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기사 주제는 전도입니다. 우리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합니다. 칼빈주의의 근간이기도 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파 전통입니다. 이런 개혁파 전통에서 전도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요?


한편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정체 내지는 하향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도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기 위해서 기획기사를 다루었습니다. 기사 순서는 주수은 선교사(전도 현장), 황원하 목사(전도설교), 그리고 임경근 목사(전도의 미련한 것), 김성운 목사(목회자 후보생들의 전도 훈련), 이세령 목사(화란 개혁교회의 전도에 대한 노력) 등 순으로 싣겠습니다. 관심을 나누어 주시길 바랍니다. -코닷연구위원장-

 

‘전도’는, 모두가 알듯이 ‘도(복음)’를 전하는 것이다.

(‘전도’와 구별하여, 국외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라고 표현하지만 모두다 같은 맥락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하나님의 자녀)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영원한 고통(지옥)에서 놓임을 받은 자들이다.

 

값없이 받은 구원의 은총의 감격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다면 측량할 수 없이 큰 은혜를 준 하나님의 뜻(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

 

벧전 2:9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거룩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그 이유는) 너희(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전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제자)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들이다.  막1:38, 눅4:43,44,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친히 ‘전도 하러 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고 부탁(명령) 하셨다. (마28:20) 그래서 교회는 ‘전도’의 사명을 빼 놓을 수가 없다. 반드시 (어떤 상황이든) 해야만 한다. ‘전도’를 해야만 참다운 교회요, 참된 성도이다. (딤후4:2)

 

전도는 생명을 낳는 일이기에 기쁘기도 하지만 매우 힘든 일이다.

요즘, 아기를 낳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들을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새 생명을 낳아 양육하는 희생과 수고의 대가를 회피하려는 심적 작용도 많은 것 같다. 예전의, 그 묵묵히 희생하던 우리네 어머니를 어리석고 답답한 사람으로 치부하며 자신을 이기적으로 가꾸어가는 신 세대들을 본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지 않으면 그 나라의 역사는 끝이 난다. 영적 생명 역시, 새로운 탄생을 위해선 많은 수고와 희생을 필수로 하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죄악과 지옥에서 건져 내기 위해 (우리 편에선 값없이 얻은 것이지만) 엄청난 값을 지불한, (조물주 그 분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심과 멸시와 천대, 핍박과 함께 십자가에서 당하신) 은혜를 진정 안다면 우리가(전도하면서) 당하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수고와 희생을 즐거움으로 치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슬렘 땅에서 주의 은혜와 도우심으로(물론, 후원자들의 기도와 사랑에 힘입어) 가정 교회들을 세웠다. 저절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정말 피나는 노력과 그리고 해산하는 수고를 통해서 이루어 진 일이었다.


새벽마다 바닷가 오두막에서 냄새와 추위를 이겨내며, 한 사람을 붙들고 말씀을 가르쳤다 우유팩을 끓인 물에 데워 빵과 함께 품 안에 안고 가선 그를 먹이면서. 아내는 꼬박 한 달간 죽을 쑤어 주며 현지인을 돌아보았다.

 

우리 가족과 나를 위해 한 번도 녹 즙을 만들어 식탁에 올린 적이 없었지만, 1여년간을 현지인을 위해 녹즙기를 돌리며 사랑을 쏟았다. 피를 토하는 현지인을 부둥켜 안고 기도하면서 (한국에) 부탁해서 온, 온갖 약(신약, 한약)을 먹이는 수고를 했다.

 

때론, 현지인의 머리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고, “타이코” 치료를 하면서 그들과 가까워 진 후, 복음은 그들의 두꺼운 사고의 벽을 깨고 들어갔다. 아내는 요즈음 된장 끓이기를 싫어한다. 현지 교인(사역자)이 아침에 우리 집에 오면 오전 내내 말씀공부와 기도를 저와 함께 한 후, 점심 식사를 우리 가족과 같이 했는데, (가끔은 아침과 저녁식사도 우리 집에서 했다.) 그는 꼭 우리네 된장을 찾았기 때문에(고질적인 위장병 때문이기도 했지만) 약 4년간을 매일 된장을 끓였다.


