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서

▲ 이상규 교수 고신대부총장
‘고신’이라고 불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교회(총회)는 1952년 조직되었고 금년으로 60주년을 맞게 되었다. 오늘 모임은 지난 60년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우리 교단이 나아갈 바를 점평(點評)해 보자는 의미로 준비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고신교회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까? 고신교회가 지향해 온 고신의 이념 혹은 정신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에까지 계승되고 있는가? 이런 점들에 대해 소견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어떤 시대의 교회 혹은 교회사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평가의 규범(norm)은 그 시대의 교회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해왔는가에 있을 것이다. 이 점은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지상명령(마28:19-20)에 분명하게 예시되어 있다. 또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일곱교회에 대한 말씀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예시되고 있다. “말씀을 지키며(본질) 또 (교회의 사명에)충성된 증인”에 대한 칭찬(3:7)은 교회사의 모든 시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고난과 박해를 받아도 그것이 교회의 본질과 사명, 곧 말씀을 지키며 충성된 증인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아름답고도 영광스러운 고난일 것이다. 교회가 비록 사회로부터 비난과 질책을 받아도 그것이 만일 교회의 본질을 지켜가며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불가피한 결과였다면 그것은 감내 할 만한 가치가 있다. 베드로전서 2장 19절의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은혜이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뜻일 것이다.

교회는 십자가와 재림 사이의 하나님 나라 도구로써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할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현존을 보여주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 세상과 분리되어(apart from the world) 있으면서도 세상 속에서(through the world), 이 세상을 변화시키면서(by converting the world)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신앙공동체이다. 우리가 속한 고신 교회는 오직 하나 뿐인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동일한 권속이며 동일한 시민이다(엡2:20). 우리 교회도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교회이며, “외인도 아니며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다.” 이런 확인과 함께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교회의 초기 역사와 이념 혹은 정신을 점평해 보는 일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재 확인하는 ‘오늘의 개혁’을 위해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1. 고신교회 형성의 역사,신학적 배경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노회라는 이름으로 1952년 고신교회가 조직된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고신교회의 이념이나 정신을 헤아리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고신교회의 형성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고신 교회 형성의 배경(historical context)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1) 신학적 변화, 진보신학의 대두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주로 선교사들에 의해 주형 되었다. 이런 점에서 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은 ‘한국적 신학’(Korean theology)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신학’(theology in Korea)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사에서 초기라고 볼 수 있는 1920년대 이전에 내한하였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며 복음적이었고, 장로교 선교사들의 경우 전통적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WCF)를 따르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 혹은 개혁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흔히 인용되고 있지만, 미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은 1911년 이전의 주한 선교사들의 신학에 대해 이렇게 말한바 있다. “개국 이후 첫 25년간 내한한 선교사는 전형적인 푸리탄형의 선교사였다. 이들은 1세기 전 그들의 조상들이 뉴 잉글랜드에서처럼 안식일을 지켰으며 술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에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 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과 성경 비평에 대해서는 그들은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했고 저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했다.”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에 대해서는 ‘철저한 근본주의,’ ‘정통적 복음주의,’ 혹은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진보적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주의 신학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점은 1890년에 내한한 마포삼열(Dr. Samuel A. Moffett, 1864-1939)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1909년 첫 25년간(1884-1909)의 한국선교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교부와 교회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투철한 신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열성적인 복음정신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1)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1934년 마포삼열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어떤 신신학자들은 나를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다. ... 근래에 신 신학이니, 신 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하든지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 2) 1934년은 미국 장로교회의 한국선교 5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한국교회의 신학적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포삼열의 이 두 가지 진술은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이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1930년대 한국교회에는 다른 전통의 신학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1930년대 한국교회에는 ‘다른 전통들’, 곧 새로운 신학의 대두를 보여주었다. 무교회주의, 신비주의 신학도 이 시기 대두되지만 특히 진보적 신학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진보적 신학’이란 역사적 기독교신앙을 부인하는 신학을 의미하는데, 이 신학은 주로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들과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한국인들에 의해 유입되었다.3) 이런 새로운 신학은 이전시대에는 일부지역, 곧 캐나다 선교부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제기되었으나 1930년 이후 한국교회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그 첫 조짐이 성경관의 변화였다. 성경관의 변화는 신학적 변화를 보여 주는 구체적인 증표라고 할 수 있는데, 완전 영감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성경 비평학이 도입되었다. 1934년에는 모세의 창세기 기록설이 부인되었고고린도전서 14:33-34절 해석과 관련하여 여권(女權) 문제가 제기되었다. 또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사건(1935)을 중심으로 신학적 견해차가 분명하게 노정되었다.

당시 진보적 입장을 견지했던 인물은 김영주(金英珠), 김춘배(金春培), 채필근(蔡弼根), 송창근(宋昌根), 김재준(金在俊) 등이었다. 반대로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던 일물은 강병주(姜炳周), 길선주(吉善宙), 박형룡(朴亨龍) 등이었다. 1930년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의 실재는 김재준과 박형룡의 논쟁에서 분명하게 예시되었다. 양 입장을 대변, 대표하는 이 두 사람의 논쟁은 한국 장로교사상 최초의 신학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논쟁은 한국에서의 신학적 경계선을 보다 구체적으로 예시해 주었다.4)

1935년 이후 장로교 총회에서 직접적으로 진보신학이 문제시 되지는 않았으나 한국교회의 신학적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었고, 장로교회의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었던 장로교신학교는 폐교되었고(1938), 보수주의 지도자들은 탄압을 받거나 투옥되었고 일부는 목회현장에서 인퇴(引退)하거나 망명의 길을 갔다. 한국교회 부수주의 신학에 영향을 끼쳤던 선교사들도 1940년 귀국하거나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1940년대 이후 진보적 신학의 대두와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이때의 상황을 김양선(金良善)은 “보수주의는 붕괴되고 지금까지 저들의 손에 있던 교회의 지도권은 자유주의적 인사들에 의해 신속히 대치되었다.”고 했다. 비교적 일제 정책에 순응적이었던 이들은 1940년 4월 19일 서울 숭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를 개교하였다. “복음적 신앙에 기(基)하여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되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5) 첫 전임 교수는 김재준, 윤인구, 그리고 서울의 일본인조합교회 목사였던 미야우찌 아키라(宮內 暁)목사였고, 1940년 8월 현재 재학생은 53명이었다. 이미 있던 평양의 장로교신학교가 폐교되는 현실에서 조선신학교가 개교될 수 있었던 점은 이 신학교의 태생적 한계를 암시해 준다. 소위 외국선교사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반 선교사)를 주장한 김제준의 입장은 1940년 이후 일제의 중요한 정책이었던 세계교회로부터의 한국교회 이탈정책과 일치하고 있었다.

