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 이양호 교수 연세대 신과대학 칼빈의 사상은 근대 사회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종교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인물이었다. 루터가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사상을 제시했다면 칼빈은 그 새로운 사상을 정교화하고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칼빈은 세계 정치사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근대 민주주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칼빈이 군주나 영주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활동을 했더라면 민주주의의 발전의 역사에서 공헌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는 군주나 영주가 아니라 시민이 이끌어가는 제네바라는 도시 국가에서 활동하였고, 또한 그가 법학 전문가였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 제도를 제시할 수 있었다. 칼빈은 세계 경제사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칼빈이 장원 중심의 농촌 지역에서 활동했더라면 새로운 도시 산업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업이 중요 산업인 제네바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새로운 산업 사회의 예언자”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그는 한편으로 상업을 장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나타내었다. 또한 칼빈은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 그는 과학적 연구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뿐만 아니라 역사 연구와 철학 연구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우리가 이런 칼빈의 역할을 종합해 본다면 그는 가히 “근대 문화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사상이 이처럼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지만 근래에 와서 서구를 중심으로 그 영향이 크게 감소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코틀랜드의 라이트 (David F. Wright) 교수는 한국 교회를 보고 다녀간 후 한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날 서구의 기독교 세계가 와해되는 것을 볼 때 칼빈주의의 유산이 지속되기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지난 수세기 동안 네덜란드, 네덜란드 개혁 교회가 지배한 남아프리카, 스코틀랜드, 청교도가 지배한 잉글랜드, 뉴잉글랜드 등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해 왔던 단일한 기독교 사회의 진지한 질서가 문화적, 종교적 다원주의에 의해 해체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 교회의 빠른 성장이 입증하듯이 칼빈주의의 신학과 교회 정치의 시대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1) 라이트 교수는 세계 개혁 교회의 약화를 보면서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개혁 교회의 희망을 보고 있는 듯하다. II. 종교 개혁 사상 칼빈은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무엇보다 종교의 개혁자이었다. 그는 종교를 “종의 종교”로부터 “아들의 종교”로 격상시켰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요컨대 율법의 멍에에 매인 자들은 주인들에 의해 매일의 일들을 할당받는 종과 같다. 이 종들은 그 일들의 정확한 양을 완수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성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주인들 앞에 감히 나타나지 못한다. 그러나 아들들은 아버지에 의해 보다 관대하고 진솔한 대우를 받으므로 불완전하고 절반밖에 안되고 심지어 결함이 있는 일까지도 내어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아버지들이 의도하는 것을 그대로 완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의 순종과 자발성을 아버지들이 받아주시리라고 굳게 신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봉사들이 아무리 작고 조야하고 불완전하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자비로우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신다고 굳게 신뢰해야 한다.”2) 그는 종교를 영적 종교로 격상시켰다. 칼빈은 우상 숭배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경건의 실천이 유일한 하나님 이외에 어떤 다른 것에 전가될 때마다 신성 모독이 생긴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참으로 처음에는 미신이 태양이나 별들 혹은 우상들에게 신적 영광들을 부여했다. 다음으로 야심이 뒤따라서 하나님에게서 빼앗은 것들을 가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장식하여 거룩한 모든 것을 더럽혔다. 그리고 최고의 존재를 예배하는 원리는 남아 있지만 수호신들, 작은 신들, 죽은 영웅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오류에 잘 빠지므로 하나님이 자신에게만 엄격하게 남겨 두신 것을 여러 존재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3) 칼빈은 개혁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했다. 그는 일부 루터파가 칭의를 강조한 데 반해 칭의와 중생을 함께 강조하기를 원했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추방되어서 영혼의 복스러운 생활에 속하는 모든 성질들이 그 안에서 사라졌으며, 중생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회복된다는 결론이 된다”4) 하고 칼빈은 말하였다. 칼빈은 회개와 중생을 동일시하였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나는 회개를 중생으로 해석한다. 중생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인데, 그 형상은 아담의 범죄를 통해 일그러지고 말살된 것이다”5) 라고 칼빈은 말하였다. 또한 칼빈은 중생과 성화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중생에 의해 그리스도의 유익을 통해 하나님의 의 속으로 회복된다. . . . 그리고 참으로 이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그리고 때로는 늦은 진전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선택자 안에서 육의 부패를 씻고 그들을 죄로부터 정화하며 그들을 자신에게 성전으로 봉헌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지성을 참된 순결로 갱신하여 그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회개를 실천하고 이 전쟁이 죽음에서만 끝날 것임을 알게 한다”6) 라고 칼빈은 말하였다. 칭의와 중생의 관계에 대해 칼빈은 이 둘이 동일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분리되는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우선 칼빈은 칭의와 중생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구별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칭의와 중생을 동일시한 오지안더(Osiander)를 비판하였다. “오지안더는 중생의 저 선물과 이 값없는 용납을 혼합하고 그것들을 하나요 동일하다고 주장한다”7) 하고 칼빈은 말하였다. 칼빈은 칭의와 중생은 분리되지 않지만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칭의의 은총은 중생과 분리되지 않으나 그것들은 구별된다. 죄의 흔적들이 의인들 안에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이 경험에 의해 매우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칭의는 삶의 새로움을 향한 개혁과는 전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롬 6:4 참조]. 하나님은 그의 선택자 안에서 이 두 번째 점을 시작하고 그 안에서 일생을 통해 점진적으로 때로는 천천히 진보시키므로 그들은 항상 그의 심판대 앞에서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8) 칼빈은 칭의론에 있어서 의의 부여가 아니라 의의 전가임을 분명히 주장하였다. 칼빈은 “우리는 신앙만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값없는 의를 얻는다”9) 라고 말하였으며, 칭의는 “하나님이 그의 사랑 속에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들로 받아들이는 것”10)이라고 말하였다. 칼빈은 오지안더가 "justify"를 "to make righteous"로 설명한다고 비판하였다.11) 칼빈은 오지안더의 주장에 반해 칭의와 중생을 구별하였지만, 그러나 칼빈은 칭의와 중생을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삶의 실제적 거룩함은 의의 값없는 전가와 분리되지 않는다”12) 하고 칼빈은 말하였다. 또한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지혜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 1:30].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동시에 성화하지 않고 아무도 의롭다 하지 않는다. 이 유익들은 영원하고 분리할 수 없는 띠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그가 그의 지혜로 조명한 자들을 그가 구원한다. 그가 구원한 자들을 그가 의롭다 한다. 그가 의롭다 한 자들을 그가 성화한다.”13) 또한 칼빈은 “그리스도가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없듯이 우리가 그 안에서 인식하는 이 두 가지, 즉 의와 성화는 함께 결합되어 분리될 수 없다”14) 하고 말하였다. 칼빈은 칭의와 중생의 관계를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하였다. “우리는 행함 없이 의롭다 함을 받지 않지만 행함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참여에 있어서 성화는 의와 마찬가지로 포함되기 때문이다.”15) 칼빈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의 저 연합, 우리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내주 - 요컨대 저 신비적 연합 - 는 우리가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들 안에서 그의 참여자가 되게 한다. 우리는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우리 밖 멀리서 관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그를 입고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 요컨대 그가 우리를 그와 하나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16) 마치 칼케돈 신조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는 것이 아니라 연합되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칼빈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혼합을 주장하는 것은 비판하였지만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연합은 주장하였다.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사상은 최근에 와서 칼빈 연구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17) 노리스(F. W. Norris)는 “존 칼빈은 신화(deification)라는 가르침을 피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하고 말하였다.18) 노리스는 그렇게 말하긴 하지만 칼빈이 지복의 비전과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에 관해 말했음을 지적했다. 한편 모써(Carl Mosser)는 “가능한 가장 위대한 복: 칼빈과 신화”라는 논문에서 “칼빈은 신자들의 신화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또 긍정하였다” 하고 말하였다.19) 모써는 칼빈에게 있어서 신화는 중심적 주제는 아니었지만 다른 주제들을 다루는 자리에서 빈번히 다루어진 주제라고 말하였다. 모써는 칼빈에게 있어서 신화는 가장 위대한 종말론적 선이며 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슬레이터(Jonathan Slater)는 모써의 주장을 반박했다. “칼 모써는 최근의 한 논문에서 칼빈의 신학에 신화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논제는 에큐메니칼한 전망은 가지고 있지만 그 논제를 지지할 만한 증거는 거의 없다” 하고 슬레이터는 말하였다.20) 슬레이터는 칼빈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구별되며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인성과의 연합이라고 보았다. “칼빈의 입장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속한 것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하고 슬레이터는 말하였다. 칼빈은 구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서로 반대되는 두 사람, 오지안더와 스탄카로(Francesco Stancaro)와 논쟁을 했다. 오지안더는 그리스도는 신성에 따라 우리의 중보자라고 보았으며,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따르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따르는 의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스탄카로는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없으며, 인성으로만 중보자가 된다고 말하였다. 이 논쟁은 신자의 구원이란 그리스도의 신성과 연합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이 두 사람의 상반된 주장을 다 비판하면서 자기의 입장을 피력했다. 오지안더는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에 따라 우리의 의가 된다고 말하였다. “만약 무슨 의인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믿음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따라 우리의 의이다.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의 공로로 주시는 것인데, 이 죄의 용서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인 그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준비이며 원인이다.”21) 칼빈은 오지안더의 칭의의 교리에 대해 두 가지로 비판했다. 첫째로 그리스도가 그의 신성에 따라 우리의 의가 된다는 주장을 비판했으며, 둘째로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득의된 신자와 연합한다는 주장을 비판했다. 칼빈은 오지안더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오지안더의 견해는 그리스도는 신이며 인간이기 때문에 그는 그의 신성에 있어서 우리를 위해 의가 되지 인성에 있어서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22) 이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평했다. “만약 오지안더가 이 사역은 그 탁월함으로 인해 인간 본성을 넘어서며 이 까닭으로 신성에만 돌려질 수 있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나는 이 첫 번째 점은 인정한다. 두 번째 점에 있어서 그는 크게 현혹되었다고 말한다.” 칼빈은 두 번째 점을 이렇게 부연 설명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참된 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의 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없었으며 그의 희생 제물로 그의 아버지를 달랠 수 없었으며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없었으며, 요컨대 제사장의 직임을 성취할 수 없었겠지만 - 육체의 능력은 이런 큰 짐을 지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 그가 이 모든 행위들을 그의 인간 본성에 따라 수행한 것이 확실하다.” 칼빈에 의하면 오지안더는 본체적 의에 대해 말한다. “오지안더는 ‘본체적’ 의라고 하는 이상한 괴물을 소개하였다. 그는 그것에 의해 거저 주어지는 의를 폐기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안개 속에 싸서 경건한 정신들을 어둡게 하고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빼앗았다.” 칼빈이 보기에 오지안더는 “본체적 의”라는 용어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본체와 하나님의 성품의 주입에 의해 하나님 안에서 실체적으로 의로운 것으로 이해하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칼빈은 “오지안더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의롭게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하고 말하였다. 칼빈이 보기에 오지안더는 결과적으로 신생의 선물과 값없는 용납을 혼합하고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오지안더는 하나님이 의롭다할 때 용서할 뿐만 아니라 신생하게 함을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의롭다한 사람들을 본성상 있는 그대로 남겨 두고 그들의 악덕들을 변화시키지 않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대답하기 매우 쉽다. 그리스도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없듯이 우리가 그 안에서 함께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 두 가지, 즉 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다.” 이어서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은총 속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동시에 그들에게 양자의 영(롬 8:15)을 준다. 그리고 그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이미지로 다시 만든다.” 이 곳에서 칼빈은 태양의 빛과 열에 대해 언급한다. “태양의 빛이 태양의 열에서 분리될 수 없다고 해서 우리는 땅이 태양의 빛에 의해 따뜻하게 된다고 말하거나 태양의 열에 의해 밝아진다고 말할 것인가? 현재의 문제에 대해 이 비교보다 더 적합한 것이 있는가? 태양은 그 열에 의해 땅을 살리고 열매를 맺게 하며, 그 빛에 의해 땅을 밝게 하고 조명한다. 여기에 상호적이며 불가분리의 연결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은 빛의 고유한 특질들을 열의 고유한 특질들에 이전하는 것을 금한다.” 칼빈은 이중적 은총은 인정하지만 이중적 의는 인정하지 않는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에게 참여함으로써 주로 이중적 은총을 받는다. 즉, 첫째는 그리스도의 무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는 은총이다. 이는 우리가 하늘에 한 심판자 대신 은혜로운 아버지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성화되는 은총이다. 이는 삶의 무죄성과 순결성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에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비참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자비 안에 전적으로 쉬지 못하도록 이중적 의를 함께 싸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가시관으로(막 15:17) 관을 씌어 모독하는 자들이다.” 칼빈에 의하면 이중적 의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불경건이다.” 반면에 스탄카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부의 신성보다 열등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23) 중보자는 우리를 위해 중재하고 기도하는 분이다. 중재와 기도는 중재와 기도의 대상에 비할 때 열등함을 보이는 표적들이므로, 스탄카로는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만 중보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중보는 단지 성부에 대한 중보가 아니라 삼위일체 전체에 대한 중보였다고 그는 보았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중보직에 대한 스탄카로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두 편의 서신 형식의 논문을 썼다. 칼빈의 두 번째 글은 1560년에 쓴 것이다. 