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단 헌법의 교리부분이 통과됨에 따라 사도신경 중에 "음부에 내려가사"가 첨가 됩니다. 이것이 가지는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기획기사를 마련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동안 무시한 교리항목을 첨가함으로 일어날 수 있는 논의를 미리 나누어 보자는 의도이며 신학적 설명이기도 합니다.


신조적인 관점에서 이 고백이 지닌 의미를 이성호 목사가 다루고, 벧전3:19절이 음부에 내려가사의 고백과 관련성에 대해서 황원하 목사가 논하고, 마지막으로 황대우 목사가 교리사적인 관점에서 음부에 내려가신 것을 다루려고 합니다.


이 논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논의에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논의가 전개되는대로 글이 확장될 수 있음을 밝힙니다.                                     연구 위원장 이세령 드림

 

   
  ▲ 이성호 교수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졸
  고려신학대학원 졸.
  Calvin Theolgical Seminary
  (Th. M. 및 Ph. D)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역임)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현)
지난 총회에서 통과된 개정된 고신교회의 교리표준에서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문구가 최종적으로 사도신경에 포함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장로교회는 교회연합이라는 구실로 충분한 신학적 검토 없이 이 문구가 제외된 사도신경을 받아들여 왔었다. 그러나 이번 개정된 교리표준으로 인해 고신교회는 적어도 신조에 있어서 한국교회와 거리를 두면서 세계의 개혁교회뿐만이 아니라 보편적 교회와 연합하게 되었다. 이것은 세계선교와 교회 연합을 위해서도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이 항목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우리교회는 공교회성에 있어서 다른 한국 교회들보다 앞서게 되었으며, 적어도 신조에 있어서 만큼은 고신교회가 분리주의를 추구한다는 비난이 그렇게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조의 한 항목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교회가 이해하고 실천하는가에 있다. 실제로 고신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개혁신학을 은근히 혹은 공개적으로 폄하하면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상식과 철학대로(경상도 식으로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면, 자기 ‘쪼대로’) 목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 개혁신학 대로 하면 목회가 안 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목사들도 있는 형편이다. 이와 반대로, 개혁신학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전혀 엉뚱하게 자기 식대로 이해하여 자신들만의 편협한 개혁신학을 추구하고 있는 그룹들도 있다. 


구호가 중요하지만, 구호를 받아들인 다음 중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내용이다. 로마 교회도, 루터파도, 성공회도 “음부에 내려가사”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내용에 대한 이해는 전혀 성경적 가르침과 다르다. 로마교회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연옥설을 발전시켰고, 루터파는 이 구절을 사탄에 대한 승리의 선포로 보고, 성공회는 음부를 죽은 신자들이 거하는 낙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오해의 소지가 많고, 성경적 근거를 찾기 힘든 문구를 이전과 같이 아예 사도신경에서 제외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성경에서 “음부에 내려가사”에 대한 명시적 가르침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최상의 해결책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도 충실한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성경에 없다”라는 말을 신중하게 사용하여야 한다. 재세례파의 경우 유아세례에 대한 명시적 가르침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였다. 이 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절은 “성경에 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 지를 잘 보여 주고 있는데, 개혁교회는 성경의 명시적 가르침 뿐 아니라 그 가르침에 근거하여 “선하고 필연적(good and necessary) 추론”을 통해서 내린 결론도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으로 이해하였다. (예: 감독(목사)의 자격에 대한 성경의 명시적 가르침은 “한 아내의 남편”이다. 따라서 여자나 아내를 2명 이상 둔 남자는 목사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연 선하고 필연적 추론을 통해서 “음부에 내려가사”가 담고 있는 내용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도신경은 간결하고 포괄적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이 필수적이다. 로마교회의 경우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고백에 근거하여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어머니로 공경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도신경의 “부활”을 믿지만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부활한 것으로 이해한다.


사도신경 자체가 “음부에 내려가사”에 대한 해석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신조와 요리문답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이야 말로 중요한 교리에 대한 가장 성경적 해석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일단 개혁교회가 이 교리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자.


대교리문답  50문: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어떻게 낮아지셨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신 후에 묻힌바 되어, 제 삼일까지 죽은 자의 상태로 사망의 권세 아래 계셨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44문: “지옥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큰 고통과 중대한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고 거기에서 풍선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그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아픔과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한글 번역과는 달리 다른 번역들은 음부를 지옥이라는 훨씬 강한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1) 중요한 것은 단어가 아니고 그것이 표명하는 내용이다. 가장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음부에 내려가사”를 문자적인 혹은 장소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교리문답은 죽은 자의 상태로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음부로 내려가사”로 보았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역시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을 지옥의 고통으로 해석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이 교리에 대한 가장 상세한 가르침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 교리가 왜 신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지를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신조 모두 예수님이 죽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변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웨스트민스터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음부에 내려가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하의 본문에서 찾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문답서의 작성자들은 이 교리에 대한 성경적 근거 구절들을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그리스도의 고통, 부르짖음, 수치와 조롱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음부에 내려가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가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그리스도의 극한 비하를 보다 분명하게 고백하는 구절인 것이다. “음부에 내려가사”를 우리가 신조에 근거하여 해석한다면, 이 고백이야 말로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 고신교회는 사도신경뿐만 아니라 니케아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도 공교회 신조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적어도 신조에 있어서 우리 고신 교회가 한반도 구석에 처박힌 군소교단이 아니라 당당한 보편적 세계교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타나시우스 신경 역시 “음부에 내려가사”를 명시적으로 고백하고 있고, 앞에서 언급한 대교리문답도 이것에 대한 성경적 해석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런 올바른 해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음부에 내려가사”를 우리가 거리낌 없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우리 교회는 이 문구를 받아야 할 의무마저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대교리문답도 수정해야 할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음부에 내려가사”가 성도들에게 혼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구 자체의 책임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사람에게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음부에 내려가사”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다른 신조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보다 관심을 가지는 기회로 삼는다면 교회에 큰 유익이 될 것이다. “이 문구가 없어도 그동안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왔는데 왜 이제 와서 굳이 넣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제외시킨다면, 이 문구뿐만이 아니라 이 문구가 성도들에게 주는 엄청난 위안과 유익도 동시에 사장시키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전과 달리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지옥과 음부에 대한 가르침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는데, 이 항목을 받아들임으로써 고신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사망과, 음부와, 지옥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해방하셨다!”는 복음의 핵심을 성도들에게 잘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굳건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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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음부에 대한 헬라어는 “τὰ κατώτατα,” 라틴어는 “inferos”이다. 문자적으로 볼 때, 전자는 ‘가장 아래’ 후자는 ‘아래에 있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2) 이 글을 읽고 성도들에게 사도신경을 가르쳐야 할 필요성을 느낀 목회자들은 SFC에서 출판된 "사도신경"을 추천한다. 상세한 해설뿐만이 아니라 여러 질문들도 첨가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공부 교재로도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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