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교회의 차이점과 역사적 교훈

작년 고신과 합신 총회는 각기 교단 통합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의 실제 생활이 유사한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이를 이루는 일을 위해서 코닷도 기획 기사를 통해서 합신 교회를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소망스런 통합 논의들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양 교회가 기억해야 할 요소들을 있다. 


먼저는 신조에 대한 것이다.

합신이나 고신 교회는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신조로 받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내용은 조금 차이가 있다. 합신이 받은 교리표준은 그야말로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을 그대로 받았다. 합신의 김영규 목사가 쓴 글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646년 9월 25일에 작성된 고백서가 1647년 2월 4일 이후 두 번의 의회 비준 과정을 거치면서 관원에 대한 항이 수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합신은 수정 이전의 웨신 교리표준을 번역해서 받았다. 


고신의 경우는 성령과 선교에 대한 장이 추가된 미국 장로교회의 신조를 받았다. 미국 장로 교회는 국가 관원에 대한 항을 수정해서 처리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교리표준은 엄밀한 의미에서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이 아닌 그냥 고신 교회의 교리표준이다. 물론 주된 내용들은 웨신 교리표준이다. 


여기서 교리 표준이 한국 교회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하겠는가라고 질문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실제의 차이점들이 존재하고 있다. 합신의 경우 17세기의 정통주의 시대를 통해서 개혁신앙의 실체를 이해하는 면들이 있다. 정통주의 시대는 리처드뮐러 교수 등을 통해서 재 조명받고 있다. 개혁파 신앙의 단절을 넘어서 연속성상에서 최근 많이 연구되고 있다. 


고신의 경우 칼빈 자체에 대한 관심이 더 많고 정통주의 시대에 대해서 그렇게 상세한 이해가 없다. 향후 서로 양쪽의 교회가 그리고 신학자들이 더 많은 논의를 기울이면서 풀어가야 할 신학적 과제이기도 하고, 교회적 과제이다.

 


두 번째는 교세의 차이다.

두 교회의 총회 게시판에 고지된 바에 의하면 양 교회의 교세는 약 두 배 정도의 차이가 난다. 합신이 21개 노회에 872개 교회이다. 목사1842, 장로 930명, 74명의 강도사, 562명의 전도사가 있다. 교인 총수는 153,361명이고 세례 교인은 85402명이다. 


이에 반해서 고신 교회는 37개 노회에 1741개 교회이다. 목사 3021명, 장로 3745, 강도사 452, 전도사 924, 교인 총수는 466,379명이고 세례 교인은 255971명이다.

 


정리하면 교회 수는 절반, 교인 수는 1/3 정도이다.

이런 절대적인 차이는 교회 정치에서 양자의 관계가 가질 역할 구도를 예측하게 된다. 정치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양 교회는 이미 교회 정치에 의해서 1960년대에 그리고 1980년대에 거친 격랑을 겪으면서 형성되었다. 고신이 합동의 숫자에 의해서, 그리고 합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양 교회가 하나의 교회가 되려고 할 때 물론 처음은 좋을 것이다. 서로 총회장을 양보하기도 하고, 돌아가면서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체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까지 교회 전통에 근거한 이질적 요소로 서로 존재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최악의 경우 표로서 결정될 수 있을 것이다. 


믿음과 생활의 표준인 성경과 교리 표준을 근거로 해서 헌법의 절차와 질서를 존중하면서 교회는 전진한다. 그러나 타락한 죄성은 교회 안에도 언제나 침투하여서 교회 질서를 어지럽혀 온 것이 교회 역사의 진실이다. 따라서 정파적 구도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는 복음적 가치를 가지고 서로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노력을 잘 간직해야 한다. 


고신이 승동 측과 합동을 하면서 이런 숫자의 놀음에 휩쓸릴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실제로 어리석음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늘의 합신과 고신교회 통합 논의는 이런 과거의 교훈을 근거로 해서 숫자의 작음이 하나된 거룩한 교회를 손상하지 않도록 지킬 책임이 고신 교회들에게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나그네 되었음을 기억하고 나그네를 대접해야 한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세 번째는 교회의 분포도이다.

고신 교회가 수도권의 약점을 가지고 있고 경상도를 중심한 교회인 것은 자명하다. 신학교를 천안 수도권으로 옮긴 배경은 수도권을 강화하려는 의지가 있다. 그런데 합신 교회는 수도권에 교회들이 많다. 이것은 두 교회의 시너지 효과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면이 된다. 