정리하면, 1940년대는 보수주의 신학의 폐허 위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그 지경을 넓혀 갈 수 있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조선신학교는 96명의 졸업생을, 1945년 12월 말까지 125명을 배출했다.6) 해방 당시 장로교계 신학교는 조선신학교 뿐이었고, 1946년 6월 11일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한 ‘남부총회’는 이 조선신학교를 장로교회 직영 신학교육 기관으로 승인했다.7)

이런 상황이 해방 후 고려신학교 설립을 제촉했던 현실적인 이유였고, 곧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은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의 중요한 신학 이념이 된 것이다.

1)“The mission and the church have been marked preeminently by a fervent evangelistic spirit, a thorough belief in the Scriptures as the Word of God, and in the Gospel message of salvation from sin through Jesus Christ.”

2)“Today some modernists criticize me as a being too conservative --- There are those who go about talking a new theology, a new Gospel, today, but let us beware of them. Even though the Korean missionaries should all die or leave the country, let the brethren of the Korean church continue to preach the same Gospel as forty years ago.”

3)미국 정통장로교(OPC) 선교사였던 하비 콘(Harvie Conn)은 “한국 장로교 신학에 관한 연구”(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에서 1930년대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요인을 다음과 같은 4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A. 캐나다 연합장로교 선교부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적 선교사인 서고도(W. Scott), 프레지어(Frazier) 등의 영향, B. 미국 북장로교의 신학적 좌경에서 오는 자유주의 신학 영향, C. 일제 식민지배기 일본을 통한 바르트, 부른너 등의 자유주의 사상의 유입 및 한국인의 일본유학을 통한 자유주의 신학의 영입, D.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지역 분할정책(Comity Arrangement)의 조정으로 일부 지역이 자유주의 신학의 성역화가 됨을 들고 있다.

4)김재준은 1933년 일본과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남궁혁에 의해 장로교신학교 교수로 천거되었으나 그의 신학사상 때문에 거부되었다. 그러나 남궁혁의 배려로 「신학지남」(神學指南)의 정규 기고자가 되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하기 시작했다. 즉 그는 1933년부터 35년까지 8편의 논문을 기고하였는데, 이 글들에서 그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공격, 비판하였다. 이 때 1928년 미국 유학에서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던 박형룡은 김재준의 신학적 견해에 의의를 제기하고 신학지남 편집위원직을 사퇴하였다. 이렇게 되어 이 두사람은 1935년까지 첨예하게 대립했다. 김재준은 장로교 총회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고, 신학지남에도 더 이상 기고 할 수 없게 되었다. 1935년 이후 신학적 문제가 장로교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된 일은 없다. 비록 자유주의 신학적 견해를 견지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당시 한국교회는 보수주의적 경향이 강했으므로 한국교회적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여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회 회의록(1940. 9), 43.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신학원 이사장 함태영 명의의 보고서는 일본어로 작성되었는데, 목적, 수업연한, 주요교과목, 입학 자격, 정원, 학생현황, 교사, 운영비,이사 및 교직원 등에 대해 보고했다(43-44).

6)조선신학교 졸업생 명단은 『한신대학 50년사』(한신대학, 1990), 497, 『한신동문회 주소록』(한신대학 동문회, 1979), 14-18을 참고하였음. 졸업생 수는 1회(1942.3.31): 11명, 2회(1942.12.2): 48명, 3회(1943. 12.3): 23명, 4회(1944.12.2):14명, 5회(1945.12.12):26명이었다.

7)이 때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신학교를 총회가 직영키로 하고 대학령에 의한 신학교로 하기로 함.” 이 결의문은 총회록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총회회의록』, 11권(1946-1956)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n.d.), 1-6참고. 이 총회에 주남선 목사가 총대로 참석하였다.

 

2) 신사참배 강요와 반대운동

일본의 조선침략은 오랜 역사를 거처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 운양호 사건(1875), 개항(1876), 임오군란(1882), 청일전쟁(1894-5), 노일전쟁(1904-5)을 거치면서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불리는 불평등조약을 통해 조선의 주권을 강탈했고, 1910년에는 조선을 강점하였다. 이때로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탄압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1935년 이래로 강요된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였다. 신사참배는 1936년부터 기독교 학교에 강요되었고, 1938년부터는 교회와 기독교 기관에도 요구되었다.

일본은 서구적 개념의 문예부흥이나 종교개혁 혹은 시민혁명이나 산업혁명 등을 경험해 보지 못한 전 근대적, 반 봉건적 질서 위에서 군수산업을 통해 성장한 왜곡된 근대 국가였다. 즉 전 근대적 사회질서 위에 선진국가의 자본주의 제도만 도입한 나라였기 때문에, 서구적 자유주의나 개인주의, 자유주의나 인권 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이처럼 정신적 토대 없는 경제 발전과 개인(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인간관 위에 수립되는 국가관은 파시즘 체제 혹은 전체주의적 침략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일본은 국가지상주의(國家至上主義), 천황(天皇)의 신격화와 같은 독특한 국가이념을 수립하게 되었고, 일본의 조선 지배는 식민국가의 모든 것, 심지어는 종교적 신념까지 박탈하는 전체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1910년 이래로 일제의 기독교 정책은 일면 탄압, 일면 회유 등 양면적인 것이었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근대 시민의식의 계몽은 물론 민족의식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또 교회라는 전국적 조직과 학교, 자선사업 등을 통해 국민적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통해 구미제국과 교류하고 있었음으로 국제여론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 총독부는 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식민통치에 이용하든지, 아니면 기독교를 탄압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켜야 하는 숙명적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신사참배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강요되었다.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가 득세하여 1931년에는 만주침략을 강행하였고, 1932년에는 소위 5.15사건을 통해 군국주의가 권력을 잡은 후 소위 전시체제로 돌입하였다. 일제의 소위 대동아공영권 확보라는 미명 하에서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이라는 이름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내선일체(內鮮一體), 황민화 정책(皇民化政策)의 일환으로 일면일신사주의(一面一神社主義)를 강행하여 전국에 신사(神社, 神祠)를 건립하고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한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국민적 요구, 곧 국가의례라는 이름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강력하게 반대, 저항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이 점증해 감에 따라 천주교(1935), 감리교(1938)는 일제의 요구에 굴복하였고, 교세가 약했던 성결교(1941), 성공회(1942), 안식교(1943), 침례교(1944) 등 군소교단들도 해산되거나 해체되었다.