그 글의 제목은 “그리스도는 어떻게 중보자인가: 스탄카로의 오류를 반박하기 위해 폴란드 형제들에게 보내는 대답”이었다.24) 스탄카로의 “주장은 그리스도는 신성에 따라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한다면 그는 성부보다 열등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고 칼빈은 말하였다. 이어서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중보자의 이름에 적합한 것은 단순히 그가 육체를 입었거나 그가 인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직임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이미 참으로 중보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교회의 머리였으며 천사들 위의 수위권을 가졌으며, 만물 가운데 처음 난 자였다(엡 1:22, 골 1:15, 2:10).”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독생자는 동일한 하나님이며 성부와 동일 본체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중간점이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 그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 중보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천사들을 그의 명령으로부터 빼내며, 하늘과 땅에서 모두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빌 2:10) 그의 지고의 위엄을 손상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적 권능이 아니었다면 그 직임의 다른 면들을 성취할 수 없었다. 죽음과 악마를 정복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안에 있지 않았다. 또한 인간으로서만은 의를 얻을 수 없었고 생명을 줄 수 없었고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모든 유익들을 줄 수 없었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두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래서 그는 단순히 인성 때문에가 아니라 신성 때문에 중보자인 것이 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해 행한 모든 행위들은 전체 인격에게 관계되며, 한 본성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한 것이다. 궤변가들에게 있어서는 구별이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행위들은 그 자체로 고려해 볼 때 한 본성에 관계된다. 그러나 그 결과적 영향 때문에 그 행위들은 두 본성에 공통적인 것이 된다. 예컨대 죽음은 인간 본성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가 그리스도가 자신을 영을 통해 바쳤기 때문에(히 9:14)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게 된다고 말할 때 그가 무엇을 뜻했는지를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죽음의 행위 안에서 본성들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적 권능이 결합되지 않았다면 인간만으로는 속죄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베드로후서 1장 4절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베드로]는 그 약속들의 탁월함은 그것들이 우리를 신적 본성의 참여자로 만든다는 사실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이보다 더 탁월한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이어서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복음의 목적은 우리를 조만간 하나님과 같이 만드는 것임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사실상 그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신화(a kind of deification; quasi deificari)이다.”25) 또한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본성이라는 단어는 본체가 아니라 성품을 뜻한다(naturae nomen hic non substantiam, sed qualitatem designat). 마니교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줄기로부터 우리의 뿌리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삶의 과정을 마쳤을 때 우리의 본래적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꿈꾸곤 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 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본성이 우리의 본성을 흡수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광신자들이 있다. . . . 이런 종류의 광기는 거룩한 사도들의 정신에는 결코 없었다. 그들은 단순히 우리가 육의 모든 악덕들을 벗었을 때 우리는 신적 불멸성과 축복의 영광에의 참여자들이 될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칼빈의 이 강해에 대해 모써는 이렇게 말하였다. “칼빈은 ‘신적 본성의 참여자들’이라는 구절의 의미를 고전적인 theosis라는 용어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올리워져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모써는 “칼빈은 교부 저자들과 일치하게 믿는 자들의 신적 본성에의 참여를 일종의 신화로 본다” 하고 말하였다. 모써는 이렇게 덧붙인다. “베드로의 말인 ‘본성’은 하나님의 본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류’ 혹은 ‘특질’을 가리킨다 (정교회의 essence/energies의 구별과 기능적 유사성을 유의하라).” 반대로 슬레이터는 모써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것에 참여하는데, 이는 그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에 따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입는 의는 그의 인성에 고유한 의이며, 이 의는 그의 신성으로부터 이전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 복종의 의이다.” 칼빈은 베드로후서 1장 4절 강해에서 신적 본체(substantia)와 신적 성품(qualitas)을 구별하였다. 우리는 신적 성품에 참여자가 되지만 신적 본체에 참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지만 하나님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신화 자체가 아니라 일종의 신화를 경험할 것이다. 슬레이터는 “칼빈에게 있어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것에 참여하는데, 이는 그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에 따른 것이다” 라고 말했지만, 이와 반대로 칼빈 자신은 스탄카로에 대한 비판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해 행한 모든 행위들은 전체 인격에게 관계되며, 한 본성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신자들의 중생, 성화, 신화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 제도의 개혁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빈은 종교의 제도를 성직자 중심에서 신도 중심으로 개혁하였다. 중세 교회의 근간은 주교, 사제, 부제였다. 칼빈은 우선 주교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사제를 교직자인 목사와 평신도 대표인 장로로 구별하였다. 부제는 집사직으로 전환하였다. 중세 교회의 세 직 위에 있는 상위직인 교황, 추기경, 대주교 제도는 폐지하였다. 교회 제도의 역사에 있어서 칼빈은 혁명적 변화를 취하였다. 칼빈은 중세 교회의 주교-사제-부제의 계급적 성직을 목사-교사-장로-집사의 사중직으로 대체한 것이다. 교사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장로는 신자들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지를 점검하고, 집사는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는 일을 한다. 목사는 이 모든 일을 함과 동시에 성례를 집례하는 일을 한다. 칼빈의 교회 제도에 있어서는 직무의 차이가 있지 신분의 차이는 없다. 칼빈은 교회 제도를 민주적인 방식으로 개혁했다. 칼빈은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교회를 세웠다고 보았다. 칼빈은 이 교회를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또한 어머니가 될 것이다.”26) 칼빈은 이 어머니가 “우리를 태속에 품고 낳고 그의 가슴 속에서 우리를 기르고 마침내 우리가 가사적인 육체를 벗고 천사들처럼 될 때까지(마 22:30) 그의 지킴과 지도 아래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생명으로 들어갈 다른 길이 없다”27) 하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이사야 49:7을 강해하면서 “그런 위대한 복음의 참여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즉 교회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 밖에는 구원도 진리도 있을 수 없다” 하고 말했다. 또한 『기독교 강요』에서는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우리는 죄의 용서나 구원을 받기를 희망할 수 없다”고 말한다.28) 칼빈은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교회를 묘사하는 데 가장 자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톨릭적 혹은 보편적이라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나누이지 않는다면 - 그것은 일어날 수 없다 - 둘 혹은 세 [교회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선택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연합하여, 한 머리에 의존한 것처럼 한 몸을 형성하며, 몸의 지체들처럼 연합되고 결합된다.”29)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마음과 영혼이 하나가 된다고 한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 성서적인 표현은 칼빈의 교회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거룩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를 참된 그리스도의 몸인 불가시적 교회와 사악한 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가시적 교회로 구별하게 된다.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고 분열을 정죄하게 된다.30) 칼빈은 성서에서 교회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때때로 그들이 교회라고 말할 때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입양의 은총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성령의 성화에 의해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들이 된 자들 이외에 아무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사실상 교회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세계의 시작으로부터 존재해 온 모든 선택된 자들을 포함한다. 하지만 종종 교회라는 이름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예배한다고 고백하는 땅 위에 퍼져있는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31) 그런데 후자의 교회 안에는 이름과 외양 이외에는 그리스와 무관한 많은 위선자들이 섞여 있는 반면, 전자의 교회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32)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사명은 말씀과 성례를 통해 아직 참으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지도록 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도록 하며, 권징을 통해 위선적인 그리스도인들을 공동체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교회 안에 참된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것은 “그들이 합법적인 재판에 따라 정죄되지 않거나 엄격한 권징을 마땅히 해야 할 만큼 항상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33) 라고 칼빈은 말한다. 칼빈은 이 점에서 교회 안에 사악한 자들이 많이 있다는 재세례파의 주장을 인정한다. 그리고 “사실상 교회들이 질서가 잘 잡혀 있다면 그 품안에 사악한 자들을 품고 있지 않을 것이다”34) 라고 말한다. 목회자들이 권징을 게을리하거나 아니면 엄격하게 권징을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난 악인들조차 성도들의 집단으로부터 제거되지 않고 있다. 칼빈은 “나는 이것을 잘못이라고 인정하며 가볍게 보려고 하지 않는다”35) 하고 말한다. 칼빈은 사악한 자들과의 친교를 삼가는 것이 경건한 사람들의 임무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의 장막을 피하는 것과 그들을 싫어하여 교회와의 친교를 끊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36) 라고 말한다. 교회는 끊임없이 권징을 통해 가시적 교회 안에 있는 위선자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가시적 교회 안에 위선자들이 있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 다른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구속 활동을 하는 두 방편은 말씀과 성례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면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 그러나 옛날의 카타리파나 노바티아누스파나 도나투스파 그리고 칼빈 당시의 재세례파는 교회의 일치를 해치고 있다.37) 그러나 마태복음 25:32의 말씀처럼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유한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서 분리해 나가는 일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일이어서 용납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양떼로부터 제외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한 머리 아래 한 몸으로 모으는 것을 제외하고는 희망할 안전이 없기 때문이다. . . .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것이며 분리될 수 없다. 그것에 그는 불가분리의 매듭으로 결합되어 있다. . . . 그래서 우리가 신자들과의 일치를 이룩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단절된 것으로 본다.”38) 칼빈은 삶의 순수성의 문제로 분리해 나가는 것도 잘못이지만 교리에 다소 불순성이 개입된다 하더라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더욱이 교리들에 있어서나 성례들의 집행에 있어서 어떤 잘못들이 들어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교회내의 교제로부터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참된 교리의 모든 조항들이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은 그것들을 종교의 고유한 원칙들로 확정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 있다는 것 등등이다.”39) 칼빈에 의하면 교리들 가운데 중심적인 것이 있고 주변적인 것이 있다. 그런 중심적인 것이 부정되면 참된 교회일 수가 없다. 그러나 “교회들 중에는 신앙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는, 논쟁이 되는 다른 것들이 있다.”40) 즉, 주변적인 것들이 있다. 칼빈은 빌립보서 3:15을 인용하고 나서 “이것은 이런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불일치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의 자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지적해 주지 않는가?”41) 하고 묻는다. 환언하면 칼빈에게는 본질적인 교리들과 비본질적인 교리들에 대한 구별이 있다. 그리고 비본질적인 교리들이 다르다고 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칼빈은 이런 근본적인 교리들 이외에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비본질적인 교리의 차이 문제보다는 교회의 일치 문제가 더 중요한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칼빈은 교직 제도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관대했다. 파니에(Jacques Pannier)가 지적한 것처럼 칼빈은 주교 뿐만 아니라 대주교도 인정하고 있으며, 칼빈이 비판한 것은 주교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직책을 오용하는 것이었다.42) 칼빈은 영국교회의 대주교인 크랜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 교회의 일치를 논하는 자리라면 - “그것은 내게 대단히 중요하므로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가기를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43)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칼빈이 생각한 교회일치는 루터파, 츠빙글리파, 영국 국교회 등 기존한 교회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일종의 세계적 교회 연합체를 구성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이 1541년 제네바 교회를 위해 작성한 교회법규에서는 “우리 주님이 그의 교회의 통치를 위해 제정한 네 직임들이 있다. 첫째는 목사들이요, 그 다음은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장로들이요, 넷째는 집사들이다”44) 라고 말한다. 칼빈은 주로 성서 두 곳, 곧 에베소서 4:11과 로마서 12:7-8에 근거하여 이 네 직임을 추론해 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정에 따라 교회의 통치를 주관하는 자들은 바울에 의해 첫째로 사도들, 다음으로 예언자들, 셋째로 복음 전도자들, 넷째로 목사들, 마지막으로 교사들이라 불리운다[엡 4:11]. 이들 가운데 마지막 둘은 교회 안에서 일상적인 직임이다. 주님은 그의 왕국의 시작에서 처음의 세 직임을 세웠으며, 때때로 시대적 요청에 따라 그들을 일으킨다.”45) 칼빈은 여기서 영구적인 직임과 일시적인 직임을 구별한다.46) 목사와 교사는 영구적인 직임이나 사도와 예언자와 복음 전도자는 일시적인 직임이다. 그리고 복음 전도자와 사도는 함께 묶을 수 있는데 그 둘은 목사에 상응하며, 예언자는 교사에 상응한다고 말한다.47) 칼빈은 성서에서 사용되는 'episcopus', 'presbyter', 'pastor', 'minister'는 동의어들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내가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을 감독들, 장로들, 목사들이라고 구별없이 부른 것은 이 용어들을 혼용한 성서적 용법을 따른 것이다.”48) 칼빈은 바울이 디도서 1:5에서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라고 명령한 후 곧 1:7에서 “감독은 . . .”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장로와 감독은 상호 교환될 수 있는 용어로 보고 있다. 그리고 빌립보서 1:1에서 한 교회에 있는 여러 감독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예로 들고 있으며,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감독들이라고 부른[20:28] 예를 들고 있다.49) 그 다음에는 로마서 12:7-8과 고린도전서 12:28에 근거하여 교회 직임을 추론해 내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롬 12:7]와 고린도전서[고전 12:28]에서 그는 다른 직임들로서 권세, 치료의 은사, 해석, 통치, 불쌍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열거한다. 이것들 가운데 일시적인 것들은 나는 생략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다루느라 머무르는 것은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 중 둘은 영구적인 것들인데, 즉 통치와 불쌍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다.”50) 칼빈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일시적인 직임과 영구적인 직임을 구분하여, 두 직임을 영구적인 직임으로 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장로와 집사이다. 목사의 직임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가르치고 훈계하고, 권면하고,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성례를 집례하는 것과 장로들 및 동역자들과 함께 형제로서의 교정을 하는 것이다.51) 교회 안에서 혼란이 생기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도 부름이 없이는 이 직책을 맡을 수 없다. 