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平和, peace)는 인류가 추구해 온 가장 고상한 가치였다. 동시에 그것은 지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난해한 과제였다, 그러나 인류는 거듭된 전쟁과 폭력, 인명살상과 상실, 자연의 파괴와 같은 엄청난 재난을 경험했다. 1차 대전과 같은 대규모의 국제적인 전쟁을 경험 한 이후 서구에서는 반전(反戰)운동과 반전사상이 일어났고, 평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기독교권에서 계속되어 왔던 평화주의(Pacifism)사상과 더불어 1920년대 이후 서구사회에서 중요한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발전했다.

그 후 평화학(Peaceology)은 학제간 연구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제2차 대전 이후 세계 평화에 대한 갈망은 국제연합, UN과 같은 국제기구 창립의 동기가 되었고, 세계교회 협의회(WCC) 또한 평화에 대한 염원에서 발의된 교회협의체였다. 2차 대전 이후 서구학계에서 평화에 대한 연구는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고, 수많은 연구물들이 출판되었으며, 주요 대학에는 평화연구소나 유관 기관, 기구들이 창립되기도 했다.

서구에서의 경우, 평화사상, 혹은 평화운동은 근원적으로 기독교 사상에서 시원(始原)하였고, 발전하였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의 화평 케하는 자(peacemaker)란 라틴어 pacifici 인데, 이 말은 넓은 의미로 평화를 위해 일하고 투쟁. 피흘림, 전쟁을 없애기 위해 싸우는 이들을 의미하지만, 좁은 의미는 군복무를 반대하는 이들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 반대 이념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이들을 기독교평화주의자라고 부른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했음은 하르낙(Harnack), 캐둑스(Cadoux), 헤링(Heering), 헐스버그(Hershberger)의 연구를 통해 분명히 제시되었다. 폴리갑(155년경)은 빌립보인들에게 악에게 대항하지 말라는 베드로의 말씀(벧전2:23)에 순복하라고 했고, 180년경 변증가 아데나고라스는 동일한 취지의 기록을 남겼다. 분명한 증거는 174년 테르툴리안의 그리스도인들은 군복무를 할 수 없다는 보다 강력한 권면 속에 나타나 있다.

군인이 신자가 되었을 경우 즉각적으로 군복무를 그만두던지, 순교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실지로 신자가 된 이들이 군복무를 포기했다고 했다. 2세기 후반기 이교도 셀수스(Celsus)는 기독교도를 비판하면서 비전(非戰)은 제국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258년에 순교한 키푸리아누스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범죄로 간주되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살인은 용기로 간주된다”고 비판했다. 4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기독교인이 군복무를 거부했던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막시밀리안(Maximilian)이라는 21살의 누미디아 출신의 청년은 군복무를 거절한 이유로 295년 3월 12일 사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비전, 반전 전통과는 달리 콘스탄틴의 개종(312년)과 공인(313)이후 기독교는 제국의 종교로 화하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반전, 평화사상은 점차 자리를 읽게 된다. 350년 경 아다나시우스는 “살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는 일은 합법적이며, 칭송받을 일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25년 이후 암브로스는 “야만인들에 대항하여 고향을 지키고, 가정에서 약자를 방어하고, 약탈자로부터 자국인을 구하는 싸움은 의로운 행위”라고 보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어거스틴(354-430) 때 와서 그리스도인의 참전권은 의로운 전쟁론으로 조직적으로 정당화되었다(J. C. Wenger, Pacifism and Biblical Nonresistance, Herald Press, 1968, pp. 7-12). 기독교가 380년 국가종교가 된 후 기독교의 비저항적 태도는 416년에 와서 완전히 전위되었다. 황제는 모든 군인들은 기독교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공표했던 것이다. 불과 1세기 만에 기독교의 입장은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이것을 헤링은 ‘기독교의 타락’이라고 불렀다.

그 후 16세기 종교개혁과 함께 재세례파 구룹들을 통해 평화사상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313년 이전으로 돌아가는 복귀(restitutio)를 개혁의 이념으로 여겼던 재세례파에 있어서 콘스탄틴 이전의 초대교회의 비폭력, 비전사상은 제자적 삶의 당연한 태도로 간주되었고, 오늘날의 평화운동의 기독교적 전통이 되었다. 북미나 유럽의 경우, 특히 ‘평화를 지향하는 교회들’(Historic Peace Churches)은 평화연구를 보다 근원적으로 이념-사상적 혹은 종교적 측면에서 연구하여, 비폭력(non-violence), 화해(reconciliation), 앙갚지 않음(un-retaliation), 기독교적 사랑(Christian love)의 실천을 통해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여러 운동을 전개해 왔는데, 이런 일련의 운동이 오늘의 절대적 평화주의(absoluter Pazifismus) 사상의 연원이 된다.

한국은 거듭된 외침과 19세기 이후 일본, 러시아. 중국과 같은 인접국간의 분쟁과 대립 속에서 전화를 경험하였고, 특히 한국전쟁의 참화를 경험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가 심각하게 연구되지 못했다. 비록 ‘평화’ 라는 말은 수없이 사용되었으나 정치적인 구호에 지니지 않았고, 실제적으로 평화에 대한 연구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상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공존이나 반전(反戰), 비핵 비폭력, 혹은 평화에 대한 논구 자체가 반국가적인 행위인 것처럼 오인되는 현실에서 평화추구는 반체제적 이념운동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평화운동가이자 평화학자인 바이재커(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는 “오늘과 같은 과학기술 시대에 있어서 평화란 곧 삶의 조건이다.”(Die Verantwortung der Wissenschaft in Atomzeitalter, Göttingen, 1957)고 했는데, 평화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기 전에 그것이 없으면 생존이 곤란해지는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분단 상황에서 남북간 상호 적대적 상황에 있는 오늘 한국에 있어서 전쟁이 없는 비전(非戰), 비폭력의 평화적 공존만이 아니라, 비무장운동, 반핵운동, 혹은 적대적 미움의 제거, 화해와 공존의식, 지역간 종교간의 갈등의 해소를 통해 진정한 ‘평’(平과)과 ‘화’(和)를 추구하는 것이 평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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