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종류의 땅

   
살아가는 모습이 매우 다양하다. 각자 좋을 대로 살아가기에 어떤 종류의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이럴수록 삶에 대한 바른 기준이 필요한 법이다. ‘섬김을 받으려는 삶’과 ‘섬기는 삶’, ‘소유적 삶’과 ‘존재적 삶,’ ‘쫓기는 삶’과 ‘쫓아가는 삶’, ‘반사적 삶’과 ‘주도적 삶.’ 바른 기준으로 보면 어떤 삶이 옳고 바른지 분별할 수 있다. 철학자 키엘케골도 삶의 의미가 혼돈스러웠을 당시 삶을 심미적 실존, 도덕적 실존, 종교적 실존으로 구분하면서 삶의 합당한 모습을 찾아 내려고 했다.


성경도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제시한다.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신령한 그리스도인.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은”(고전 2:14) 믿음 없이 사는 사람이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고전 3:1)로서 믿기는 하나 성숙치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는”(고전 2:15) 사람, 즉 외적 환경에 의해 지배 받기 보다 오히려 선한 영향을 미쳐 그 상황을 변화시키며 사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이다.


고린도전서가 보여 주는 세 종류의 삶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세 종류의 땅에서의 삶과 같다. 첫째는 애굽에서의 삶이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바로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 아닌 존재를 하나님처럼 섬기며 살았다. 이른바 육에 속한 자의 삶이다. 둘째는 광야에서의 삶이다. 광야에서 이들은, 출애굽을 통해 자유를 얻었으나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대로 살면서, 불평과 원망과 거역을 일삼는 자기 중심적이고 미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셋째는 가나안에서의 삶이다. 이 땅에서 백성들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강력한 여리고 성도 무너뜨렸고, 죄악의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가기도 했다. 환경을 다스리고 변혁시키는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성경은 세 종류의 땅에 사는 세 종류의 삶을 보여 주면서, 우리는 지금 어떤 땅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묻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제시한다. 가나안 정복의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이르러야 할 목표점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곳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홍해를 건너

성경은 먼저 우리가 홍해란 강(바다)을 건너야 한다고 말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곧바로 추격해 오는 바로의 군대 때문에 뒤에는 애굽 군대, 앞에는 홍해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다. 출구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하나의 길 밖에 없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홍해 사이로 길을 만드셨고, 이들은 홍해를 건너 마침내 애굽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홍해 사건이 성경에서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세례에 비유했다. “우리 조상들이 ….. 바다(홍해) 가운데로 지나며 …… 바다(홍해)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 세례란 옛 자아에 죽고 새로운 자아로 살아나는 것이며, 죄의 다스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죄와 사망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수행과 자기 공로로 죄와 사망의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 것은 헤엄쳐 넘실대는 홍해를 건너려는 것과 같다. 홍해 바다를 건너는 유일한 길은 바다 가운데로 하나님이 내신 길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애굽의 삶을 벗어나 목표점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홍해를 건너야만 한다.

 

요단강을 지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애굽을 벗어나 광야로 들어갔다. 그러나 광야는 머물 곳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곳이다. 광야의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로 착각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다.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또 하나의 강을 건너야 한다. 그 강은 요단강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의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요단강을 건넜다. 강물이 너무 범람해서 아무도 건널 수 없었을 때, 지도자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강물에 먼저 발을 담그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강물 사이로 난 길을 통해서 백성들이 건너게 되었다.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 바다를 건넜다면, 요단강은 제사장들의 언약궤를 통해서 건너게 되었다. 요단강 건너기의 핵심에 언약궤가 있다. 언약궤 속에는 십계명 돌판이 담겨 있다. 십계명이 담긴 언약궤를 들고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십계명이 담긴 언약궤를 들고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사건은 가나안 땅의 삶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서만 가능함을 보여 주는 상징 역할을 한다. 실제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이 가나안 땅 입국 패스포트다. 가나안 땅에서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었을 때 그들은 그 땅을 정복하면서 그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 그들은 결국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되고 다시 앗수르와 바벨론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광야적 삶의 특징은 언약의 말씀을 망각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삶은 쉬지 않는 입술의 불평과 고집센 자아들 사이의 끝없는 충돌과 갈등을 낳았다. 가나안 땅의 삶이 되려면  언약궤가 상징하는 순종이 필수적이다.


모세는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온유하다는 것은 성품이 유순했다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이 뻣뻣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씀에 대한 절대 순종이 모세가 지닌 온유함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므리바란 곳에서 모세는 그 온유함을 한번 잃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감정과 의지대로 분노하면서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행동했다. 성경은 모세가 이 한 번의 실수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나안 땅의 삶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순종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한 또 하나의 두려운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자아가 깨어진 온유한 사람만이 가나안 정복의 삶을 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자기 십자가를 지고

광야의 삶을 살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야 했던 것처럼,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영적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 홍해 건너기가 세례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면,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홍해 건너기는 우리 대신 단번에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라면, 요단강 건너기는 자아에 대해서 매일 죽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홍해를 통과해서 구원을 받으나, 요단강을 통과해야 성령충만한 삶을 산다. 죄악의 홍해를 건너고, 자아의 요단강을 지나야 내 삶의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숙의 가을이 오고 있다. 성숙해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애굽의 삶에서 광야의 삶을 거쳐 가나안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육신에 속한 삶에서 영에 속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반드시 두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 두 강을 건너지 않고 가나안 땅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없다. 만약 두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뿐 아니라 남도 힘들게 하는 메마른 광야의 가시나무처럼 살게 된다. 하지만 두 강을 건너게 되면 당신의 가을 나무에 성숙의 열매가 맺힌다. 그 열매로 남까지 풍요롭고 행복하게 된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땅은 어디인가? 당신은 두 강을 건넌 자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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