부름에는 두 가지, 즉 내적 부름과 외적 부름이 있다. 내적 부름은 목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식하는 것으로 본인 이외에 아무도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며 교회를 세우려는 욕구가 있는지를 봄으로써 그의 내적 부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52) 외적 부름은 교회가 목사로 부르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즉, 건전한 교리와 거룩한 삶을 구비했는가 하는 것이다.53) 이 두 조건을 구비한 사람들을 목사로 뽑는 데 있어서 교인들의 동의를 받을 것을 칼빈은 강조하고 있다. 전체 교회가 뽑는 방법, 동료 목사들과 장로들이 뽑는 방법, 한 개인이 뽑는 방법 등이 있을 수 있다.54) 이 방법들 중 칼빈은 “적합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교인들의 동의와 찬성에 의해 선임될 때 우리는 목사의 이 부름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하고 말한다.55) 우리는 여기서 교회 정치에 있어서 칼빈의 민주주의적 경향을 볼 수 있다.56) 그러나 여기에 첨가하여 그는 대중의 나약함 때문에, 혹은 악한 의도 때문에, 혹은 무질서 때문에 잘못되지 않기 위해 다른 목사들이 선거를 관장할 것을 주장한다.57) 여기서 칼빈은 교회 정치의 민주적인 방법을 주장하면서 민주적인 방법이 선동에 의해 오도될까 하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58) 교회의 직임으로 목사 다음에 교사가 있다. 그런데 “교사들의 고유한 직임은 복음의 순수성이 무지나 유해한 견해들에 의해 부패되지 않도록 건전한 교리로 신자들을 교육하는 것이다.”59) 칼빈의 교회론에서 교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언자의 직임은 그들이 계시라고 하는 독특한 은사를 가지기 때문에 더욱 탁월했다. 그런데 교사들의 직임은 거의 비슷한 특징과 정확하게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60) 하고 칼빈은 말한다. 그러면 목사직과 교사직의 차이는 무엇인가. 칼빈은 그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그들 사이에 다음의 차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사들은 권징, 성례의 집례, 훈계나 권면을 맡지 않고, 다만 성서 해석을 맡는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온전하고 건전한 교리가 보존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목사직은 이 모든 것을 그 자체 안에 내포하고 있다.”61) 교회의 세 번째 직임은 장로이다. 그런데 “그들의 직임은 모든 사람의 삶을 감독하고, 잘못되거나 무질서한 삶을 사는 자들을 보았을 때 다정하게 훈계하고 그리고 필요한 경우, 형제로서의 교정을 위해 파송될 회합에 보고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형제로서 교정을 하는 것이다.”62) 『기독교 강요』에서는 장로에 대해서 “치리자들은 백성들로부터 선출된 자들로서 감독들과 함께 도덕에 대한 책망과 권징의 행실을 맡은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63) 하고 말한다. 칼빈은 성서에 나오는 감독, 장로, 목사라는 말들을 상호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 장로의 위치는 모호한 점이 있다. 디모데전서 5:17 강해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보아 두 종류의 장로들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 . . 이 말들의 분명한 의미는 존경스럽게 잘 다스리지만 가르치는 직임을 가지지 않은 어떤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진지하고 잘 단련된 사람들을 선출했는데 그들은 . . . 목사들과 함께 권징을 행하고 도덕을 교정하는 검찰관으로 행동했을 것이다.”64) 어떤 사람들은 장로직은 칼빈이 창안한 것으로 후에 그것을 보증하는 성서적 근거를 찾으려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캐스웰(R.N. Caswell)도 지적한 바 있지만65) 그 견해는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칼빈은 장로직은 성서 및 고대 교회에 있었던 직임으로 믿고 있었으며, 말씀을 가르치는 교직자 장로와는 구별되는 평신도 가운데 선출된 직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교회의 네 번째 직임은 집사이다.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고대 교회에는 항상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불우한 자들을 위한 물질을 받아 나누어 주고 보관했는데, 매일의 구제금뿐만 아니라 재산, 세, 연금 등도 맡았다. 다른 하나는 병자들을 보살피고 간호하며 불우한 자들을 위한 구제품을 관리했다.”66) 칼빈은 로마서 12:8에서 집사의 이 직분을 추론해 낸다.67) 중세기에 집사는 예배 의식을 도와주는 사람에 불과했으나 칼빈은 환자와 불우한 자를 돌보아 주는 집사의 본래의 직능을 회복시켰다. 칼빈은 당시 일부 재세례파의 ‘공산주의적’ 공동체 운동에 대해 매우 고심한 것 같다.68) 그는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이 운동에 대해 비판하고 사유 재산 제도를 옹호하고 있다.69) 칼빈은 사도행전 2:44 강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광신주의자들 때문에 이 구절에 대한 건전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들은 재산의 κοινωνία를 주장하는데, 그것에 의해 모든 시민적 질서가 전복된다. 이 시대에 재세례파가 소요를 일으켜 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자의 재산을 한 덩어리로 모아 놓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70) 이어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두 가지 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시민적 질서라는 구실 아래 자기들이 가진 것을 숨기고 가난한 자들을 횡령하고서도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약탈하지 않는 한 갑절이나 의롭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반대의 오류에 빠져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뒤섞기를 원하기 때문이다.”71)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칼빈은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적’ 재세례파를 비판하면서 사유 재산을 옹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유한 자들의 횡포를 비난하고 있다.72) 칼빈은 재산의 공유를 부정하는 반면, 사랑의 자선에 의해 가난한 자들이 결핍이 없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73) “이와 같이 주님은 . . . 우리가 기금이 허락하는 한,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서 풍부한 사람도 없고 결핍한 사람도 없도록 우리에게 명한다.”74) 중세에는 deacon이 부제였으나 칼빈은 deacon의 역할을 사제 보좌의 역할이 아니라 사회 사업가의 역할을 하도록 했으며 칼빈은 이것은 성서적 의미의 deacon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빈은 이렇게 교회에 집사 제도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헌금은 고대 교회의 관례에 따라 4등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법들에는 교회의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교직자를 위해 하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하나는 교회 및 다른 건물들의 보수를 위해, 하나는 가난한 나그네나 가난한 본토민들을 위해서였다.”“다른 교회법들은 마지막 것을 감독에게 할당했는데 이것은 내가 방금 말한 구분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 법들이 그것을 감독 혼자 다 쓰거나 자기가 좋아하는 자에게 다 주거나 할 수 있는 감독의 사적 수입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75) 그래서 칼빈은 교회 수입의 “적어도 절반”은 가난한 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76) 여기서 칼빈이 “적어도”라는 표현을 쓴 것은 고대 교회에서는 재난 때문에 긴급한 구제가 필요한 때는 그 절반 이외에도 교회의 기물을 팔아서 구제했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고대 교회의 아카키우스 감독은 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성직자들을 모아 놓고 “우리 하나님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기 때문에 잔이나 컵이 필요 없습니다” 하고 말하고 교회의 그릇들을 녹여 팔아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양식을 사 준 예를 들고 있으며, 또 암브로스가 교회의 거룩한 그릇들을 녹여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아리우스파에서 보고 비난했을 때 암브로스는 “교회가 금을 가진 것은 간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한 것을 예로 들고 있다.77) 이어서 칼빈은 암브로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교회가 가진 것은 무엇이나 곤궁한 자들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다”78) 라고 말했다. 제네바에서는 집사들이 구빈원 원장직을 맡았으며, 그들은 교회 헌금 외에도 시당국이 배정해 주는 예산, 벌금, 기부금, 자선을 위해 헌납된 물건을 판매한 대금 등의 수입원으로 구제 활동을 해 나갔다. 칼빈은 시당국이 구빈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이외에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일자리가 없을 때는 새로운 사업을 벌여 일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시당국이 노동에 대한 임금이 정당하게 지불되고 있는지를 감독해야 하고 물품과 금전의 유통 과정에도 개입하여 부당한 상행위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사상에서 볼 때 교회의 집사직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재세례파의 ‘공산주의적’ 공동체 운동에 대해 반대하면서 집사들의 자선 활동을 통해 사회 내의 빈곤을 치료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한국에서는 칼빈이 그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장로교회가 크게 성장하였다. 한국에서 장로교회가 크게 성장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우선 한국 선교 초기에 많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온 점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장로교 선교사들은 다른 분야보다 복음 전도 분야에 더 집중하였으므로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교회의 성장과 함께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09년 통계에 의하면 교회가 세운 학교가 1,000개교 정도 되는데, 그 중에 장로교회가 세운 학교가 719개교, 감리교회가 세운 학교가 200개교였다.79)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했다. 그는 칭의를 강조했지만 성화를 함께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강요』를 보면 3권 3장에서 “신앙에 의한 중생”을 먼저 다루고 3권 11장에서 “신앙에 의한 칭의”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물론 중생한 자를 의롭다 한다는 뜻은 아니다. 칼빈의 칭의론은 어디까지나 죄인의 칭의이다. 그러나 칼빈은 중생을 강조하기 위해 중생을 칭의 앞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불신을 당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칼빈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칭의와 함께 중생과 성화를 강조해야 할 것이다. 칼빈의 모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이었다. 칼빈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였다. “위대한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명상하고 행하기 위해 하나님께 성별되고 바쳐진다는 사실이다.”80) 칼빈은 1558년 의회 선거를 앞두고 시민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좋은 제도, 이것이 우리의 모토입니다”81) 하고 말하였다. 한국 교회에서 요리 문답이라고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 제 1조에서는 질문자가 “인간의 최고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고, 대답자는 “인간의 최고 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한다.82) 이 소교리 문답은 1640년대 영국의 청교도 혁명기에 청교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칼빈의 가르침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칼빈은 하나님만을 높이고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을 알리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무덤을 평토장하도록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은 지켜졌다. 제네바 공동 묘지에 칼빈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긴 하지만, 가노치(Alexandre Ganoczy)는 “칼빈은 그 자신의 바람에 따라 장례 예식 없이 한 장소에 묻혔으며 그 장소는 오늘날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83) 하고 말했다.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모토에 비추어볼 때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아직도 귀족 대 평민의 이분법적 구조에 맞는 성직자 대 평신도 구조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또한 한국 교회에서는 교계의 회장직을 전근대적 종교의 대표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직책을 위해 사활을 건 싸움을 하고 있어 안타깝기 한이 없다. 한국 교회는 칼빈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칼빈은 교회 수입의 적어도 절반은 가난한 자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도 주장했다. 이런 칼빈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 교회는 교회 헌금을 지나치게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칼빈은 긴급하게 구제가 필요할 때 교회의 거룩한 기물을 팔아서라도 구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낡지 않은 교회당을 헐고 새 교회당을 건립하는 데 많은 헌금을 쓰고 있다. 서구의 교회들처럼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나면 큰 교회당이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종교의 개혁자인 칼빈의 가르침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III. 정치 개혁 사상 칼빈은 종교의 개혁자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개혁자였다. 벨로크(Hilare Belloc)는 “칼빈이 없었다면 크롬웰이 없었을 것이다”84) 하고 말하였다. 크롬웰은 영국의 국왕을 처형하고 왕정을 공화정으로 변혁시켜 놓았다. 칼빈이 이런 크롬웰의 혁명적 운동에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것이다. 이처럼 영국을 비롯하여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스위스, 미국 등 근대에 와서 민주주의가 일찍 발전한 국가들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공헌한 사람들은 대체로 칼빈의 사상을 따르는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칼빈을 근대 민주주의의 주창자로 여겨왔다. 그러나 1937년 셰네비에르(Marc-Edouard Chenevière)는 그의 저서 『칼빈의 정치 사상』(La Pensée Politique de Calvin)에서 이런 전통적인 해석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셰네비에르는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칼빈주의적 종교 개혁을 “근대 민주주의 정신적 어머니”(la mère spirituelle de la démocratie moderne)로 간주해 왔으나 그것은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주의와 종교 개혁자들의 종교 개혁을 혼동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였다.85) 그는 몇몇 나라들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종교적 소수자로 그들의 자유를 위해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 개혁과 근대 민주주의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고 했다.86) 한 저명한 『정치사상사』에서도 “홀란드, 스코틀란드, 아메리카의 칼빈주의 교회들은 저항의 정당성을 서유럽에 전파한 주된 매개체였다. 그러나 [루터파와의] 이런 차이는 결코 칼빈 자신의 일차적 의도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87) 하고 말했다. 반면에 허드슨(Winthrop S. Hudson)과 맥니일(John T. McNeill)은 칼빈과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을 구별하여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이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칼빈 자신은 민주주의의 주창자가 아니었다고 하는 이런 주장자들에 대해 그들의 논문을 통해 반박하였다. 허드슨은 “칼빈의 사상은 민주주의적 관념을 정교화하는 데 잠재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그는 독재에 대한 저항의 근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은 명백한 민주주의적 정치 철학의 구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칼빈주의적 관념은 필연적으로 선택된 자에 의한 정치를 의미한다고 하는 가정은 단순히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88) 라고 말했다. 맥니일도 칼빈은 “내심에 있어서 정치적 공화주의자”89)였으며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이라고 하는 칼빈의 관념은 “우리의 대의 민주주의의 개념에 가까운 것”90)이라고 했다. “그의 후기 저서를 보면 정부의 이상적 기초는 시민에 의한 선거임이 분명히 드러난다”91) 하고 맥니일은 덧붙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중 정치의 문제를 다루는 장에서 먼저 두 개의 정부92)를 구별했다. 인간 안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으며 이 두 세계를 지배하는 왕도 법도 다 둘씩이다. 그래서 인간 안에는 두 개의 정부가 있다(duplex esse in homine regimen). 하나는 영적인 정부인데 그것에 의해 양심이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지도받는다. 다른 하나는 시민정부인데 그것에 의해 인간은 인간됨과 시민의 의무를 교육받는다.93) 칼빈은 이 두 개의 정부가 구별되긴 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정부가 다 궁극적으로는 왕들 중의 왕인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 점에서 시민 정부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입장을 배격했다. 첫째는 재세례파의 입장으로, 그들은 양심의 자유에 따라 법정도 법도 관리도 없는, 그리고 자기들의 양심을 속박한다고 생각되는 그 외 무엇도 인정하지 않는 어떤 새 세계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기존의 정부 형태를 배격한다고 했다.94) 다음으로 마키아벨리를 지향한 비판으로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람들은 제후들에 아첨하며 그들의 권력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하나님 자신의 통치와 대립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했다.95) 영적 통치와 시민 통치는 다 한 하나님께 속하지만 서로 다른 경륜에 속한 것으로, 시민 통치를 하나님의 통치와 대립시켜서도 안 되며 시민 통치를 하나님의 영적 통치로 대치시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다음으로 시민 통치의 사명에 대해 다룬다. 