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의 설교(Law-Gospel Preaching)

▲ 이정복 교수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M.Div) Tronto School of Theology of University of Toronto(Th.D)
들어 가는 말:

1997년 여름 도쿄에서 열린 제 3차 설교학회 모임(Societas Homiletica)에서 정장복 교수는 "한국 교회의 설교 상황"(The Preaching Situation in Korean Church)이란 글에서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새 정부가 개혁을 시작했을 때, 전 정부의 부패한 관리들과 정치인들을 감옥에 보내었다. 그런데 그들 중의 50 퍼센트 이상이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 표명했다."고 발표했다.

 

무슨 의미인가? 한국 교회에 신앙과 삶의 괴리가 심각하다는 이야기이다.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이 만연하다는 말이다. 그 때보다 더 상황은 좋지 않은 것 같다. 현재도 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그렇고 또 그런 성화론의 영향 하에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변화를 위한 이렇다할 움직임도 오래가기 힘들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저술한 김경일은 그의 머리말 글 말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제 한 번 쯤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때가 되었다. 모든 껍질을 벗고 자신의 모습에 솔직해질 때가 되었다. . . . 이제까지처럼 허풍으로 가득 찬 '. . 대한민국' 이 아닌, 유교적 허세문화와 정치적 허세에서 벗어난 맑은 삶의 옷을 말이다"라고 썼다. 한국 교회도 이제껏 바삐 달리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걸치고 있던 신앙적 허세문화의 옷을 벗어 던져야 할 것이다. 그럴때 만이 교회의 유효기간이 재갱신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 위선을 부추기는 외형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 성화론이 아닌 복음의 웅변을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근거로 하는 복음적 성화론을 정립하는 길이다. 이를 위한 하나의 설교학적 실천방안으로 '율법과 복음의 설교'(이하 L-G 설교)의 원리와 적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다 폭넓게 직시하기 위하여 한국 교회의 성화론은 어떠한가? 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I. 한국 전통 종교의 성화론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한국 전통종교(하느님 신앙, 무교, 도교, 불교, 유교) 문화의 사상과 행동 양식을 부분적으로 수정했으나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기존 문화의 철학적, 종교적 개념이나 관행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설명, 이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초기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신 개념을 전달하는데 기꺼이 한국의 하느님개념과 용어를 차용하여 설명하였다. 한국인들도 이러한 일치 때문에 기독교를 환영하였으며, 이것은 한국 선교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한국 전통종교의 성화론이 한국 교회의 성화론의 기본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 전통종교의 성화론은 그 형식에 있어 크게 제의적 그리고 도덕-수양적 성화론으로 나눌 수 있다.

 

A. 제의적 성화론(Ceremonial sanctification)

제의적 성화론은 하느님(천신) 신앙과 무교(Shamanism)같은 종교에서 그 양상을 특히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이 건국된 이래 하느님 숭배는 그 전 역사에 걸쳐 국교시되어 왔으며 단군의 본을 따라 한국의 모든 부족장과 왕들은, "천관(天官)"이라 불리는 제사장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자기 백성들을 대표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하느님에게 제사하는 종교적 책임을 감당해 왔다. 무교(Shamanism) 하느님이라는 최고신을 인정은 하지만, 주로 저급 신령들과 관계한다. 신들린 무당이 진노한 선한 신령을 위무하거나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한 신령을 축귀함으로써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 평안을 가져오려 한다. 이는 주로 백성들의 희생적 헌신인 굿이라는 외형적 제의를 통해 이루어 진다.

