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 김영수 장로 고신대 前사무처장 부평교회
이 자료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개역개정판 성경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1999년 제49회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총회에 제출한 것이며, 총회는 동 보고서를 받았다. 이 보고서는 ‘1998년에 출간된 개역개정판 성경이 우리 고신교단 목회자들이 강단용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가?’ 에 대한 질문의 답변 성격을 띠고 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당시 신대원 교수들로 구성된 5인 전문 위원회의 보고서에는 ‘참고용 정도는 몰라도 강단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중요한 부분 100여 곳의 재번역 및 개악(改惡, 고쳐서 도리어 더 나쁘게 됨)을 주장했다. 당시 보고서에는 ‘개역개정판 성경은 교회가 공식 강단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불가(wrong)하며, 일반 신도들이 알기 쉽도록 한 참고용 수준 정도로 된 번역문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나아가 성경 원어에 탁월한 개혁주의 성향의 보수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올바른 개정 작업이 필요하며, 대한성서공회 측에 ‘완벽한 재개정을 요청해야 한다.’는 의견도 함께 덧붙여 보고하였다.

 

개역개정판은 2005 11월 제4판이 출간되었으며, 고신 교단은 2006년 제56회 총회에서 ‘개역개정판 성경의 사용 여부는 개체교회 당회가 판단하도록 한다.’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러면서도 대한성서공회의 청원을 ‘총회가 받기로 한다.’는 어정쩡한 이중적인 결정을 함으로서 혼란만 가중시켰고, 해 당회에 책임과 권한을 전가하는 듯한 이중 모션을 취했다.

 

결국 새로 출간된 개정판 성경 사용여부는 일선 교역자들의 재량권에 맡겨지게 되었으며, 서점가에는 킹 제임스 버전을 직역한 개역판 성경이 사라지고 개정판 성경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어느 날 순식간에 개체 교회에 비치된 개역판 성경은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고, 개역개정판 성경과 새로 출간된 찬송가로 완전히 뒤바뀌는 상황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여기에는 목회자들을 상대로 대한성서공회가 지역별, 개체 교회별로 벌인 마케팅 전략도 한몫했다고 한다.

 

2007 3 16일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는 개역개정판 성경(4)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고신 총회에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신대원 교수회가 채택한 보고서에 의하면 2005년 발간된 제4판은 1998년 초판에 비해서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고, 그때 당시 지적한 오역들이 수정되지 않았으며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신대원 교수회는 현 상태로는 개체교회가 개역개정판 성경을 채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당시 총회가 개역개정판 성경을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은 다소 전향적인 면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학자적 양심에 의거해 볼 때, 오역이 너무 많으므로 교단총회가 대한성서공회에 오역을 개역하도록 해 줄 것을 강력히 주문했으나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신대원 교수회는 ‘우리는 한국교회가 더 나은 성경, 바른 성경을 가지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취지의 간절한 마음을 고신총회와 대내외에 선포했었다.

 

이 자료는 고신총회에 보고되어 채택된 공개된 자료다. 그럼에도 고신총회 지도자들의 책상서랍 속에서 사장된 문서로 남아있는 것을 필자가 발굴, 재조명하게 된 것이다. 우리 고신교회는 우리 신학자들의 위대한 판정을 귀담아 듣고 한국교회와 대한성서공회에 간청을 하여서라도 이를 적극 반영토록 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전달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필자는 보고서 원문이 손상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였으며, 보기 쉽고 알기 쉽도록 간결하게 표로서 임의 분류, 재편집하였다.

 

확인해 본 바로는 우리 신학자들의 소중한 검토보고서가 아예 대한성서공회에 전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에 다시 보내졌으나 반영 여부는 아직 깜깜 무소식이다. 이를 단순한 행정처리 미숙 정도로 보기에는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총회와 관계자들은 이 중요한 자료가 어떻게 서랍 속에서 몇 년간이나 꽁꽁 숨어 있게 되었는지를 대답해야 될 것 같다. 필자는 이 귀중한 문서를 접하면서 우리 신학자들이 자랑스러웠다.

 

 

개역 개정판(4) 성경 번역에 대한 연구 검토 보고서

. 구약성경

 

1. 개역판보다 개악된 경우

성 경

개역판

개정판

(4판 기준)

개역대상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창세기 2:2

“그 지으신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히브리어 원어 /Tk]al'm]AlK;mi는 ‘일에서부터’이다. 이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그는 일곱째 날에 그가 행하신 그의 모든 일에서부터 안식하시니라”이다.

개정판에는 동사 ‘안식하다’ 앞에 목적어를 두었다(“…을 안식하다”). 하나님이 ...부터 안식하시지, ...을 안식하는 것은 말이 맞지 않다. 재개정은 “그치고”라는 단어를 삽입하였는데, 이것은 원문에는 없는 말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일곱째 날에 그가 만드셨던 모든 일에서부터 안식하셨다” 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일하지 않고 쉬는 것’으로 한정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안식’은 오히려 ‘누림’의 의미가 더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민감한 구절에서 번역자는 원어에 있는 그대로 번역하여 그 의미가 가질 수 있는 포괄적인 해석의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정판은 ‘안식’의 개념을 임의로 한정시키려고 애쓰는 흔적이 보인다.

창세기 10:32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이요

개역 판이 히브리어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되었다.

창세기 48: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원어 dj'a' !k,v]을 개정판은 음역하였고 개역판은 풀이하였다. 세겜에 수사 dj'a'가 있으므로 개역판처럼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도 개역판과 같이 번역하였다.

창세기 49:24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견강하며’를 ‘굳세며’로 바꾼 것은 좋다. 그러나 뒷부분에서 바꾼 것은 문제가 있다. 개역판은 요셉 가문으로부터 목자가 나오는 것인 반면에, 개정판은 요셉의 팔이 힘이 있는 것은 목자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번역한다. 개정은 ydeymi!V;mi를 동격으로 본 것인데, dy:()!v;(거기서)를 동격으로 보는 것은 좋지 않다. KJV, NASB 등은 개역판과 같이 번역하고, NIV와 표준새번역은 개정판과 같이 번역한다.

