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본받아 바울을 본받아 (ImitatioChristi,ImitatioPauli)

1. 삶과 사역의 스타일과 자기정체성 (self-identification)

   
  ▲ 문장환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졸업
  스텔렌보쉬대학교 박사
  현 한소망교회 담임목사
부정적 자기정체성이 어둡게 사람의 영혼에 드리우고 있을 때는 작은 비방이나 부정적인 평가에도 견디기 힘들어진다. 반대로 누가 뭐래도 자기정체성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면 그는 자기에게 쏟아지는 비방만이 아니라, 찬사에도 휩쓸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정체성은 그 사람의 삶뿐만이 아니라, 사역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삶과 사역의 스타일은 역시 그의 자기정체성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 그의 삶과 사역의 스타일을 추적해 봄으로써 사도바울의 자기정체성의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역추적해 보려고 한다.

 

성경에서 바울을 볼 수 있는 곳은 사도행전과 그의 서신들인데, 그 중에서도 고린도후서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바울의 모습은 마치 풍경화에 나오는 모습이다. 누가가 바울이라는 사람을 관찰하면서 (아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여행여정과 경험과 사역과 행동을 기록하였다. 반면에 고린도후서에서는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 직접 말하고 있어서 마치 그의 자화상을 보는 것처럼 그를 보게 된다. 그래서 그의 삶과 사역에 나타나 있는 자기정체성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바울의 자기정체성 인식과 삶과 사역의 스타일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본문은 고린도후서 10-13장 본문이다. 이 본문을 상담학적 관점이나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첫째는 성경학자로서 상담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 언어로 표현하려 하니 본문이 주는 어떤 충격(impact)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22-12:10 본문을 해석해 나가려고 한다. 이 해석은 사회수사학적 접근(socio-rhetorical approach)의 산물로 나온 것이다. 이 강의를 상담에 적용하는 것은 오늘 듣는 분들의 몫인데, 특별히 그리스도인 상담자가 그리스도인 내담자를 도와줄 수 있는 영적 원리와 힘을 얻게 되길 바란다.

 

2. 고난 연약 그리고 수치의 자랑 (고후11:22-33)

(1) 자랑 대결

오랜 시간 동안 겸손이 미덕으로 자리 잡았지만, 최근에는 그 경향이 달라졌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을 대담하게 심지어 과장되게 자랑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기고, 때로는 무형의 권위를 덧입으려고 한다. 사실 자랑은 오랫동안 인간 공동체에서 각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사용하여 왔다. 바울 당시의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 자랑하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특별히 교만한 사람들만의 행동이 아니라 일반적이었다.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는 것 없이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였다. 이런 업적 자랑들은 지금도 남아 있는 각종 유물들에 잘 나와 있다. 공적 기념비나, 건물의 한 벽면에 공적을 길게 새긴 글이나, 가족의 영화를 자랑하는 가족벽화나 혹은 시인이 남긴 서사시로, 그리고 철학자나 수사학자들이 남긴 찬양의 글에 남아 있다. 이렇게 자랑하는 것은 유대인에게도 일반화 되어 있었다. 아마 예수님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세리와는 다르게 자신의 자랑거리를 감사로 둔갑시켜 성전에 올라가 길게 늘어놓았던 바리새인의 모습은 특별한 모습이 아니라 흔히 볼 수 있었던 모습일 것이다 (참조 눅 18:10-13).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새로 온 교사들, 거짓 사도들 역시 자신들의 자랑거리들을 길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보다 우월하다고 하면서 바울의 자리를 넘보았고 이런 자랑에 익숙한 고린도교인들 역시 혹하여서 그들을 받아들였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랑을 하였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을 하는구나!" (고후 11:20). 이것이 그들의 자랑하는 동기이다.

 

거짓 교사들은 신앙이란 탈은 쓰고 있지만 결국 세상적인 기준으로 자랑하였다. 그들의 출신 배경, 그들의 신비적 능력, 그리고 그들의 말솜씨, 그들이 받아온 보수들 등을 자랑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의 자랑거리에 비해서 바울은 자격미달이라고 바울을 비난하였다. 바울은 이런 자랑 대회에 나서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자랑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지만 정작 바울이 자랑에 나섰을 때, 그의 주저하는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자랑의 내용은 거짓 교사들, 더 나아가 모든 당시의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2) 바울의 이상한 자랑거리들