 

B. 도덕-수양적 성화론((Moralistic-Disciplinary Sanctification)

도덕-수양적 성화론은 주로 도교(Taoism), 불교(Buddhism) 그리고 유교(Confucianism)에서 왕성한 성화 방법론이다. 도교에서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을 찾아 자기의 신체와 정신과 마음을 수련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연과의 합일을 거쳐 불노불사를 추구한다. 자연과의 이러한 합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상의 욕심을 버리는 도덕적 요구가 가르쳐지고 수양자는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불교는 열반과 극락왕생을 위하여 불경과 기도를 통해 도()를 깨쳐 각자(覺者)가 되는 수련의 성화 과정을 밟는다. 각자(覺者)가 되어 열반에 오르는 이 길에는 불경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높은 도덕적 길을 걸어 선한 공덕을 쌓는 수양이 필수적이다. 유교에서는 주장하기를 사람은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천성과 인성을 부여받는데, 이 천성과 인성을 온전히 따르게 되면 하늘과 합일되어 '완전'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이 합일을 위해 사서삼경, 삼강오륜 등의 경전들을 지침으로 높은 도덕적 수양을 추구하는데, 특히 부친이 죽을 때는 3년 동안 그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그의 묘를 돌보는 의무를 수행해야 하며, 심지어 무덤 옆에서 살기도 했다.

 

종합하자면 (1)한국 전통종교의 성화론의 기본은 인본주의적인 노력을 통한 성화론이었다. 왜냐하면 제의적 그리고 도덕-수양적 성화론의 핵심이 인간의 행동과 노력을 통한 평안과 인간 완성이었기 때문이다. (2)인본주의적 노력을 강조하다가 보니 외형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 성화론으로 기울게 되었다. 정신이야 어떻던지 간에 형식만 갖춰지면 온전하다 는 사고이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한국 문화에 가장 늦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교도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천성에 일치하는 삶을 추구하는 유교의 사람들은 개인의 의()보다도 대의명분(大義名分; the highest duty)을 항상 우선시한다. 결과, 유교의 대의명분에 치우쳐 형식을 강조하다 보니 제례의식들이 오히려 위선을 부추기는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전통종교의 성화론의 배경 가운데서 기독교가 전래되었기에 한국 교회의 성화론은 그 형성 초기에서부터 이들의 영향으로 그 핵심이 왜곡되어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II. 한국 교회의 성화론

기독교가 전래된 후, 한국 전통종교가 성화의 길에서 추구하는 덕목과 기독교가 추구하는 덕목들이 별 차이가 없었기에 과거 유교도였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전통종교의 인본주의적이고 외형주의적인 성화론을 바탕으로 기독교 성화를 생각했다. 결과 단순히 교회에 잘 출석하여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면 곧 좋은 기독교인이 되어 버리는 상황이 만연해 진 것이다. 이정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뿐 아니라, 길고 긴 종교사를 통하여 잘 개발된 수양의 전통적 방법들--독경   과 경전연구, 기도와 명상, 고행과 훈련, 적선과 시주등--이 그리스도인들의 방식에도 지배적인 영향을 미쳐, 한국교회에서 성경 읽기와 성경공부, 기도와 금식선행과 헌금등이 가장 유행하는 성화의 방법이 되었다. . . . [이러한] 수양의 노  력을 통한 성화사상은 은총(sola gratia)의 구원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한국 교회가 외적 성장에 치중하면서 전통종교의 인본주위적이고 외형주의적인 성화론에 점점 과도하게 노출되어 상대적으로 기독교의 은혜중심적인 인격적 성화론은 배경적 역활만을 감당하게 되면서 발생했다. 이러한 전통종교의 성화론의 영향이 특히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1997년 여름 도쿄에서 열린 제 3차 설교학회 모임(Societas Homiletica)에서 정장복 교수가 위에서 보고한 "한국 교회의 설교 상황"을 보면 그 결과는 심각한 것이었다.

