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령 목사

   연구위원장
장로교회가 언약의 표시로서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녀에게 유아 세례를 베푼다. 인간 부모의 자녀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치는 의식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자기 백성을 부르심과 같이, 비록 타락한 부모들이지만 은혜를 주신 부모들 밑에서 자기 백성을 모으신다. 


유아 세례는 구약적인 뿌리를 할례에 두고 있다. 유아 세례와 할례의 관계는 신구약의 연속과 불연속이란거대한 문제와 늘 맞닿아 있다. 할례가 가진 언약적 의미를 다시 새겨 보면서 신약으로 이어주는 언약적 의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자. 


1. 전능한 하나님은 번성의 하나님

할례는 창17장에서 처음 언급된다. 할례가 고대 이스라엘만의 유일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할례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출발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에서 비롯된다. 창17장에서 할례를 하는 것은 아브람이 99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바꾸시면서 사라를 통해서 아이를 주신다는 약속의 배경이 된다. 사라를 통한 번성의 증거이다. 


1절의 99세 때라는 배경은 관심이 필요하다. 아브람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다(창16:16). 그리고 나서 13년간의 침묵의 세월이 흐른다. 13년의 세월은 아브람이 가나안에 도착한 때부터(창12:4, 75세) 이스마엘을 낳은 시점까지(86세) 보다 더 길다. 이런 긴 침묵은 가나안에서 아직 정착하지 못한 아브람의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와 같은 시간이다. 


아브람은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났고, 다시금 믿었다(창15:6). 그러나 아브람은 조카 롯을 생각하고, 또한 종이었던 다메섹 엘리에셀을 마음에 두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된다는 말씀을 근거하여(창15:4), 아브람은 사래와 의논해서 첩 하갈에게로 들어간다(창16:1-3). 하나님의 번성의 성취를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루기 위해서 노력한 지난 10년 세월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긴 13년의 세월을 침묵하신다. 그리고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전능한 하나님이 누구신가?

전능한 하나님은 족장들의 하나님으로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규정된다(출6:3). 조상들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났지만 여호와로는 나타나지 않으셨다는 진술이다. 그렇다면 전능한 하나님과 여호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동일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실 때는 다른 역사적 환경에서 주시는 구원적 의미가 있다. 


족장들의 경우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경우는 창17:1절을 선두로, 창28:3절에서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는 야곱에게 이삭이 주는 복에서 등장한다. 또한 창35:11절에서 벧엘로 돌아온 야곱에게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마지막으로 야곱이 베냐민을 애굽에 보내면서 창43:14절에서 언급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상의 전능한 하나님은 모두 생명을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바라는 번성을 약속하는 장면이다. 밧단아람으로 도망하는 야곱에게 번성을, 그리고 세겜에서의 학살 사건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야곱 일행에게 번성을 약속한다. 그리고 번성의 최대 위기가 야곱의 집에 발생할 때 애굽의 그 사람(요셉)이 막지 못하도록 요청하는 장면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언급된다. 


이제 우리의 본문 창17:1절을 살펴보자. 위의 관찰이 적용되는가?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하나님은 이에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99세에 다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번성을 약속하시는 언약을 세우신다(아브라함, 사라로 개명). 그리고 그 언약의 증거로 아브라함의 집의 남자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창17:9-14)과 그것을 실천하는 본문(창17:23-27) 사이에는 사래가 사라가 되는 개명 사건과 또한 동시에 사라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이름을 이삭으로 불리는 사건이 있다. 언약의 표시로서 할례의 명령과 시행 사이에 놓인 사건은 사라의 잉태이다. 


사라의 잉태는 죽은 몸이 다시 사는 사건이다. 사라는 창11:30에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보다 중요한 진술은 바울 사도가 이 사건을 롬4:17-22절에서 언급하기 때문이다.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백세가 되도록 아이가 없다. 그런데도 믿음으로 선다. 어떻게 가능한가? 17절에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부활의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믿었다. 부활의 하나님, 사라의 죽은 태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받았다. 웃는 사건을 겪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믿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부활을 통해서 번성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믿었다. 


할례는 언약적 사건이다. 그런데 그 언약적 사건의 실체는 부활이다. 언약을 이루는 힘은 전능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을 통해서 경험되는 구속사적 사건이다. 


할례가 생식기에 이루어짐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새로운 부활의 생명이 가능함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혈통적인 의식으로만 유지가 된다면 할례는 타락한 제도일 수 밖에 없다. 할례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신 생명임을 기억한다면 할례는 바른 언약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2. 유아 세례의 가능성과 '집' 공식

할례는 부활 신앙을 배경으로 성립된 언약적 의식이다. 이것이 왜 유아 세례로 변경되느냐는 것은 신구약의 연속성의 문제와 연결된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유대인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이방인도 허락되었다. 그런데 복음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새로운 인류를 만들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을 만드신다. 오순절에 온 흩어진 유대인뿐 아니라 그 자녀들과 모든 먼데 사람 즉 이방인들에게도 약속된 새로운 백성 즉 교회를 세우신다(행2:39).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는 교회가 탄생하였다. 교회는 새로운 시대 즉 세례요한이 예비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연결된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시대를 준비하면서 세례를 베풀었다. 요한의 세례는 구약의 정결의식과 새언약의 죄 사함의 시대의 도래(렘31:34)와 연결된 의미를 담는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시작하여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셨다. 이제 세례는 교회의 표지로서 위치한다. 무엇보다 마28:19절은 세례를 베풀도록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서 명령된다. 


그런데 유아세례는 어떻게 된 것일까? 여기서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에 아이들이 포함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모든 족속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이 유아들을 포함한다고 동의하는 몇 가지의 중요한 본문들이 있다. 첫째가 행2:29절이고, 행10장의 고넬료 사건이다. 또한 행16:31절에 빌립보 간수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 집에 베푼 세례 사건이다. 


먼저 행2:29절에서 세례와 성령의 약속이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에게 보장되었다. 여기서 너희 자녀가 누구인가? 너희 자녀는 다음 세대를 말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모든 먼데 사람이란 표현에 의해서 수직적인 시간 개념보다는 수평적인 지역 개념이다. 즉 현재의 너희들과 너희 자녀들, 그리고 이방 사람들에게도 유효한 약속이다. 이것의 증거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뒷받침한다. 행2:17절에서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너희 자녀들은 예언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이제 다음 본문은 행10장의 고넬료 사건과 16장의 빌립보 간수의 집에서 행한 세례 사건이다.

행10:48절과 이것을 행한 보고 사건인 행11:14절 이하에서 온 집에 세례를 베풀었다. 빌립보 간수의 집도 마찬가지이다. 16:33절이다. 루다아의 집에서도 온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행16:15). 여기서 집을 말하는 단어가 과연 아이를 포함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집은 노예들을 포함해서 모든 식구들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아이들이 오시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축복하셨다(마19:13 이하). 이런 모든 말씀들을 종합해서 우리는 결론에 이른다. 세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는 교회적인 의식으로서, 유아들을 포함한다. 


이것은 우리의 옛 생명이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한다. 옛 생명 아래서 태어난 아이이지만 이 아이를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유아세례를 베푼다.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부모는 안다. 그리고 그 아이를 꼭 껴안아 준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를 아신다. 믿는 부모에게 새로운 생명을 맡기시면서 자기의 친 백성임을 부르신다. 물론 할례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부활의 생명이 아닌 기계적 과정으로 전락하는 순간 교회는 타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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