바울의 첫 번째 자랑의 내용은 거짓 교사들의 자랑에 필적하는, 비슷한 자랑이다. 곧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22절). 육체적으로 볼 때 바울은 빠질 것이 없었다. 왜 바울이 이것을 먼저 말하느냐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내용을 따라서 (빗대어서) 말하려니 이렇게 출발을 하였을 것이다. 한편 이것 자체가 주장되어야 하는 것은 바울의 사도성과 사도적 사역을 따지니 당시의 사정으로 (기독교 전파의 초기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유대인이라는 신분은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음 절부터 자랑의 내용은 거짓 교사들과 정 반대로 나간다. 당시에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 것들을 자랑하는데 어리석음, 약함, 실망, 패배를 자랑한다. 그 시작을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라는 표현인데, 공동번역에서는 이 말을 “미친 사람 말 같겠지만” 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조롱이 섞여있고, 그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를 바울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이제부터 하는 바울의 자랑거리가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 그래서 제 정신이 아닌 자랑으로 보일 것이라는 말이다.

 

l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그들과 비교해서 수고를 더 많이 했다는 비교급 표현이 아니라 고된 일군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헬라 사회에서 그렇게 칭찬들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이상형은 육체적으로 고되게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학과 시와 수사학 속에서 아름다운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다.

 

l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바울이 이 편지를 쓸 시기는 예루살렘 (행22장), 가이사랴 (행23장), 그리고 로마 (행28)에서의 감옥 생활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이다. 이 시기 전에 감옥에 갇힌 것으로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은 빌립보 감옥에서이다 (행16장). 그런데 바울은 한번만이 아니라 더 여러 번 감옥에 갇혔다고 말한다. 이것으로 보아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이 당한 모든 고난을 다 기록한 것은 아니다. AD 95년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보면 바울은 7번이나 감옥에 갇혔다고 하였다. “옥에 갇힌 것”이 “순교와 고난의 신앙”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자랑거리가 아니다.

 

l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왜 하나님의 사도라면서 죽을 뻔 합니까? 매 맞고 죽을 뻔 하였던 것이 지금에 보니 신앙적인 영웅담으로 들리지만 세상적인 각도 혹은 삐딱한 각도에서 보면 형편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존경 받아가면서, 칭찬 들어가면서, 필요한 것 챙겨가면서 사도 노릇 잘하는 교사들이 어엿이 있는데요. 이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매를 맞았고 어떻게 죽을 뻔 하였는가를 말해준니다.

 

l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유대인의 형벌로 이 태형은 죄인의 두 손을 결박하여 기둥에 묶고 양 어깨와 가슴을 벗겨놓고 소가죽으로 만든 묵직한 채찍으로 13회씩 3번에 걸쳐 때렸다. 바울은 이런 극형을 다섯 번이나 당하였다. 유대인으로서 수치스런 모습이다.

 

l 세 번 태장으로 맞고-태장은 가죽 끈의 끝에 납 덩어리를 매달아 그 부분으로 죄인에게 매질하는 로마의 형벌인데 노예와 반역을 하는 이민족을 다스리기 위하여 고안한 것으로 로마시민에게는 금지된 형벌이다. 살이 찢어지는 등 고통이 극심하여 태장집행 중 죄수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 로마 시민으로서도 부끄러운 모습이다.

 

l 한 번 돌로 맞고-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맞았는데 사람들이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버렸다. 미친 개에게나 돌을 던진다. 돌에 맞은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l 세 번 파선하였는데 일주야(24시간)를 깊음에서 지냈으며-사도행전 27장에 바울이 죄수로 끌려가면서 탄 배가 멜리데(말타)에서 파선한 사건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 사건은 이 편지를 쓰고 난 후의 일이다. 자연까지 그를 버리는 듯한 모습이다.

 

l 여러 번 여행의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여행 중에 당하는 자연 재해와 사람으로부터 받은 재해 등을 수 없이 겪었다. 역시 가는 데마다 어려움을 당하니 하늘이 버렸다.

 

l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강도 같은 악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동족들은 동족대로 그를 죽이려고 하였고 괴롭혔다. 어떤 사람에게도 환영 받지 못한 사람이다.

 

l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사람이 사는 곳에서도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육지에서도 바다 한 가운데서도 고난을 겪었다. 시내에서는 소동과 선동으로 죽을 뻔 하였고, 광야에서는 들짐승과 강도떼 등으로 바다에서 폭풍과 해적 등으로 늘 위험 속에서 지냈다.