최대의 교파인 장로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 요구를 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용이주도하게 교회의 저항을 약화시켜 갔다. 주기철 목사 등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예비 검속하였고, 친일 인사를 통해 교계 지도자들을 회유하는 등 교계를 분열시켰다. 1938년 9월에는 강압적으로 신사참배안을 총회에 상정하여 불법적으로 가결케 했다. 결국 장로교마저도 1938년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한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함으로써 결국 굴종의 길을 갔다. 신사참배가 장로교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가결되자 불참배자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고, 배교와 굴욕행위도 더욱 심해졌다. 1938년 이후 소위 시국(時局)인식이란 이름 하에 행해진 기독교계의 친일행각은 암울한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1942년에는 친일적 기독교단인 ‘조선혁신교단’(朝鮮革新敎團)이 조직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조직적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후일 고신교단의 형성에 있어서의 또 하나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는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이 건립되던 해인 1925년경부터 있어 왔으나 1938년 장로교의 신사참배 가결 이후에는 조직화되고 구체화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주로 이북지역(평안도 중심)과 부산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다. 이북에서의 경우 지도적 인물은, 고흥봉(高興鳳), 박관준(朴寬俊), 방계성(方啓聖), 안이숙(安義淑), 오유선(吳潤善), 이기선(李基宣), 채정민(蔡庭民) 등이었고, 경남의 경우 손명복(孫明福), 이현속(李鉉續), 주남선(朱南善), 최덕지(崔德智), 최상림(崔尙林), 한상동(韓尙東) 등 이었다. 다수의 주한 선교사들도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반대자들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후원하였다. 한부선(Rev. Bruce Hunt), 함일돈(Rev. F. Hamilton) 등 복음주의적인 미국선교사들과 마라연(Dr. Ch. McLaren), 서덕기(J. Stuckey), 태메시(M. G. Tate), 허대시(D. Hocking) 등 호주 선교사들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근원적 이유는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신앙양심과 신교의 자유를 억압, 탄압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신교(信敎)의 자유와 영적(靈的) 자유를 주장하고 신앙의 순수성과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한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개인적인 반대, 조직적인 불참배운동의 전개, 그리고 ‘합법적 투쟁’으로 불리는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일본 정계 요로에 호소, 진정하는 방법 등이 있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약 2,000여명이 투옥되었고, 이중 35명이 순교 하였다. 끝까지 투옥된 이들은 1945년 8월 17일 저녁 11시 경 석방되었다. 평양 감옥에서 석방된 손명복, 주남선, 한상동 등을 비롯한 신사참배 거부자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해방 후 고신교단 형성의 인적 중심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신앙적 투쟁, 곧 생활의 순결과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려는 정신은 후일 고신교단 형성의 이념적 근간이 되었다.

 

3) 해방 후의 교회쇄신(Church Renewal) 운동

해방된 조국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교회를 쇄신하는 일이었다. 일제하에서 장로교는 ‘일본 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1943.5), 감리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1943.8) 일본기독교에 예속되어 있었다. 1945년 7월 19일에는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등의 교파를 망라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되어 일본기독교에 완전히 예속되었다. 중앙 조직은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통리와 부통리를 맡았는데, 통리가 장로교의 김관식(金觀植, 1888-1848) 목사였고 부통리가 감리교의 김응태(金應泰, 1890-1971) 목사였다. 지방에는 교구장을 두었고, 조선 8도 외에 중국에도 지부를 두었다. 이들이 업무를 시작했을 때가 8월 1일이었다. 해방되기 꼭 15일 전이었다.

해방 이후 교회 재직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장로교의 경우, 1946년 말까지 지방별로 노회가 재건되었고, 1946년 6월에는 ‘남부총회’가 소집되었다. 즉 1946년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11개 노회 54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 승동교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남부총회’가 조직된 것이다. 남한지역에서만이라도 총회를 구성하여 한국장로교회를 재건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 때 재야 교역자였던 배은희(裵恩希, 1888-1966) 목사가 회장으로, 함태영(咸台永, 1873-1964) 목사가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비록 해산된 조직을 재건했으나 진정한 의미의 교회쇄신은 아니었다. 김양선은 이렇게 썼다. “새로 총회를 조직하여 일견 교회의 주도권이 이전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지도자들의 손에서 떠난 것 같이 보였으나, 교회의 주도권에는 실제적 변화가 없었다.” 8) 이 총회에서, 장로교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1940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신학교로 가결했다. 9)

8)김양선, 『기독교해방십년사』, 52.

9)조선신학교에 대한 결의는 후일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취소는 그 후 제34회 총회(1948)와 제38회 총회(1952)에서 반복되었다.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던 30여명의 교계 지도자들이 8월 17일 평양형무소에서 석방되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 쇄신운동이 일어났다. 북한(평양)에서는 1945년 9월 20일, 5개항에 이르는 교회재건 원칙을 발표하고 교회 쇄신을 의도했다. 그러나 친일적 신사참배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성공적으로 수행되지 못했고, 특히 김일성 공산정권의 탄압으로 좌절되었고 오늘날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다.

서울에서의 경우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투쟁했던 인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 쇄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46년 6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南部總會)’를 조직함으로써, 남한지역 장로교 총회를 재건하였을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한국교회 재건운동은 경남노회(부산 경남지역)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경남지방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지였고,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등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남노회 지역 교회쇄신운동의 중심인물은 이약신 주남선 한상동 목사 등이었다. 평양에서 출옥한 주남선 목사는 거창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1945년 11월에 남하하였고, 한상동 목사는 평양산정현교회에서 잠시 봉사했으나 1946년 3월 남하했다. 이들이 남하하기 전에 경남지방에서는 교회재건과 정화를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영적 쇄신이나 정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1945년 9월 18일 부산진교회당에서 경남 재건노회가 조직되었다.10) 1943년 5월 5일 일제에 의해 장로회 총회가 해산됨에 따라 경남노회가 그해 5월 25일에 해산되었었는데, 이 해산된 노회를 다시 재건한 것이다.11) 이때에는 일제하에서 범한 죄과에 대한 자숙안이 상정, 결의 되었다. 이 안은 최재화 목사를 중심으로 강주선, 김상순, 윤술용 목사 등에 의해 제안된 것이었다. 그러나 자숙의 대상인 친일적 인물들은 교묘한 수단으로 노회의 영도권을 장악함으로 자숙안은 실행되지 못했다. 김양선은 이렇게 썼다. 자숙안은 “가장 중요한 안건으로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교권주의자들은 교묘한 수단을 사용하여 노회의 영도권을 장악함으로서 암암리에 자숙안을 폐기시켰다.”12) 이때로부터 노회는 심각한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교회 쇄신운동은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길창을 비롯한 10여명의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우리가 양심적으로 이미 해결한 것인데 해방이 되었다 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라고 하고 자숙안에 반대하였다.13)

10)김양선, 149. 그러나 이운형은 경남제건노회로 모인 날이 9월 12일이라고 말하고, 회장 심문태, 부회장 최재화, 서기 강성갑, 부서기 김상권, 회계 구영기, 부회계 김상세 목사였다고 한다. 이인숙편,『백광일지』(장로교출판사, 2006), 173.

11)경남노회는 1943년(소화 18년) 5월 25일 “경남노회는 발전적으로 해소(解消)한다”고 발표함으로서 해산되었고,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경남교구회로 개편되었고 김길창 목사는 해방 때까지 교구장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3년만에 다시 경남노회가 조직된 것이다.

12)김양선, 149.

13)한상동, “현하 대한 교회에,” 『파수군』2호(1949. 4), 19.

