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Asia의 민주주의 모델 국가

 

우리 나라가 하나님 은혜 중 선거를 잘 치루어 아시아에서는 민주주의의 모범국가된 것을 감사할 뿐이다. 캄보디아나 아시아 많은 나라는 선거가 형식적이거나 부정이 많고 투표과정도 한 달이 걸 릴 때가 있다. 캄보디아도 내년도 총선거가 있지만 여당의 독주가 예상된다. 그래서 오바마가 공정한 선거를 주문하였지만 소 귀에 경 읽기이다. 얼마 전 UN인권위원장이 이 나라를 방문, 훈센 수상을 만나기 원하였으나 노골적으로 나는 훈계를 들어야 하는 국민학생이 아니라고면담을 거절하고 말았다. 국내외 적으로 독재, 부정부패, 선거부정, 토지분쟁 등 비판의 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금년에도 독일 연구소가 전 세계 175개 국가 부정부패 지수를 발표하였다. 캄보디아는 157등을 기록하였다.

 

2. 세계종교학자들 한국에 관심

 

몇 년 전 일부 세계적 종교학자들이 한국의 종교를 연구하였다. 이유인즉 한국은 종교인구가 절반을 넘으면서도 모든 종교가 비교적으로 평화적 공존을 하였고, 종교가 민주화나 근대화에 발목을 잡지 않았고, 경제성장과 함께 외국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영국의 다원주의 신학자 존 힉은 복음주의 학생운동에서 전도 받고 학생 때는 열심 있는 신앙인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후일 다원주의자로 변신, 모든 종교는 같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 복음주의 선교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아시아 종교의 사회학』에서 아시아 종교로는 민주화도, 경제성장도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비기독교 아시아 종교는 도리어 계급주의를 정당화하고 경제에도 희생이 있어야 하는데, 아시아 종교는 희생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1900년도 초기 그는 한국인들도 아시아에서 욕심이 많은 백성, 그리고텃세가 강한 문화라고 평가하였다.

 

한국은 잘못된 아시아 종교를 극복하고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선거를 통하여 지역 간, 세대 간의 갈등과 이념의 대립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이다.

 

3. 캄장신: 지방교회목회자 훈련 프로그램 시작

캄보디아장로교 신학교는 어제(12/20) 교무회의에서 지방교회 목회자 훈련을 개설하기로 하였다. 학교는 주요 지역에 지부를 설치, 출장 강의를 하는 것이다. 아시아 대부분의 기존교회는 자립교회가 되지 못함으로, 좋은 교회 청년들이 신학교를 지원하지 않는다. 좋은 건물의 신학교를 세워도 학생이 극소수이며 자기 돈으로 공부하러 오는 자는 전무한 실정이다. 일본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사실은, 우리 신학교 대학부 학생들은 학문적으로는 일반 대학생들에게 비교적 뒤쳐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대학부 위주의 신학교육을 탈피하고자 한다. 기존의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하면 이 나라 교회는 희망이 없다. 새해 114일부터 18일까지 1차로 깜뽕츠낭지역에서 훈련을 시작한다.

 

다시 아래와 같이 호소하는 바이다.

첫째, 건물 지어주는 선교는 신중해야 한다.

둘째, 선교지 신학교육은 좋은 교수진과 좋은 학생을 확보하고 영적 수월성이 추구되어야 한다.

캄장신은 건물문제는 당분간 보류상태이다.

셋째, 돈 주는 선교는 지양되어야 한다.

이 나라 대학에 신자는 극소수이다. 한 신자학생은 친구들로부터너 얼마 받고 기독교를 믿느냐?고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4. 아랍의 봄이 아랍의 겨울로?

최근 타임지와 외신들은 아랍 혁명 이후를 분석하는 특집보도를 한다. TIME 특집은 분노한 아랍의 청년을 주제로 다루었다. 혁명 이후 도리어 나라들이 후퇴하고 있다고. 일본의 중동연구(2012 2No. 515)중동변동과 선거를 특집으로 북아프리카 시리아, 이란, 이라크, 이집트, 알제리아, 튀니지아를 다루었다.

 

중동의 인구는 30대 이하가 60%에 고실업률, 경제불안, 정치불안, 사회불안으로 청년들이 분노하고 있다. 혁명이후 중동현실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1) 이슬람의 복귀: 프랑스 인구통계학자 E. 토드는아랍혁명에 신은 관계가 없다고 하였지만 이슬람이 도리어 복귀하였다.

2) 독재를 물리친다고 혁명을 일으켰는데, 혁명주체 세력들이 이슬람을 빙자하여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다.

3) 사회혼란, 정치혼란으로 경제가 더 불안해져 실업은 늘어간다.

 

5. 이집트 헌법 갈등: “바로의 등장

이번 주 다시금 이집트 헌법문제로 인한 갈등과 데모를 소개한다. 지난 15 1차 헌법 투표는 모르시 57% 지지를 받았다고 외신은 전한다. 이집트 선교사의 소식을 전한다.