 

l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지금 바울이 당하고 있는 문제다. 아마 최대의 난적이고 최대의 고통 거리였다.

 

l 한 가지 더 사건을 말하는데 이것은 약한 것뿐 아니라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수치스러운 사건을 말한다.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탈주한 사건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로마의 군대 제도였던 “coronamuralis”라는 제도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곧 전쟁이 일어나면 보통 도시의 성을 정복해야 하는데 그 때 그 성벽을 제일 먼저 올라가는 군인이 최고의 상급을 받게 하였는데, 그것이 “coronamuralis”이다. 바울은 이 자랑거리와 비교하면 정반대되는 가장 부끄러운 사건을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경상도 말로 사나이가 성벽을 제일 먼저 정복하려고 기어올라가지는 못 할 망정 (생선)광주리 타고 내려가 도망을 가다니!”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결국 약하고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것이다. 일반인들이 다 싫어하는 것들이다. 바울에게는 자신을 바라보고, 사역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가치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보면 정신 없는 사람이 하는 자랑거리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것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자랑거리라고 한다. 바울의 가슴에는 불타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11장에 나온 그런 고난과 수치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그에게 맡겨진 사역을 지속할 수가 있었다. 오히려 그런 고난과 수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어려움과 수치를 당하는 것이 오히려 자랑거리가 되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이지기도 못하고 말리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그의 자랑거리가 고린도인들의 정서에는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십자가를 따라가는 모든 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그것을 장황하게 말하였다.

 

3. 천상의 계시와 지상의 가시 (고후 12:1-10)

(1) 천상의 계시 (1-6절)

본문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면서 바울을 비난했을 또 하나의 문제로 눈을 돌린다. 그것은 과연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자격에 대한 증명서로 환상이나 계시를 경험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적들은 그런 것들을 자랑했음에 틀림이 없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묘하게 응답한다. 분명히 그런 경험이 있었다. 환상과 계시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중에 이 환상의 경험이 제일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이 경험은 본문에 따르면 14년 전에, 그러니까 AD 42-3년경에 다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12:2). 그는 "셋째 하늘" 혹은 "낙원"에 이끌러 갔다 (12:2, 4). 그는 바로 그곳에서 많은 "환상"을 보았으며 또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말("계시")들을 들었다. 만일 자랑을 하자고치면 이것이 얼마나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굉장히 특이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험을 쓴 글을 묵시문학이라고 하는데, 분명 토픽은 묵시적인데, 기록하는 내용과 방식을 보면 비(非)묵시적, 아니 반(反)묵시적이다.

 

l 첫째, 일반적으로 묵시문학은 가명이라도 빌려와서 사용한다. 그런데 바울은 철저히 익명적으로 말한다. 분명 자기의 경험인데 1인칭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12:2) 라고 3인칭으로 표시한다.

l 둘째, 철저히 수동적 동사를 사용한다. "이끌려 간(12:2), 이끌려 가서, 들었으니(12:4)," 이런 표현들은 그런 경험이 자신의 자발적인 행동이나 덕목이나 소원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단지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한 토기,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l 셋째, 분명히 그 경험은 엄청날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바울의 보고는 철저히 "무(無, nothing)"이다.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12:2,3), 말할 수 없는 말, 가히 이르지 못할 말 (12:4)," 이런 바울의 보고 속에서 도대체 그가 체험한 환상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도록 한 단어라도 제대로 주는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남은 것은 "무명(un-name)" "무환상(un-vision)" "무계시(un-audition)" "무해석(un-interpretation)" 한마디로 "무(nothing)"이다.

 