첫째 건전한 종교를 보호하고 육성해야 하며, 둘째 공적 평화를 유지해야 하며, 셋째 개인의 소유를 보호해야 하며, 넷째 사람들이 원만한 거래를 하도록 해야 하며, 다섯째 사람들 사이에 정직과 순수함이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96) 칼빈은 이 외에도 가난한 자를 돌보고 학교를 세우고 가난한 자와 여행자를 위한 건물을 세우는 것 등을 시민 정부의 사명으로 보고 있다.97) 시민 통치의 사명이 이러하기 때문에, 관리가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합법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직업 가운데 가장 존경할 만한 것이라고 했다.98) 다음으로 칼빈은 정부의 형태에 대해 다룬다. 칼빈은 고대 철학자들이 논의한 바에 따라 정부를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99) 그것은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 등이다. 그런데 군주정은 폭군정으로 전락되기 쉽고 귀족정은 과두정으로, 민주정은 폭민정으로 전락되기 쉽다고 한다.100) 칼빈은 세 가지 더 나은 정부 형태 가운데 귀족정이나 아니면 귀족정과 민주정이 혼합된 형태가 다른 모든 형태들보다 탁월하다고 한다.101) 칼빈은 혼합 정부가 최선의 정부가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군주정에서 왕이 자기 뜻을 정의에 따라 조절하는 일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이런 인간적 결점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바람직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하면 그들은 서로 돕고 서로 가르치고 충고를 줄 수 있을 것이며, 어떤 한 사람이 잘못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잘못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102) 그리고 칼빈은 국민이 관리를 선거하는 것을 탁월한 은사로 보고 있다. “만약 우리가 법관과 관료를 선택할 자유를 가진다면 (. . .) 그것은 탁월한 은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보존시키며 선한 양심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103) “만약 우리가 인간의 정부에 대해 논의한다면 우리는 자유 국가에 사는 것이 제후 아래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104) “이유 없이 명령을 내리는 제후를 가지는 것보다 선출받아 그 직임을 수행하며 법을 준수하는 통치자를 가지는 것이 훨씬 더 지지할 만한 일이다.”105) 그러나 셰네비에르는 “만약 프랑스가 프랑스 종교 개혁에 대해 우호적인 왕이나 아니면 적어도 단순히 중립적인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면 칼빈의 설교와 강해에는 아마 군주정의 주제에 대한 불평이 들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귀족정에 대한 칼빈의 편애는 사실상 군주정 형태에 대한 배격을 의미하지 않는다”106) 하고 말했다.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에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왕이 있었다면 칼빈이 설교와 성서 강해를 통해 왕들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셰네비에르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비록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칼빈이 왕들에 대해 비판한 다른 비행들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볼 수 없으며 여전히 그런 비행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일인 군주가 지배하는 정부 형태는 견제 세력이 없기 때문에 그 제도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한편 에써(Hans H. Esser)는 “나이가 많아지면서 칼빈은 군주 체제 정치 이념으로 기울어졌다”107) 하고 말하였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허드슨이 주장한 것처럼,108) 칼빈은 나이가 많아지면서 점점 민주 체제 정치 이념으로 기울어졌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는 귀족정을 좋게 생각했으나 제네바에서 7년간 지나고 난 뒤에는 “귀족정 혹은 귀족정과 민주정이 혼합된 형태”109)를 좋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 16년 뒤 155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정부를 관장하는 것이 더 완전하고 더 좋은 것”110)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허드슨이 지적한 것처럼111) 미국 혁명의 지도자들이 옹호한 정부 형태도 바로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이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대의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모든 국가에서 군주정을 폐지하고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칼빈은 세계 전체를 보면 여러 종류의 정부 형태가 있는데, 이런 기존 정부 형태를 바꾸려 하는 것은 “어리석고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로운 사상”112)이라고 했다. 칼빈이 군주 폐기론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 전혀 무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영국과 같은 입헌 군주제 국가는 군주제를 폐기하지 않고도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칼빈은 여러 가지 정부 형태 가운데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정을 최선의 정부 형태로 보았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용어로는 대의 민주주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역적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상이한 정부 형태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군주제 폐기론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칼빈은 최선의 정부 형태는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정으로 보았지만, 차선의 정부 형태로 폭군정으로 떨어지지 않는 군주정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의 정치 사상에 대해 오랫동안 논란되어 온 문제는 칼빈이 신정 정치를 지향했는가 하는 것이다. 신정 정치(theocracy)라는 말이 통속적 용법에 따라 성직자가 정치를 하는 성직자 통치(hierocracy)를 의미한다고 할 때 칼빈은 결코 신정 정치를 표방하지 않았다. 맥니일이 말한 것처럼113) 칼빈은 제네바에서 관리와 성직자를 구별했으며, 그와 그의 동료 목사들은 정치적 직임이나 관리의 권한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칼빈은 1559년 크리스마스 때에 와서 비로소 제네바의 소의회로부터 시민권을 받았다. 몬터(E. William Monter)가 지적한 것처럼 “제네바에서 칼빈의 영향은 특히 1555년 이후 두드러졌지만, 그러나 이 영향은 일차적으로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114) 칼빈이 제네바 시정부에 대해 여러 가지 조언을 했으며 제네바 시정부가 칼빈에게 조언을 구한 경우도 많았지만 칼빈의 조언이 반드시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1560년 칼빈은 성찬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성찬표를 나누어 주자는 제안을 했으나 시정부는 이를 거부했으며, 그 후 한 사보이 사절을 선동자로 여겨 투옥하자는 칼빈의 제안도 시정부가 거부했다.115) 오히려 신정 정치라는 말을 성직자 통치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제후의 역할을 겸한 감독의 지배를 받던 칼빈 이전의 제네바가 신정 사회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셰네비에르는 칼빈은 하나님만이 주권을 가지며 그리고 그 주권을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에게만 넘겨준다고 보기 때문에 주권 재민을 주장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칼빈은 “근대 민주주의의 확고한 적”116)(un adversaire déterminé du démocratisme moderne)이라고 했다. 사실상 칼빈은 관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으며 신적 권위를 부여받으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직무를 행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을 지닌”117) 자들이라고 했다. 따라서 관리에게 저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라고 했다.118) 관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는다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는가? 하지만 칼빈은 여기서 왕권신수설이나 왕권 절대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리인임을 기억한다면 그들은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섭리, 보호, 선함, 자선, 및 공의의 이미지를 자신들을 통해 나타내기 위하여 주의와 진지함과 근면을 다해야 할 것이다.”119) 그래서 “만약 그들이 어떤 잘못을 범한다면 그들이 해를 끼친 그 사람들에게만 상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모독하는 것이다.”120) 칼빈의 주권은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주장할 때 그가 의도한 것은 주권이 관리 자신들에게 있지 않음을 말해 주려고 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힘으로 이 높은 위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의해서 받는다”121) 하고 칼빈은 말했다. 물론 관리들에 대한 이런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은 주권 재민이라는 근대 민주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로마서 강해 13장 4절에서는 주권 재민의 사상에 좀더 접근해 있음을 볼 수 있다. 관리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 다스린다. 또한 그들은 무제약적인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민들의 복리에 국한된 권력을 가진다. 요컨대 그들은 통치를 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책임을 진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위임한 직임은 그들의 신민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민들에게도 의무가 있다.”122) 하지만 위의 주장도 역시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상과는 거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후의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그의 권한을 관리들에게 위임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위임했으며, 그러므로 백성들은 관리의 지위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가정했다.123)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다시 백성들은 관리에게 그 권한을 위임했다고 하는 후대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에는 주권 재민의 사상과 주권 재천의 사상 사이의 문제가 해결되지만 칼빈 자신 안에는 이런 해결이 없었다. 한편 이 문제에 대한 카이퍼(Abraham Kuyper)의 해석은 독특하다. 카이퍼는 하나님의 주권설을 국민 주권설(Popular-sovereignty) 및 국가 주권설(State-sovereignty)과 대비시키고 난 다음 다음과 같이 질문을 제기한다. “이 국가 주권론은 국민 주권론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그 동료 인간에게 예속시키게 되고 양심을 속박하여 복종의 의무로까지 비약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124) 그리고 나서 카이퍼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자는 백과 전서파의 무신론적 국민 주권론과 독일 철학자들의 범신론적 국가 주권론에 반대하여 사람들 사이에 있는 모든 권위의 근원인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한다.”125)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국민 주권론만 주장한다면 다수 국민의 이름으로 정의로운 소수가 박해를 받을 때 그들이 호소해야 할 근거가 무엇이겠는가고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칼빈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보았기 때문에 국민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록 독재자들이 나와 독재를 할 때라도 국민은 저항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불의하고 난폭하게 다스리는 자들은 백성의 악함을 벌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일으킨 자들”126)이기 때문이다. 독재자가 나타나서 독재를 할 때 국민들은 “먼저 주님의 채찍으로 징계를 당하는 바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127) 그리고 나서 “왕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왕국들을 교체시키는 주님의 도움을 간청”128)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종들 가운데서 공개적인 해방자들을 일으켜 하나님의 명령을 주어 악한 정부를 벌하고 불의하게 압박받는 백성을 비참한 불행에서 구출해 낸다.”129)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런 의로운 종들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를 위해 다른 의도와 다른 용건을 가진 사람들의 격정을 이용한다.”130) 첫 번째 사람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합법적 부름에 따라 이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왕들에게 준 위엄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왕들이 신민들을 벌하는 것이 합법적인 것처럼 “그들은 하늘로부터 무장되어 더 큰 권력을 가지고 더 작은 권력을 진압하기”131)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들의 경우는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장중에서 이 일을 하지만 악한 생각으로 악한 일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독재자를 징벌하기 위해 의로운 하나님의 종들을 쓰기도 하지만 때로는 정권욕을 가진 악한 사람들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행동은 그 자체에 따라 심판을 받겠지만 주님은 거만한 왕들의 피 묻은 홀을 분쇄하고 용인할 수 없는 정부를 전복할 때 그들을 통해 똑같이 자기의 일을 성취한다. 제후들은 이를 듣고 두려워할지어다.”132) 그러나 칼빈은 여기서도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난폭한 폭정을 교정하는 것이 주님이 보복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복종하고 참는 것 이외에 다른 명령이 주어져 있지 않다.”133) 그러나 칼빈은 곧바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사인(私人, privatis hominibus)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만약 이제 왕들의 방자함을 견제하기 위해 임명된 백성의 관리들(populares magistratus)134)이 있다면 (. . .) 나는 그들이 그들의 임무에 따라 왕들의 심한 방자함을 저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135) “만약 그들이 낮은 일반 민중을 난폭하게 습격하고 욕보이는 왕들에 대해 눈을 감아 준다면 그들의 가식은 극악한 배신이 아닐 수 없다고 나는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배정에 의해 백성의 보호자들로 임명되었음을 알면서 기만적으로 백성의 자유를 배반하기 때문이다.”136) 말하자면 백성의 관리들이 독재자의 독재를 보고도 저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배임이고, 나아가서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백성의 관리에게만 저항권을 인정하고 사인에게는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는 사인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있다. 관리에 대한 복종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떠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137)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의 악한 선포에 맹종했기 때문에 정죄를 받았다. 예언자는 백성들이 사악한 왕의 칙령을 받아들인다고 심하게 책망했다. 주님은 왕들 중의 왕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 때문에 왕들에게 복종하는 우리가 왕들을 만족케 하기 위해 주님을 불만케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칼빈은 말한다.138) 영국의 청교도(Puritans), 스코틀란드의 장로교도(Presbyterians),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s), 네덜란드의 베거(Beggars), 그리고 미국의 필그림 파더(Pilgrin Fathers), 이들 모두는 자기들의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이들 모두가 칼빈의 정신적 후예들인 칼빈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칼빈이 근대 민주주의의 주창자라는 가정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셰네비에르의 저서가 나온 다음 이 문제는 칼빈 연구가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우리는 앞에서 칼빈이 시민 정부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정부 형태에 대해서는 차선책으로 폭군정이 아닌 군주정도 인정했지만 최선의 정부 형태는 민주정과 귀족정의 혼합 정부임을 주장했으며, 선거에 의해 통치자를 뽑아 통치자가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을 최선의 길로 인정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칼빈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보았으므로 독재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백성의 관리의 저항권은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 권리를 행하지 않는 것을 배임으로 보았음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우리는 칼빈 안에서 후에 권력 분립으로 표현된 권력의 상호견제 사상, 후에 대의 민주주의로 표현된 민주정과 귀족정의 혼합 정부에 대한 사상, 후에 의회의 탄핵 소추권으로 표현된 백성의 관리의 저항권 등 많은 민주주의의 사상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칼빈은 사인의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종교 문제에 대한 사인의 저항권은 인정했기 때문에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종교 문제로 박해를 받을 때 저항권의 사용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사용했으며,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칼빈이 없었다면 크롬웰이 없었을 것이다” 라고 말한 벨로크의 말은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칼빈의 독재자에 대한 해방자의 사상과 독재자에 대한 백성의 관리의 저항권 사상은 크롬웰에게 청교도 혁명을 주도해 나가면서 국왕을 처형할 도덕적 용기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노력해 온 점에서 칼빈의 정치 개혁 사상에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이긴 하지만 한국 교회 안에 북한의 비민주적 체제를 지지하고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 민주적 절차에 있어서 부정과 편법이 난무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전 세계를 보면 이슬람 국가들을 비롯해 비민주적인 국가들이 상당히 많다. 또한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민주적이지 않은 국가들도 많다. 