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물교회 순교자 기념관 개관예배

▲ 2007년 아프칸 단기봉사팀 특송 분당에 위치한 샘물교회(박은조 담임목사)는 배형규, 심성민 순교 4주기를 맞아 기념집회와 순교자기념관을 개관하면서 감사예배를 드렸다. 7월 22일(금)과 23일(토) 양일간에는 저녁 7시부터 구포제일교회 이성구 목사를 강사로 순교4주년 기념집회를 가졌다. 이성구 목사는 “왕의 명령을 거절하라”(출1:8-21) “기념비를 세워라”(수4:1-9)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여 성도들이 함께 은혜를 받았다. 7월 23일(토) 오후 4시30분부터는 본당 예배실에서 순교자기념관 개관예배가 김상훈 목사의 인도로 드려졌는데 구본중 장로의 기도 후에 2007년 아프칸 단기팀이 함께 나와 특송을 하여 더욱 경건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 "별과 같이 빛나리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는 박은조 목사

 

박은조 담임목사는 다니엘서 12장 3절을 본문으로 “별과 같이 빛나리라”는 말씀을 전했다. 박목사는 설교를 통해 “기념관을 세우는 목적은 단지 그들을 기념하고 추모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들이 선교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하늘의 별과 같이 된 그 역할을 우리가 본받고 순교자기념관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그 세분이 가졌던 목적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 세상을 진리로 비추는 방향타의 역할을 하도록 함에 있다.”고 말씀을 전했다.


박목사는 N국에 빈민들을 위해 적은 음식물을 제공하고자 하는 작은 급식소를 샘물교회가 마련했는데 순교자를 기념하기 위해 ‘별 급식소’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예배에는 샘물교회 교인 뿐 아니라 세 순교자의 가족친지들이 제주, 경남 고성 등지에서 찾아왔는데 故배형규 목사의 부친 배호중 장로 부부와 故심성민 형제의 부친 심진표 씨(경남 고성출신 前경남도의원) 부부도 함께 참석하였고 중국에서 선교하다 순교한 故안대욱 선교사의 가족도 함께 자리를 같이하여 예배를 드렸다.


▲ 1층 로비에서 순교자 가족들과 성도들이 함께 자리를 같이하고 순교자 기념관 개관식을 거행했다. 1부 예배를 마친 뒤 1층 로비에 모여 김상훈 목사의 인도로 개관식을 가졌는데 전우택 교수(연세세브란스병원)가 격려사를 김태웅 장로가 연혁을 소개하고 순교자 가족들이 차례로 나와 인사를 했다. 이어 박은조 담임목사와 순교자가족들이 나와 함께 현판을 제막하고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기념관을 들어서면 맨 처음 세 순교자의 동판이 맞이하고 배형규 심성민 안대욱 선교사 순으로 그들을 기념할 유품과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은 배형규 심성민의 순교는 샘물교회 성도들로 이루어진 봉사단 23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무장세력에게 납치된 사건으로 발생하였다. 샘물교회 봉사단 23명은 2007년 7월 13일 출국하여 다음날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현지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 및 의료 봉사활동을 한 뒤 7월 19일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이동하던 중 카불에서 남쪽으로 175㎞ 가량 떨어진 카라바흐 지역에서 탈레반 무장세력에게 납치당하였다. 탈레반은 7월 20일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한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불응하면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다음날 탈레반은 요구조건을 바꾸어 탈레반 죄수 23명을 석방하지 않으면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시한을 정하여 협박하였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협상에 실패하자 한국정부와 직접 대화를 요구하였고, 24일에는 탈레반 포로 8명과 한국인 인질 8명을 맞교환하자고 요구하였다. 7월 25일 탈레반은 인질석방 협상이 실패하였다고 선언하고 인질 가운데 배형규 목사를 살해하였다. 탈레반은 수차례 협상 마감시한을 연장하였다가 7월 31일 심성민 형제를 살해하였다. 그 후 정부가 보낸 협상팀과 협상을 통해 23명 중 21명은 순차적으로 풀려나 42일 만인 8월 30일 모두 석방되었던 사건이다. ▲ 아들의 사진 앞에서 아들의 활동을 둘러보는 배호중 장로, 순교자들의 사진은 샘물교회 성도들의 작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붙여 만든 것이다.