왜 바울은 이 경험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는가? 우선은 발설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 "말할 수 없는 말" 이란 말이 "발설이 금지된 말"의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말하지 않기로 바울이 의도적으로 작정을 한 것 같다. 이런 것 말고 오히려 약한 것들과 수치스러운 것들 그리고 역경들만 자랑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12:5).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12:6).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고린도 성도들이 과거의 내 모습이 아니라 현재의 내 모습을 보기를 원하노라. 그대들이 진지하게 고려하고 또 본받아야 할 사람은 과거에 놀라운 계시를 받고 환상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현재 그대들이 보고 있는, 온갖 형태의 연약함 속에 있는 사람이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듣고는 사람들이 바울에 대하여 대단하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하였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의 황홀경 등을 내세워 자신의 자리를 정당화하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자신의 연약한 삶 등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서 복음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어 하였다. 복음의 능력은 황홀한 체험과 대단한 경험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연약해 보이는 것에서 나타난다. 복음능력의 결과인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바로 그렇게 나타났다. 복음의 진실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데 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무엇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길인가를 바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계시 경험의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그래서 혹자는 바울의 앞의 말들을 고도의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보기도 한다. 바울이 은근하게 자랑하는 수사학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미 이런 경험을 꺼내기조차 싫어하였지만 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것을 안타깝게 말한 바가 있다 (11:16, 참조 12:11). 곧 환상이나 계시 받았다고 사도됨을, 그리스도의 일군됨을 주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게 된 주된 이유는 따로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자신의 몸속에 가시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가시를 지금 고린도인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환상 경험조차도 철저히 바울의 굴욕을 보여주도록 문학 구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곧 성벽 도망 사건 (11:30-33)과 몸의 가시 사건 (12:7-9) 사이에 환상 경험 사건 (12:1-6)을 배치시키고 있다.

 

(2) 지상의 가시 (7-10절)

이제 바울은 그의 자랑의 목록에서 그 자신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가장 높은 곳으로 이끌고 간 낙원의 계시가 아니라, 자신을 가장 처참한 데로 이끈 몸 안의 가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12:7). 이 가시는 무엇인가? 생선 가시? 장미가시? 여기에 나오는 가시의 헬라어는 스콜롭스로서 땅에 박는 말뚝을 말한다. 혹은 그 크기를 작게 말한다면 사람을 고문하거나 찔러 꿰기 위해 사용되는 날카로운 나무막대기이다. 그러니 그의 가시는 몸 속 깊이 관통되어서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어떤 것을 말한다. 이것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에너지가 고갈이 되어서 어떤 일도 효율적으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의 가시가 무엇일까 하는 것에는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계속되는 핍박들, 대적들, 육체적인 유혹들, 안질, 간질, 말라리아, 알려지지 않은 질병, 혹은 심한 말더듬 등, 우리는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직할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인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12:6), 바울에게는 굉장한 고통거리였을 것이다. 그것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날 나의 고통이 무엇이든지 간에 바로 바울의 경험에 넣어서 생각해 보게 한다. 곧 나의 가시가 어떤 것이든지 바울을 통하여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시는 이중적 목적을 가진다. 우선 그것은 사단의 도구로 쓰인다. 그 가시 때문에 바울의 사역이 많은 방해를 받고 더디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바울 자신이 조롱과 비웃음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그래서 그 가시를 "사단의 사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가시는 놀랍게도 이 가시는 하나님의 목적도 달성을 한다. 사단은 가시를 통하여 바울을 공격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가시를 통하여 더 나은 길로 바울을 인도하였다. 계시를 받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의기양양함, 자부심을 가져온다. 종교적인 깊은 경험은 나도 모르는 사이 자아를 쉽게 부풀리게 한다. 바울이라도 여러 계시를 받는 것이 지극히 큰일이므로 자만하여 붕 뜨기 쉬웠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위험을 아셨기 때문에 바울을 땅으로 끌어내려서 그를 "가시(말뚝)"로 땅에 박아 놓으셨다. 이 경우 같은 가시라도 사단이 의도하는 것과 하나님이 의도하는 것이 정 반대일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 대부분의 시험거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사단이 원하는 것이 있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있다. 만일 우리가 사단이 원하는 대로 분노와 불평, 실망과 죄, 미움, 자기 연민, 교만 등으로 끝나버린다면 그 시험거리는 사단의 가시로만 이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심으로 원하시는 것, 곧 인내와 용납, 믿음과 사랑, 소망과 깨끗함, 하나님을 의지함과 감사, 겸손 등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단의 가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시험거리를 당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일구어 내느냐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경험이나 고난의 종류가 아니라, 우리의 태도가 그것을 사단의 가시로만 사용되도록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자로 사용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어려움 앞에서 어려움의 제거를 위해 기도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바울도 기도하였다. "이것이 내게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8절). 세 번 기도하였다는 것은 기도한 횟수를 밝히기 보다는 여러 번 간구했다는 것이고,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에게 교훈하시는 말씀을 깨닫는데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다. 세 번 기도한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 기도하신 것을 연상하게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세 번 드리셨지만, 바울은 긴 시간을 두고 작정하고 드렸던 기도들이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많은 일을 하신다. 우선 나로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 평안과 감사를 갖게 한다. 또한 기도하는 중에 나의 모습을 새로 발견하고 인생과 영의 세계를 새로 보게 한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 가시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훈련과 유익을 얻는다. 곧 기도할 때 사단의 가시가 하나님의 가시가 되는 것이다. 기도하면 교만에서 벗어나 또한 겸손해진다. 기도를 통하여 어려움이 많은 경우 해결된다. 기도 응답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나를 사랑하심을 새롭게 체험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지금 바울의 경우처럼 기도한 요구가 거절되기도 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9a절). 우리가 원하는 뜻대로 되는 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고 영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오랫동안 기도하고 간절히 바라왔던 문제가 여전히 하나님께 거절이 되므로 기도에 대한 실망을 나도 모르게 가질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 그분에 대하여 쓴 뿌리를 가질 수 있다. 비록 말로는 원망을 하지 않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쓰디쓴 기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비웃음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러했다 (창 17:17; 18:12) 이 상처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곤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깊은 화해와 일체와 동행을 방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노예적인 굴욕으로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는 질문에 소요리문답에서는 이렇게 답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 지혜, 능력, 거룩, 공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영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지혜에 있어서 능력에 있어서 거룩과 공의에 있어서 완전하시고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다. 뿐만 아니라 선하심과 진실하심에도 동일하다.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짧은 생각으로 판단하고 섭섭해 할 이유가, 불평할 이유가, 앙심을 품을 이유가, 비웃을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우리의 소원대로 해주지 않는 이유가 있다. 우리에게 좋은 이유이다.

