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팔이 사건' 주도자로 유명한 김용남(62)씨가 18일 본사 인터뷰실에서 '학교폭력 예방'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씨는 "2003년 불순한 의도로 교회에 갔다가 '새 사람'이 됐다"고 말했다.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165cm쯤 돼 보이는 땅딸막한 키에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이 더위에 넥타이까지 했다.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게 어깨는 딱 벌어졌다. 콧수염이 인상적이다. 다듬어 관리하는 듯한 수염이다.


거침없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던 정치깡패 ‘용팔이’를 18일 본사 인터뷰실에서 만났다. 그를 만날 생각에 왠지 모르게 더럭 겁부터 났다. 그가 수년 전 개과천선(改過遷善)해 좋은 일을 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용팔이는 그래도 용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의 주역인 용팔이 김용남(62)씨는 당시 200여명을 동원해 통일민주당 20여개 지구당에 난입해 기물을 부수고 당원들을 폭행했다. 이 사건은 훗날 정권의 지시로 안기부(현재 국정원)가 개입한 정치공작임이 드러났다.


1년 4개월의 도피생활 끝에 붙잡혀 2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전과 7범’의 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한 번 몸담은 ‘주먹계’와 연을 끊지 못했다. 그 뒤에도 몇 번 교도소를 들락날락했다. 손대는 사업마다 불운이 겹쳤다. 10년 가까이 월세 방을 전전하던 그는 2003년 돈을 뜯어내 보려는 ‘불순한 의도’로 교회를 찾았다가 ‘새 사람’이 됐다.


한 때 ‘주먹’ 하나로 세상을 호령했던 그가 지금은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다. 요즘 그의 이름 앞에는 ‘학교 폭력예방 전도사’란 수식어가 붙는다. 5명과 함께 일하는데 그 중 3명은 전직 ‘조폭’이다. 악수할 때 잡은 김씨의 손 두께는 보통 사람의 배는 돼 보였다.


 

―한순간에 사람이 바뀌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요.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교회를 찾아갔던 이유는) 하도 돈이 궁해 10년 전쯤 작곡가 조운파 선생님께 돈을 빌리러 갔었어요. 그랬더니 조 선생님이 대뜸 교회에 가자고 하더라고요. 교회 가서 ‘돈 좀 얻어내 볼까’란 생각으로 간 곳이 ‘사랑의 교회’였는데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며 천국과 지옥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옥 목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천국에 안 갈 이유가 없다고 하더군요. 2003년 3월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 필사를 했어요. 이상하게 예배만 참석하면 눈물이 났어요. 필사하면서 중이염이 낫고 술과 담배를 끊게 됐습니다. 걱정과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죠.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경험이에요.“


―좋은 일에도 종류가 참 많은데 폭력예방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어요. 나는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평생 ‘주먹’ 하나 믿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제일 잘하는 일은 주먹 쓰는 일인데…. 거기서 답을 찾았죠. ‘나처럼 주먹질 잘못 배워 인생 망치는 애들이 한 명도 생겨선 안 된다. 한 번 실수로 죽을 때까지 낙인이 찍혀 잘못된 일을 반복해선 안 된다. 꼭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출소 후 줄곧 돈이 궁했다고 하면서 활동은 어떻게 하나요. 어디서 따로 돈을 받나요.

”예전에 고등어 장사할 때 쓰던 창고에 책상이랑 의자 갖다 놓은 게 전부에요. 사당동에 있고, 30평쯤 됩니다. 보증금 500에 월세는 50만원짜리 사무실인데…. 예전에 책을 하나 썼는데 거기서 나오는 돈이랑 교회 간증집회 다니며 받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합니다. 간판 내걸고 거창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럴 형편도 안 되고…. 동네에서 찾아오고 (아는 사람들이) 한 번씩 찾아와 상담하고 가는 정도에요.“


김씨는 학교폭력 피해학생보다는 가해학생을 주로 상담하고 있다.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이 동네 어른들한테 잡혀 끌려오는 식이다. 아직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김씨를 찾아온 적은 없다. 그는 “난 현장에서 뛰었던 사람이니까 ‘너희 이런 일 하다가는 내 꼴 된다. 그래서 너희가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며 타이른다고 말했다.


―멀리서도 상담받으러 찾아오나요.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부산 사는 남자 중학생 3명이 작년 여름에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우리 동네 학생이 걔들한테 붙들려 두들겨 맞고 돈을 뺏겼어요. 피해 학생 엄마가 동네를 돌면서 그애들 중 한 명을 잡아서 여기 데려왔어요. 피해 학생 엄마가 ‘얘 교육 좀 잘 시켜달라. 나도 자식 키우는 사람인데 얘들도 딱하다’면서 3만원을 주고 갑디다. 그 엄마도 식당일 하며 힘들게 사는 사람인데.”