그러나 이런 면들은 서로를 형제로 기쁘게 받으면서 설 때에 가능한 일이다. 서로의 약점을 담당하고 부족을 채워주는 것은 복음이다. 양 교회가 교리적인 표준과 교세의 차이 그리고 실제적인 교회적인 생활과 모습의 차이를 잘 극복하고 하나되는 길로 나아가는 노력이 구체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머물고 있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하나되는 두 개의 모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네덜란드 주류 교회였던 개혁교회(Herformed Kerk-과거 국가교회)와 다른 개혁교회(Nederland Gereformeerde Kerk- 아브라함 카이퍼의 돌레앙시 운동으로 생겨난 총회파 교회) 그리고 루터파 교회가 2004년에 한 교회로 합동하게 된다. 그래서 개혁교회라는 간판을 떼고 개신교회(Protestant kerk)라고 명명하였다. 이제 네덜란드의 주류 교회는 개혁교회가 아니다. 소위 복음주의권의 교회이다. 


이런 교회들의 합동에 에큐메니칼한 의지가 들어있을 것이다. 오랜 논의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교단 합동은 여러 분파들을 갈라져 나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보수적인 교회들이 재건 개혁교회들을 만들고 있다. 하나가 되려다가 더 많은 교회로 분열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리고 감추어져 있는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 당장 개혁파와 루터파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에는 의미를 가진다. 1529년 마부르크에서 열린 개혁파와 루터파의 교회 연합 회의가 성찬 논쟁으로 결렬되었다. 루터는 쯔빙글리를 향해서 다른 영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취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루터파가 제시한 15항중에서 개혁파가 14개의 항을 받아주었는데, 마지막 성찬 항에서 결렬됨으로 개신교회 교회 분열의 시원적인 자리가 되었다. 그런 루터파와 개혁파가 한 교회가 된 것은 역사적 신기원이다. 


그런데 실제의 이면에는 기울어져 가는 개혁파, 루터파 교회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유럽의 교회 통합 논의의 배경은 교세의 급격한 하락이다. 하락하는 교회의 현실을 앞에두고, 은퇴한 목회자의 은급 등 수많은 재정적인 문제들이 생긴다. 그래서 교회들이 하나가 되고, 예배당을 매각하여 그 손실을 메꾸는 현실이다.

 


이와 반대되는 교회 통합 논의가 있었다.

고신 교회와 자매 교회인 네덜란드의 두 개혁교회가 있다. 자유 개혁교회(소위 31조파)와 기독개혁교회이다. 이 교회들은 오랫동안 두 신학교의 긴밀한 관계(교수 강의 교환, 학점 공유, 박사과정의 공동 세미나, 기초 언어 과정 공동 개설 등)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양 교회가 실제로 통합을 염두에 두면서 많은 논의를 거쳐 왔다. 그러나 결국은 결렬이 되었다. 이 두교회는 아주 성장하는 교회는 아니지만 앞에 소개한 교회처럼 급격한 하락을 하는 교회도 아니다. 여전히 왕성하게 개교회들이 활동을 하는 교회들이다. 


이런 교회들은 합동 논의가 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된다. 아쉬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각자의 교회 질서가 있고, 이런 교회 전통의 차이점을 굳이 극복하면서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관계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결렬되었다 


고신과 합신의 교회가 하나가 되려는 교회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일단 환영한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저변에 복음을 위한 선한 열정으로 서로 낮아지고 섬기는 자세를 가지고 형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힘과 수의 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과 교회 현실에서, 복음과 그 은혜만이 교회를 온전하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우리 교회들을 굳게 붙잡을 때 이 논의들은 진행이 될 것이다. 


교회의 총회적인 차원의 결정도 중요하지만 노회와 개 교회적인 차원에서 강단교류를 비롯해서 다양한 교제의 장을 늘여야 한다. 그리고 신학적인 입장과 교회 생활에서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서로의 행사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대표단을 파송하고 서로의 언론은 소식을 실어주고 관심을 표해야 한다. 이런 작은 노력들이 서로의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다. 


이제 시작된 이 논의가 얼마나 진행되어서 열매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된 교회로의 바람직한 논의를 생산성 있게 잘 진행하려는 교회들의 의지가 더 드러날 때 가능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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