 

이런 상황에서 1945년 12월 3일 부산진교회에서(그리고 1946년 2월 19일 속회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경남노회 제47회 정기노회가 개최되었다. 주남선 목사도 이 노회에 참석하였다. 이 노회에서 자숙안에 대한 논란이 심화되자, 노회원은 자숙안을 추진하지 못한 재건노회 임원들의 총사퇴을 요구하고,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에 천거했다. 주남선 목사는 노회의 평화적인 재건은 법보다 은혜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손양원 전도사를 강사로 부흥집회를 한 후 노회를 개회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김길창, 배성근(裵聖根) 등은 자기들의 각성을 의도한 집회라 하여 참여치 않았다.

한상동, 주남선 등은 일제 하에서의 범과를 청산하고 바른 교회운동, 곧 영적쇄신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친일적 인사들의 조직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자숙해야 할 인사들은 출옥한 인사들을 비난하고 자기변호에 열중하고, 교권 장악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1946년 12월 3일 진주 봉래동 교회에서 모인 경남노회에서는 김길창(金吉昌) 목사가 노회장으로 피선되었고,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가결하였다. 이 노회에서는 고려신학교의 인정 취소론을 제기하고 신학생 추천도 취소할 것을 결의하였다.14) 이때 한상동은 “불손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가지 탈퇴한다.”고 선언하고 퇴장했다.15) 이렇게 되자 평신도들의 거센 항거가 일어났다. 1947년 1월에는 초량(草梁), 문창(文昌), 부산진(釜山鎭), 거창읍(倨昌邑), 영도(影島), 남해읍(南海邑)교회 등 6개 교회가 김길창 목사 측을 반대하였고 경남노회 소속 67개 교회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한 교회재건 운동을 지지하였다. 이렇게 되자 김길창 목사는 압력에 굴복하여 노회장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교회쇄신운동은 반대에 직면하였고 결국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당시 경남노회에서 친일적 교권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이 숫적으로 우세하였다. 또 이들은 서울에서 조직된 남부총회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남부총회의 중심인물 또한 대체로 친일 전력의 인사들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믿음을 지켰던 한상동, 주남선 등은 교회쇄신을 위해 힘겨운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의 영적투쟁, 곧 회개와 자숙, 생활의 순결과 교회의 거룩성 확보는 고신교단 형성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14)김양선, 152.

15)김양선, 152.

 

2. 고려신학교 설립과 고신교(단)회의 조직

1) 고려신학교의 설립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던 주남선, 한상동 두 목사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한국 교회재건과 신학교 재건을 구상하고 있었다. 신사참배와 같은 시련을 이겨 내지 못한 것은 신학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다운 신학교육 없이는 한국교회를 재건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해방과 더불어 석방된 이들은 이 구상에 따라 1946년 5월 20일 신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6월 23일부터 8월 10일까지 진해에서 제1회 신학강좌를 개설하였다. 이 강좌가 고려신학교 개교로 이어지는 신학교육의 시작이었다. 신학강좌라고 하지만 실상은 단기 신학교였고, 수강생은 63명이었다. 이들 중 다수가 후일 고려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고신교단의 주류로 편입하게 된다.

해방 당시 장로교계 신학교는 조선신학교 뿐이었다. 그러나 주남선,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자유주의적 입장의 조선신학교에 한국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고 보았다. 특히 남부총회는 조선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가결했는데, 이런 현실에서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잇는 개혁주의적인 신학교육 기관의 설립을 긴박한 과제로 인식했다. 이것이 고려신학교 설립을 서두른 직접적이고도 현실적인 동기였다. 고려신학교가 설립되고 1947년 10월 박형룡 박사가 교장으로 부임해 왔을 때 서울 조선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51명의 학생들이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고려신학교로 이적했는데, 이것은 고려신학교의 신학적 성격과 존재의의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고려신학교는 부산진 좌천동의 구 일신여학교에서 개교되었으나 1956년 4월 현재의 송도에 교지를 마련하고 교사를 이전하였다. 박형룡(朴亨龍) 박사가 초대 교장으로 봉사하였고, 박윤선(朴允善) 박사는 신학교 설립 때로부터 교수로 참여하여 1948년 5월 이후에는 교장으로 1960년 10월까지 만 14년간 봉직했다. 개혁주의 신학교육을 표방했던 고려신학교는교회재건운동과 영적 쇄신운동의 동력원이 되었고(1946-1952), 고신교단 형성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설립자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고려신학교 설립은 불가피하게 고신교회의 성립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고려신학교 인물들이 고신교회(단)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신학교는 고신교회(단)의 예비 조직(Shadow organization)이자 모체였다고 할 수 있다. 

 

2) 경남노회의 분열과 총회로부터의 단절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해방 후 경남지방에서는 교회재건을 주장하는 인사들(주로 출옥한 신사불참배론자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자)과 신속한 변신을 통해 교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자들(주로 친일적인 교권주의자들과 이들의 동조자)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인적 구성으로 볼 때 전자는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회개와 자숙을 통한 교회 쇄신을 주장하였으나, 후자는 교회재건 원칙을 거부하고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므로 교권을 장악하려는 이들이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경남노회는 한상동 목사 등 고려신학교와 출옥성도를 지지하는 일파, 김길창 목사 등 교권주의자를 지지하는 일파,16) 심문태(沈文泰), 노진현(盧震鉉), 이수필(李秀弼) 목사 등의 중간파로 분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12월 7일 마산문창교회 별관에서 개최된 경남노회 제50회 정기노회는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분기점이 된다. 이 노회는 논란의 와중에서 임원개선을 하지 못하고 3일을 보내고, 결국 김길창에 이어 김만일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임하였다.17) 지난 노회의 결의에 따라 경남노회 신학부장이자 고려신학교 조사위원이었던 신문태 목사는 고려신학교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를 했으나 고려신학교 인정 취소를 재확인하였다.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친일적 인사들이 주도권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한대식 목사는, 노회석상에서 일제시대에 범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다. 자신은 ‘미소기바라이’18)를 한 사람이며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을 예식으로 행하는 이 의식을 송도 앞바다에서 7번이나 행하는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다. 회중은 숙연해 졌다. 이 때 좌석에 않아 있던 김길창은 “미소기바라이가 무엇인가? 나는 들어보지도 못한 말일세”라고 했다. 그의 가증함을 보고 참지 못한 한상동은 신앙과 양심을 저버린 김길창을 제명해야 한다고 동의하였을 때 곧 제청이 뒤따랐다. 사태가 불리해지자 김길창은 노회장을 이탈하였다. 노회장 김만일 목사는 본인이 현장에 없다는 이유를 들어 가부를 묻지 않고 다음 회기 시까지 유보한다고 선언했고 노회는 이를 받아드렸다.19) 

노회에서 제명 위기에 몰린 김길창은 1949년 2월 19일자 별도의 경남노회 조직을 위한 소집통지서를 ‘발기인 대표 권남선’의 이름으로 발송했다. 그리고는 예정에 따라 3월 8일 항서교회에서 김길창을 비롯하여 권남선, 김영환, 배성근, 손순열, 윤술용, 지수왕 목사 등 10여명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별도의 ‘경남노회’를 조직하고 이를 51회 노회로 명명했다. 20)노회 조직과 함께 4월에 있을 총회에 파송할 총대를 선출했다. 이들이 기존 노회를 이탈하여 불법적인 별도의 경남노회를 조직한 것은 친일인사들의 자기 보위를 위한 수단이었다. 기존의 경남노회를 이탈한 별도의 노회(私租老會) 조직은 경남지방에서 일어난 대수롭지 않는 사건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것이 경남노회의 분열이자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시작이었다.

