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i Deo gloria에 대해

▲ 손재익 목사 서울노회 강서교회 부목사
     우리는 매우 자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말의 뒷부분에 ‘이’라는 조사가 붙느냐, 아니면 ‘을’이라는 조사가 붙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황대우 목사님께서 잘 지적해 주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이라고 번역하면 그 주체는 우리 인간이 되지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고 번역한다면 그 주체는 하나님이 된다. 이 때, 우리는 두 번역 중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번역이 더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핵심은 하나님이 주체라는 것이다.


잘못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의미의 인간 중심적인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우리가 공부를 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가 출세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가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이 조금 덜 영광스러우신데 나의 어떠한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분이 된다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황대우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신자 개개인이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도 세상에서 성공 신화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분명 하나님이 조금 덜 영광스러우시고, 그래서 나의 어떠한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분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삶에서는 그러한 의식이 담긴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소요리문답 제1문답의 번역과 관련하여

     필자는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 장로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대소요리문답 제1문답의 번역 때문이라고 본다. 어떤 번역인가? 최근에 개정된 고신헌법(2011년판) 대요리 1문답의 경우를 예로 들면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고, 소요리 1문답에는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큰 차이는 없으나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이 바로 문제의 근원지이다. 무슨 말인가? 왜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것을 알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원문을 보아야 할 것이다. 아래에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Question. 1.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Quæstio. Quis hominis finis est præcipuus? 

Answer. 1.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위 원문에서 지금 다루고 있는 핵심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에 해당하는 부분은 “to glorify God”이다. 이 말은 대개 한국에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라고 번역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to make God glorious)라는 말이 아니다. to glorify는 ‘하나님을 영화로운 존재로 만들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화로우시다고 선포하거나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1) 그래서 소요리문답 1문답을 바르게 번역하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제대로 된 번역에 근거해서 이 문답의 의미를 말해 보면 “하나님께 영광이 부족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이 이미 영광스러우신 분이신데, 그 영광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우리가 그 영광에 감히 참여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대소요리문답 제1문답에 나타난 개혁주의 핵심 사상

     그렇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손에 달린 것도, 우리의 행동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영광의 주체이시며 동시에 그 영광의 대상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받아야 할 영광을 스스로 받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의 제1문답은 단순하게 나온 문답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최고 표현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최고로 여기는 개혁주의 신학의 결정체가 제1문답에 나타나 있다. 이 사실을 대소요리문답을 직접 작성하였던 청교도들은 바르게 이해했고 이것을 아주 심도 있게 고민한 끝에 그 의미를 살려서 가장 첫 문답에 남겼는데, 한국 사람만, 한국 장로교인만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보태어 드릴 것이라고 생각하다보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회복되어야 할 바른 개념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바르게 사용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는 의미로 사용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보태어 드리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태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분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보태어 드리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시다. 완전하시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으로 존재하셔도 영광이 충만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어도 영광스러우신 분이요, 우리를 만들지 않으셨어도 영광스러운 분이며,2)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어도 영광스러운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께 영광을 보태어 드릴 수가 없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그를 높이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 이미 영광스러우신 분께 “하나님 당신은 참으로 영광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함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보태어 드린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어야 하겠지만, 이 때 우리는 우리의 성공을 통해서, 혹은 우리의 열심을 통해서 그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를 해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죄인이므로 늘 하는 일이 죄짓는 것뿐이다. 아무리 우리가 뭔가 대단한 업적을 이룬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고 나서 그 결과의 성공 여부에 따라 하나님께 감사하느냐 안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한 것은 죄를 지은 것뿐이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사 이 모든 일을 선하게 하셨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열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광스러우셔서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그 영광을 비추사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에 참여케 하심을 감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인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시대에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보태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바른 번역을 통한 인식의 변화를 기대하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잘못된 번역은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언어는 사상을 담는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을 바르게 고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 문장 한 단어를 번역할 때에 매우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앞서 인용한 2011년판 고신헌법에 수록된 대소요리문답은 이전판(1992년판)과 전혀 다르지 않다. 즉 개정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누가 새로운 번역에 수고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나, 그 어떠한 것보다 중요한 교회의 신앙고백을 번역하면서 제1문답에 나타난 오류를 시정하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실, 한국에 나와 있는 거의 대부분의 번역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을 마치 하나님이 좀 덜 영광스러우신데,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이 더 영광스러워 진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론

     번역이 어떠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들어 드린다거나, 하나님께 영광이 조금 부족해서 우리가 그 영광에 보탬이 되어 드리는 것(to add something glourious to God)이 아니라,3) 완전하신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이 있음을 기억하며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비록 어떠한 처지에 놓인다 할지라도 오히려 나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사역의 영광스러움을 기억하며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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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용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1문, 답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개혁신학』, 제8호 (서울: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1992), p.82, n.1. 

2) Willem A. VanGemeren, The Progress of Redemption (Grand Rapids: Zondervan, 1988), 안병호, 김의원 공역, 『구원계시의 발전사 Ⅰ』(서울: ESP, 1993, 20044), 69;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Ⅰ, (1871; Reprinted, Mass: Hendrickson, 2003), 553, 555. 

3) G. I. Williamson, 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Phillipsburgh: P&R, 1980), 2; 나용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1문, 답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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