 함으로써, 효과적인 말씀 사역을 위한 말씀 사역에 참여한 이들의 필요(need)를 끄집어내도록 한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아직’의 긴장 가운데 있는 인생들의 모순 상태를 네 가지로 요약한다. 인간과 자연과의 모순 상태, 인간과 인간과의 모순 상태, 인간의 내적 자기 모순 상태, 인간과 하나님과의 모순 상태 가운데 설교에 적합한 부분을 제시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인간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들어오도록 초대함으로써, 이 모순적 상황을 총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길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온전하고 전인적인 회복을 인간에게 가져온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이 세속을 끌고 가는 힘과 정신 그리고 가치 구조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빛 가운데서 평가하도록 만든다. 세속 세계의 허상을 복음의 실상으로 밝히고, 대안적인 하나님 나라의 변혁의 길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비전이 중심에 놓여진 말씀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시각을 세상에 제시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비전을 구현하는 3단계 설교 프로세스

설교 사역의 본질에 대한 우선성은 설교 사역의 형식과 방법론의 중요성도 간과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두 부분을 대립적 시각 안에서 이해해선 안 되며, 오히려 상호 충족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관점 안에서 양자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설교를 어느 그릇에 담느냐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무엇인가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선 앞서 규명한 설교의 본질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구현하는 3단계 설교 프로세스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세상 나라의 지배권 아래 살아가는 청중의 어둠의 실재로서 갈등의 요소와 그 대안으로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의 선포(변혁의 복음 선포)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위한 결단(변혁적 복음이 요구하는 삶의 결단)으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세상 나라에서 사는 갈등의 요소를 제시하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파할 때, 그 복음은 진공 상태에 그냥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전파와 가르침은 언제나 사람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말씀 사역은 상황적 국면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복음의 희망이 진정한 희망으로 청중에게 주어지기 위해선 먼저 세상 나라 안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어둔 실체를 깊이 드러내주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이 타락적 요소의 실제를 철저하게 규명해 가는 일 없이 대안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나 복음을 제시하게 될 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값싼 은혜’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하나님 나라의 밝은 빛이 심령 안에 분명히 비춰지기 위해선 청중의 어둔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야 한다. 로마서가 바로 이런 구조로 설명되고 있다. 찬란한 빛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를 선언하는 자리는 바로 인간의 죄의 심각성이 심도 있게 토론된 직후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인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설교 사역은 새 창조, 새 공동체, 새로운 가치, 새로운 질서의 이미지들을 부여해 줘야 한다. 성령님의 현존하시는 능력 안에서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복음 혹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부분이다. 이런 면에서 말씀 사역을 반드시 성경이 무엇이라고 증언하고 있는지에 대한 규범적인 측면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규범적 국면을 규명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설교자의 임무가 단순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개념 전달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 상징의 기능과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청중을 설득하는 효력을 풍성하게 드러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즉 청중이 갖고 있는 사상 바꾸기만이 아니라 이미지 바꾸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거기서 본문은 청중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된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1장에 변혁적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증인의 능력이 바로 세속적 관점에서 추구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세속적 능력의 그림들과 대조를 이루는 성경이 말하는 능력의 그림을 고난과 희생의 이미지 중심으로 스케치할 수 있다. 두 증인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는 변혁의 복음을 결단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복음을 삶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마지막 남은 설교자의 임무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현장화시키는 것이다. 이 부분은 흔히 말하는 적용의 부분으로서 청중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 나라의 빛 아래서 오늘 설교 말씀을 어떻게 실천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아래에 주어진 아주 포괄적인 영역에서 구체화돼야 한다.

 

쪾개인으로서 나는 개인의 영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쪾개인으로서 나는 사회의 영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쪾공동체로서 우리는 개인의 영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쪾공동체로서 우리는 사회의 영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맺는 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설교는 반드시 실존적인 측면을 가져야만 한다. 설교가 들리기 전과 들리고 난 후에 청중이 어떤 부분에서 변화되기를 원하는지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다시 계시록 11장으로 설명한다면, 규범적 측면에서 제시한 십자가의 희생을 따라가는 능력의 길을 어떻게 개인의 삶, 가정의 삶, 교회의 삶 그리고 사회의 삶에서 구체화시켜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앞서 모든 논의들을 정리하면 ‘미소 띤 허무주의’ 가치관이 진리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우리 시대는 어느 때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우리의 모순적인 문제들에 해답과 희망 그리고 대안이 되는 설교 사역을 필요로 한다. 그저 아무 목적이나 방향도 없이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뚜렷한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비전 안에서 어둔 삶을 뚫고 오시는 주님(복음)의 희망을 보여주는 설교 사역이 요구된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