1949년 3월 8일에는 예정대로 마산 문창교회에서 경남노회 제51회 정기노회가 개최되었다. 이것은 제50회 노회에서 정기노회를 매년 3월과 9월 연 2차 회집하기로 한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부산 항서교회에서 김길창 목사가 별도로 조직했던 노회가 불법 노회임을 깨닫고, 마산 문창교회에서 모인 노회에 참석하여 사과서를 낸 목사들도 있었다.21) 이 노회에서는 김길창의 사조노회에 동참한 권남선, 김길창, 김만일, 김영환, 김응진, 김재규, 배성근, 배신환, 백운학, 손순열, 윤술용, 지수왕 목사를 제명했다.22)

이 사조노회와 구별하기 위해 기존의 경남노회를 ‘경남법통노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1949년 3월부터 경남노회가 ‘경남법통노회’가 되지만 이 용어가 최초로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50년 5월이었다.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제36회 총회(1950. 4)가 끝난 후 총회장과 경남노회 특별위원장, 그리고 제36회 총회 총대에게 보내는 노회장 이약신을 비롯하여 박손혁, 한상동, 권성문, 김을길, 송상석 명의의 진정서에서 ‘경남법통노회’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23) 제36회 총회에서 마산에서 모였던 본래의 노회를 인정하지 않자 우리가 정통성을 계승하는 법통 노회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때부터 ‘경남법통노회’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제36회 총회가 혼란가운데 정회한 후 2개월 6.25동란이 발발했다. 그래서 총회를 속회하지 못하고 지내던 중 1951년 5월 25일 부산중앙교회에서 속회되었다. 이 총회에서 다시 ‘법통노회’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경남지방 특별위원회는 36회 계속총회(속회)에서 경남노회 문제를 보고하면서, 고려신학교 중심 인사들의 노회 대표를 만나 청취한 의견을 소개하면서 “마산서 회집한 노회가 법통노회인즉 기타 불법으로 조직된 노회를 귀속케 하여 주실 것”을 요구했다고 보고하였다.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인사들은 36회 총회가 열리기 전인 1950년 3월 마산 문창교회에서 노회를 개최하였는데(노회장 이약신) 이를 두고 ‘마산측’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24)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 고신측의 경남노회를 여타의 경남지방 노회와 구별하기 위해 경남법통노회라고 칭하게 되었고, 이 용어는 1950년 초부터 사용된 것이다.  

16)이 당시 김길창을 지지했던 인사들로는 권남선, 김광수, 김만일, 김석진, 김영환, 박군현, 박창근, 배성근, 백운학, 진종학 목사 등과 김상욱, 김찬서, 백시돈, 이의석 장로 등이었다.

17)김석진,『한세상 다하여』(광명출판사, 1972), 180. 이 당시 노회록은 소실되었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 부산노회 100회사(통합)』에서는 노회장을 노진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은 노회록이 소실된 가운데 오측으로 보인다.

18)한자로 계불(禊祓)인 신도의 정결예식인데, 정확한 발음은 ‘미소기하라이’이지만 통상 ‘미소기바라이’라고 말해왔다.

19)경남노회 제50회 정기노회록.

20)마산문창교회 청년면려회,『회보』12호(1949. 4. 25), 3. 참고.

21)이들이 강주선, 김봉갑, 김석진, 김재유, 김종세, 양이득, 이영한, 진종학 등 8명의 목사들인데, 사과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남노회장 좌하, 제 51회를 앞두고 같은 날 부산성경학원에서 뜻이 맞는 목사, 장로들이 다른 노회를 모이겠다는데 서명날인 했으나 그 후 그 일이 불법 인줄 알고 50회 결의대로 1949년 3월 8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모이는 노회가 법통 인줄 알고 이 자리에 출석하여 사과하나이다.”

22)개교회가 발간하는 마산문창교회 청년면려회의 기관지,『회보』12호(1949. 4. 25)에서 이 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 교회 안에 비 신앙적이며 비양심적이며 교회의 법을 무시하고 교회 안에서는 물론 세상에서도 비난과 손꾸락질을 받고 있던 몇몇 목사들이 지난 3월 8일 부산에서 모여서 수십년의 역사를 가진 경남노회를 계속한 제51회 노회라 자칭하고 거기서 여러 가지 노회적인 행동과 결의를 하여 각 교회에다 결의사항 인쇄물을 노회촬요라고 보내고, 상회부담금을 청구하며, 총회에다 총대명부를 보내는 동시에 여러 사람이 서울에 있는 총회관계자에 가서 법통노회라는 승인을 얻고저 백방계책과 활동을 하고 있을 때에 마침 마산에서 모인 진짜노회의 보고가 채택되었으니 어린 아이라도 가히 그 참과 거짓을 분간할 수 있거든 누가 이 가짜인 불법집회를 노회로 인증하리오. 결국 불법한 모든 계교가 허사가 되고 말았으니 어찌 가소롭고 또한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1951년 3월 15일 부산시 대청동 소재 중앙교회에서 회집한 친 김길창 계 제52회 경남노회에서는 제51회 노회에서 재명 된 자 중 배성근, 윤술룡을 제외한 10사람의 해벌을 결의했다.

23)1950년 5월자로 발표된 성명서 참고.

24)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총회회의록 11』(1946-1956), 110.

문제는 경남노회의 분열에 대해 남부총회는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1950년 4월 대구제일교회서 모였던 제36회 총회는 경남노회 분열과 총대권 문제 조선신학교 문제 등으로 극도의 대립으로 혼란했고,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경찰이 투입되는 등 혼미를 거듭했다. 총회장 최재화목사는 “울어도 못하네” 찬송으로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했으나 무위로 끝나자 비상정회를 선포하고 산회했다. 두 달 후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이 일어났다. 이듬해 5월 피난지 부산의 중앙교회당에서 총회가 속회되었다. 이때의 총회도 긴장이 감돌았다. 총회장은 권연호 목사였다. 수태수습이라는 이름으로 입장권을 발부하였고 방청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총회에서 경남법통노회 총대들은 입장이 거부되었고, 언권 요청마저도 무시된 채 총회에서 축출 당했다. 김양선은 이렇게 썼다. “일선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 임시 수도 부산에 피난 중에 있을 때에 눈물을 먹음고 모인 성회이었으나, 총회의 주도권을 가진 수삼(數三)의 교권주의자들과 그 배후에서 암약하는 수삼 기회주의자들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몰각(沒却)한 교권적 행동 때문에 출옥성도를 중심한 고려신학교 측이 제외된 경남노회가 승인되어 마침내 고려신학파는 총회의 문외로 쫓껴나 저들만의 노회를 조직하였고..” 고려신학교 측은 ‘저들만의 노회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경남(법통)노회에 남아 있었을 따름이다.