그런 점에서 칼빈의 정치 개혁 사상은 여전이 이 세상에 필요하며, 이 세상은 많은 칼빈주의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IV. 사회 경제 개혁 사상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칼빈은 일부 재세례파가 재산의 공유를 주장한 데 대해 사유 재산 제도를 옹호했다. 칼빈은 사유 재산제는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이 정해준 제도라고 주장했다. “각 개인이 자기의 사유 재산을 소유하도록 허락하는 시민적 질서가 문란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재산의 소유권이 인간들 사이에서 구별되고 개인적이 되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139) 라고 칼빈은 말했다. 예루살렘 원교회가 공유 재산 제도를 택했다는 재세례파의 주장에 대해 칼빈은 사도행전에서 밭을 팔아 그 값을 바친 두 사람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데, 만일 모든 사람이 재산을 바쳐 재산을 공유했다면 이 두 사람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론을 폈다. 그래서 칼빈은 예루살렘 원교회는 재산을 공유한 것이 아니라 다만 신앙이 돈독한 신도들이 재산을 팔아 구제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고 해석했다. 칼빈은 시편 강해에서 구제 활동을 할 때 자기 것으로 어느 정도 구제할 수 있는지 합리적으로 계산할 것이며, 지나친 구제 활동으로 가족을 곤궁에 빠뜨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140) 칼빈은 사유 재산 제도를 옹호함과 동시에 부의 편재를 인정했다. 재산의 불평등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재물을 많이 준 것은 부유함 속에도 교만에 빠지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갖고 도와주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며, 어떤 사람을 가난하게 한 것은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141) 칼빈은 소유의 불평등을 인정함과 동시에 생활의 불평등도 인정했다. “우리는 부자가 빈자보다 더 잘 사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정도로 평등을 주장하지 않는다. 빈자는 거친 빵과 검소한 식사를 하고 부자는 그의 상황에 따라서 더 잘 먹을 수 있다”142) 라고 칼빈은 말했다. 칼빈은 이처럼 사유 재산 제도를 옹호함과 동시에 상공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칼빈은 상공업도 하나님이 정한 천부적 직업으로 보았으며 상인들의 매매 활동이 건전한 사회 생활에 있어서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상업의 거래 없이 공적 정부가 지탱될 수 없다”143) 라고 칼빈은 말했다. 칼빈은 상공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함과 동시에 이자를 받는 것을 허용했다. 칼빈은 성경에서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한 것은 가난한 자들이 소비 자금으로 빌린 돈에 대해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한 것이지, 사업을 하는 사람이 돈을 더 벌기 위해 사업 자금으로 빌려준 돈에 대해서까지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돈에는 증식성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칼빈은 돈을 단순히 금고 속에 넣어두면 증식성이 없지만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을 통해 돈을 증식시킨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돈은 돈을 낳지 않는다고 한 성 암브로스와 크리소스톰의 이론은 내 판단으로는 너무 피상적이다. 바다가 무엇을 낳는가? 땅이 무엇을 낳는가? 나는 집을 빌려주고 수입을 얻는다. 거기서 돈이 자라기 때문인가? . . . . 그리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소유에서보다 상업에서 돈이 더 결실이 있지 않는가? 농지를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것은 합법적이고 돈을 빌려주고 그 열매를 받는 것은 불법적이란 말인가? . . . 상인들은 어떻게 그들의 이윤을 얻는가? 그들의 노력에 의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확실히 돈을 금고 속에 넣어두면 열매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동들도 알고 있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자는 이 돈을 한가하게 간직하여 아무 소득도 얻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윤은 돈 자체로부터 오지 않으나, 그러나 그것이 유통됨으로써 온다.”144) 칼빈의 이런 사상에 정념을 억제하고 이성을 따르라는 스토아적 인문주의의 정신에 근거한 금욕주의적 기상과 합리주의적 사고가 결부되어 칼빈의 사상은 자본주의의 정신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었다. 또한 칼빈은 근면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게으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손발을 주었고 산업을 주었기 때문이다.”145) “우리에게 할당된 짧은 삶의 시간을 볼 때 우리는 나태 속에 빈둥빈둥 지내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146) 칼빈은 병석에 누워서도 제자들에게 구술하여 저작 활동을 계속했다. 병문안을 왔던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겨 좀 쉬라고 권면하면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대답했다.147) 칼빈은 시간을 아껴 일할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검소하고 절약하는 삶을 강조했다.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검소한 생활과 절제를 요구하며 무절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금한다고 말했다.148) 요컨대, 칼빈이 사유 재산 제도를 인정하고 상공업과 상공업상의 이윤과 사업 자금의 이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근면하고 검소한 삶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의 발달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사유 재산제는 신적 제도이긴 하지만 기금을 형성하여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서 풍부한 사람도 없고 결핍한 사람도 없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가르쳤다. 칼빈은 빈부의 격차를 인정했지만 우리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을 행할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면 왜 이 세상에 빈곤이 있게 하였겠는가?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람은 부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것을 볼 때 운명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 . . 하나님이 인간의 용기를 시험하기 위해 이 세상의 덧없는 재물을 불공평하게 분배해 준다. . . .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행한다면 . . . 이것은 좋은 증거이다.”149) 그래서 칼빈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낸 수납인이며, 우리가 그들에게 자선을 베푼 것을 하나님께 한 일로 간주해 준다고 말했다.150)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칼빈은 나태한 삶을 비판하고 근면성을 주장했지만, 노동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보았다. 노동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 행위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라고 보았다.151) 칼빈은 일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일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칼빈은 노동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보았기 때문에 공동체에 유익한 일, 이웃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삶의 어떤 형태도 인간사회에 유익을 주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더 찬양받을 만한 것이 없다”152)라고 칼빈은 말했다. 또한 노동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칼빈은 일자리를 빼앗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칼빈은 제네바 시당국이 사업을 벌여서라도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권면했다. 칼빈은 노동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봄으로써 임금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노동이 은총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임금은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는 선물이 되는 것이다. 칼빈은 고용자가 피고용자에게 임금을 지급할 때 하나님이 피고용자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부여한 것을 자기가 전달해 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고용자가 피고용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을 때 그것은 피고용자의 몫을 약탈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칼빈은 상업 활동을 인정했지만 부정직한 계약, 불량한 계량 기구, 매점, 매석, 독점, 폭리 등을 신랄히 비판했다. 칼빈은 특히 매점 매석을 비판했다. “창고에 좀이 먹도록 밀을 썩혀 두었다가 부족할 때 팔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 . . 이런 투기군들은 마침내 기근의 부르짖음이 들릴 때까지 창고에 밀을 모아서 안전하게 자물쇠를 채워둔다. . . . 사실상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많은 이익을 얻기 원하는 자들에 의해 조롱을 받는다. . . .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땅에 묻어 버리는 것이다.”153) 칼빈은 사업 자금에 대한 적정한 이자를 인정했지만, 고리 대금이나 가난한 사람이 빌리는 소비 자금에 대한 이자는 금지했다.154) 칼빈 당시의 제네바에서는 1558년 사치 금지법을 제정하여 과소비를 규제했다. 시의회는 이 법을 만들 때 그 취지를 “많은 악을 산출하고 탐욕스러운 교만을 양육하고 빈곤과 높은 생활비를 초래하고 많은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원인인 사치를 근절시키려 하는데, 이 원리는 하나님을 크게 화나게 하기 때문”155)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1559년에는 제네바 아카데미가 세워졌으며 교사들의 봉급을 시가 담당함으로써 가난한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게 했다. 칼빈의 사회 경제 사상은 서구의 자본주의적 복지 사회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레이엄(W. Fred Graham)은 칼빈의 사상은 “16세기 중부 유럽에 하나의 조그마한 복지 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공헌했다. 토니(Tawney)의 표현으로 하면 그것은 기독교 사회주의였다”156) 라고 말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스위스, 독일, 미국 등지에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반대하면서 기독교적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대개가 칼빈주의적 전통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다.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는 정의가 큰 관심거리가 되어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100만 권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읽기 쉽지 않은 이 책이 100만 권이 판매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정의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가 건전한 자본주의 토대 위에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대담 프로에서 1인당 국민 소득이 2만 달러라고 하면 4인 가족 기준으로 평균 8만 달러이고 우리 돈으로 9,000만 원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 돈이 다 어디에 갔느냐고 탄식했다. 우리 국민 다수가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 . . 우리가 기금이 허락하는 한,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서 풍부한 사람도 없고 결핍한 사람도 없도록 우리에게 명한다.” 라고 한 칼빈의 말을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는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 것이다. V. 문화 개혁 사상 칼빈주의는 근대 문화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칼빈은 1554년 창세기 1:16 강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천문학은 알면 즐거울 뿐만 아니라 매우 유익하다. 이 학예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칼빈은 1559년 판 『기독교 강요』에서 철학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그들[철학자들]이 가르치는 것들이 진실하며, 배우면 즐거울 뿐만 아니라 유익하며, 그것들은 그들에 의해 정교하게 수집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는다.”157)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1559년 판에서 인간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였다. “플라톤의 견해는 더욱 옳다. 왜냐하면 그가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고려하기 때문이다.”158) 칼빈은 본성의 타락을 주장하면서 자연적 은사와 초자연적 은사를 구별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의견이 상식화된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그 의견은 사람의 자연적 은사는 죄로 인하여 사람 안에서 부패하였으나 초자연적 은사는 사람에게서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장의 후반부는 하늘 생명과 영원한 복락을 얻는 데 충분했을 만큼의 믿음과 의의 빛을 의미한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한다.”159) 칼빈은 이 초자연적 은사는 인간의 타락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들은 제거된 것이라고 추론한다.”160) 그러나 “사람이 선과 악을 구별하며 이해하고 판단하는 이성은 자연적인 은사이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히 말소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부분적으로 부패되어 기형적인 잔해가 남았다.”161) 칼빈은 한 곳에서 타락을 건물의 파괴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철학자들은 큰 모호성 속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폐허 속에서 건축물을, 흩어진 파편 속에서 균형이 잘 잡힌 구조물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162) 비유컨대, 칼빈에게 있어서 타락은 그 중심이 폭격을 받은 건물과 같았다. 중심은 완전히 사라져 없어졌다. 그러나 주위는 파괴되긴 했지만 무언가 남아 있다. 칼빈은 타락 후에도 남아 있는 자연적 은사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칼빈은 인간의 오성과 의지 중 오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인간의 지성은 항상 맹목적이어서 아무 대상도 지각하지 못한다고 정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상식의 경험도 역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본성 안에 진리를 탐구하려는 일종의 욕망이 내재한 것을 보며, 이미 진리를 맛보지 않았다면 사람은 그것을 전혀 열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지성은 본성상 진리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지각 능력을 가지고 있다.”163) 그러나 칼빈은 “진리에 대한 이 동경은 그 자체로는 곧 허영에 떨어지기 때문에 경주에 참가하기도 전에 맥이 빠져 버린다. 참으로 인간의 지성은 둔하여 바른 길을 견지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오류 사이를 방황하며 어둠 속을 더듬는 것 같이 되풀이해서 넘어지다가 마침내 길을 잃고 사라져 버린다” 하고 첨언한다. 칼빈은 다시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구별함으로써 지성의 역할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정신이 어떤 문제에 대해 그 능력의 정도에 따라 나아갈 수 있는 범위를 더욱 분명하게 지각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구별을 해야 한다. 그 구별이란 하나는 땅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땅의 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 또는 하나님 나라, 참된 공의, 또는 내세의 복에 속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현세에 관해서 의미와 관련성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세의 범위 내에 국한된다. 내가 ‘하늘의 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 참된 의의 본성과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한 순수한 지식이다. 처음 부류에는 정치와 가계와 모든 공예와 학예가 포함된다. 둘째 부류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 그리고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적응시키는 규칙이 있다.”164) "선과 악 사이의 어떤 재량이 여전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진 것이 하나님을 찾는 문제 일 때 그것은 그림자 속으로 분명히 변해 버렸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그의 이성이나 지성에 의해서는 조금도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165) 한편 칼빈은 땅의 일에 관련된 인간의 활동을 이렇게 예찬한다. “시민적 질서와 규율을 매우 공정하게 확립한 고대 법률가들 위에 진리가 빛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것인가?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바로 관찰하고 예술적으로 묘사했는데 그들을 눈이 어둡다고 말할 것인가? 논쟁술을 생각하고 조리 있는 화법을 우리에게 가르친 사람들을 지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것인가? 의학을 발전시켜 우리의 유익을 위해 노력을 다한 사람들을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할 것인가? 모든 수학적 과학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것들을 미친 사람들의 고함으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이들 주제들에 관한 고대인들의 저작들을 높이 찬양하지 않고 읽을 수 없다. . . .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것을 찬양할 만하거나 고상하다고 생각할 것인가? . . . . 우리는 인간 본성이 그 참된 선을 빼앗긴 후에도 주님이 많은 은사들을 인간 본성에 남겨 두었다는 것을 그들의 예를 보아서 알아야 한다.”166) 칼빈은 여기서 법학, 철학, 논쟁술, 의학, 수학 등 모든 학문적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결론적으로 “이 다양성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자취들을 보며, 이 자취들이 인류 전체와 다른 피조물들을 구별한다”167) 하고 말하였다. 스피츠(Lewis W. Spitz)는 칼빈주의가 과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고 말하였다. “1640년대 이후 프로테스탄트들이 과학자들 사이에 지도적 위치를 담당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루터란, 앵글리칸, 특히 칼빈주의자들이 더 많은 과학적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이들을 실제 응용, 사용하는 데에도 가톨릭 교도들 보다 훨씬 융통성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그 비례를 따져 보아도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 앵글리칸들보다 더 많은 과학자들을 배출하였으며, 1630년에 사망한 천문학자 요한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루터란 측에서는 이렇다 할 과학자가 나타나지 못하였다.”168) VI. 