출애굽기 31:17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vp'N:YIw" tb'v; y[iybiV]h' !/Yb'W 히브리어에 vp'n:I(상쾌하다)가 들어 있다. 직역하면 “제7일에 안식하여 (스스로) 평안케 하셨다”이다. 개정판에 “일을 마치고”라는 말이 히브리어에는 없는데 들어간 것은 잘못 되었고, tb'v;를 ‘쉬었다’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안식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창세기 2:2에는 tb'v;를 ‘안식하다”’ 번역하였다. 특히 개정판은 안식에 대해 ‘일에서부터 쉬는 것’으로 단순화시키려는 의도로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레위기 6:2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개정판에서 ‘강도질’을 ‘도둑질’로, ‘늑봉하고’를 ‘착취하고’로 바꾼 것은 잘된 것이나 문장의 전체적 구조는 개역판이 히브리어에 더 가깝다.

레위기 25:10, 15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기업(基業)’은 이미 전문용어가 된 것이다. ‘소유지’라고 할 때에는 단순히 “그가 차지하고 있는 땅”의 의미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아서 그 가문에게 대대로 불러주는, 그래서 결코 남에게 넘길 수 없는 ‘기업’이 가지는 의미를 충분히 나타내지 못한다. 특히 희년에서 ‘기업’을 회복하는 것은 구속(救贖)에 관련된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 특히 민수기 18:21, 26, 신명기 2:31, 19:14 등에는 개정판에서도 ‘기업’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면, 레위기의 중요한 구절에서도 ‘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민수기 5:6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패역하여 그 몸에 죄를 얻거든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

개정판이 개역의 ‘패역하여’를 ‘거역함으로’로 바꾼 것은 좋다. 그러나 그 뒷부분은 개역판이 오히려 좋은 번역이다(vp,n<를 ‘몸’으로 번역할 수 있다.)

신명기 13:14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개역판이 히브리어를 바로 번역하고 있다.

역대상 17:10, 24

‘집’

‘왕조’

tyBe는 ‘가문’의 의미가 있으며, 왕조는 가문 전체가 아닌 왕위 계승에만 국한된다. 어떤 곳에서는 그 문맥에 따라서 왕조로도 번역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경우에도 ‘집’이라고 직역을 해도 독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직역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 구절이 꼭 왕위에 오른 후손만 가리킬 것인지, 아니면 그 가문 전체를 가리킬 것인지는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역대상 22:9

‘평강의 사람’

‘온순한 사람’

hj;Wnm] vyai에 대한 번역으로 ‘온순한’이란 말은 문맥에 잘 맞지 않는다.

호세아 14:2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개역판이 원어에 가깝다.

아모스 1:2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개역판이 원어에 가깝다.

아모스 5: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개역판 번역이 오히려 원어에 더 가깝다.

 

 

II. 개역판의 오역을 고치지 않은 경우

성 경

개역판

개정판

(4판 기준)

개역대상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사사기 16:7

...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

...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

!yjil' !yrit;y]은 ‘새 노끈’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인데 ‘칡’이란 말은 어색하며, ‘활줄’이라는 것도 불명확하다.

열왕기하 23:29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

히브리어 l['은 일반적으로 ‘...를 향하여(to, forward)’이며, 간혹 ‘대항하여(against)’로 번역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근래에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당시(주전 609) 앗수르와 이집트가 연합하여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과 유브라데 강 유역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앗수르 왕을 치고자”가 아닌 “앗수르 왕을 향하여” 혹은 “앗수르 왕을 도우러”로 번역해야 한다.

이사야 52:14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원문을 바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이 너를 보고 놀랐던 것과 같이, 그와 같이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 할 수 없었고, 그의 모습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1) 개역판과 개정판 모두 각 절들의 어순을 바꾸고 있다. 어순이 왜 중요한가 하면 히브리어는 양 절에 rv,a}K'@Ke이라는 두 접속사가 있어 “…와 같이, 그와 같이 …”로 양쪽 문장을 서로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yl,[;는 ‘너를’(2인칭 남성 단수 인칭접미사)이다. 그런데도 양쪽 모두 ‘그를’이라고 삼인칭으로 번역하고 있다. 개역판과 개정판이 난외주에서 주를 달고 있지만 본문에서 고치는 것이 옳다. 3) 개정판이 ‘전에는’이라고 시작하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는 말을 의도적으로 삽입하였다.

이사야 52:15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1) !yBir' !yI/G hZ<y" @Ke는 접속사(@Ke)로 시작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하여’(thus 혹은 so)와 함께 문장을 시작하여 앞(14)과 관계를 표시해야 한다. 개역판은 ‘후에는’이란 말로 시작하는데, 개정판은 이것조차 빼어버려 이보다 더 후퇴한 번역을 하고 있다.

2) hZ<y"(원형 hz:n:)는 “그가 뿌릴 것이다”이다. 개역판과 개정판이 ‘놀라다’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NIV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so will he sprinkle many nations …” 개역판과 개정판은 난외주에 주를 달고 있지만 본문에서 고치는 것이 옳다.

이사야 53:3

<개역 & 개역판> “… 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라 … ”

<개역 & 개역판> “… 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라 … ”

‘간고(艱苦)’와 ‘질고(疾苦)’는 너무 어려운 말이며, 히브리어를 단순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간고’라고 번역한 t/baok]m' vyai을 직역하면 “고통(혹은 슬픔)의 사람”이다. 육체적인 나약함을 인하여 당하는 고통을 말한다. ‘질고’로 번역된 ylijo는 그냥 ‘병’이다.

이사야 53:4

<개역 & 개정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疾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개역 & 개정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疾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여기서 중요한 단어 ylijot/baok]m'3절에 이어 4절에 그대로(인칭접미사를 붙여서) 사용되었다. 단순하게 다시 번역한다면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연약함(고통)을 담당하셨다”이다. 개역판과 개정판 모두 t/baok]m' 3절에서는 ‘간고’, 4절에서는 ‘슬픔’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일관성이 없다. 참고로 이사야 53:4을 인용한 마태복음 8:17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이 번역이 히브리어에 가장 가깝다.