비록 총회로부터 부당하게 축출되었으나 경남(법통)노회는 교회분립을 원치 아니하였다. 이들은 총회에서 축출된 다음 해인 1952년 4월 29일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7회 총회에 다시 총대를 파송하고 총회와의 관계 정상화를 시도했다. 이 점은 후에 고신총회를 조직했던 이들이 분열을 원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총회에 경남노회장 김석진 목사는 “고신파는 본 총회와 상관이 없다는 점을 교회에 선언하여 달라”고 헌의 하였고, 총회는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 단체와 총회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재언명으로 경남(법통)노회를 완전히 축출하였다. 총회로부터의 축출이 재확인 된 것이다. 이 당시 경남노회 지역의 교회는 344개 처였는데, 이중 반(反)고신 노회인 ‘별노회’에 속한 교회는 58개 처로 전체 교회의 14%에 불과 했다. 절대다수인 85%의 교회가 ‘경남법통노회’를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25)

 

 

3) 고신교(단)회의 조직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로부터 부당하게 축출된 인사들, 곧 고려신학교를 중심의 경남법통노회는 일년 간 총회와 관계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그것 마져 무산되자 경남법통노회 인사들은 별도의 조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당에 모였다. 제57회 경남법통노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 회의의 참석자는 50명의 목사와 37명의 장로였다. 이들은 ‘총노회’ 조직을 결의했다. 이때 불렀던 찬송이 ‘이 세상 빛된 예수’였다. “이 세상 빛된 예수여 내 마음에 항상 비추사 어둠을 멀리하시고 주 낯을 보게 하소서. 이 눈에 잠이 올 때 엎드려 주께 비는 말 이 곤함 몸이 쉼같이 내 영혼 쉬게 합소서.” 이때가 밤 11시였다. 임시회장 이약신(李約信)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총로회에서 설립 취지와 목적을 발표하였다.  

취지: 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異) 교파적으로 흐르므로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 장로회 총회로 계승하기 위하여 총로회를 조직함.

목적: 전통적인 대한 예수교장로회 정신을 지지하는 전국교회를 규합하여 통괄하며 개혁주 의 신앙운동을 하여 법통노회를 장차 계승키로 함.  

이것은 고신교단의 출발이었다. 이날 이약신(李約信) 목사를 회장으로, 한상동(韓尙東) 목사를 부회장으로, 홍순탁(洪順卓) 목사를 서기로, 오병세(吳秉世) 목사를 회록서기로, 윤봉기(尹奉基) 목사를 부서기로, 주영문 장로를 회개로, 김인식 장로를 부회개로 선출했다. 이 당시 고신교단에 속한 교회는 320여개 교회였는데, 이중 90%가 부산. 경남 지역에 위치한 교회였다. 총로회에서는 한국교회가 범한 신사참배의 죄를 자백하고 자숙하기 위한 3주간의 특별집회를 갖기로 결의하였다. 3주간의 자숙의 기간을 보내고 1952년 10월 16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노회’ 발회(發會)를 공식 선포하였다.

고신파라는 이름의 새로운 교회(단)가 형성되자 부산 경남 대구 경북지역에서는 연속적으로 교회 분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산 구포교회(심문태 목사시무)의 경우 고신파를 지지하는 6명의 신자들, 곧 김순연, 배진택, 이정자(애린원 한정교 목사의 부인), 정금이, 최수남 등 5명의 집사들과 고려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한동석 신학생은 교회를 떠나 구포제일교회를 설립했다. 대구에서는 서문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이 제명을 당한 후 교회를 나와 서문로 교회를 설립했다. 경남노회 제54회 정기 회의록에서는 “진동, 남산, 사상, 통영읍, 생초, 의령 신안교회에서는 소수가 분열해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26) 

25)교회 수 통계는, 기독청년면려회 편,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 교회 및 교역자 명부(1951. 4)에 근거함.

26)부산노회 회의록 편찬위원회, 『부산노회회의록』(부산노회, 1980), 23.

총노회가 조직될 당시는 경남지역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타지역으로도 교세가 확장되었다. 1956년까지는 여섯 개 노회가 조직되었으므로 그해 9월 20일에는 역사적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고신)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하여 오늘 우리가 속한 고신교단이 형성, 조직되었다. 이 당시 교단에 속한 교회는 568개처, (이중 부산. 경남지역에 위치한 교회는 387개 교회로 전체교회의 70%에 해당한다) 목사는 111명, 전도사 252명, 장로 157명, 세례교인수는 15,350명으로 보고되었다. 총로회를 조직한 교회는 이를 기념하여 대만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여 1958년 1월 김영진(金英進) 목사를 파송하였다.

 

3. 고신교회의 초기 이념

고신교회의 초기 이념이 어떠한가 하는 문제는 해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고신교회가 명시적으로나 총회적으로 공식화된 고신교단(회) ‘이념’을 공표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고신교회는 1952년 9월 11일 총로회를 조직하면서 ‘취지와 목적’을 제시한 바 있고, 그해 10월 16일에는 총노회장 이약신 목사 명의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 발회식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발회식 선언문은 총로회를 조직할 때 제시한 ‘취지와 목적’을 상술하는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위의 두 문서에서는 “한국장로교 총회가 이 교파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판단하고, 개혁주의 신앙운동을 통해 참다운 장로교 정신을 회복하는 것을 취지와 목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고신교회를 형성한 경남법통노회가, 1951년 5월 25일 부산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제36회 속회총회에서 축출당한 이후에도 총회로부터 분리를 원치 않았던 그 동일한 총회를 향해 “이 교파적으로 흐른다”고 규정한 것은 다분히 감정적인 대응이었다. 이것은 총로회 조직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단지 이 문서에서는 개혁주의 신앙운동과 역사적 정통성을 갖는 교회 설립을 교단 설립의 취지로 제시하고 있다. 즉 개혁주의 신학과 바른 교회운동을 총로회 조직의 취지로 제시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고신교회의 이념 혹은 정신으로 말할 수 있지만, ‘선언적’의미는 있으나 구체성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고신교회가 추구한 이념 혹은 정신은 무엇인가? 비록 교회가 이념 혹은 정신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하더라도 교회의 생활 속에서 그 정신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집단의 정신이나 이념은 그 집단 구성원들의 역사, 신념체계나 행동양식을 통해 규정할 수 있다. 이 점은 영국의 문학적 역사가 네이미어(Lewis B. Namier, 1888-1960) 27)가 시도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네이미어는 구성원들의 외적 주장만이 아니라 구성원들 배후나 내면에 숨어있는 내면적 의식(underlying emotions)을 분석하여 그 집단의 성격을 규명한 바 있다. 고신교회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과 고신교회라는 집단의 행동양식, 가치체계를 종합하여 고신교회의 이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고신교단 생성의 역사적 배경, 교회적 생활, 신앙적 태도에 근거하여 다음의 3가지를 고신의 이념 혹은 정신으로 말해 왔다.