결언 칼빈은 세계사에서 누구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종교 개혁만으로 말하면 칼빈은 루터만큼의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칼빈은 루터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전 유럽에 확산시키고 종교 개혁을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서양 사회가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변화하던 과도기에 태어나 서양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칼빈은 근대 민주주의의 어머니, 근대 자본주의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근대 복지 사회의 형성에도 공헌하였으며, 근대 과학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칼빈은 근대 서양 문화의 형성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멸망한 후 러시아의 수도사였던 필로테오스는 모스코바를 제3의 영원한 로마가 될 것이라고 예찬한 적이 있다. 필로테오스는 첫째 로마는 이단 사상 때문에 멸망하였고, 둘째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은 분열 때문에 멸망하였는데, 이제 셋째 로마가 북에서 솟아나서 태양처럼 전 우주를 밝힌다고 하였다. 그러나 셋째의 영원한 로마라고 한 모스코바도 짜르 정권에 유착하여 부패함으로써 공산당에 의해 멸망당한 바 있다. 이제 넷째 로마가 동에서 솟아오르는데 그것은 한국의 서울이라고 생각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한국 서울에 있고, 주일이 되면 수많은 성도들이 교회로 모여들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최근의 한국 교회의 침체가 일시적 침체이기를 바란다. 1907년 한국 교회의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는 백만 명 구령 운동이 일어났다. 1960년대 드디어 백만 명이 되었을 때 삼천만의 가슴에 그리스도를 심자고 하는 제 2차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제 칠천만의 가슴에 그리스도를 심는 제 3차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온 세계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가 이런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근대 문화를 이끌어 온 칼빈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숙고하고 그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사야 11:9에서는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하고 말씀했다. 바다에 가 보면 물이 바다를 덮고 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다면 거룩한 세상이 될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우리의 지혜의 전체 대요는 - 그것이 참되고 확고한 지혜로 간주되는 것이라면 - 두 부분, 즉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 강요』는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을 알게 하는 책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래서 거룩한 세상이 되는 것이 칼빈의 개혁 사상의 핵심이었다. 그의 개혁 사상은 거룩한 인간, 거룩한 교회, 거룩한 사회를 지향하였다. 그런 점에서 칼빈의 개혁 운동은 아직도 미완의 개혁으로 남아 있다. 칼빈의 개혁 운동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 지속되어야 할 운동이다. =========================================================== 1) David F. Wright, "Calvin's role in church history," The Cambridge Companion to John Calvin, ed. Donald K. McK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288. 2)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and trans. Ford Lewis Battles (2 vols.,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3.19.5. (이하 Inst. 라고 약함). 3) Inst. 1.12.3. 칼빈이 우상 숭배를 비판했다고 해서 예술적 작품을 조각하거나 그리는 것을 금지한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역사적인 사실을 조각하거나 그리는 것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 사실의 조각이나 그림은 교육에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형상도 절대적으로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미신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조각과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들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의 순수하고 합법적인 사용을 추구한다. 주님이 자신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그것들이 악한 오용으로 더럽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파멸로 향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 . 이 부류 안에 어떤 것들은 역사들과 사건들이며 어떤 것들은 과거의 사건들을 그리지 않는 몸들의 형상들이나 형태들이다. 전자는 교육과 교훈에 있어서 어떤 유익이 있다. 후자의 경우 쾌락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주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Inst. 1.11.12. 4) Inst. 2.2.12. 5) Inst. 3.3. 9. 6) Inst. 3.3.9. 7) Inst. 3.11.6. 8) Inst. 3.11.11. 9) Inst. 3.11.1. 10) Inst. 3.11.2. 11) Inst. 3.11.6. 12) Inst. 3.3.1. 13) Inst. 3.16.1. 14) Inst. 3.11.6. 15) Inst 3.16.1. 16) Inst. 3.11.10. 17) 이 문제에 관해 졸고, "Calvin on deification: a reply to Carl Mosser and Jonathan Slater,"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63/3(2010):272-284에서 다루었다. 18) F. W. Norris, "Deification: Consensual and Cogent,"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49/4 (1996): 420. 19) Carl Mosser, "The Greatest Possible Blessing: Calvin and Deification,"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55/1 (2002): 39. 20) Jonathan Slater, "Salvation as Participation in the Humanity of the Mediator in Calvin's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A Reply to Carl Mosser,"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58/1 (2005): 39. 21) Concordia Triglotta, ed. F. Bente and W. H. t. Dau (St. Louis: Concordia, 1921). 153, quoted in James Weis, "Calvin versus Osiander on Justification," in Calvin's Opponents, Vol. 5 of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ed. Richard C. Gamble (New York: Garland Publishing, Inc., 1992), 356. 22) Inst. 3.11.8, 23) Cf. Joseph Tylenda, "Christ the Mediator: Calvin versus Stancaro," in Calvin's Opponents, Vol. 5 of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ed. Richard C. Gamble (New York: Garland Publishing, Inc., 1992), 161. 24) The text is translated in English in Joseph Tylenda, "Christ the Mediator: Calvin versus Stancaro," in Calvin's Opponents, Vol. 5 of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ed. Richard C. Gamble (New York: Garland Publishing, Inc., 1992), 167-172. 25)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ed. G. Baum, E. Cunitz, and E. Reuss (59 vols., "Corpus Reformatorum"; Brunsvigae: Schwetschke et Filium, 1863-1900), 55:446 (이하 CO라고 약함). 26) Inst. 4.1.1. 27) Inst. 4.1.4. 28) Inst. 4.1.4. 29) Inst. 4.1.2. 30) Cf. Alexandre Ganoczy, Calvin und Vaticanum Ⅱ. Das Problem der Kollegialität (Wiesbaden: Franz Steiner Verlag GMBH, 1965), 23. 31) Inst. 4.1.7. 32) Inst. 4.1.7. 33) Inst. 4.1.7. 34) Inst. 4.1.7. 35) Inst. 4.1.15. 36) Inst. 4.1.15. 37) Calvin's Commentaries on Psalms 15. 1. (이하 Comm. Ps. 처럼 약함). 38) Comm. Ezek. 13. 9. 39) Inst. 4.1.12. 40) Inst. 4.1.12. 41) Inst. 4.1.12. 42) Jacques Pannier, Calvin et l'Épiscopat (Strasbourg: Libraire Istra, 1927). 43) Epistola, 1619 "Calvinus Cranmero," CO 14:314. 칼빈은 특히 루터파와 츠빙글리파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Nijenhuis가 지적한 것처럼 칼빈은 그 두 파 사이의 중재자적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Cf. W. Nijenhuis, Calvinus Oecumenicus ('S-Gravenhage: Martinus Nighoff, 1959), 310ff. 44) Projet d'ordonnances ecclésiastiques, CO 10/1:15-16. 45) Inst. 4.3.4. 46) Inst. 4.3.5. 47) Ibid. 4.3.5. 48) Inst. 4.3.8. 49) Inst. 4.3.8. 50) Inst. 4.3.8. 51) Projet d'ordonnances ecclésiastiques, CO 10/1:17. 52) Inst. 4.3.11. 53) Inst. 4.3.12. 54) Inst. 4.3.15. 55) Inst. 4.3.15. 56) Cf. Evelyn Maud Farrington, Calvin. The Modern Man (Belfast: The Belfast News-Letter Ltd., 1953), 9. 칼빈은 시민 정치에 있어서도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있다. Inst. 4.20.8. 여기서 칼빈은 민주주의와 귀족주의의 혼합형, 즉 일종의 대의 민주주의를 가장 나은 정부 형태로 보고 있다. 칼빈의 민주주의적 경향에 대하여는 Abraham Kuyper, Calvinism (London: Sovereign Grace Union, 1932), 125ff.; Winthrop S. Hudson, "Democratic Freedom and Religious Faith in the Reformed Tradition," Church History, 15(1946):177ff.; John T. McNeill, "The Democratic Element in Calvin's Thought," Church History, Vol. 18(1949):153ff.; George L. Hunt (ed.), Calvinism and Political Order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5), 11ff., 23ff. 참조. 57) Inst. 4.3.15. 58) François Wendel, Calvin: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trans. Philip Mairet (Glasgow: William Collins Sons & Co. Ltd., 1950), 304. 59) Projet d'ordonnances ecclésiastiques, CO 10/1:21. 60) Inst. 4.3.5. 61) Inst. 4.3.4. 62) Projet d'ordonnances ecclésiastiques, CO 10/1:22 63) Inst. 4.3.8. 64) Also cf. Inst. 4.11.1. 65) R. N. Caswell, "Calvin's View of Ecclesiastical Discipline," John Calvin, ed. G.E. Duffield (Appleford: The Sutton Courtenay Press, 1966), 222. 66) Projet d'ordonnances ecclésiastiques, CO 10/1:23. 67) Inst. 4.3.9. 68) 이 운동에 대해서는 Claus-Peter Clasen, Anabaptism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72), 210ff. 참조. 69) Inst. 4.1.3. 70) Comm. Acts, 2. 44, 71) Ibid. 72) Calvin's Sermons on Matthew, 3. 9-10 (이하 Serm. Mt.라고 약함). Also cf. Alfred T. Davies, John Calvin and the Influence of Protestantism (London: Henry E. Walter 1946), 27. 73) 이 문제에 대해서는 André Biéler, La Pensée économique et sociale de Calvin (Genève: Georg, 1961), 306ff.: W. Fred Graham, The Constructive Revolutionary. John Calvin and His Socio-economic Impact (Richmond, Virginia: John Knox Press, 1971), 65ff. 참조. 74) Comm. 2 Cor. 8. 14. 75) Inst. 4.5.7. 76) Inst. 4.5.16. 77) Inst. 4.4.8. 78) Inst. 4.4.8. 79) 민경배, 『한국 기독교회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269. 80) Inst. 3.7.1. 81) Quoted in Emanuel Stickelberger, John Calvin, trans. David Georg Gelzer (Cambridge: James Clarke & Co., LTD, 1977), 140. 82) Philip Schaff, Creeds of Christendom (3 vols.; New York: Harper & Brothers, 1919), 3:676. 83) Alexandre Ganoczy, "Calvn's life," trans. David L. Foxgrover and James Schmitt,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John Calvin, ed. Donald K. McK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23. 84) Hilaire Belloc, "Oliver Cromwell," 35, quoted in Davies, 30. 85) Marc-Edouard Chenevière, La Pensée politique de Calvin (Genève: Slatkine Reprints, 1970). 9. 86) Ibid., 10. 87) George H. Sabine and Thomas L. Thorson, A History of Political Theory (Hinsdale, Illinois: Dryden Press, 1973), 339. 88) Hudson, 179. 89) McNeill, 162. 90) Ibid, 169. 91) Ibid. 92) Inst. 4.29.1. 93) Inst. 3.19.5. 94) Inst. 4.20.1. 95) Inst. 4.20.1. 96) Inst. 4.20.3 97) CO 37:211, quoted in Wilhelm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trans. Harold Knight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56), 234. 98) Inst. 4.20.4. 99) Inst. 4.20.8. 100) Inst. 4.20.8. 101) Inst. 4.20.8. 102) Inst. 4.20.8. 103) Ser. Deut. 16, 18-19. 104) Ser. Deut. 17. 14-18. 105) Ser. Deut. 17. 14-18. 106) Chenevière, 228. 107) Hans H. Esser, “칼빈의 정치이론,” 장일조 역, 「세계와 선교」 71(1979. 6):43. 이것은 저자의 주장인지 아니면 번역이나 출판상의 착오인지 확인할 수 없다. 108) Hudson, 190. 109) Inst. 4.20.8. 110) Inst. 4.20.8. 111) Hudson, 190. 112) Inst., 4.20.8. 113) Hunt (ed.), 35. 114) E. Willam Monter, Calvin's Geneva (Huntington, New York: Robert E. Krieger Publishing Company, 1975), 107. 115) Ibid, 107-108. 116) Chenevière, 10, n. 4. 117) Inst. 4.20.4. 118) Inst. 4.20.23. 119) Inst. 4.20.6. 120) Inst. 4.20.6. 121) Comm. Rom. 13, 1, 122) Comm. Rom. 13. 4, 123) Cf. Hudson, 192. 124)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1), 89. 125) Ibid., 90. 126) Inst. 4.20.25. 127) Inst. 4.20.29. 128) Inst. 4.20.29. 129) Inst. 4.20.30. 130) Inst. 4.20.30. 131) Inst. 4.20.30. 132) Inst. 4.20.31. 133) Inst. 4.20.31. 134) 칼빈은 여기서 스파르타의 민선 장관(Ephorus), 로마의 호민관(Tribunus plebis), 아테네의 시민 장관(Demarchus), 그리고 당시의 삼부회(tres ordines) 등을 예로 들고 있다. 135) Inst. 4.20.31. 136) Inst. 4.20.31. 137) Inst. 4.20.32. 138) Inst. 4.20.32. 139) Inst. 4.1.3. 140) Comm. Ps., 31. 19. 141) Serm. Deut., 15. 11-15. 142) Comm. 2 Cor., 8. 15. 143) Comm. Isa., 24. 2. 144) CO 10/1:247. 145) Quoted in William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nth Century Portrait(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199. 146) Comm. Jn., 9. 4. 147) Cited in Emanuel Stickelberger, John Calvin, trans. D. G. Gelzer (Cambridge: James Clark & Col, Ltd., p. 1977), 147. 148) Comm. 2 Cor., 8. 15. 149) Serm. Deut., 15. 11-15. 150) Ibid. 151) Cf. W. Fred Graham, The Constructive Revolutionary: John Calvin and His Socio-Economic Impact (Atlanta: John Knox Press, 1978), 81. 152) Comm. Mt., 25. 24. 153) Quoted in ibid., 56. 154) Cf. ibid., 92. 155) CO 21:705. 156) Graham, 193. 157) Inst. 1.15.6. 158) Inst. 1.15.6. 159) Inst. 2.2.12. 160) Inst. 2.2.12. 161) Inst. 2.2.12. 162) Inst. 1.15.8. 163) Inst. 2.2.12. 164) Inst. 2.2.13. 165) CO 9:743. 166) Inst. 2.2.15. 167) Inst. 2.2.17. 168) Lewis W. Spitz, 『종교 개혁사』, 서영일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496. 169) 이런 왜곡에 대해 해명한 가장 좋은 안내서는 리샤르 스토페르(Richard Stauffer)가 쓴 <칼빈의 인간성(L'humanité de Calvin)>이다. 이 책은 총신대학교의 박건택 교수에 의해 <인간칼빈>으로 번역되어 엠마오 출판사를 통해 출판되었다. 칼빈의 개혁사상과 한국교회(논평1) 최 종 호(경성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 최종호 교수 경성대학교 신학대학
이 연구는 칼뱅의 개혁사상이 “근대 민주주의의 어머니”, “자본주의의 아버지”, “새로운 산업 사회의 예언자”, “근대 과학의 아버지”, “근대 문화의 어머니”등으로 불릴 만큼 사회 전반 분야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지만 근래에 와서 서구를 중심으로 그 영향이 크게 감소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세계 개혁교회의 약화를 보면서 개혁사상에 기초한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교회의 희망을 모색하가는 것으로 출발하고 있다.   