 

10개 주에서 치러진 1차 국민투표에서 4597382명이 찬성을 하고, 3537264명이 반대를 했다. 백분율로는 56.6%가 찬성을 43.5%가 반대 했다. 주 별로 보면 카이로가 찬성이 43% 반대가 57% 로 나타나 반대가 찬성보다 많은 유일한 주이고, 나머지 9개 주들은 찬성이 반대보다 많았다. 역시 수도 카이로에 지식층이 많아 반대가 많았고, 시골의 주들은 지식층이 적고 이슬람주의 지지자들이 많아 찬성이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 다가오는 토요일 나머지 주에서 2차 국민투표가 실시된다.

예상하는 바로는 1차 국민투표 결과를 뒤집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야당 단체인 '구국전선'에서는 이번 국민투표가 위조되었다고 비난을 했다. 당분간은 국민투표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 것 같다.

 

6. 무슬림 형제단이란?

이집트 헌법의 핵심은 이집트를 이슬람 샤리아가 지배하는 이슬람 국가로 만들려는 무슬림 형제단과 살라피스트들이 주도한 것이다. 이 헌법은 여성의 인권, 타종교 탄압, 인권박탈의 위험이 있다고 기독교회, 세속주의자들, 온건 무슬림들이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중동국가에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이란?

지난 주 타임지는 무슬림 형제단을 소개하였지만 지난 10울 세미나 때 미국 이슬람 전문가의 글을 요약 정리한다.

 

1) 무슬림 형제단의 등장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등장은 1924년 투르크의 케말 파샤가 칼리프 제도를 폐지함으로 시작된다. 1차 대전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완전히 붕괴하자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세속적 이슬람 공화국을 시도한다.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Mustafa Kemal Atatürk)는 칼리프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2) 칼리프의 의미는?

칼리프는 모하메트의 후계자로, 종교, 정치, 군사를 통합하는 최고 지도자이다. 그러나 칼리프는 이슬람 국가 전체에서 한명만 존재한다. 카도릭의 교황에 비유된다. 이집트 일부 무슬림들은 이슬람 세계의 쇠퇴와 혼란은 칼리프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칼리프 제도의 복원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이슬람 내부분열의 원인이 된다. 사령 사우디에서 칼리프를 세우면 다른 나라 무슬림들이 인정하지 않는다.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을 만든 하산 알 바나(Hasan al Banna)는 마호메트 이래 1400년의 역사를 가진 칼리프 제도가 붕괴하자 크게 실망, 칼리프 복원, 무슬림훈련, 철저한 조직운동을 시작한다. 하산 알 바나(Hasan al Banna)는 이슬람 재건을 위하여 3단계 방식으로 칼리프 제도를 복원하고자 했다.

 

a) 사회(이슬람공동체)의 이념과 목표를 내부와 외부에 널리 알린다.

b) 이념을 실현할 효율적 단체를 만들어 유지한다.

c) 조직은 이슬람공동체의 이념을 완수한다.

 

이들의 목표는 철저한 이슬람에 기초한 이슬람 신정국가(theocracy)를 시도한다. 그러나 지상에서 신정정치가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서운 전제정치, 집단주의이다.

무슬림 형제단과 폴포트 공산당

양자는 유사성이 있다. 이들은 초기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는 "천사로, 해방자"로 서민들에게 인심을 얻었다. 캄보디아에서는 가난한 자들과 농민들이 다 포포트의 공산군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무슬림 형제단도 무바라크로부터 탄압을 받을 때 서민들에게는 가장 도움을 주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에는 양이 토끼로 변하였다. 지금 무슬림 형제단이나 모르시 대통령이 그 길을 가는 것으로 외신들은 비판한다.

칼리프는 모하메트의 후계자로, 종교, 정치, 군사를 통합하는 최고 지도자이다. 그러나 칼리프는 이슬람 국가 전체에서 한명만 존재한다. 카도릭의 교황에 비유된다. 이집트 일부 무슬림들은 이슬람 세계의 쇠퇴와 혼란은 칼리프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칼리프 제도의 복원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이슬람 내부분열의 원인이 된다. 사령 사우디에서 칼리프를 세우면 다른 나라 무슬림들이 인정하지 않는다.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을 만든 하산 알 바나(Hasan al Banna)는 마호메트 이래 1400년의 역사를 가진 칼리프 제도가 붕괴하자 크게 실망, 칼리프 복원, 무슬림훈련, 철저한 조직운동을 시작한다. 하산 알 바나(Hasan al Banna)는 이슬람 재건을 위하여 3단계 방식으로 칼리프 제도를 복원하고자 했다.

a) 사회(이슬람공동체)의 이념과 목표를 내부와 외부에 널리 알린다.

b) 이념을 실현할 효율적 단체를 만들어 유지한다.

c) 조직은 이슬람공동체의 이념을 완수한다.

 

이들의목표는 철저한 이슬람에 기초한 이슬람 신정국가(theocracy)를 시도한다. 그러나 지상에서 신정정치가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서운 전제정치, 집단주의이다.

 

무슬림 형제단과 폴포트 공산당

양자는 유사성이 있다. 이들은 초기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는 "천사로, 해방자"로 서민들에게 인심을 얻었다. 캄보디아에서는 가난한 자들과 농민들이 다 포포트의 공산군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무슬림 형제단도 무바라크로부터 탄압을 받을 때 서민들에게는 가장 도움을 주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에는 양이 토끼로 변하였다. 지금 무슬림 형제단이나 모르시 대통령이 그 길을 가는 것으로 외신들은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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