 

순교자 배형규 목사

순교자 배형규 목사는 2007년 아프가니스탄 여름 단기 봉사를 인솔하던 중 탈레반에 의해 피랍된 후 7월 25일 10여발의 총격을 받고 순교했다.


그는 1965년 7월 25일 제주에서 배호중 장로의 자녀로 출생으로 제주영락교회에서 가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서울로 진학한 후에는 서울영동교회에서 박은조 목사를 만나 신앙의 동지가 되었고 박은조 목사가 분당에서 샘물교회를 개척하여 옮기자 함께 샘물교회로 옮겨 목회의 동역자가 되었다. 2001년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샘물교회 청년회 사역자로 섬기면서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다.


▲ 심성민 형제의 사진 앞에선 아버지 심진표 前경남도의원 순교자 심성민 성도 순교자 심성민 성도는 2007년 배형규 목사와 함께 아프가니스탄 여름 단기본사 중 7월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어 그 달 30일 배형규 목사에 이어 두 번째로 순교했다. 그는 1978년 경남 고성에서 출생하였고 샘물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장애인들을 위한 사랑부 교사로 헌신하면서 하나님과 영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청년이었다. 그는 순교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어머니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고 한다. 당시 피랍가족들이 샘물교회에 모여 있었는데 심성민 형제의 순교가 뉴스를 타고 알려지자 그의 어머니는 소식을 듣고 실신했다. 교인들과 의료진이 얼른 어머니를 빈 공간으로 옮겨 안정을 취하게 하였고 의식을 회복한 후 눈을 뜨면서 벽에 걸린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진들이 심성민 형제가 장애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담은 사진들이었다. 성도들에게서 아들의 교회생활과 섬김의 생활을 듣게 되었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음을 듣게 된 어머니는 천국에서 아들을 만나기 위해 그 길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1년 후에 세례를 받고 이제는 집사로 임명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방명록에 아들에 대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심성민 사랑한다. 미안하다. 엄마는 하(나)님 은혜로 살아간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사랑한다. 성민아, 엄마가."
순교자 안대욱 선교사

순교자 안대욱 선교사는 가족들과 함께 1990년부터 중국현지선교에 헌신하여 활동하던 중 2002년 4월 13일 북경에서 순교했다.


그는 1957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1978년 미국으로 이민한 후 1989년 중국선교를 위한 동아시아선교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90년 본격적으로 중국현지에서 신학교를 세워 중국 내 기독교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삶을 드린 하나님의 종이었다.


샘물교회 더 건강해져.

아프칸 피랍사건 후 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을 법한 샘물교회는 오히려 더 건강한 모습으로 성장하였고 박은조 목사도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던 지난날을 감사하면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고 위로하시고 세워주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잊을 수가 없다고 술회하고 있다.


모두가 석방되기까지의 42일은 피를 말리는 시간들이었다. 당시의 사진들을 보면 박은조 목사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초췌하였는데 박목사는 밥도 먹을 수가 없었고 잠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나니까 사람이 해골같이 되어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박목사에게는 또 하나 중대한 근심이 있었는데 샘물교회였다. 개척한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기에 교인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이었다. 한 순간에 와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어 주셨다. 퇴근하면 성도들은 곧바로 교회로 달려왔고 저녁마다 기도회는 1,300석이 모두 차고 넘치는 뜨거운 기도회가 계속되었다. 방언이 터지고 성령의 역사를 교회는 체험하게 된다.


날마다 피랍 가족들과 온갖 기자들, 방문자들을 위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안내하는 등, 모든 궂은일들을 성도들이 잘 감당해 준 것을 박목사는 새삼 감사하다고 말했다.