연구자는 칼뱅의 개혁사상은 교회와 사회 나아가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논문을 읽으면서 이해를 위한 몇 가지 간결한 질문을 하고자 한다.  


1) 프랑스 사람 “칼뱅”의 이름을 다시 생각해본다. 

2) 제목이 “칼빈의 개혁 사상과 한국교회”인데 “한국교회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3)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상태”는 무엇을 말하는가? (p.4)

4) “우리는 신화 자체가 아니라, 일종의 신화를 경험할 것이다.”의 의미는 무엇인가?(p.7)

5)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나누어지는 교회 직분 중 한국교회에서 “교사의 직분”이 잘 수행되고 있는가?(p.7)

6) 재산의 koinonia는 무엇을 말하는가?(p.12)


다음으로 칼뱅의 개혁 신학사상은 “하느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최우선으로 하여 성경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되고 있는 것 같다.

1.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imago dei)을 잃었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 최우선의 급선무가 되었다. 칼뱅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혼합이 아닌 연합, 즉 신비적 연합을 주장하였다.

2.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믿음의 내용이요, 바로 그것은 “전가된 의”다. “믿음으로 의롭다”는 칭의(justification)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중생(회개)에 이르는 성화의 삶으로 이어지게 한다. 중생과 성화 없는 칭의는 무의미하다.

3. 성도 혹은 교인으로 구성되는 교회는 말씀과 성례를 통해 신앙과 구원에 참여하도록 하며, 권징을 통해 위선적인 그리스도인들을 공동체 밖으로 내보낸다.

4. 교회는 연합체(루터 파, 츠빙글리 파, 영국교회), 즉 “다양성 속에서 일치”(unity in the diversity)라는 전제 속에서 에큐메니컬(ecumenical) 해야 한다.