 

근래에는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높아지고 기독교인에 대한 신뢰가 점차 더 추락하고 있기에, 한국기독교자교수협의회가 작년 1116일 기독교회관에서 ‘두 번째 종교개혁은 가능한가?’란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특별히 이날 포럼에서 한인철 교수(연세대)는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가 ‘신앙과 삶의 분리’임을 역시 지적했다. ,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은 좋지만, 예수님처럼 살기는 싫다.' 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의 현주소라면 인본주의적이고 외형주의적 성화론이 한국 교회에 가져온 문제가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안은 무엇일까? 교회사를 가만히 되짚어볼 때, 이러한 현상들은 종교개혁 시기의 교회 속에 만연한 현상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종교개혁의 대표적 주자인 루터(Martin Luther)와 칼빈(John Calvin)은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통한 그들의 성화론을 교회에 적용함으로써 대안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므로 필자도 그들의 성화론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문제에 대한 지혜와 동시에 L-G 설교의 신학적 근거를 찾고자 한다.

 

III. Luther Calvin의 성화론

A. Luther의 성화론:

   "반복"(Repetition)-계속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ever to be justified anew)

 

루터는 죄인이 먼저 말씀을 들음으로 능동적 의를 추구하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붙잡음(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의롭다 칭함(이신칭의)을 받는 다고 믿었다. 하지만 루터는 이 의인의 상태를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신칭의이후에 이루어 져야 하는 성화라는 과정과 구별하기를 꺼려했다. 그에게 있어 이신칭의 교리는 성화를 그 속에 이미 포함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는 이신칭의 교리가 단지 법적인 의를 인정받는 수준의 신화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신칭의는 죄의 법을 깨뜨리고 그것을 복종시키며 그래서 신자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루터는 그의 유명한 1522년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 . . . 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요한복음 1). 그것은 [또한]   리의 옛 아담을 죽여서 우리의 마음, 영혼, 정신과 힘들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고 성령은 믿음을 통해 역사한다. ! 이 믿음은 얼마나 생생하고   열심이고 능동적이고 능력의 믿음인가. 따라서 믿음이 끊임없이 선행을 행하지 않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음은 어디 선행을 행할 데가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질문이 나오기 전에 이미 선행을 행해왔고 그리고 지금도 계속 선행을 행하는 것이다.

 

만약 이신칭의를 얻은 후에 다시 완전한 의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의 계속적인 노력의 성화 과정이 다시 들어가야 한다면 하나님의 이신칭의의 역사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루터는 보았다.  대신 위에서 보듯이 그는 성화는 인간 편에서 도덕적 완전한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이신칭의의 완전한 상태가 말씀(율법)을 통한 옛사람을 죽임과 복음을 통한 새사람의 시작이 지속적으로 신자의 삶 속으로 들어와 형성되어 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루터는 그의 율법의 제 2용법--죄인을 책망하고 정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즉 신학적 용법(theological use of the Law)을 율법의 온당한(proper), 그리고 가장 우선적인(primary) 용법으로 보았다.

 

B. Calvin의 성화론:

  "여행"(Journey) - 계속 점 점 더 의로워지는 과정(ever to be made more and more  

   righteous)

 

칼빈은 율법의 제 1용법(루터의 신학적 용법)에 의해 사람은 정죄받고 복음의 소식을 붙잡음으로 의로워 진다고 루터와 동일한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신자는 말씀과 성령에 의해 성화되지만(Inst, III. 11.6.),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은 육신에 얽혀있는 많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싸여 있다.  이렇게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의 사함을 받았지만 죄의 본성 즉 죄의 경향성은 여전히 남아 있어 신자가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괴롭힌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꾸준히 이 죄와 싸우면서 전진해야 되는데, 그래서 칼빈은 성화는 중생에서부터 시작해서 성령 안에서 율법의 안내와 권고 가운데 평생에 걸쳐 점진적으로 계속되어지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여행(Journey)로써의 성화에서 율법의 이러한 긍정적인 역활을 율법의 제 3의 용법이라 부르며, 이는 오직 신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써(“finds its place among believers in whose hearts the Spirit of God already lives and reigns”) 순종을 야기하는 흥분(an excitement aroused to obedience)으로써 작용하는 것이므로, 이 용법이 루터가 강조한 율법의 신학적 용법을 넘어서는 율법의 주된 용법이라 보았다(“which pertains more closely to the proper purpose of the law”) (Inst, II. 7.12.).