위생 관념이 전혀 없는 현지인들이 돌아선 자리에서는 오랫동안 (우리 집에서 말씀 공부를 하거나 예배를 드리고 난 후) 흙가루가 날리고 악취가 진동했다. (여름에는 하는 수 없이 거실에 들어오기 전에 발을 씻도록 현관 입구에 물과 비누를 대기시키기도 했다.)

 

때론, 아내가, 산부인과 의사 노릇을 하기도 하고, 재빨리 미음을 끓여 자동차로 현지인을 찾아가야 할 때도 있었다. 교회 행사들을 할 때마다, 아내는 고심하면서 적은 교회 재정으로 이것 저것 준비하느라(포장하느라) 그리고 말씀을 외울 때 붙여주는 ‘포도송이 알’을 만드느라 사랑의 수고를 밤이 늦도록 했다.

 

주일 날, (하루 동안) 일곱 번씩 예배를 드릴 때는 온 가족이 교회 일을 도와야 했는데, 제대로 식사를 못하는 것은 뻔한 것이었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언어 준비를 위한 수고 또한 만만치 않았다. 복음 전파는 수고의 대가를 동반함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는 자들이다.

 

마음은 뻔하고 머리로는 알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는 말을 가끔씩 들을 때가 있다.


전도는 영적 싸움이다.

어두움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영적 무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단지) 우리 힘으로는 복음 전파가 어렵다. 때론, 부끄럽기도 하고, ‘내가 말해봐야’ 라는 합리적인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선교지에서는) 두려움이 다가와 입을 막아버리기도 한다.


기도와 말씀의 철저한 무장은 전도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가끔씩, (복음도) 성경말씀도, 기도도, (교회의 삶을)하나도 모르는, 더군다나 비참하리만큼 낮은 생활, 텅 빈 위생관념, 나쁜 생활 습관(술, 담배, 마약, 매춘), 도움을 청하는 일, 구습(모슬렘인의 관습, 종교)에 얽매여 있는 이들에게 전도하며 가르치는 것이 별로 변화가 없어 보이고 효과가 없게 느껴질 때 낙망이 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기도로서 영적인 힘을 얻고 나면 또 다시 일할 마음을 얻는 데, 어두움과 마귀의 궤계를 파하기 위해 – 그 위에 당당하게 서서 전도하기 위해선 기도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확인해야만 한다.

 

(영적으로) 나약하고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력감에 휘감길 때, ‘전도’란 것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이 귀찮고 하나님을 말씀을 순종할 만한 힘이 전혀 없을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로서 힘을 얻어야만 한다.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로 통해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의 강력한 능력은, 모든 무기력과 불순종을 벗어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전도를 하다 보면 교인(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거론하는 자들이 있다. 사람들은 전도인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 불신자들은 그(전도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복음) 보다는 어쩌면 그의 삶을 더욱 쳐다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벧전2:12, 15에서 ‘어리석은 자’(불신자)들의 무식한 말을 막기 위해, 또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마5:13-16에서도, 딤전2:10에서도, 우리 (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방인(불신자) 앞에서 선한 모습을 보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교인들의 아름답지 못한 행실은 복음전파에 큰 걸림돌이 된다. 주님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모든 것을 녹인다.