이사야 53:8

...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

...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 ”

히브리어 /r/DAta,는 ‘그의 세대’ 앞에 ta,라는 목적격 접두요소가 붙어 있다. 주어는 ‘누가’(ymi)이다. 따라서 j'je/cy] ymi /r/DAta,를 바르게 번역하면 “누가 그의 후손을 생각했으리요?(r/D는 ‘세대’이지만 ‘후손’으로도 번역할 수도 있다.)

아모스 5: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

여기서 ‘사망의 그늘’을 ‘칠흑같은 어둠’으로 고쳐야 한다.

미가 2:5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비를 뽑고 줄을 띨 자가 ...

“여호와의 회중에서 분깃에 줄을 댈 자가 ...

“여호와의 회중에서 분깃을 위해 제비를 뽑을 자가”로 바꾸어야 한다.

미가 2:8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

“원수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

“원수 같이 일어나는도다. 너희들은 전쟁을 피하여 ...”로 바꾸어야 한다.

미가 3:4

<개역 & 개정판>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

<개역 & 개정판>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 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

“그 때에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로부터 얼굴을 ...”로 수정해야 한다.

미가 3:8

<개역 & 개정판> ...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개역 & 개정판> ...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 야곱에게 그의 허물과 이스라엘에게 그의 죄를 말하리라”로 수정해야 한다.

나훔 3:13

“너의 중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가운데 있는 네 백성은 모두 여인이라”로 수정해야 한다.

스바냐 2:10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교만하여 스스로 커서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함 이니라.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에 대하여 교만하여졌음 이라.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을 비방하고 교만하게 행하였음이라”로 수정해야 한다.

말라기 1:6

<개역 & 개정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

<개역 & 개정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니라 오! 나의 이름을 경멸하는 제사장들아! 그러나 너희는 이르기를 ...

말라기 1:9

<개역 & 개정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

<개역 & 개정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

‘너희는’ 앞글에 ‘그리고 이제’를 첨가해야 한다.

말라기 2:8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끝부분을 “율법으로 인해 넘어지게 하는도다”로 수정해야 한다.

 

III. 불필요하게 개정한 경우

성 경

개역판

개정판

(4판 기준)

개역대상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창세기 6:4

“딸들을 취하여

“딸들을 취하여

히브리어의 문자대로는 ‘들어와’가 맞다. 그러나 그렇게 직역하는 것이 의미를 잘 전달할지는 의문이다.

창세기 13:14

“동서남북을”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개역판의 ‘동서남북’도 널리 쓰이는 용어이므로 구태여 이렇게 풀어서 길게 번역할 필요가 없다.

창세기 49:10(민수기 24:17, 이사야 14:5)

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개정판은 개역판의 ‘홀’을 ‘규’로 바꾸었다. 국어사전에는 ‘홀()’이 조선시대에 왕이 쥐었던 막대기로 규정하고, ‘규()’는 중국 천자의 옥으로 된 막대기로 말한다. 우리 말에서 ‘홀()’이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지팡이로 이미 익숙한 단어인데, 굳이 중국이 사용한 글자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출애굽기 6:6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1) 히브리어 !yfip;v]bi은 ‘심판들로써’로 번역할 수도 있으며, 또는 심판의 결과로 내리는 징계도 가능하다. 따라서 양쪽 다 가능하다.

2) ‘구속’(la'g:)은 이미 전문화된 용어이다. 이것을 ‘속량’으로 바꾸는 데에 동의하기 힘들다.

오바댜 1:19

“남방 사람은 에서의 산을 얻을 것이며 평지 사람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그들이 네겝과 에서의 산과 평지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개역판의 번역이 원어에 더 가깝다.

미가 6:16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

개역판 번역이 원어에 더 가깝다.

하박국 2:7

“너를 물 자들이 ...

“너를 억누를 자들이 ...

개역판 번역이 원어에 더 가깝다.

 

IV. 일관성 없이 번역한 경우

성 경

일관성 없는 번역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의’와 ‘공의’ (창세기 15:6과 신명기 6:25 )

창세기 15:6에서 개역판이 ‘의’로 번역한 것을 개정판 초판에서는 ‘공의’로 번역했다가 4판에서는 다시 ‘의’로 바꾸었다. 신명기 6:25에서 개역판이 ‘의로움’으로 번역한 것을 개정판 초판에서는 ‘공의로움’으로 번역했다가 4판에서 다시 ‘의로움’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외에 구절들, 예를 들면 신명기 6:25, 9:5, 6 등에서는 개역판의 ‘의’를 개정판은 ‘공의’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츠다카’(hq;d;x])는 ‘의’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다. ‘공의’는 재판과 관련된 인상을 받게 한다. 올바른 재판을 시행함으로써 이루는 사회정의의 개념을 가진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베풀어주시는 복으로서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hq;d;x]를 ‘공의’로 번역하는 것은 어떤 신학적인 복선이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 표준 새번역에서도 hq;d;x]를 ‘의’라는 단어 대신에 ‘공의’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개정판도 신약의 로마서 4:3에서 창세기 15:6을 인용할 때에는 ‘의’로 번역하고 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2-3). 로마서의 이 부분을 ‘공의’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구약의 이 부분도 ‘의’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공의’와 ‘정의’ ( 1:21, 1:27, 32:1, 5:24 )

개역판은 ‘미쉬파트’(fp'v]mi)i를 주로 ‘공의’로, 간혹 ‘공평’ 또는 ‘공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개정판은 사 1:21, 1:27, 32:1, 5:24 등에서 ‘정의’로 번역하였다. ‘미쉬파트’는 주로 재판을 공정히 행하는 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공의’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정의’ 혹은 다른 말로도 번역할 수 있다.

‘가증한’과 ‘혐오할’ (레위기 11:11, 12)

$q,v,를 개정판이 어떤 곳에서는 ‘가증하다’를 ‘혐오하다’로 바꾼 반면( 11:12), 어떤 곳에서는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11:11).