 

칼빈은 구체적으로 이 용법의 적용에 개해 설명하기를, 이 용법은 두 가지 면에서 신자에게 도움을 주는데, 그 첫 번째 유익은 율법은 그들[신자]이 앙모하는 주의 뜻의 성격이 무엇인지 날마다 더 철저히 가르치며 그리고 그것을 아는데 굳게 하는 것이다(The law teaches “more thoroughly each day the nature of the Lord’s will to which they aspire, and to confirm them in the understanding of it.”)고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유익은 율법의 권면(exhortation)의 역할과 관계된 것인데, 칼빈은 이를 율법과 육신의 관계는 게으르고 머뭇거리는 나귀를 일깨워 일하도록 하는 채찍의 관계와 같다고 설명한다 (“The law is to the flesh like a whip to an idle and balky ass, to arouse it to work.”) (Inst, II. 7.12.).

 

IV. Luther Calvin의 인간론

그러면 왜 루터와 칼빈은 이러한 다른 성화론과 율법에 대한 이해를 가졌을까?  몇 가지 이유들 중 중요한 한가지 이유는 그들의 독특한 인간론에 근거한다.

 

A. 루터의 인간론

루터는 예수님이 신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었던 것처럼 신자를 이원론적으로(a divided person) 이해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완전히 의인이면서 동시에 완전히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simultaneously justified and sinner)인 것으로 보았다(LW 26:336).  그래서 신자의 의인 측면(the saint-dimension of the justified person)에는 말씀이 성령을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하여 말씀의 요구를 기쁨으로 뿐 만이 아니라 동시에, 아니 더 나아가 요구 그 이상을 이행하므로, 의인 측면의 신자에게는 선행(성화)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신자의 죄인 측면(the sinner-dimension of the justified person)이다.  디모데전서 1:8-11절의 설교에서 루터는 주장하기를:

율법[말씀]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너[우리]는 사람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사도 바울이 사람을 나눈 것처럼, 그 두 부분, 즉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분명하게 구별되도록 해야 한다.  새 사람은 율법에 의해 방해 받지 않도록 완전히 제외시켜 두라. 그러나 옛 사람에 대해서는 너는 끊임없이 율법으로 자극을 가하고 그가 율법으로부터 안식을 취하도록 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할 때 너는 율법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루터의 성화론의 핵심을 이해한 에벨링(Ebeling) "루터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바는 율법이 신자에게 설교되어져야 하는데(the Law has to be preached to the pii[believers], 의인으로서의 신자가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신자에게 이다(not in quantum iustii[insomuch as they are just] but in quantum peccatores[insomuch as they are sinners]"라고 요약한다.

 

신자의 이 죄인 측면은 항상 능동적 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또 하나님의 법보다 죄의 법을 따르는 성향이 있으므로 말씀(율법)에 의해 책망 받고 날마다 죽은 후 복음에 의해 다시 살아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루터에게 있어서 성화는 말씀(율법)의 정죄로 인해 그리스도를 믿어 이신칭의를 받은 신자가 날마다 그 삶 속에서 이 이신칭의의 완전한 상태가 성령님의 역사로 말씀을 통한 옛사람을 죽임과 복음을 통한 새사람의 시작이 지속적으로 신자의 삶 속으로 반복적으로 들어와 그들의 육신에 거하는 죄들로부터 그들을 정결케 하여 가는 것으로 보았다.