말씀에서 ‘해라’고 하니까 하는 것은 ‘율법주의’로 가기 쉽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모든 말씀은 우리를 얽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신10:13)을 위한 것이며, 전도의 사명은, ( 전능하신 그 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맡긴 것은 ) 우리에게 상급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며 사랑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기쁨과 사랑으로 받들 일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도록-깨닫도록 지속적인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전도의 책무를 다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전도 대상은 우리의 마음을 읽는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낄 때, 마음 문을 열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전도를 하다 보면, 거대한 벽 앞에 부딪힐 때가 많다. (전도의 대상자가) 자신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생각을 갖고 바라볼 때, 또는 전도의 미련함을 비판하는 시각을 가질 때(사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 으로 일하시지만-고전1:21)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의 사고 속에 갇혀 귀를 막고 듣기 싫다고 비아냥 그릴 때, 전도하는 우리는 무척 힘들다. 게다가, 어떤 때는 미친 사람이라고 바보취급을 하기도 하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지속적으로 그들을 껴 안을 때 역사는 일어난다. (선교지는 특히 그러하다.)

 

전도는 습관화 되어야 한다.

어쩌다가 용기를 내어 한번 시도해 본 전도가 다행히 좋은 결과(반응)가 나타나면 천만 다행이지만 오히려 힘든 상황을 만날 때가 더 많다. ‘하루에 한 명은 꼭 전도 하리라’는 결단은 한 명이 아니라 수 명, 또는 수 십 명에게 전도하게 된다.


자신과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주님의 도우심을 매일 구하는 가운데) 전도하다 보면 온갖 일들을 다 겪게 되는 데, 어려움도 당하지만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좋은 보상을 받기도 한다. (우리 가족이 선교사역을 위해서 프랑스에서 불어를 배울 때) 아내가 급성맹장염에 걸린 적이 있다. 우리는 고국과 다른 병원 시스템에서 어찌 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우리에게 도움을 준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전도하다가 만난 “카메룬”사람이었다. 그가 우리의 도우미가 되어 병원까지 안내해 줌으로 위급한 상황을 면한 적이 있었다.


전도를 하다 보면 거절의 쓴 맛을 볼 때도 많지만,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더 나아가 주의 백성으로 탈바꿈하는 사람들을 볼 때의 환희는 이루 표현 할 수 없다. 어쩌다가 전도하는 것 보다 매일 전도하는 사람이 구원의 백성을 만날 확률이 훨씬 많을 것은 뻔한 일이다.

 

전도를 습관처럼 하다 보면 (기차 안, 자주 가는 장소에서 만나는 사람, 길가, 관공서, 어느 곳이든) 주님께서 우리 옆에서 돕고 계심을 확신하는 활기찬 삶을 살게 된다.

 

믿음을 동반하며 전도해야 지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라’(시126:5-6)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주의 일 중에 가장 귀중한 전도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하는 것이 헛되지 않고 주께서 갚아 주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연약한) 우리들은 전도의 삶을 잘 유지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조그마한 땅에 씨앗을 뿌린 적이 있다. 심은 날로부터 매일 물을 주면서 싹이 날 때를 생각하면서 바라보았다. 씨를 뿌리지 않은 땅은 아예 기대할 것 없다. 은혜의 비가 내리면 주께서 반드시 (전도한 복음의 씨를) 싹 틔울 것을 바라볼 때 우리의 전도적인 삶은 활력이 있으리라 본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 충만 할 때 집안에 조용히 있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들처럼 전도했다. 마음이 주의 은혜로 가득 채워질 때는 찬양을 하든, 기도를 하든, 전도를 하게 된다. 전도할 때, 우리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 (행11:21)

 

한국의 많은 교인들은 ‘전도’와 ‘교회인도’를 혼동하는 것 같다. ‘전도’는 단어 그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전도를 하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가 그리고 성경 말씀에 얼마나 무지한가를 새삼 깨달으며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사랑과 진심을 담아 복음을 상세하게 말하기 귀찮아서, ‘교회 오세요’, ‘교회 갑시다’라는 식의 전도는 너무 피상적인 전도 방법이다. 주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주님을 알아가야 하고 주님의 큰 사랑을 점점 더 깨달아 가야 한다. 그럴 때 자신은 부패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다.

 

전도는 참된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도구이며 하늘나라에서 받는 상급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도 주님의 귀한 보상(영적인 기쁨)의 은혜를 누리며 주님의 참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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