―그런 애들은 말 참 안 들을 것 같은데….

“혼자 잡혀온 애를 앉혀 놓고 말을 했어요. ’네가 경찰서 가면 나올 수가 없다. 도망간 애들한테 빨리 연락해라.’ 집 전화는 죽어도 안 알려주더라고요. 계속 설득하다 보니 지 친구놈들한테 전화해서 ‘괜찮아. 여기로 와. 경찰서 가는 거 아니야’라고 하대요. 내가 말했죠. ‘나하고 상담만 하면, 부모만 연락되면, 파출소에 안 데려간다. 그리고 너희 차비 있어야 내려가잖아.’ 그리 말하니까 (도망갔던 학생 2명이) 왔어요. 한 시간 정도 ‘용팔이’ 사건 얘기를 했어요. ‘과거에는 나도 그렇게 했다. 그게 너무 후회스럽고… 너희 소년원 가면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내가 살아봤으니 너희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서울엔 왜 왔느냐고 하니까 그냥 서울에 와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나쁜 애들은 아니었어요. 착했어요. 말해보면 애들 다 근본부터 나쁜 애들이 없어요.”


김씨는 그날 저녁 학생 세 명을 데리고 근처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서 부산 가는 표 3장을 끊었다. 터미널 식당에서 밥도 사 먹였다. 돈만 주고 내려가라고 하면 집에 안 가고 샐까 봐 일부러 버스 타는 것까지 보고 돌아왔다. 보름 뒤 애들 부모한테 연락이 왔다. 고맙다고. 자식들이 이렇게 탈선하지 않게 도와주고 집에 돌려 보내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가슴이 짠했다.


김씨는 인터뷰 내내 학교 폭력은 부모들 잘못이라고 강조했다. 부모들이 밖에 나가 돈 버느라 집에 내팽개쳐진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어른들이 잘못된 것이 자기들이 잘못해놓고 애들이 저런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어렵다는 것”이라면서 “부모들이 책임져야 할 자식을 생각하지 않고 왜 그 아이가 집 나가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느냐를 동네 창피한 것만 알지 아이들 마음은 생각 안 한다”고 어른들을 비난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을까요?

”한 달 전쯤 옛날 (주먹) 세계 후배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 유흥업소에 잡아놓은 집 나온 고등학생들이 5명 있는데 걔들 좀 데려가 달라고 하더라고요. 반포 영동시장 쪽 유흥업소인데 그쪽이 또 무법지대에요. 애들을 데려왔는데 여자 하나, 남자가 넷이에요. 남자애들은 추궁하니까 집이랑 연락돼서 다 돌려보냈는데 여자애가 절대 집 전화번호를 안 알려주더라고요. 집에도 절대 안가겠다고 해서 나도 계속 앉아만 있었어요. 한참을 앉아 있다가 먼저 얘기를 시작했어요.”


김씨가 살아온 얘기를 하나둘씩 풀어놓으니 어느 순간, 그 여학생도 속사정을 털어놨다. 그 여학생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새 아빠와 살았는데 새 아빠에게 성폭행을 수차례 당했다고 말했다. 충격적이었다. 그 여학생은 “죽고 싶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아이 엄마는 상황이 그런데도 전혀 몰랐나요?

“엄마는 식당일을 해서 늘 집을 비웠고 새 아빠는 백수라서 집에서 둘이 있다 보니…. 엄마한테 말하고 싶었지만, 괜히 겁나고, 아빠가 ‘말하면 죽여버린다’고 위협해서 무서웠다고 하더라고요. 그 일을 당하고부터 무서워서 집에 들어가지 못했고, 밖으로 돌기 시작했어요. 그게 그 아이 불행의 시작이 된 겁니다. 여자애 집이 인천인데 직접 인천역까지 데리고 가서 엄마를 만났어요. 엄마가 모르는 번호가 뜨면 아예 받지를 않더라고요. 한참 지나 겨우 연락이 돼서 밤늦게 인천역에서 만나 애를 앉혀두고 얘기를 했습니다. 엄마도 반성을 많이 했고 앞으로는 딸을 잘 보살피기로 약속을 받고 돌아왔어요.”


김씨는 여학생 어머니에게서 가끔 안부문자를 받는다. 가출을 밥 먹듯이 하던 여학생이 요즘은 집에서 잔다고 했다.


한 시간 남짓한 인터뷰를 마치고, 경황이 없어 제대로 챙기지 못한 그의 명함을 처음 봤다. ‘천국을 만드는 사람들’ 이라고 쓰여 있었다. (출처 조선닷컴 김지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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