‘장구하리라’와 ‘길리라’ (신명기 5:33, 6:2)

신명기 5:33에서는 ‘길리라’고 바꾸었으나, 6:2에서는 ‘장구하다’는 말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멸절’과 ‘멸망’ (신명기 2:14, 6:15)

신명기 2:14에서는 ‘멸절’을 ‘멸망’으로 고쳤으나, 6:15 등에서는 ‘멸절’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음역 혹은 번역? (‘음부’와 ‘스올’ 등)

개역판의 ‘음부’를 개정판에서는 ‘스올’로 음역(音譯)하였는가 하면, 창세기 6:14에서는 개역판의 ‘잣나무’를 개정판에서는 ‘고페르’로 음역하여 놓았다. 그러나 신명기 10:3에서는 반대로 음역된 ‘싯딤나무’를 ‘조각목’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사야 3:19-20

여기서 개역판의 ‘면박’(veil)을 개정판이 ‘얼굴 가리개’라는 잘 사용하지 않는 우리말로 바꾸면서도 ‘화관’(headdress, 머리 장식)이나 ‘호신부’(charms, 부적?)는 한자어 그대로 두고 있어 일관성을 잃고 있다.

나훔 3:5

<개역판>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서”

<개정판>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

동일한 표현을 나훔 2:13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로 번역해 놓고서 나훔 3:5에서는 다르게 번역하였다. 개역판 번역을 따르는 것이 낫다.

 

V. 어려운 한자어나 고어를 그대로 둔 경우

성 경

개역판

개정판

(4판 기준)

어려운 한자나 고어를 그대로 둔 경우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창세기 4:1

득남하였다

득남하였다

‘아들을 얻었다’로 바꾸면 좋을 것이다.

출애굽기 21:3

단신

단신

‘홀 몸’으로 바꾸면 좋을 것이다.

출애굽기 22:16

“사람이 정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빙폐를 주고”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납폐금’이라는 말도 너무 어렵다. ‘지참금’ 혹은 ‘보상금’으로 바꾸면 좋겠다.

출애굽기 30:19

수족을 씻되

수족을 씻되

“손과 발을 씻되”로 바꾸었으면 좋을 것이다.

아모스 4: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수은제’를 ‘감사제’로 ‘낙헌제’를 ‘자원하는 예물’로 고치는 것이 더 좋다.

 

<신 약>

I. 개역판보다 개악된 경우

성 경

개역판

개정판

(4판 기준)

개역대상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마태복음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

개역판의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가 개정판에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로 바뀌었다. 그러나 원문에는 ‘드리려 한다’는 의지나 시도를 나타내는 동사가 없고 그냥 ‘드리다’는 동사의 가정법(prosfevrh/")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개역판의 ‘드리다가’가 맞다. 그러면 왜 개정판에서 ‘드리려다가’로 바꾸었을까? 그 이유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도중에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예물을 드리려고 마음을 먹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이라는 의미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원문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24절의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라는 말씀에 맞지 않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가 맞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번역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성경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는 것이 그 임무이며, 어려운 구절의 해석 문제는 주석가들에게 맡겨야 한다.

마태복음 5:25 (40)

“너와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송사하는 자’라는 단어의 원어는 ‘안티디코스(ajntivdiko")’인데, 이는 법률 소송에 있어서 고소하는 자(one who brings a charge in a lawsuit) 즉 고소자(accuser)를 의미한다(Bauer 사전). 이에 반해 ‘고발’이란 ‘범인 또는 피해자 이외의 제3자가 수사기관에 범죄사실을 신고하여 그 소추(訴追)를 요구하는 의사표시’를 말한다(네이버 백과사전). 그런데 본문에서 ‘안티디코스’는 제3자가 아니라 당사자이다. 따라서 ‘고발하는 자’가 아니라 개역판에서처럼 ‘송사하는 자’ 또는 ‘고소하는 자’가 맞다.

같은 장 40절에서도 개역판에서는 ‘고발하여’로 고쳤으나 여기서도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는 제3자가 아니라 다투는 당사자이다. 따라서 개역판에서처럼 ‘송사하여’ 또는 ‘고소하여’가 맞다.

사도행전 19:24

... 아데미의 은합실을 만들어 ...

...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맏들어 ...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는 “은으로 만든 신전 모형”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개정판에서 ‘신상 모형’으로 번역한 헬라어 표현은 ‘나우스 아르귀루스’(naou;" ajrgurou'")이다. 여기서 ‘나오스’는 ‘신상’이 아니라 ‘신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로마서 8:15 ( 4:6)

...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개역판에서 ‘아바’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헬라어로 Abba이다. 그대로 음역하면 ‘압바’가 된다. 이 단어는 원래 아람어 ‘압바’에서 온 것으로 ‘아버지()’란 뜻을 가지고 있다. 본 구절에서 ‘압바 아버지(Abba oJ pathvr)’라고 되어 있는데, 앞의 ‘압바’는 아람어이요 뒤의 ‘아버지()’는 앞의 ‘압바’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를 받는 로마 사람들은 아람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압바’ 곧 ‘아버지’라고 헬라어로 번역해 준 것이다. 아람어 ‘압바’를 헬라어로 말하자면 ‘호 파테르’(아버지)인 것이다.

