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일각에서 ‘순교’(殉敎)라는 말이 분별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자연재해나 사고사 등 인간적 실수로 인한 희생자나 사고자들에 대해서도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에서 순교자라고 칭하는 일이 있었다. 단기 전도여행 중 사망한 경우에도 순교자로 칭한 일이 없지 않았다.

‘순교’는 영광스러운 칭호이지만 분별없는 사용은 한국 교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하는 순교자들에 대한 모독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누가 순교자인가를 기독교 전통에서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 기독교백과사전은 순교를 “복음을 증거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적의에 결과로 명을 다하기 전에 자신의 생명을 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신약에서 순교라는 개념은 따로 없었고 증언이란 말이 순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순교라는 의미의 영어(martyrdom)는 라틴어 마르티리움(martyrium)에서 왔고, 마르티리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투리온은 본래 증언 또는 증거 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2세기 중엽부터 이 말이 순교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헬라어 ‘말투스’도 증인이라는 의미였지만 훗날 순교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즉 순교는 죽기까지의 증거, 곧 말과 행위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개념화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순교자들은 상당한 영광을 누렸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에서 순교에 대한 과도한 열망과 함께, 자발적으로 순교당하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어거스틴이 “(죽음)이라는 형벌이 순교자로 만들지 않고, 그 (죽음의) 이유가 순교자를 만든다”고 말했던 것은 왜,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를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순교인가라는 개념 정리가 요구되었다. 순교는 특히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첫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공적 증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증거를 확증하기 위해 임의로 받아들이는 죽음이었다. 임의로 받아들이는 죽음이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이를 확증하기 위해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고사나 자연재해로 인한 죽음과 구별된다. 여기서 중시된 점이 육체적 죽음이었다.

그런데 3세기 이후에는 피 흘림의 증거만이 아니라 피흘림이 없는 순교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분명한 변화는 로마제국에서 기독교 박해가 종식되는 4세기 이후의 일이지만 그 시원은 3세기 초부터 나타났다. 이런 순교를 영적 순교 혹은 백색 순교 라고 불렀는데, 중세기의 환경을 반영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고자 하는 의지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여겼고 금욕적 삶을 살거나 수도자적 고행자들을 순교자로 부르게 된 것이다. 다소 변형된 포괄적 순교개념이 대두된 것이다.

포괄적인 혹은 광의의 순교개념은 20세기 개신교계에서도 강하게 대두되었다. 본훼퍼의 죽음이 그 계기가 됐다. 본훼퍼를 순교자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논쟁거리로 대두된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 이후 본훼퍼를 순교자로 보는 간주하는 입장은 1998년 7월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본훼퍼를 다른 9명의 인물들과 함께 순교자로 칭하고 조각상을 제막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순교자는 약 1000명에서 1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 수를 확정할 수 없는 것은 자료의 결핍도 그 이유이지만 더 큰 문제는 어떤 이를 순교자로 볼 것인가 하는 공적인 순교개념이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죽음을 맞은 이들을 순교로 간주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한 공적인 정리가 있어야만 한국 교회의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노력은 순교라는 고상한 죽음을 고양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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