제발 빨리 끝났으면 하고 소원했는데 왜 42일간이나 고통 가운데 두었는가를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뜻이었다. 전 세계의 이목을 아프가니스탄에 집중 시키고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샘물교회와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 거룩한 뜻이 계셨음을 감사한다고 했다. 그리고 전 세계로부터 위로의 메일을 받았고 독일에서 중국에서 직접 샘물교회를 방문하여 위로한 목회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봉사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피랍되어 억류와 석방까지 순교자들과 함께 했던 유경식 전도사는 이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 유경식 목사
테러와 전쟁으로 무지와 가난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어둡고 황량한 그 땅 아프가니스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러 갔던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가 살해되고, 21명의  형제자매들이 42일 동안 억류를 당했던 일이 벌써 4년이 지나고 있다. 4년이 지났지만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뇌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두 분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탈레반들에게 납치된 지 사흘 때 되던 날 아침의 일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우리들은 탈레반들의 아지트라고 생각되는 깊은 산속의 작은 흙집에 갇혀 있었다. 사방이 흙으로 쌓아 올린 벽이고 지붕도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엮어놓고 그 위에 흙을 바른 집이었다. 빛은 한쪽 벽 높은 곳에 사방 한 뼘 반 정도의 조그만 유리창을 통해 흘러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통역을 담당하고 있던 임 화평 선교사를 통해 모두 밖으로 나오라고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아보니 오두막집 끝에 구덩이가 파여 있고 비디오카메라로 촬영을 하면서 구덩이와 벽 사이에 우리들을 한 줄로 세우고는 한 사람씩 자기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라고 강요했다.


구덩이 건너편에는 복면을 하고 소총 기관총 RPG 로켓포 등으로 무장한 탈레반들이 우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우리를 죽여서 저 구덩이에 묻은 다음, 찍은 비디오를 방송국에 보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날은 다행이도 죽이지는 않고 다시 흙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모두가 황망한 마음으로 어두컴컴한 방 안에 둘러 않아 있는데 배형규 목사님이 입을 열었다.

 

“형제자매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온 세계 성도들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들은 자기들의 동료들과 인질 교환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납치했기 때문에 우리를 절대로 그냥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한두 사람을 죽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제가 제일 먼저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배형규 목사님의 온화하면서도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모습과 함께 죽음을 초월함에서 오는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난 다음날, 나를 포함해서 11명의 형제자매들은 배목사님과 헤어지게 되었고, 우리와 헤어진 다음날인 2007년 7월 25일, 자신의 45번째 생일날에 탈레반에 쏜 10발의 총탄을 맞고 순교의 피를 흘리시며 돌아 가셨다.


탈레반들에게 끌려 나가시던 배형규 목사님은 죽음을 직감한 듯 최후까지 배목사님과 함께 있었던 3명의 자매들에게 “믿음으로 승리 합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탈레반을 따라 나가셨다고 한다.


납치 되어 있던 어느 날 우연히 라디오에서 한국인 인질 두 명이 피살 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한분은 배형규 목사님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또 한 사람이 심성민 형제일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이가 많은 나보다는 제일 꽃다운 순전한 청년 심성민을 받으신 것이었다. 그의 이모는 심성민 형제가 아프간 단기 봉사에서 돌아오면 낙후된 농어촌을 위해서 헌신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나이 많아 별 쓸모없는 나를 놔두시고 왜 젊고 훌륭하신 배형규 목사님과 심성민 형제를 먼저 데려 가셨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두 분이 순교자의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두 분을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살아남은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두 분의 선교 열정을 가지고 순교자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특히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으로 순교하신 두 분의 뒤를 따라 모든 민족을 제자삼고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호수아가  요르단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곳곳에 돌무더기를 쌓고 돌비를 세워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것을 후손들이 길이길이 기억하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에게도 이 순교 기념관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한국 교회의 큰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사진으로 보는 이모저모.

▲ 예배와 개관식 사회를 맡은 김상훈 목사 ▲ 순교자 가족들과 박은조 목사가 함께 순교자 기념관 현판을 제막하고 있다.
▲ 순교자 기념관 현판 ▲ 기념관으로 들어가기 전 세 가족들의가족들 단체사진
▲ "형규가 살았던 순교자적인 삶을 대대로 이어가게 하소서"라고 기록하는 배호중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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