그런데 개정판에서는 왜 ‘아빠’라고 번역했을까? 이것은 아람어 또는 헬라어를 충실히 번역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원어의 발음에 정확하게 음역하려면 차라리 ‘압바’가 더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의 ‘아빠’란 말은 우리말에서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부르는 친근한 호칭이다. 이것은 현대 신학자들, 특히 독일의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견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곧 그들에 의하면, 구약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을 친근하게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전수되었는데 아람어 ‘압바’라는 말은 곧 그냥 ‘아버지’가 아니고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아빠’라고 부르듯이 친근한 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무리가 있다. 우선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곳이 더러 있다( 32:6, 63:16, 64:8). 그리고 무엇보다도 롬 8:15과 갈 4:6이 아람어 ‘압바’는 헬라어로 ‘호 파테르’(아버지)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압바’와 ‘호 파테르’는 둘 다 주격(호격)으로서 서로 동격 관계(apposition)이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곧 ‘압바’는 아빠이고 ‘호 파테르’는 아버지라는 것이 아니라 아람어 ‘압바’가 곧 ‘아버지’란 말이다. 아버지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아브’이고 아람어도 ‘아브’이며, 이 아람어의 강세형이 ‘압바’인데 이것은 또한 호격(아버지! 아버지여!)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아람어로 ‘압바’는 우리말로 ‘아버지’란 뜻이지 특별히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아빠’라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정확한 발음을 살려서 번역하자면 ‘압바 아버지’라 할 수 있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와 영어 세계에 익숙한 ‘아바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

개정판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독자가 되어”라고 번역해야 한다. 개정판에서 ‘초등교사’로 번역한 헬라어 명사 ‘파이다고고스’(paidagwgov")는 노예로서 6세부터 16세 사이의 주인의 아들을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과 함께 그 아이의 전반적인 행동을 감시하고 지도하는 일을 하였다. 따라서 ‘파이다고고스’는 교사를 뜻하는 ‘디다스칼로스’와는 그 의미와 기능이 달랐다. 고전시대의 사용례에 따라서 ‘파이다고고스’를 ‘훈육자’ 또는 ‘감독자’(disciplinarian)라고 번역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개정판의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개정판은 헬라어 표현 ‘에이스 크리스톤’(eij" Cristovn)을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라고 번역하였다. 로마서 6:3에도 같은 표현이 사용되는데, 개정판은 이것을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라고 옳게 번역하고 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 받는 예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예식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합하여”라고 번역해야 한다.

에베소서 1: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개정판의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다음과 같이 고쳐 번역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을 가진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개정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표현 tou;" prohlpikovta" evn tw/' Cristw/'는 주어 ‘우리가’와 동격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을 가진 자들’을 뜻한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개정판의 “... 듣는 자와 ...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는 개역판에서 처럼 “... 듣는 자들과 ...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로 고쳐야 한다. 원문에는 복수로 되어 있다.

계시록 2:9 (3:9)

...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

...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개역판에서 ‘회()’라고 번역된 말의 원어는 ‘쉬나고게(sunagwghv)’이다. ‘쉬나고게’는 원래 ‘모으다’는 뜻을 가진 동사 ‘쉬나고’에서 온 명사로서 장소를 가리킬 때는 ‘회당’을 뜻하고, 사람을 가리킬 때에는 ‘회당의 회원들’을 뜻한다(Bauer 사전). 여기 계시록 2:9 3:9에서는 장소 또는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가리킴으로 ‘회당’이 아니라 ‘회’ 또는 ‘모임, 집단’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사탄의 회당’이라는 번역은 맞지 않으며 개역판대로 ‘사단의 회’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II. 개역판의 오역을 고치지 아니한 경우

성 경

개역판의 오역을 고치지 아니한 경우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로마서 1:24,26의 ‘정욕’과 ‘욕심’

개역판에 보면 넓은 의미에서의 타락한 인간의 ‘욕심’ 또는 ‘욕구’를 의미하는 단어인 ‘에피튀미아’(ejpiqumiva)를 ‘정욕(情慾)’으로 번역한 곳이 많다( 1:24, 13:14, 벧전 2:11, 4:2, 요일 2:16 ). 물론 ‘정욕’이란 말이 전에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주로 성적(性的)인 욕구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의미 전달이 정확하게 되지 않으며 왜곡되고 있다. 그런데도 개정판에서는 이러한 부정확한 번역을 고치지 않고 있다.

한편 로마서 1:26에 나오는 ‘파토스’(pavqo")란 단어는 감정적이고 성적인 뉘앙스가 물씬 풍기는 단어(lustful passion)로서, 이 단어야말로 ‘정욕(情慾)’으로 번역해야 하는데(26, 27절이 성적인 패역을 말하고 있다), 개역판은 여기서는 오히려 ‘욕심’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개정판은 이러한 개역판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1 24절의 ‘정욕’과 26절의 ‘욕심’은 서로 뒤바뀌어야 옳다.

로마서 8:1의 ‘정죄’

로마서 8:1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라 많은 성도들이 암송하고 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이 구절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장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번역된 ‘정죄함’의 원어는 ‘카타크리마’(katavkrima)로서 단순한 ‘정죄(定罪)’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심판’, 곧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하는 ‘단죄’(condemnation)나 ‘저주’(curse)를 뜻한다. 따라서 이 구절의 뜻은 일부 잘못된 단체나 그룹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겐 아무런 ‘책망’이나 ‘징계’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히브리서 12:8에서는 징계가 없는 자는 사생아라고 했다), 비록 연약함과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결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단죄’는 없다는 뜻이다. 곧 항상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며,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개역판은 이 구절에서 ‘정죄함’이 없다고 번역함으로써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잘못된 사상이 들어올 여지를 제공했기 때문에 이번 개정판에서 고쳐졌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고쳐지지 않았다.

고린도후서 2:14의 ‘이기게 하시고’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개선 행렬 가운데 끌고 가시며”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기게 하시고’라고 번역한 분사 ‘트리암뷰온티’(qriambeuvonti)는 “승리의 개선 행진에서 (누군가를) 포로로 끌고 가다”를 뜻하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2:17의 ‘혼잡하게’

개역판은 고린도후서 2:17을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로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의 ‘혼잡하게 하다’는 말의 원어 ‘카펠류오’(kaphleuvw)는 ‘소매상인이 되다, 소매상을 하다’(to be a retail-dealer, to drive a petty trade)는 뜻인데, 따라서 이것은 ‘이익을 위해 거래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개역판의 ‘혼잡하게 하다’는 것은 원어의 뜻에 전혀 맞지 않다. 그런데도 개정판에서는 이것을 고치지 않았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장사하지 아니하고”로 고쳤으면 좋았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3:5

<개역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개정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개정판의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주장할만한 자격이 없으니,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라.” 개정판에서 ‘만족할’과 ‘만족’이라고 번역한 단어 ‘히카노이’(iJkanoiv)와 ‘히카노테스’(iJkanovth")는 이 문맥에서 ‘자격이 있는’과 ‘자격’을 의미한다.

