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나 회개와 겸손으로 정치해야 -

1. 정치행위

   
▲ 정주채 목사 /향상교회 담임목사, 코닷 운영위원장
정치란 말은 좀 정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매우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이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고, 조직하고, 의논하고, 행동하는 행위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둘째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말인데,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익이나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행하는 권모술수를 포함한 모든 행위들을 말한다.

그리고 어느 공동체이든 정치가 없을 수 없다. 모든 공동체는 자신들의 목적하는 바를 위해 정치행위를 해야만 한다. 국가는 국가 경영을 위한 정치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기 위한 정치가 있다.

그러나 세속정치와 교회정치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교회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목적이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정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정치행위는 예배에 속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거기에 순종으로 응답함으로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행위이다. 권징은 제자 삼는 일이고, 회의는 기도의 일종이며, 투표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특별한 규정 없이 그냥 “정치한다”는 말을 할 때의 “정치”는 나쁜 의미로 사용된다. 곧 교회 안에서 파벌을 짓고, 개인이나 그 개인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인본주의적인 행위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교회에서는 이 부정적인 의미의 말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왜 교회 안에까지 이런 부정적인 의미의 정치가 있을까. 또 이런 정치는 피할 수 없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가지지만 안타깝게도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타락이 그 원인(遠因)이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지만 아직 성숙되지 못한 것이 그 근인(近因)이다.

이렇다 보니 서로 의견이 다르고, 목적하는 바도 달라지고, 때론 타락한 본성을 따라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나 목적을 하나님의 공의와 그분의 목적보다 앞세워 추구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친소(親疎)가 발생하고 계파가 생긴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함에 이르기 전까지 계파란 인간에 있는 필연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역사 이래 교회에서 어떤 파벌이나 교파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교파나 파벌이 항상, 그리고 모든 일에 비생산적이고 파괴적이었나 하는 것이다. 이것이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온 일들도 많았다는 사실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오히려 교회가 정치적으로 하나였을 때 타락의 속도가 훨씬 더 빨랐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으로 추락되었었다. 그래서 때로는 교파가 필요악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중세교회를 분열시킨(?) 사람들은 개혁파[protestants]였다. 저들은 교황정치를 거부함으로써 이단자라는 정죄로 출교되고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개혁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세력화되었다. 그들은 교단을 조직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하고, 개혁하였다. 도덕적인 개혁이 아니라 교리를 바로 세우고, 교회정치를 새롭게 하였다.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부르짖으며 교회의 기초와 목표를 다시 확인하였다.

고신의 초기 지도자들은 분리주의자들이란 비난을 받았다. 또 그런 비난을 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는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하나님 중심의 목표는 분열이라는 아픔을 넘어서야 했다. 스스로 분리한 것이 아니라 쫓아냄을 당한 것이지만, 결국 고신파의 분열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고신파는 “개혁파”라는 역사적인 사명과 긍지를 가지고 분열의 아픔을 극복해 왔다.


2. 회개와 겸손으로
고신교단 안에서 개혁파란 말이 생겨난 때는 1997년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전에는 “돼지파와 부곡파”로 불린 계파가 있었지만, 무슨 조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잘 어울렸던 사람들을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고, 교단정치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하며 총회 임원선거 등에서 세력다툼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이 드신 목사님들이 은퇴를 하면서 두 계파는 서서히 약화되었다.

그 무렵인 1996년도에 고신목회자협의회(이하 고목협이라 칭한다)란 단체가 생겼고, 당시 총회에서 복음병원의 건축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난 잘못들에 대해 권징을 행한 일이 있었는데, 그 치리의 공정성 문제를 두고 고목협이 분명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교단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두고 일부 언론들이 “보수파”와 “개혁파”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고목협은 자신들이 정치적인 계파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하고, 결코 정치집단이 아니라고 변명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돼지파나 부곡파와는 달리 고목협은 구체적인 조직을 갖고 시작하였고, 교단의 현실적인 문제들에 의견을 분명히 했음으로 원하든 원치 않든 정치적 계파로 분류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때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고목협을 해체하기까지 했지만 이도 역시 소용없었다.

“개혁파”가 다시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을 전후해서였다. 당시 김해복음병원의 경영의 투명성 확보를 주장하며, 급기야는 교단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일어났던 젊은 목사 장로들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주장만 편 것이 아니라 [복음병원바로세우기운동본부]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한 조직을 하고, 수차례 대회로 모였으며, 총회에서는 김해복음병원의 매각청산과 고신의료원의 경영혁신을 주장하여 그 결의까지 이끌어냈다.

여기에 강하게 반발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복음병원의 조직과 경영을 그대로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름 그대로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로 인해 양계파의 갈등은 치열하였다. 현실적인 결과는 “손실”뿐이었다. 그리고 개혁파는 모든 갈등과 손실의 주범이라도 된 것처럼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진실과 공의이다. 이것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또 모든 것을 소유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잃으면 무엇이 유익할 것인가? 얻은 것이 있다면 의를 잃고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한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이런 사람들이 “개혁파”로 불리게 된 것이다.

개혁파란 영광스러운 이름이다. 개혁파는 이 영광스러운 이름을 걸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열정적으로 사모하고 추구하며, 이를 위해 정치(?)해야 한다. 이런 정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것이요 사람의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혁파가 명심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회개와 겸손함이다. 우리는 아무도 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을 항상 고백하며 자신을 살펴야 한다. 자칫 하면 자신만 의로운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고, 남을 정죄하고 대적하는 교만한 자리에까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정치는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 의를 추구한다면서 개혁의 대상자들이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정치를 한다면 이는 개혁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겸손이란 단순히 사람들 앞에서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그의 법을 순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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