 

B. 칼빈의 인간론

칼빈의 성화론이 루터와 다른 이유는, 루터는 그의 인간론에 있어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 불연속성(discontinuity)이 있다고 본 반면, 칼빈은 이 둘 사이에 연속성(continuity)이 있다고 보았다. 다시말해, 불신자의 육신(flesh)의 죄 된 경향성이 신자가 된 뒤에도 그대로 연속되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맥을 살펴볼 때 아주 분명한 사실은, 본문의 단어 '육체'[flesh]는 인간이 어머  니의 태로부터 가져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인간은 부패하다는 것 외에 다른 평판이 없고, 또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추악하고 세상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자연적인 본성을 소유하는 한, '육체'라는 이 용어는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에게 붙여진 이름(또는 명칭)이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형상을 따라 변혁시켜가시는데,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새롭게 해 가신다.

 

인간의 존재에는 이러한 연속성(continuity)이 있기 때문에, 칼빈은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신자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해서 신자가 그 자신 안에 남아있는 육신의 성품을 날마다 제거해 나가도록 돕는 일이라고 보았다. 이 말의 의미는, 루터가 "그리스도인을 완전한 성자(wholly saint)이며 동시에 완전한 죄인(wholly sinner)" 으로 보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율법의 말씀과 복음의 말씀에 의한 "죽음과 살아남의 문제"(a matter of death and life)라고 이해한 반면, 칼빈은 "그리스도인을 부분적 성인(partly saint), 그리고 부분적 죄인(partly sinnner)" 으로 보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갱신, 즉 부패한 육체를 의도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로 계속적으로 갱신해 나가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속되는 하나의 성화의 과정인데, 그 과정 속에서 신자는 성령의 감화와 율법의 도움으로 그의 육체의 죄된 소욕을 억누르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이미 온전케 된 그 복종의 삶으로 계속 더 가깝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을 반복”(repetition)—계속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ever to be justified anew)—으로 보았고,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여행”(journey)—계속 점 점 더 의로워지는 과정(ever to be made more and more righteous)—으로 보았음을 살펴보았다. 이들의 성화론의 특징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근거한 복음적 성화론이며, 이러한 성화론으로 종교개혁기의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당시의 인본주의적 형식주의 신앙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한 개혁을 소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루터는 율법-복음의 신학적 틀을, 칼빈은 율법-복음-율법의 신학적 틀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 L-G 설교의 신학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이제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알아 보자.

 

V. L-G 설교의 역사

루터와 칼빈의 율법과 복음의 이해와 정의에서 보여진 것처럼, L-G 설교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구별이라는 큰 틀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선 이해를 갖고, L-G 설교의 역사를 (1) 전통 수사학적 설교학(classical, rhetorical Homiletics) 영향하에서의 L-G 설교, (2) 서사 설교학(Narrative Homiletics) 영향하에서의 L-G 설교, (3) 서사설교의 확장으로서의 L-G 설교, (4) 여러 교파에 나타난 L-G 설교의 변형된 형태 라는 네 범주로 나누어 간략히 고찰해 보자.

 