고린도후서 3:6

<개역판>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

<개정판>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

개정판의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는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에 합당하게 하셨으니”라고 고쳐 번역해야 한다. 개정판에서 ‘만족하게 하셨으니’라고 번역한 동사 ‘히카노센’(iJkavnwsen)은 ‘자격을 갖게 하다’, ‘합당하게 하다’를 뜻한다.

고린도후서 4:4의 ‘혼미하게’

개역판은 고린도후서 4:4에서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개정판은 여기의 ‘혼미케’를 ‘혼미하게’로 어미만 약간 바꾸었을 뿐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원어는 ‘에튀플로센’(ejtuvflwsen)으로 ‘어둡게 하였다, 눈멀게 하였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쉬운 우리말인 ‘어둡게 하다’는 번역을 채택하지 아니하고 어려운 한자어이며 잘못된 번역인 ‘혼미하게 하다’를 그대로 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고린도후서 10:16

<개역판>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

<개정판>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

개정판의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는 “이는 남의 영역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 자랑하지 아니하고”라고 고쳐야 한다.

갈라디아서 1:14의 ‘지나치게 믿어’

개역판의 갈라디아서 1:14은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라고 번역하고 있어서, 사도 바울이 전에는 마치 광신자였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 ‘지나치게 믿어’의 원어는 ‘프로에콮톤’(proevkopton)으로서 어떤 일에 있어서 ‘진보하다, 뛰어나다, 우수하였다’는 뜻이다. ‘프로콮토’(prokovptw)는 동사는 원래 “군인들이 행진해서 나아갈 때 ‘앞에’(프로) 있는 나무들을 ‘베고’(콮토) 나아가다”는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사로서, 일반적으로 ‘행진하다, 나아가다’는 의미와, 건강이 ‘향상되다, 좋아지다’는 의미, 그리고 도덕적으로 ‘향상하다, 진보하다’는 의미, 나아가서 ‘뛰어나다, 능가하다’는 의미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여기 갈라디아서 1:14은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자기 동족 중의 많은 동년배(동료들)보다 유대교에 있어서 ‘뛰어났다, 우수하였다, 모범생이었다’는 의미인데, 이것을 개역판에서 마치 ‘지나치게 믿은’ 광신자였던 것처럼 잘못 번역했었는데, 이러한 중대한 오역을 새로 나온 개정판에서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에베소서 1:14

<개역판>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개정판>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개정판의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다음과 같이 고쳐 번역해야 한다. “성령은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실 때까지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시느니라. 이는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개정판에서 ‘이는’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중성 관계 대명사이며 성령을 가리킨다.

에베소서 3:18

<개역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개정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는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고쳐야 한다. 개정판에서 ‘넘치는’이라고 번역한 단어 ‘휘페르발루산’(uJperbavllousan)은 ‘넘치다’가 아니라 ‘초월하다’, ‘능가하다’, ...을 넘다’를 의미한다. 참고로 헬라어 본문에서 이것은 19절에 있다.

빌립보서 2:6의 ‘취할 것’

개역판은 빌립보서 2:6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며 오해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 번역을 읽으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신분)를 취하지 아니하셨다”는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문의 구조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취할 것’으로 번역된 단어의 원어 ‘하르파그모스’(aJpagmov")는 ‘취한 물건’(res rapta)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실 때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과 자격과 권리를 ‘자기 고유의 권리’라고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 개역판의 ‘취할 것’은 ‘고유 권리’ 또는 ‘기득권’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개정판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 구절을 고치지 않고 모호하고 부정확한 상태로 둔 것은 심히 아쉽다고 생각된다.

골로새서 1:5

<개역판> ...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개정판> ...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는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 안에서 들은 것이라”라고 고쳐야 한다.

골로새서 2:15

<개역판>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개정판>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개정판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는 다음과 같이 고쳐 번역해야 한다. “십자가로 정사들과 권세들의 무장을 해제하시고 그들을 개선 행렬 가운데 포로로 끌고 가시면서 공개적으로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개정판에서 “이기셨느니라”라고 변역한 단어 ‘트리암뷰사스’(qriambeuvsa")는 고후 2:14에서와 같이 “승리의 개선 행진에서 (누군가를) 포로로 끌고 가다”를 뜻한다.

골로새서 4:10

<개역 & 개정판> ...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

‘바나바의 생질 마가’는 ‘바나바의 사촌 마가’라고 고쳐 번역해야 한다. 개역 개정에서 ‘생질(甥姪)’이라고 번역한 단어 ‘아넵시오스’(ajneyiov")는 ‘사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12:28

<개역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

<개정판>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

“은혜를 받자”는 난하주에 있는 대로 “감사하자”로 번역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11:17

(19:6)

<개역 & 개정판> ...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시도다.

여기 ‘왕노릇하시도다’의 원어는 ‘에바실류사스’(ejbasivleusa") (당신이) ‘왕노릇하셨도다’로 번역해야 한다. 이 헬라어 동사의 시상은 아오리스트(aorist)로서 직설법이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난 일, 여기서는 재림의 시점에서 되돌아본 지나간 세상 역사상의 일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마땅히 ‘왕노릇하셨도다’로 번역해야 하는데 현재 시제로 번역하여 오해를 초래케 하고 있다. ,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는 예수님이 왕노릇하시지 않은 것처럼 오해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19:6에서도 똑같은 동사가 사용되었다. 헬라어로 ‘에바실류센’(ejbasivleusen)인데 단지 인칭만 3인칭으로 바뀌었을 뿐 시상과 법이 똑같다(아오리스트 직설법). 따라서 이 단어는 ‘왕노릇하셨도다’로 번역해야 하는데, 개역판에서는 ‘통치하시도다’(현재)로 번역하고 있고 개정판에서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도 예수님의 재림 이후의 관점에서 그 이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주께서 왕노릇하셨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마치 재림 이후에 왕노릇하시는 것처럼 오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물론 하나님(또는 예수님)은 재림 이후에도 영원토록 왕노릇하시는 것이 맞지만 그 이전에도, 지금 이 세상 역사 중에도 왕노릇하고 계신다. 그런데 개역판과 개정판에서는 중요한 단어의 오역으로 말미암아 이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III. 불필요하게 개정한 경우

성 경

단 어

개역판

개정판

(4판 기준)

개역대상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증거 -> 입증 (마태복음 8:4)

...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이 부분의 원문을 직역하면 “... 그들에게 증거로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리라.”이다. 여기서 ‘증거’로 번역된 말은 원어로 ‘마르튀리온’이다. 이것은 ‘증거(testimony, proof)’란 말이지 꼭 ‘입증’이란 말은 아니다. ‘입증’이란 번역은 좀 지나치고 부자연스럽다.

핍박 -> 박해 (마태복음 5:10,12,44, 10:23, 13:21)

 

핍박을 -> 박해로 함

개정판 번역에서는 여러 곳에서 ‘핍박’이란 단어를 ‘박해’로 바꾸어 놓았다. 물론 ‘핍박’이나 ‘박해’나 사전적 의미는 동일할 수 있다. 그러나 ‘박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집단적인 사건에 대해 많이 사용되고 ‘핍박’이란 단어는 개인적으로 당하는 신앙상의 일에 대해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이미 기독교계에서 많이 사용되고 성도들 사이에 굳어진 ‘핍박’이란 단어를 굳이 ‘박해’로 바꾼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지금도 교회 성도들은 열이면 아홉, 열은 ‘핍박한다’, ‘팝박받는다’라고 말하지 ‘박해한다’, ‘박해받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미 기독교 안에서 굳어졌고 또 적절한 용어인 ‘핍박’을 ‘박해’로 바꾼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교제 -> 친교 ( 2:9)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교제’나 ‘친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제(코이노니아)’란 말은 원래 ‘함께 함, 나누어 가짐, 참여함, 동참함’의 의미를 가진 폭넓은 단어이다. 그런데 ‘친교’란 번역은 서로 사이좋게 어울려 논다는 의미로 제한되는 느낌이 든다. 본 구절에서는 게바와 요한이 바울과 바나바와 신앙과 사상에 있어서 상이점이 없음을 확인하고 주 안에서 하나됨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악수를 나눈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역판대로 ‘교제의 악수’가 좋다고 생각된다.

구속 → 속량 (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처럼 개정판은 개역판의 ‘구속(救贖)’이란 말을 ‘속량(贖良)’이란 말로 바꾸었다. ‘구속(救贖)’이란 말의 원어는 ‘아포뤼트로시스’(ajpoluvtrwsi")로서 종이나 노예를 ‘석방금’ 또는 ‘속전(贖錢), 속량금(贖良金)(luvtron)을 주고 해방시키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죄에 빠져 죄의 종이 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속전’으로 지불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속’이란 이 단어는 불신자들에겐 전혀 이해되지 않으며, 성도들에게도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 단어는 ‘잡아 가두다’는 정반대의 뜻을 가진 ‘구속(拘束)’이란 단어와 혼동되면서(원래 救贖이란 단어에서 ‘구’자를 길게 발음해야 옳은데도 拘束 ‘구’자와 혼동되면서 두 단어의 발음이 같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의미가 더욱 불분명해지고 있다.

아마도 이런 점을 고려하여 개정판에서는 ‘속량’으로 바꾼 듯하다. 그러나 ‘속량(贖良)’이란 단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며, 교회 바깥의 사람들에겐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오히려 ‘속량’이란 단어가 더 어려우며 사용 빈도가 더 적은 듯하다. 그렇다면 개정판에서는 ‘어려운 단어’를 ‘더 어려운 단어’로 바꾸고 만 꼴이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속량하다’는 말은 ‘종을 돈(속량금)을 주고 사서 끄집어내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단어 ‘엨사고라조’(ejxagoravzw)의 번역으로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속’과 ‘속량’이라는 두 용어를 가지므로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은혜를 좀더 풍부한 표현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이 두 단어는 교회 밖에서는 사용례를 찾아보기 힘든 단어로서 불신자들에겐 이해되지 않는 단어이므로, 교회에서 잘 가르쳐서 이해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면에서 ‘구속(救贖)’이란 단어는 이미 교회 안에서 정착되어 가고 있는 단어이므로 굳이 더 어려운 단어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본다.

 

IV. 일관성 없이 번역한 경우

성 경

단 어

개역판

개정판

(4판 기준)

개역대상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권위’와 ‘권세’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

헬라어 ‘엑수시아(ejxousiva)’는 단지 ‘권위(authority)’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power)’를 나타낸다. 따라서 ‘권세’라는 번역이 적합하다. 그런데 개정판에서는 ‘권세’를 ‘권위’로 많이 바꾸어 놓았다( 9:6, 1:22, 27). 따라서 개정판에서는 예수님의 권세가 왠지 약화된 듯한 느낌을 받는 곳이 더러 있다. 그러나 개정판도 마 28:18에서는 ‘권세’로, 3:15에서는 ‘권능’으로 번역함으로써 일관성 없는 번역임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 7:29, 9:6, 1:22, 27 )

‘변명’과 ‘변증’

변명

변명 또는 증명으로 번역

빌립보서 1:7에 ‘변명’으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개정판>에서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변명(辨明)’이란 단어는 오늘날에는 ‘별로 합당치 않은 사실에 대해 구차하게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불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변호한다는 뜻을 가진 ‘아폴로기아’(ajpologiva)의 번역으로는 합당치 않다. 그러나 같은 장 16절에서는 ‘변증’으로 바로 고쳤다. 따라서 같은 서신, 같은 장 안에서도 똑같은 단어에 대해 일관성이 없이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7)

‘성’과 ‘시’

()

()

개정판은 개역 성경에서 ‘성()’으로 번역된 것을 ‘시()’로 개정하였다. 예를 들어, ‘온 성’을 ‘온 시민’으로( 13:44), ‘성내’를 ‘시내’로( 13:50) 개정하였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성’을 개정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 (14:21, 15:36, 21:39, 22:3, 26:11).

‘언어’와 ‘방언’

방언

언어

개정판은 개역판에서 ‘방언’이라고 번역한 것을 사도행전 2:4, 11에서 ‘언어’로 개정하였다. 그러나 사도행전 2:8에서는 ‘방언’을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금면류관

계시록 4:4 (4:10, 6:2, 19:12)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이 구절의 ‘금 면류관’ 또는 ‘금관’의 원어는 ‘스테파누스 크뤼수스(stefavnou" crusou'")’이다(복수 대격). ‘스테파노스(stevfano")’는 ‘나뭇잎이나 나뭇잎을 닮은 것으로 만들어진 화관’(a wreath made of foilage or designed to resemble foliage)을 가리킨다(Bauer 사전). 개역판에서는 마 27:29, 15:17, 19:2,5에서 (가시) ‘면류관’으로 번역되었으며, 고전 9:25, 4:1, 딤후 4:8 등에서도 ‘면류관’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개정판에서는 마 27:29, 15:17, 19:2,5에서 다 ‘(가시)관’으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고전 9:25에서도 ‘관’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을 보면 개정판 번역자들은 ‘면류관’이라는 번역 대신에 ‘관’이라는 번역으로 통일하기로 합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빌 4:1과 딤후 4:8에서는 ‘면류관’으로 번역함으로써 꼭 그렇지도 않으며 일관성을 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시록 4:4에서는 개정판이 ‘금관’이라고 번역하여 ‘면류관’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10에서도 ‘면류관’ 대신에 ‘관’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그러나 6:2에서는 동일한 ‘스테파노스’에 대해 ‘면류관’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19:12에서는 다시 ‘관’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원어로 ‘스테파노스’가 아니라 ‘디아데마(diavdhma)’가 사용되고 있다. ‘디아데마’는 ‘면류관’이 아니라 ‘왕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작 ‘왕관’으로 번역해야 할 곳에서는 그렇게 번역하지 않고 여전히 ‘관’으로 번역하고 있다(개역판에서는 ‘면류관’으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스테파노스’와 관련한 개정판의 번역은 일관성이 없으며 잘못된 방향으로 개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냥 ‘관’이라고 하면 이것이 머리에 쓰는 화관(면류관)을 의미하는지 장례식 때 사용하는 관(시신을 담은 관)을 의미하는지 구별이 잘 안 될 수 있다. 따라서 개정판 번역자들도 가끔 사용하는 ‘면류관’이라는 번역을 다른 곳에서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개역판의 계 19:12의 ‘면류관’은 원어가 다르므로 ‘왕관’으로 고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V. 어려운 한자어나 고어를 그대로 둔 경우

성 경

단 어

개역판

개정판

(4판 기준)

개역대상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마태복음 1:20, 2:13,19

현몽(現夢)

현몽(現夢)

마태복음 1:20, 2:13,19의 ‘현몽(現夢)’이라는 한자어를 개정판은 고치지 않고 그냥 두었다. “꿈에 나타나”로 번역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마태복음 5:25

사화(私和)하라

사화(私和)하라

그리고 마태복음 5:25의 ‘사화(私和)하라’란 말도 그냥 두었다. 원어 ‘유노에오(eujnoevw)’는 ‘좋은 관계를 가지다(be on good terms)’의 의미인데, 요즘 쓰는 말로 ‘화해하라’고 번역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같은 절 안에서 개역판이 ‘관예(官隸)’라고 번역한 것을 개정판은 ‘옥리(獄吏)’라고 번역했는데 ‘관예’보다 낫기는 하나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원어 ‘휘페레테스(uJphrevth")’는 밑에 있는 사람 곧 재판관 밑에서 형을 집행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오늘날 우리나라 말로 ‘교도관’이나 ‘교도소 관리’ 정도로 번역하면 좋을 듯 싶다.

마태복음 7:7

창수

창수

마태복음 7:7의 ‘창수()’란 말도 ‘홍수’라 바꾸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2:1

도고(禱告)

도고(禱告)

디모데전서 2:1의 ‘도고(禱告)’란 단어도 현재 우리나라에 거의 쓰지 않는 말이며 또한 현재 중국에서는 그냥 ‘기도’라는 의미인데 그대로 두었다. ‘중보기도’로 바꾸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⑤ 요한계시록 9:3

황충(蝗蟲)

황충(蝗蟲)

그리고 요한계시록 9:3의 ‘황충(蝗蟲)’이란 단어도 그대로 두었는데 쉽게 ‘메뚜기’로 바꾸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원어 ‘아크리스(ajkriv")’는 ‘메뚜기’를 가리키며 다른 무엇이 아니다.

똑같은 단어를 마태복음 3:4과 마가복음 1:6에서는 둘 다 ‘메뚜기’로 번역하였다.

 

 

맺음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역사와 시대를 달리하고 빈부와 귀천과 직업이 각기 다르지만, 놀랍게도 동일한 주제와 목표를 향한 일관성 있는 흐름의 저술임을 볼 때 경이로움이 더해진다. 세상에는 무수한 서적과 저서들이 즐비하게 쌓여있지만, 성경처럼 감화를 주며 골수를 찔러 감동케 하고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책은 없다. 성경을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일수록 그 가치와 귀중함을 깨닫게 된다.

 

올바른 성경 번역은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 인간에게 정확하게 전달해 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이며 과제이다. 성경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아니하는 신앙심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게 된다. 강해설교를 즐기는 목회자 일수록 성경 원어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고 한다. 말씀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닫고선 그 기이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따라서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은 깨닫는 것만큼, 영안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큼 그리고 아는 것만큼만 전달된다.

 

또한 말씀을 읽고서 달고 오묘함을 깨닫는 자 일수록 하나님의 계시가 바로 번역, 전달되었는지를 살피게 된다. 전달과정에서 혹 일점일획이라도 누락되었거나, 엉뚱한 것이 추가되거나,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었는지를 살핀다. 신자들의 이런 모습과 자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굳게 믿고 갈망하는 천국시민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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