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릴 때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습니다. 체육시험에는 달리기, 넓이뛰기, 공던지기, 턱걸이 네 종목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1차 시험을 칠 때였습니다. 6개가 만점인데 세 번은 완전히 걸었고 세 번은 대충 걸었습니다. 턱을 치켜 올리고 거는 흉내만 낸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내려오니 시험관 선생님이 너, 다시 해라고 하시더군요. 힘이 다 빠졌는데 어떻게 제대로 하겠습니까? 배치기도 하면 안 되고.. 아무리 용을 써도 3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턱걸이를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많이 했을 텐데 오직 그때의 턱걸이만 기억이 납니다. 여섯 개의 턱걸이, 제게는 실현불가능했던 목표였던 셈입니다. 지금은 추억이 되었지만 그때는 상당히 쓰라린 사건이었습니다. 

오래전 제자훈련을 받는데 공교롭게도 거기에도 실천사항 여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성경 읽기, 묵상, 기도, 전도, 교제, 봉사 등이었던 것 같습니다. 날마다 그 여섯 개를 해야 했습니다. 턱걸이 여섯 개인 셈입니다. 그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면 뿌듯했습니다.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여섯 번의 턱걸이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턱걸이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느껴졌습니다. 이건 율법주의 아닌가, 이건 무슨 자격시험 아닌가, 신앙생활은 그 이상일 텐데, 신앙생활이란 무언가 더 깊고 더 오묘하고 더 풍성하고 더 행복한 것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섯 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애써야 했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턱걸이를 기가 차게 잘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턱이 아니라 목을 걸 정도로 몸이 가벼웠습니다. 턱걸이가 제게는 스트레스였지만 그 친구에게는 자랑스러운 무대였습니다. 그 친구는 철봉을 즐겼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턱을 거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기는 것이요, 그 율법을 주야로 펴서 묵상할 정도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 율법이 내 혀의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하고 그래서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밤중에 노래하게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하여 주와 함께 있는 편이 가장 좋다고 고백할 수 있고,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노래하며 행복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처럼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은 내 주 예수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평생을 살 수 있고, 평생을 산 후에는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이런 멋진 인생은 턱걸이 신앙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턱걸이 시험이 아닙니다. 턱을 걸면 좋긴 하지만 턱을 걸었다고 해서 영적 갈증이나 배고픔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턱걸이 여섯 개 달성을 통해 신앙생활이 단련되어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쁨과 행복과 평강이 넘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턱걸이를 다 해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생각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끝없이 풍성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발전하고, 끝없이 행복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생각 하나 덧붙여봅니다. “넘침의 신앙생활이라니요? 아니, 요즘에는 턱걸이도 어렵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철봉에 겨우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니까요.” 당신의 상태가 궁금합니다.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 턱을 열심히 걸려고 노력하는 상태, 아니면 무언가 넉넉하게 넘치는 상태, 어디쯤에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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