5. 칼뱅의 정치 형태는 귀족정치와 민주정치를 혼합한 형태를 지향한다.

6. 칼뱅의 경제관은 사유재산 옹호, 근면성, 검소한 생활, 노동, 소유의 불평등과 이에 따른 생활의 불평등 인정,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나 부정직한 계약, 불량한 계량 기구, 매점, 매석, 독점, 폭리 등을 비판했으며, 높지 않은 이자를 허용했으나 가난한자에게는 무이자로 하는 등 사회 약자에 대한 배려의 정책을 반영했다.

7. 칼뱅의 문화 이해는 매우 적극적으로 보인다. 초자연적 계시와 자연계시 중 후자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역사, 문화, 철학, 과학, 의학, 법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위의 요약해서 언급한 것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와 같은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질문1) 칼뱅은 회개와 중생을 동일시하고 그리고 중생과 성화를 동일시하고 있다.(p.2) 칭의-회개-중생-성화의 관계는 무엇인가? 

질문2) “to make righteous가 아니라 justify이다”(p.3)라는 말은?

물음3) “교회라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와 구원을 빌기를 희망할 수 없다“는 의미는 무엇인가?(p.8)

물음4) “교회 안에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교회의 분리는 그리스도를 나누는 일로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일치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로부터 단절된 것과 같다.”(p.9)는 칼뱅의 에큐메니컬 사고의 적용을 위한 모색은 무엇인가?     

물음5) 로마서 13장을 해석하면서 국민저항권은 인정하지 않지만 백성의 관리 저항권은 인정한다(p.18-19)는 말은 무엇인가?  

문6) 초기교회의 “공동소유”는 성령 충만 공동체를 통한 사건으로 보는 데, 그것과 다른  칼뱅의 성서주석이 합당한가? (p.22)     

문7) “더 이상 발전하지 않기로!”(1986년 600주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기념행사의 모토)를 기억하면서 오늘의 자본주의 발전과 문화의 문제점에 대한 방안은 무엇이 있는가?(끝)

                   

 

 

                                            칼빈의 개혁사상과 한국교회(논평2)


                                               황대우 교수(부산외대 겸임교수)



   
  ▲ 황대우 교수

  부산외대 겸임교수
  본 논문의 가장 큰 장점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하나는 칼빈의 방대한 개혁 신학의 의의를 몇몇 주요한 관점에서 명료하게 분석하고 정리하여 쉽게 제시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런 분석과 정리를 근거로 오늘날 한국교회, 특히 한국장로교회의 개혁을 위해 현실적으로 유용한, 그리고 실제로 적용 가능한 구체적인 개혁안들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본 논문은 칼빈의 사상을 크게 4 개의 개혁 사상, 즉 종교 개혁 사상, 정치 개혁 사상, 사회 경제 개혁 사상, 문화 개혁 사상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가장 먼저 설명되는 종교 개혁 사상은 소논문 전체 분량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내용이 많은데, 여기서 대부분의 지면은 칼빈이 생각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무엇이며 개혁자가 말한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설명하는데 할애된다.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에 대한 칼빈의 사상이 동방 신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신화’(deification) 사상과 비교 연구한 논문의 내용을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칼빈의 종교 개혁 사상을 다루면서 본 논문의 저자는 칼빈이 칭의와 성화를 ‘구분했지만 분리하지 않았다’(distinctio, sed non separatio)는 점을 잘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사상이 동방 신학의 ‘신화’ 사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Mosser), 그렇게 하는 해석하는 것이 부당한지(Slater의 견해) 자신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다만 칼빈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양성, 즉 신성이나 인성 가운데 하나에 의한 것이 아닌, 양성 모두를 통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아마도 저자는 자신의 이러한 양성론적 화해론을 근거로 모써의 견해를 그리스도의 신성에 치우친 결과로, 그리고 슬레이터의 평가를 인성에 치우친 결과로 평가하면서 둘 다를 비판, 내지는 보완하려는 의도를 가진 듯하다.

  

저자가 이 장의 전반부에서는 칼빈의 중생과 성화와 신화라는 주제들을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교회 제도의 개혁’, 즉 교회론, 특히 직분론을 상세하게 논하는데 아마도 그가 교회 개혁을 종교 개혁 사상의 결정적인 모티브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여기서 교회의 직분을 논하면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권위적인 직분관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점을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이 집사직의 개혁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제정의 절반 가량을 구제비로 사용하도록 했다는 점을 들어 오늘날 한국교회가 교회 제정을 대부분 교회 자체를 위해, 특히 교회 건축을 위해 제정을 사용하는 문제점을 또한 지적한다.

  

칼빈의 정치 개혁 사상을 다루면서 저자는 칼빈이 일인 군주제가 독재로 치우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대표로 구성된 정치, 즉 귀족정치체제를 선호했다는데, 실제로 그가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는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적인 정치형태였다고 주장하고 이것이 곧 민주주의의 대의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정치사상은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써 칼빈의 저항권 이론을 예로 든다.

  

칼빈의 사회 경제 개혁 사상을 논하면서 저자는 칼빈이 사유 재산 제도를 옹호했지만 경제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상공업을 장려했다는 점과 투자를 위해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대금업, 즉 사업 자금을 위해 이자를 주고 돈을 빌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점을 들어 이와 같은 칼빈의 가르침이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칼빈의 문화 개혁 사상을 논하면서 저자는 칼빈이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는 자연적 은사를 언급함으로써 인간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이로 인해 근대 과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논평한다.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모스크바를 제 3의 영원한 로마라고 말한 러시아의 수도사 필로테오스의 예찬을 인용하면서 모스크바도 역시 정경유착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영원한 로마”라 볼 수 없으며 서울이 네 번째 로마라고 생각한다는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래서 최근 한국 교회의 침체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제 3의 부흥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 발견되는 아쉬운 점들은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저자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신성적 중보 사역을 주장한 오시안더(Osiander)와 인성적 중보사역을 주장한 스탄카로(Stancaro) 둘 다를 논박한다고 밝히면서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신성적이면서 동시에 인성적인 것이었다고 강조하는데, 여기서 칼빈이 신성에 따른 중보 사역과 인성에 따른 중보 사역을 어떤 내용으로 설명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단지 칼빈이 오시안더에 반대하여 인성적 중보 사역을, 스탄카로에 반대하여 신성적 중보 사역을 주장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모호함이 있다. 칼빈이 말한 그리스도의 신성적 중보 사역은 오시안더가 주장한 신성에 따른 중보 사역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즉 칼빈이 말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따른 중보 사역의 의미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신성이 차지하는 중보 역할이 존재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적인 의가 인간에게 주입되지 않는다. 반면에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따른 중보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본질적인 의가 인간에게 주입되어 신자가 그리스도처럼 신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 논의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저자의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드러난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두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래서 그는 단순히 인성 때문에가 아니라 신성 때문에 중보자인 것이 된다.”(24번 각주의 본문 단락 중하반부) 이 문장에서 “그리스도가 두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문제다. 칼빈은 자신의 저술 어디에서도 ‘그리스도가 두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즉 제네바 개혁가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두 본성에 있어서 중보자이시지만,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 두 본성을 가지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두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칼빈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오시안더의 주장에 가깝다.

   

두 번째로, 기술적인 문제이다. 위의 논의 가운데 저자의 인용구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각주로 표기 되지 않은 곳이 더러 있다. 각주 22번과 23번 사이, 24번과 25번 사이, 25번과 26번 사이의 인용구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150번 각주의 본문 뒷 문장이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 뒤에 아무런 인용문이나 설명이 없다.

 

세 번째로, 저자는 “칼빈은 우선 주교제도를 폐지하였다.”(26번 각주의 본문 위로 두 번째 단락)고 평가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자끄 빠니에르(Jacques Pannier)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칼빈은 주교 뿐만 아니라 대주교도 인정하고 있으며, 칼빈이 비판한 것은 주교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직책을 오용하는 것이었다.”(42번 각주의 본문) 칼빈이 주교직이나 대주교직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 주교제도에 대해서는 폐지를 주장했는가? ‘폐지’와 ‘인정’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칼빈이 스스로 주교 제도 자체의 심각한 문제점들은 여러 곳에서 제시하면서 개혁을 주장했지만 그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의 교황과 교황 제도에 대해서는 폐지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참고로 제네바가 주교의 통치를 거부한 것은 칼빈이 제네바의 개혁자가 되기 이전의 일로써 제네바 정부에 의한 결정의 결과였다.

  

네 번째로, 집사직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도 보충 설명이 붙어야 오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중세에는 deacon이 부제였으나 칼빈은 deacon의 역할을 사제 보좌의 역할이 아니라 사회 사업가의 역할을 하도록 했으며 칼빈은 이것은 성서적 의미의 deacon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문장만 보면 칼빈이 설명한 제네바의 집사직이 오늘날 교회의 집사직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의 집사는 어떤 형태의 사회 사업가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 당시 제네바의 정부와 교회의 관계, 그리고 칼빈에 의해 마련된 프랑스기금제도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 되어야 집사직에 대한 의문과 오해를 피할 수 있다.

  

다섯 번째로, 칼빈은 일인 군주제가 폭군적 독재로 타락하기 쉽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주권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정치 역시 문제가 많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나마 양 쪽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귀족정로 불리는 대표정치체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대표정치체제가 어쩌면 국민이 뽑은 정치인들이 국민을 대신하여 정치하는 민주주의의 대의정치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인을 국민으로 보는 것에서 출발하는 정치제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칼빈이 주장한 대표 정치 형태(당시 제네바처럼)를 오늘날 민주주의체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칼빈은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나 군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국가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국가관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 국가관과는 다르다. 이 점을 간과한 채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칼빈의 영향을 논한다면 정치체제에 대한 칼빈의 사상을 상당히 오해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것은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주권 재민과 주권 재천의 사상 사이의 문제”이다.

  

여섯 번째로, 저자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다. “칼빈은 백성의 관리에게만 저항권을 인정하고 사인에게는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는 사인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있다.”(137번 각주의 본문)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저항권”이다. 저자는 칼빈이 말한 종교적 사안에 대한 사적인 불복종의 권리를 ‘사적인 저항권’으로 해석하고 있다. 칼빈이 말한 불복종의 권리는 단순히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할 때 순교로써 정치 지도자들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즉 그것은 순교를 각오한 수동적인 불복종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칼빈이 말한 정치인들에 대한 사적인 불복종의 권리는 개인의 능동적인 저항 행위를 포함하는 저항권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과 프랑스의 위그노들의 무력 저항은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존 낙스(John Knox)와 칼빈 사후 그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베자(Theodor Beza)의 사상을 고려할 때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저자의 주장은 신중하지 못한 판단으로 보인다. “칼빈은 사인의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종교 문제에 대한 사인의 저항권은 인정했기 때문에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종교 문제로 박해를 받을 때 저항권의 사용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사용했으며,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이 되었다.”

  

일곱 번째로, 저자는 사회 경제 개혁 사상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칼빈의 이런 사상에 정념을 억제하고 이성을 따르라는 스토아적 인문주의의 정신에 근거한 금욕주의적 기상과 합리주의적 사고가 결부되어 칼빈의 사상은 자본주의의 정신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었다.”(144번 각주의 본문 아래 단락) “요컨대, 칼빈이 사유 재산 제도를 인정하고 상공업과 상공업상의 이윤과 사업 자금의 이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근면하고 검소한 삶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의 발달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48번 각주의 본문 아래 단락)고 주장한다. 금욕주의와 근면검소가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자본주의의 발달에 기여했는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결론부분에서 저자가 “이제 넷째 로마가 동에서 솟아오르는데 그것은 한국의 서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칼빈의 개혁 신학의 장점과 영향력이 학문적으로는 정당하게 평가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오히려 상당히 왜곡된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169) 가령 칼빈이 제네바의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제네바의 독재자로서 유감없이 폭정을 일삼았는데 그 결과 제네바 시 전체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시민법을 제정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르베투스를 사형시키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16세기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크나큰 오해요, 모함이라는 사실을 학계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파악하고 인정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칼빈은 여전히 냉혈적 독재자로 인식되어 있고 한국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칼빈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음을 감안하여 인간 칼빈에 대한 오해를 짚어주었더라면 더 빛나는 논문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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