A. 전통 수사학적 설교학(classical, rhetorical Homiletics) 영향하에서의 L-G 설교

1. Martin Luther

루터의 설교 방법은 일반적으로 본문을 몇 부분의 작은 단위로 나누고 각 부분에서 핵심 교훈을 이끌어 내어 설명하고 적용했다.  동시에 각 나누어진 단위들의 핵심 교훈들은 본문 전체의 주제와 관련되어서 발전되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전통적, 수사학적 방법론으로 본문을 설교하면서 그 안에서 그는 율법과 복음의 구분을 사용하였다.  한 예는 그리스도인 삶의 요약”(딤전 1:5-7)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이다. 이 설교의 마지막 대지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전 삶의 요약을 완성하는 한 방법으로서 율법과 복음을 날카롭게 대비시키며(sharply placing them side by side)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소개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우리가 늘 가르치고 그리고 율법과 은혜라 부르는 이 두 부분을 구별하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의 좌석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선해야 하며 그리고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으로부터 사랑해야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 .  비록 당신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당신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서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당신이 수행하지 못한 것과 그리고 당신이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때 당신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율법은 당신에게 반대 증언하며 그리고 절대적인 심판을 당신에게 요구함으로써 당신을 계속 괴롭히고 비난한다.  그러면, 당신이 심판의 좌석에서 자비의 좌석으로 도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단지 절망할 수 밖에 없고 당신을 위한 도움이나 조언자도 없게 된다. . . .  보라, 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은혜라도 받는 것을 훼방하며 막고 있기 때문에 그의 무지를 도울 수 있는 어떤 존재도 없다.  그는 심판의 좌석과 자비의 좌석 사이의 차이를 모른다.  사실, 그는 자비의 좌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 그것을 놓치고 심판의 좌석 아래 놓여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은 가난한 자들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양심들의 변호자인 그리스도를 알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 . . [그리스도]는 말한다: 만일 당신이 죄인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리고 사단이 당신을 율법을 통해 심판의 좌석으로 끌고 간다면, 나에게로 와서 어떤 진노도 느끼지 말라.  왜 그런가?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나를 믿는다면, 나는 당신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여기 앉아있고 그래서 어떠한 진노나 불쾌함이 당신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인 것은] 만일 진노나 심판이 당신 위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마땅히 내 머리 위에 먼저 와야 하기 때문이다. . . .  그래서 믿음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안전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거룩함이나 순결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정죄되지 않을 것이다.  이 믿음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자비의 좌석이신 그에게로 나아가며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라면 어떠한 진노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랑과 관용과 용서만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2. John Wesley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Wesley는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현대 설교학적 의미로 발전시켰다. 1779년의 한 편지에서, Wesley는 소위 율법과 복음의 올바른 설교 방법”(the right method of preaching)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내 생각에 올바른 설교 방법은 이것이다.  어떤 장소에서건 설교하는 초두에, 일반적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선언한 후, 율법을 가능한 한 가장 강하고, 가장 밀접하고, 가장 철저한 방법으로 설교하라.  그러면서 동시에 복음을 여기 저기에 뒤섞되 그것을 마치 멀리 떨어져서 보이도록 하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수긍하게 된 후, 우리는 믿음이 생기고, 율법에 의해 죽은 사람들을 영적인 삶으로 이끌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복음을 섞을 수 있다. . . .  이 사람들이 은혜와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자랄 때, 슬기로운 건축자는 그들에게 율법을 다시 설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율법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스런 자유의 가지들에게는 명령일 뿐 아니라 하나의 특권임으로 기쁨의 빛 안에서 설교되어야 한다. . . .  의심할 여지없이, 둘 다 교대로 설교되어야 한다.  한 번에 둘 다, 또는 하나 안에서 둘 다. . . .  그것이 율법과 복음을 함께 섞는 방법이다.

 

B. 서사 설교학(Narrative Homiletics) 영향하에서의 L-G 설교

1. Herman Stuempfle Jr.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 교수인 H. Grady Davis 1958년에 설교 디자인”(Design for Preaching)이란 설교학 교재에서 그의 다섯 번째 설교 유형으로 일종의 이야기가 들려지는 형태(“a story told”)를 소개[“설명-갈등 증폭-해결”(exposition-complication-resolution)로 발전하는 설교 유형]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내러티브 설교 시대의 도래를 알리게 되었고, 율법과 복음의 설교 역사도 하나의 새로운 이정표가 형성되었다.

 

1978년에 출판된 율법과 복음의 설교”(Preaching Law and Gospel)라는 책에서 Stuempfle Jr.하나의 설교가 만들어 지는 데 다른 여러 요소들이 기여되지만 그 설교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어떤 신학적 하부 구조’(a certain theological sub-structure)가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그는 이 신학적 하부 구조를 율법과 복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율법과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의 이중 형태라고 묘사하면서 전자는 심판(judgment), 후자는 은혜(grace)라 명명했다.

 

루터의 신학적 용법으로서의 율법으로부터 Stuempfle, