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 변 종 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우리 교단에서는 금년 초부터 새로운 주기도문을 사용하고 있다. 강제 실행은 아니고 권면 차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확하게 어느 것을 사용해야 하는지 몰라서 혼란스러운 점들이 많았다. 그래서 금년 총회에 질의가 들어와서 이 점에 대해 다시 결정하였는데, 그 과정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찬송가 앞 장의 밑에 있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의가 제기되어 논란을 거쳐 최종적으로 개역개정판 성경에 있는 대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총회 결정이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우리는 주기도문에 대해 어느 번역이 좋은지, 각각의 장단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개역개정판(4판)의 주기도문과 찬송가공회의 새 번역 주기도문을 종전의 주기도문과 비교하면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종전의 주기도문이라 함은 개역한글판(마 5:9-13)에 있는 주기도문이 되어야 하겠지만, 실제로 교회에서 사용한 주기도문은 찬송가 앞에 있는 것으로서 마지막 문장에 ‘대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새 번역 주기도문은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번역 성경에 없는 문구이다. 혹 찬송가 출판사에 따라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 찬송가공회에서 출판한 찬송가에 나와 있는 것으로 살펴보겠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책에 따라 구두점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그래서 구두점은 무시하고 논하도록 하겠다.

주기도문 원본은 마태복음 6:9-13에 있는 것인데, 편의상 UBS 4판(NA 27판)을 기준으로 삼겠다. 사본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고,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 본문의 배후에 있는 원문을 기준으로 하여 번역상 논란되는 것만 살펴보기로 한다.

 

본 론 

1. [종 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개역개정]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새 번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선 하나님을 부름(호칭)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원문에는 호격(呼格)으로 되어 있는데, 종전 주기도문과 개역개정판 주기도문에는 ‘아버지여’라고 하여 호격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찬송가공회의 새 번역처럼 ‘아버지’라고 해도 주기도문에서는 자연히 호격으로 이해되므로 문제는 없다.

 

2. [종 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개역개정]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새 번역]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종전 주기도문과 개역개정판 주기도문은 동일하나 새 번역 주기도문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는, ‘이름’ 앞에 ‘아버지의’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점이다. 원문에는 2인칭 인칭대명사(단수 속격)인 ‘수’(sou)가 사용되었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뜻은 물론 ‘너의’ 또는 ‘당신의’이지만, 하나님에 대해 이런 말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냐 하는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우선 ‘너의’는 예사말이므로 하나님께 대해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렇다고 ‘당신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곤란하다. 왜냐하면 우리말의 ‘당신’은 묘해서 3인칭으로 사용될 때는 극존칭이 되지만, 2인칭으로 사용될 때는 보통 높임말(하오체)이 되고, 서로 싸울 때에는 낮춤말이 되기 때문이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기도문에서는 2인칭이므로 하나님께 대해 극존칭을 써야 한다. 따라서 보통 높임말인 ‘당신’을 쓰기는 곤란하다. 게다가 2인칭으로 사용될 때 낮춤말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당신’이란 말을 하나님께 대해 사용하는 것을 몹시 꺼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종전의 주기도문에서는 아예 2인칭 대명사를 빼버리고 그냥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했다. 왜냐하면 문맥에 의해 자연히 ‘당신의 이름’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개역개정판 주기도문도 마찬가지로 생략했다. 그러나 찬송가공회 새 번역에서는 ‘아버지의’를 다 넣었다. 주기도문의 ‘부름’(호칭)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했으니, 인칭대명사 대신에 보통 명사 ‘아버지의’를 반복한 것이다. 내용상으로는 2인칭 대명사 ‘수’(sou)가 ‘아버지의’를 뜻하는 것은 맞지만, 방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했는데 또 다시 “아버지의”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어의 어법으로서는 불필요한 반복이며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한국어에서는 가능한 한 주어니 소유대명사를 쓰지 않고 생략한다. 그저 문맥에 의해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다. 문맥에 의해 파악이 잘 안 되고 혼동의 우려가 있을 때에만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거나 고유명사 또는 보통명사를 사용한다. 그런데 주기도문의 경우에는 처음 시작할 때 이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냥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해도 혼동의 여지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인칭대명사를 생략하는 것이 한국어의 어법에 맞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는 종전의 주기도문과 개역개정판의 주기도문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태(態)에 관한 것이다. 종전의 주기도문과 개역개정판 주기도문은 수동태(피동형)를 사용했는데, 새 번역은 능동태를 사용했다. 물론 한국어에서는 피동형을 잘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히, -리, -기’와 같은 다양한 피동접미사가 있어서 피동법이 발달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 피동형을 사용하는 것이 좋거나 또는 사용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할 때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것이 잘 드러나는 반면에,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즉, 인간의 책임이 무시되고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처럼 들린다. 새 번역 주기도문 번역자들도 이런 문제점을 느꼈던지, 밑에 주(註)를 달아서 “‘아버지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후약방문(死後藥房文)과 같은 것이다. 번역은 다르게 해 놓고서 바로 이해해 달라는 말이다. 마치 ‘동쪽’이라고 말해 놓고서 ‘서쪽’으로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지만,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십시오.”라고 해 놓고서는 우리 인간의 책임도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할 때에도 인간의 책임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인도해 달라는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가 훨씬 더 좋다고 생각된다.

 

3. [종 전] 나라이 임하옵시며

[개역개정] 나라가 임하시오며

[새 번역]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여기서는 세 번역이 다 다르다. 우선 종전 주기도문과 개역개정판 주기도문은 조사(助辭) ‘이’와 ‘가’의 차이가 있다. 주격조사 ‘이’는 고대국어와 중세국어에서는 널리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앞 음절이 모음으로 끝날 때에는 ‘가’가 사용된다. 주격조사 ‘가’는 16세기 후반에야 겨우 나타났다(이익섭, 「국어학 개설」, 2009, p.298). 어쨌든 오늘날 ‘나라이’는 고어형이 되어버렸다.

이에 반해 새 번역 주기도문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했다. ‘아버지의’라는 소유격 인칭대명사는 불필요하며 번거러운 것이라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오게 하시며”와 “임하옵시며/임하시오며”에 대해서는 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문의 ‘엘떼토’(eltheto)는 3인칭 단수 명령법으로 ‘오소서’(come!)란 뜻이다. 그러면 “오게 하시며”로 번역한 새 번역 주기도문이 더 옳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오게 하시며”는 사역형(使役形)으로서 다른 누구에게 오게 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이 된다. 곧, 하나님께서 오게 해 달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헬라어 ‘엘떼토’는 3인칭 단수 명령형으로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Thy kingdom come.)란 의미이지,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Let thy kingdom come.)이 아니다.

물론 현대 영어에서는 3인칭 명령법이 없기 때문에 영어로 된 헬라어 문법책에 보면 “Let him ...” 식으로 설명해 놓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헬라어에서 2인칭 명령법은 2인칭에 대해 명령하는 것이고, 3인칭 명령법은 3인칭에 대해 명령하는 것이다(기도문에서는 명령법이 사용되는데 기원의 뜻이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22:17에서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에서 ‘올 것이요’와 ‘받으라’는 3인칭 단수 명령법이다. 즉, ‘오라’와 ‘받으라’이다. 따라서 “목마른 자는 오라”는 것이지, “목마른 자가 오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곧 어느 누구에게 “목마른 자로 하여금 오게 하여라.”(Let him who is thirsty come.)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목마른 자 곧 그는 오라.”는 의미이다. 현대 영어의 결함 때문에 3인칭 명령법을 “Let him ...” 식으로 설명해 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역형으로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말은 3인칭 명령법이 있어서 헬라어 3인칭 명령법을 그대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주기도문에서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가 맞는 번역이며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는 맞지 않다. 옛날의 KJV에는 “Thy kingdom come.”으로 번역했으며, 오늘날의 NIV에도 “your kingdom come.”으로 3인칭 명령법을 살려서 번역하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비록 현대 영어에서 일상적으로는 3인칭 명령법을 거의 쓰지 않지만, “Let your kingdom come.”으로 둘러서 표현할 때에는 앞에서 지적한 바의 부정확성과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NIV 번역자들이 주기도문에서는 3인칭 명령법을 살려서 번역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오게 하다’와 ‘임하다’에 대해 생각해 보자. 헬라어 ‘엘떼토’는 직역하면 ‘오라, 오소서’가 맞다. 그런데 ‘임(臨)하다’는 것은 ‘... 위에 오다’ 또는 ‘... 곁에 오다’, ‘가까이에 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1:8에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서 ‘임하다’의 원어를 직역하면 ‘위에 오다’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직역하면 “성령이 너희 위에 오시면”이다. 그런데 ‘위에 오시는 것’은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이 너희에 임하시면”으로 번역한 것이다. 물론 주기도문에서는 ‘... 위에’가 없이 그냥 ‘오소서!’이다. 따라서 ‘임하소서’보다 ‘오소서’가 더 옳은 번역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소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나라가 임하소서”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어감상으로 보면, “나라가 오소서”보다도 “나라가 임하소서”가 더 좋아 보인다. 우리말에서 그냥 “나라가 오소서”라고 하면 뭔가 불완전한 문장처럼 생각된다. ‘어디에’ 오란 말인가? ‘어디로’ 오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되고, 따라서 불완전하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이에 반해 ‘임하소서’라는 단어는 그 단어 안에 ‘우리에게’ 또는 ‘우리 가까이에’, ‘이 땅에’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에’라는 부사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래서 복음성가 가사 중에도 “주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소서!”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종전의 주기도문과 개역개정판 주기도문의 ‘임하다’는 표현이 더 좋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종전 주기도문의 ‘임하옵시며’와 개역개정판의 ‘임하시오며’를 비교해 보자. ‘임하옵시며’는 물론 기존 교인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나 국어 문법적으로는 맞지 않은 표현이다. 존칭을 나타내는 어미 ‘시’는 공손함을 나타내는 어미 ‘오’보다 앞에 와야 맞다. 그렇다면 개역개정판의 ‘임하시오며’가 국어 문법에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4. [종 전]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개역개정]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새 번역]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한국어에서는 불필요하고 번거롭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새 번역은 ‘하늘에서와 같이’ 다음에 ‘이룬/이루어진 것 같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원문에는 ‘이루어지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가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 번역이 더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루어지다’는 동사가 문장 제일 끝에 오기 때문에 뜻이 선뜻 전달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되소서’ 또는 ‘이루어지이다’에 해당하는 동사 ‘게네떼토’(genetheto)가 문장 제일 앞에 나와서 뜻이 분명하다. 따라서 같은 동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지만, 한국어에서는 동사가 제일 뒤에 오기 때문에 사정이 다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종전의 주기도문이나 개역개정판의 주기도문처럼 ‘하늘에서’ 다음에 ‘이룬/이루어진 것 같이’를 덧붙여 준 것이 의미전달을 분명하게 해 준다.

다음에는 ‘이룬’과 ‘이루어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루다’는 동사는 타동사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수동태(피동형)로 ‘이루어지다’로 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개역개정판의 주기도문이 가장 낫다고 할 수 있다.

 

5. [종 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개역개정]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새 번역]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헬라어 ‘세메론’(semeron)은 ‘오늘’(today)이란 뜻이다. 따라서 종전 주기도문의 ‘오늘날’보다 개역개정판과 새 번역의 ‘오늘’이 더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종전의 ‘주옵시고’는 문법적으로 맞지 않고 개역개정판의 ‘주시옵고’가 맞다. 새 번역에서는 그냥 ‘주시고’라고 했는데, 존칭어미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는 존칭어미 ‘시’와 함께 자기를 낮추는 ‘오/옵’이 함께 사용된 ‘주시옵고’가 더 좋아 보인다. 따라서 개역개정판의 번역이 제일 좋아 보인다.

 

6. [종 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개역개정]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새 번역]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종전의 주기도문과 개역개정판 주기도문은 ‘주옵시고’를 ‘주시옵고’로 고친 것 외에는 같다. 그러나 새 번역은 많이 다르다. 우선 ‘죄 지은 자’를 ‘잘못한 사람’으로 바꾸었다. 원문을 직역하면 ‘빚진 자들’이다. ‘빚진 자들’(오페일레타이)은 우리에게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인데, 문맥상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잘못하여(죄를 지어서) 갚아야 할 ‘빚’을 진 자들이다. 그런데 전체 문맥은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 사이에 연관을 짓고 있다. 우리도 하나님께 ‘빚들’(오페일레마타)을 지고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께 ‘빚’(죄) 탕감을 요청할 때에는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진 빚들도 탕감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새 번역에서는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는 ‘죄’라고 하고, 사람에게 대할 때에는 ‘잘못’이라고 하니 서로 맞지 않다. 따라서 종전 번역이나 개역개정판의 번역처럼 둘 다 ‘죄’라고 한 것이 더 좋다. 여기서 ‘빚’은 문맥상 하나님께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죄’를 의미한다(Ridderbos, Mattheus, 6:12 주석 중).

종전 주기도문과 개역개정 주기도문은 “우리 죄를 사하여”라고 했으나 새 번역은 “우리 죄를 용서하여”라고 했다. ‘사하다’와 ‘용서(容恕)하다’는 둘 다 가능하나 각각 장단점이 있다. ‘사(赦)하다’는 법적 성격이 좀 더 강하게 느껴져서 좋으나,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잘 이해할지가 의문이다. 이에 반해 ‘용서하다’는 단어는 일상적으로 많이 쓰며 뜻이 분명하다. 의미전달상으로는 ‘용서하다’가 분명하나, ‘사하다’는 하나님의 죄 용서를 나타내는 데 좀 더 무게가 있다고 생각된다. 주기도문은 한 번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서 조금만 배우면 ‘사하다’는 단어도 좋을 듯하다. 종합적으로 볼 때, 개역개정판의 번역이 제일 좋다.

 

7. [종 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개역개정]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새 번역]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우선 종전의 주기도문과 개역개정판의 주기도문은 ‘마옵시고’를 ‘마시옵고’로 고치고, ‘구하옵소서’를 ‘구하시옵소서’로 고친 것 외에는 같다. 개역개정판의 것이 국어문법에 맞춘 것이라서 이 점에서는 더 좋다.

새 번역은 좀 다른데 “시험에 들게”를 “시험에 빠지지”로 번역했다. 둘 다 대동소이한 뜻이고 큰 차이는 없지만, 미묘한 차이라도 있다면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원어는 ‘에이스페로’(eisphero)인데 영어로 번역하면 “bring into”가 된다. 그렇다면 ‘빠지지’보다도 ‘들게’가 더 낫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빠지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동사는 ‘엠핖토’(fall into)로 따로 있기 때문이다(딤전 6:9).

제일 마지막 부분은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다 “악에서 구하옵소서/구하시옵소서/구하소서”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투 포네루’는 문법적으로 남성으로 볼 수도 있고 중성으로 볼 수도 있다. 남성으로 보면 ‘악한 자’가 되며, ‘중성’으로 보면 ‘악’이 된다. 둘 다 가능한 번역이지만, 그래도 필자의 견해로는 ‘악한 자’가 좀 더 좋아 보인다. 왜냐하면 기도문에서 “우리를 건져 달라”고 간구할 때에는 막연한 중성 명사 ‘악’보다는 실체가 있는 인격체인 ‘악한 자’ 곧 ‘사탄’, ‘마귀’에게서 건져 달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눅 22:31, 벧전 5:8, 욥 1:6-12, 2:1-6, 마 4:1-11). 그러나 이 부분은 세 번역 다 ‘악’으로 했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

그리고 종전의 것과 개역개정판의 것에는 ‘다만’이 있고 새 번역에는 없는데, 원문의 ‘알라’(alla)는 강한 역접을 나타내므로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된다. 이상의 것을 종합해서 볼 때, 개역개정판의 것이 제일 낫다고 생각된다.

 

8. [종 전]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개역개정]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새 번역]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종전의 주기도문에는 뜻이 모호한 ‘대개’가 들어 있는데, 개역개정판 번역과 새 번역에서는 다 빠졌다. ‘대개’는 아마도 중국어 초기 역본에 나타나는 ‘카이’(蓋)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나채운, 「한국 교회 주기도문, 사도신경, 축도 문제 있다」, 1990, pp.122-24). 그러나 원문에는 ‘호티’(hoti)라는 접속사가 사용되어 있는데, ‘왜냐하면’이란 뜻이다. 따라서 ‘대개, 아마, 대략’이라는 뜻의 ‘대개’라는 번역은 맞지 않다. 개역개정판과 새 번역에서는 이것을 생략하였는데, 아마도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를 사용하면 우리말에서는 너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는 ... 이니이다”로 번역하기도 하지만(나채운), 이것도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고육책으로 접속사를 생략해 버렸는데, 뜻은 조금 불분명해졌지만 일상적으로 암송하여 드리는 주기도문에서는 자연스러운 문장 흐름을 위해불가피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새 번역에서는 ‘권세’를 ‘권능’으로 바꾸었는데, 원어의 ‘뒤나미스’(dunamis)는 물론 ‘능력’ 또는 ‘권능’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겠으나 ‘권세’도 거의 비슷한 뜻이다. 어감상으로는 ‘권세’가 ‘권능’보다 더 좋은 듯하다. 특히 새 번역에서는 ‘권능’과 ‘영광’이라고 함으로써 ‘ㅇ’ 받침이 연달아 나와서 운율적으로 좋지 않다. 이런 점까지 고려한다면 ‘권세’가 조금 더 낫다고 하겠다.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는 그 뜻은 같지만, 암송할 때 어감상의 문제가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종전의 번역과 개역개정판의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마지막 부분도 종합적으로 개역개정판의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된다.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종전의 주기도문과 개역개정판의 주기도문, 그리고 찬송가공회에 수록되어 있는 새 번역 주기도문을 상호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종전의 주기도문과 개역개정판의 주기도문 사이의 차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으나, 이 둘과 찬송가공회의 새 번역 주기도문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개역개정판의 주기도문은 종전의 주기도문을 가능한 한 살리면서 현대 국어문법에 맞게 개선한 점이 눈에 띈다.

이에 반해 새 번역 주기도문은 상당히 많이 달라졌으며, 헬라어 측면에서나 국어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많다. 특히 ‘아버지의’를 반복한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우며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다. 또한 헬라어의 3인칭 명령법을 잘못 이해하여 전부 사역형(使役形)으로 번역한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종전의 ‘죄 지은 자’를 ‘잘못한 사람’으로 바꾼 것도 문제이다. 그 외에도 새 번역은 시적 운율과 간결성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교과서식으로 번역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개역개정판의 주기도문이 현재로서는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 내용상으로는 종전의 주기도문에 비해 많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오늘날’을 ‘오늘’로 고치고 마지막 송영 부분에서 문제 있는 ‘대개’를 빼는 등 개선된 것들이 좀 있다. 무엇보다도 현대 국어 문법에 맞게 고친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종전의 잘못된 ‘주옵시고’를 ‘주시옵고’로 고쳤으며, 오늘날 사용되지 않는 주격조사 ‘이’를 ‘가’로 고쳤다. 그리고 능동태로 된 ‘이룬’을 수동태(피동형)인 ‘이루어진’으로 고친 것도 개선된 점이다. 뿐만 아니라 2인칭 인칭대명사(당신의)를 종전 주기도문과 마찬가지로 생략함으로써 우리말의 어법에 맞춘 것도 잘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 외에도 가능한 한 종전의 주기도문의 문구를 그대로 살린 것도 오랫동안 종전의 주기도문에 익숙한 한국 교회 성도들을 고려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는 간구에서 ‘악’은 ‘악한 자’로 번역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악’이라고 해도 내용상 ‘악한 자’를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꼭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고 둘 다 가능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은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를 계속 쓰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어쨌든 주기도는 예배 시뿐만 아니라 공적, 사적 모임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한 번 정하면 오랫동안 바꾸지 않고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신앙고백이나 주기도문 같은 것이 자주 바뀌면, 신앙생활에 혼란을 가져오고 절대 진리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따라서 신중하게 결정하여야 하며, 한번 결정한 다음에는 좀처럼 바꾸지 말아야 한다. 신앙이란 평생 동안 변치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가야 하는 유산이다. 그러려면 성경과 신앙고백, 주기도문도 가능하면 바꾸지 않도록 함이 옳다.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과 주기도문은 수백 년이 지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한다. 세상은 변하지만 하나님은 영존하시며, 그를 믿는 우리의 신앙도 영원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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