 

바울의 경우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처음 가시를 준 이유와 동일한데,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거절하신 이유가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바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세 번 동일하게 왔다. 거절과 함께 다음의 말씀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12:9a). 바울에게 주신 가시라는 것이 은혜이고 이것이 바울에게 족한 것, 충분한 것, 적당한 것, 적절한 것, 좋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가시가 있으니 바울이 하나님을 붙잡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연약한 바울에게 임한다는 말씀이다. 바울도 처음에는 제발 없애달라고 기도했지만, 세 번을 기도하는 가운데 깨달았다. 이 가시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 가시로 인하여 그가 한 없이 약자가 되고 연약하게 되지만,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무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주님의 능력은 천상의 계시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가시를 통해서 왔다.

 

그래서 그는 이 가시를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감사한다고 하였다. 거짓교사들과 몇몇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이 가시를 두고 바울을 공격하였고 몰아세우고 또 무시하였지만, 바울은 오히려 그것을 자랑한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2:9b).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보상으로, 곧 바울이 교만하지 않도록 하는 장치로 가시를 주셨고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 일을 하는데 더 유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연약함을 자랑하겠다는 것이다. “크게 기뻐함으로 내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노라 (most gladly I will rather boast about my weakness)”란 말은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지배적인 태도가 되었다. 그의 연약함이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가장 충만하게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통로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머무르게 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연약함과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여기서 기독론적이다.

 

이제 바울은 10절에서 하나의 황금 같은 고백을 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자신이 약하다고 비난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다 보여 버렸다. 그의 "고난-목록(affliction list)"를 보면 능욕을 당하고, 비난을 당하고, 거절을 당하고, 궁핍하고 곤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창피를 당하고 정말 약한 것들만 가득하였다 (11:23-33). 거짓 교사들이 비난하는 내용들이 맞다. 몇몇 고린도인들이 못마땅해 하는 내용들이 맞다. 그러나 그 내용이 의미하는 것은 달랐다. 그 연약함과 약점은 바울의 연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능력으로 이어졌다. 바로 그 연약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에 붙어있을 수 있었다. 그 연약이 곧 강함이었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지해야 할 사실은 바울이 자신의 가시 사건을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의 사건을 철저히 염두에 두고 그 고난의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면서 기술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증거들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l 첫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스타우로스)에서 고난 당하신 것 같이 바울은 말뚝(스콜롭스)에서 고난 당하셨다;

l 둘째, 그리스도께서 세 번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십자가가 떠나지 않았듯이, 바울도 세 번이나 간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시(말뚝)이 떠나지 않았다;

l 셋째,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에스케노센) 것 같이 (요 1:14),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의 연약함에 머물게(에피스케노) 되었다;

l 넷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되었던(테텔레스타이) 것처럼 (요19:28,30), 바울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완성되었다(텔레이타이);