27)영국의 보수주의역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정되고 잇는 네이미어느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으로써 20세가 최대의 영국사가로 인정을 받아왔다. 그는 1929년 『조지3세 즉위시의 정치구조』(The Structure of Pliticis at the Accession of George III, 2 vols.)를 출판했는데 19세기 유럽사 전공의 옥스퍼드대학 교수였던 테일러(A. J. P. Tayor)는 이 책을 다윈의 종의 기원에 비유했다.

 

교회의 신학적 기초: 개혁주의 신학

첫째, 삶과 신앙의 기초로써의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이다. 신학은 신앙적 삶과 교회적 생활을 결정해 주는 신념 혹은 가치 체계로써 개인이나 단체의 신학이 어떠하냐 하는 점은 그 개인과 단체의 삶과 신앙, 교회적 생활을 결정해 준다. 한국교회는 1930년대를 경과해 가면서 ‘다른 전통’ 곧 진보적(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신사참배 요구에 대해서도 타협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주남선 한상동 목사는 자유주의적이고 타협적인 신학교육기관인 조선신학교에 한국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확신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고, 고려신학교는 설립시부터 개혁주의 신학을 교육의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은 고려신학교의 존립 기반이기도 했다. 이 점은 고려신학교에서 끊임없이 강조되었다. 고려신학교육의 실제적인 책임자였던 박윤선은 『우리의 신앙노선』(고려신학교 학우회 지육부, 1954)에서 자유주의, 바르트주의, 알미니안주의, 신비주의 등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을 사수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앙사상은 곧 칼빈주의니 칼빈주의는 다음의 몇 가지로 그 특징을 생각할 수 있다”고 전재하고, 칼빈주의 혹은 칼빈주의자의 특징을 9가지로 열거하고 있다.28) 교회의 신학으로써의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확신은 총로회 조직시에 다시 강조되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개혁주의 신학은 교신교회의 신학적 기초이자 교회가 지향해 온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28)이상규, 『한상동과 그의 시대』(SFC, 2006), 415-6.

 

개혁주의적 삶: 생활의 순결

둘째, 신사참배 강요와 같은 국가권력의 부당한 신교(信敎)자유에 대한 거부와 신사참배반대 정신을 계승하는 신전 의식, 신앙의 파수, 거룩한 삶 등 생할의 순결을 지향해 왔다. 이런 정신을 개혁주의적 생활이라고 말해왔다. 고신교회는 이런 배경에서 신적의식을 강조하고 삶의 거룩성을 추구해 왔다. 일제 하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교회의 본질과 신교의 자유를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교회가 박해를 받고 시련을 당해도 그것이 믿음을 지키기위한 것이었다면 의미를 지닌다. 신사참배 반대와 거부는 신앙의 정절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려는 거룩한 투쟁이었고 바른 생활을 위한 경건한 투쟁이었다. 이것이 고신의 신앙정신이었다.

 

개혁주의 교회건설: 교회 개혁과 쇄신

셋째, 회개와 자숙을 통한 교회 개혁과 쇄신 운동이다. 해방 후 경남노회 지역에서 전개된 교회쇄신운동은 교회의 정화와 쇄신을 위한 노력이었고, 그것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새롭게 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것은 교회 개혁을 위한 투쟁이자 바른 교회운동이었다.

고신교회는 그 시작부터 회개와 자숙을 강조하였고, 실제로 고신교회는 1950년대 초까지 회개를 신앙과 생활, 설교의 중요한 주제로 인식했다. 고신교회는 '회개에 심취한 교회'(Repent oriented church)였다. 해방 후부터 6.25 전후까지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시된 가치는 회개였다. 따라서 회개와 자숙을 고신교회 정신으로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적 태도의 문제이므로 이념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를 통해 교회쇄신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고신교회가 지향하는 정신이자 이념이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쇄신론자들은 해방 이후의 상황에서 교회의 정화와 영적 쇄신을 긴박한 과제로 인식하고 이를 추진했으나 친일 전력 인사들의 저항에 부딪쳐 결국 총회에서 축출되기까지 했으나 교회의 정화와 쇄신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던 것이다.

 

4. 변화의 조짐들

앞서 언급한 바처럼 총회로부터 축출된 경남법통노회는 1952년 9월 진주성남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를 구성함으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리되었다. 총로회를 구성할 당시 총로회에 속한 교회는 320여개 교회에 달했고, 이중 90% 정도가 부산. 경남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교회쇄신론자들은 그 동안은 총회 안에 있으면서 한상동 목사의 표현처럼 ‘대한교회’ 전체에 대해 정화운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총회로부터 단절됨으로써 이 교회쇄신운동은 총로회 내의 운동으로 제한되었다.

 

1) 총로회의 조직과 제도적 교회

총로회의 조직은 중요한 의미를 함의한다. 이제까지는 기존의 교회조직체 안(內)에서의 정화와 쇄신을 시도했으나, 교단을 형성한 이후 교회 정화나 쇄신은 교단 내적인 과제가 되었다. 이전에는 ‘순례적’ 성격이 강했으나 이제는 조직과 제도 속에 머물러야하는 ‘제도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말하자면 하나의 조직체(a organization)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총로회라는 이름의 별도의 치리회를 구성한 이후에는 교단으로서의 생존과 존립의 길을 모색해야 했고, 기존의 교회조직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단이 조직된 이상 교세확장은 불가피한 요구였다. 이런 필요가 후일 교회당 쟁탈전과 같은 교회당 확보에 취심하게 된 원인이 된다. 그래서 총로회를 조직한 이후에는 여타의 교회들과 같은 현실지향적 성격으로 점차 경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이념의 변질과 타협 과정이었다.

이런 현상은 우리 교회만의 경우는 아니다. 초기 기독교도 동일했다. 교회가 이 역사 속에 안주하며 조직화되고 제도화 되면서 현실지향적 성격으로 변모되었다. 이 점을 에밀 부른너(Emil Brunner)는 에클레시아 키르헤로 변화되면서 이념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29) 이는 마치 초기 기독교는 평화주의를 지향했으나 313년 제국의 공인을 받고 380년 국가교회로 화하면서 평화주의 전통을 버리고 정당전쟁론의로 이념적 변화를 경험한 경우와 동일하다. 고신교회도 동일한 길을 갔다.  

29)E. Brunner, Das Miβuerstӓndnis der Kirche, 3 Aufl. (Zurich, 1988).