l 다섯째, 그리스도께서 연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그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셨듯이, 바울도 연약함 속에서 말뚝(가시)에 찔렸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워나갔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몸에 있었던 가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은 흔적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지상의 가시가 천상의 계시보다 훨씬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그는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였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였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꿈에도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의 모습이다. 그 모습을 그대로 본받아 살고자 하였다. 그래서 고린도인들에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감당한 시련들, 고난들, 어려움들, 모욕들, 약함들, 가시들 이 모든 것을 제시하는 것은 그것을 본받으라는 간접적 요구이다. 왜?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에서 보여주신 길이기에! 그리스도의 삶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주시고, 자신을 상실하신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바울도 그런 삶을 살겠다는 것이고, 고린도인들에게 따라오라고 것이다.

 

4. 바울의 자기정체성 인식 Imitatio Christi, 사역과삶의스타일Imitatio Pauli

“나를 본받으라”는 주제는 바울 서신에서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고전 9장에서 바울은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는 고전 11장에서 그런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고전11:1은 더 깊은 중요한 것을 제시한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본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바울이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에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할 수 있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고난-목록과, 에피소드를 통하여 자신을 모델로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삶,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십자가의 삶이다. 좀 신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종말론적인 삶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고, 이 세상의 쾌락을 누리려는 가치관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얻기 위하여 걸어가는 가치관으로 산 삶이다.

 

l 다른 사람을 복음으로 섬기기 위하여 나의 불편과 심지어 억울함을 감당하는 삶이다. 그 자신도 용도에 부족함을 느꼈고 그 일로 모함도 당하였지만 복음을 바르게 전하고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감당을 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불편이 오고 억울함이 오면 못 견뎌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감당하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다.

l 복음을 위하여 수 많은 고난과 역경을 받은 삶이다. 넘치는 수고, 옥에 갇힘, 매를 맞은 것, 태장을 맞은 것, 돌에 맞은 것, 파선, 자연적 재해, 인간의 재해, 동족의 재해, 이방인의 재해,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고, 무엇보다도 교회 때문에 갖는 마음 고생.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는 본이다.

l 연약한 삶이다. 강한 것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을 본받으라고 한다. 약해지라는 말보다는 약한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약한 것 때문에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쳐야 했고,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치명적인 가시, 말뚝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기도해도 변하지가 않았고 다만 그것이 네게 족하다는 응답만이 있었다.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은 나에게 있는 어려움 약함 괴로움을 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삶이다.

l 인내하는 삶이다. 그리고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은 스스로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인내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고 사역이다.

 

그러고 보면 바울이 제시하는 삶은 당시의 고린도인들, 그리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삶과 정반대의 모습이 아닌가? 모든 불편과 억울한 일 당하지 않으려고 공부를 하고 지위를 차지하려고, 권력을 가지려고 한다.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 강해지려고 얼마나 애쓰는 지 모르고 약한 것을 얼마나 저주하는 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즉시 얻어내려고 그래서 기다리는 고통을 줄여보려고 얼마나 수를 쓰는지 모른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은 세상이 추구하는 길과 근본적으로 반대로 걸어가는 길이다. 신앙을 가지고 세상이 걸어가는 길을 더 멋지게 잘 걸어가도록 추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고린도인들의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가 여기에 있고 또 현대의 많은 신앙인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참 신앙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고 걸어가는 그런 넓은 문도 넓은 길도 아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다. 현대인들에게 좁은 문이라 하면 들어가기 힘든 곳을 연상한다. 일류대학이나 일류 회사에 들어가는 것을 연상한다. 그곳에는 누군가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지만 들어가기가 힘든 곳이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 좁은 길은 사람들이 별로 걸어가고 싶지 않는 길이고 통과하기 싫어하는 문이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는 배치된다. 그래서 좁은 문이 되고 협착한 길이 된다.

 

바울은 이 좁은 길을 걷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모함과 억울함, 고난과 역경, 연약함과 아픔을 인내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울이 가진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 자화상은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나왔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자신이 가진 자화상이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러하지, 자기도 당연히 그런 모습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기정체성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자화상을 보여주면서 고린도인들에게 따라 오라고 말한다. 바울 자신을 본받은 자화상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 자화상이 마치 선천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남의 두 번째 태어남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처럼 가지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다. 혹 이런 자화상을 가지고 우리가 상담하면 어떨까? (나는 전문 상담자가 아니지만 이 자화상을 가지고 상담하곤 한다. 그러면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사람은 못 알아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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