 

교회쇄신을 시도했던 경남법통노회 지도자들이 기존의 교회조직을 떠나 새로운 교회조직을 갖추었다는 것은 저들이 추구했던 교회개혁과 신앙적(신학적)이념을 교단이라는 조직체 속에 수렴하고 이를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동시에 총회를 떠나 별도의 치리회를 형성했다면 교단 내에서 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향해서 교회 정화와 쇄신을 요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했고, 지역적으로는 경상도, 그리고 ‘고신 교단’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념의 외연이 불가능해지자 내적 지향을 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신은 신사참배 거부, 옥중 투쟁, 회개운동이라는 영예의 누각에서 도덕적 우월성, 영적 엘리트주의에 빠져 다른 교단과 다른 우월주의에 빠지게 된다. 신사참배 반대와 투쟁은 우리의 신앙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단골 메뉴였고, 진리의 파수를 독점적 자산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런 경향이 우리도 모르게 배타주의, 폐쇄주의, 혹은 율법적 엄격성을 거룩한 가치로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금주단연은 당연한 것이지만 남녀간의 좌석의 구분, 여성의 파마, 치마의 길이, 옷감까지도 신앙적 문제로 제단하고, 주일성수의 엄격성은 신앙의 척도로 요구되었다.

 

2. 변화의 조짐들

이념이나 전통의 문제를 말할 때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그 집단이나 공동체의 이념이 무엇이었나 하는 점과 둘째로는 그 이념이 어떻게 계승 발전되어 왔는가 하는 점이다. 고신의 이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된 인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 이념이 계승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해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고신교단은 1952년 교단 조직 전후 교회당 명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문제는 고신의 정신 혹은 이념 문제의 첫 시험대였다. 경남(법통)노회가 총회로부터 축출된 지 약 3개월 후인 1951년 9월 8일 총회는 한상동 목사에게 그가 시무하는 부산 초량교회 명도를 요구하였다. 한상동은 1946년 7월 30일부터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일해 왔고, 초량교회는 약 500명의 신도가 회집하는 경남지방의 유수한 교회였다. 그러나 그가 경남(법통)노회에 속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나가라는 요구였다. 이 당시 교회명도를 요구받은 교회는 초량교회 외에도 영도교회, 마산 문창교회, 진주교회, 거창읍교회, 남해읍교회 등 경남지방의 6개처 교회였다. 당시 총회 유지재단 이사장 김길창 명의로 제기된 명도 소송은 경남법통노회를 지지하는 교회들을 압력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초량교회 한상동 목사는 교인 90% 이상이 자신과 경남(법통)노회를 지지했으나 교회의 화평과 건덕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초량교회를 사임하였다. 김양선은 이때의 일은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교회의 주권을 의식적으로 교권주의자에게 바친 때문에 일어난 일대불상사들이었다”고 평하고, “한국교회 70년 사상에 있어 이때처럼 교권이 행세(行勢)된 때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30)

초량교회를 사임한 한상동목사는 교회의 화평을 위해 대립이나 법적 소송을 취하지 않고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초량교회를 양도하였고, 1951년 10월 14일 주일 저녁 함께 초량교회를 떠난 주영문 장로 집 뜰에서 예배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부산 삼일교회(三一敎會)의 시작이었다.

한상동 목사가 어떤 형식의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고 빈손으로 초량교회에서 철수한 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런 재물에 대한 자유함은 총로회 내에서 일관된 입장이 아니었다. 또 한상동 목사의 소송 반대론도 일관된 태도가 아니었다. 1973년 6월 13일 고려신학대학 교수명의로 발표된 오병세교수가 집필한 “신학적으로 본 법의 적용문제”가 발표될 때 한상동 목사는 학장으로 교수회를 대표하고 있었고, 불신법정 소송이 가하다는 이 논문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오병세 교수가 쓴 이 논문이 경건회 석상에서 낭독될 때 한상동 학장은 이 논문을 경청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논문에 근거하여 부산노회를 중심으로 경남노회 송상석 목사를 불신법정에 고소했을 때도 한상동 목사는 이를 반대하거나 제지 하지 않았다. 이 점은 한상동 목사가 불신법정 송사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로서,31) 한상동목사의 소송문제 대한 인식은 일관성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1952년에서 1965년 어간에 전개된 교회당 쟁탈전, 여기서 연유된 불신법정 소송건, 1960년대의 고려신학교를 둘러싼 분쟁과 사조이사 사건, 복음병원을 둘러싼 이권적 대립, 편법과 문서 위조 등 일련의 사건들은 고신의 이념 혹은 정신의 퇴락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건들이었다. 나는 이런 1960년대의 변화를 ‘고신성(高神性)의 상실’이라고 말했는데, 허순길 교수는 이 점에 동감을 표하면서 고신의 원색이 흐려졌다는 의혹 사건이라고 했다. 32)

30)김양선, 159.

31)신재철, 『불의한 자 앞에서 소송하느냐?』(쿰란출판사, 2007), 116.

32)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50년사』(고려신학대학출판부, 1996), 184.

 

교회당 쟁탈전, 법정 소송, 내분과 대립 등을 고려해 볼 때 고신교회는 총로회 조직과 함께 교단으로서의 생존 혹은 존립, 그리고 타 교단과의 경쟁, 교세확장, 고려신학교의 내분과 대립, 복음병원을 둘러싼 분쟁 등으로 신전 의식, 생활의 순결, 거룩한 삶의 가치들은 퇴색하기 시작했고, 교회정화와 교회 쇄신의 의지는 빛바랜 그림으로 산화(酸化)되고 산화(散華)되기 시작했다.

고신교회는 독립된 교단으로 출발한지 채 10년이 못되어 기성 교회의 답습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단지 그 속도가 느렸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단에 비해 그나마도 덜 타락한 것은 신학과 교회 생활에 대한 자성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어떤 조직이나 단체이든지 기구가 커지면 이념은 퇴색할 가능성이 높고 이념적 주체가 차세대로 계승해 갈수록 이념은 약화 혹은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과 정신계승을 위한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기독교장로회의 경우 신앙고백서, 사회선언, 교육지침 등 3대 정책 문서를 통해 교단이념을 고수, 계승해가고 있지만 고신 교단은 이런 류의 문서화된 이념계승 노력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념은 개인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이념이라는 것은 주관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막아주는 방파제이다. 이 이념이 중시될 때 어떤 집단이나 조직체가 하나의 목표를 행해 일관된 경주를 할 수 있다.

조직(교단의 기구, 고신대학교, 고신의료원 등)이 비대해지면 그 조직의 탈이념화를 막아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데 이런 점에서 이념의 합리적 계승을 위한 구체적 노력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초기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유산에 지나치게 안주함으로써 시대 시대마다 감당해야 할 교회적 사명을 적절히 수행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매 시대마다 요청되는 영적 싸움의 대상을 찾지 못한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일제 하에서나 해방 후에는 영적 자유와 신앙의 순수성을 유린하는 주체가 있었고, 따라서 영적투쟁의 대상이 있었으나 총로회를 조직한 이후에는 이 대상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신사참배 반대’라는 1930-40년대의 역사적 경험만을 중시하고 그 유산에 안주하였을 뿐 1960년대, 혹은 1970년대의 불신앙과 세속주의, 혹은 반 신앙적 세력과 투쟁하지 못했다. 이런 성찰이 설립 60주년을 맞는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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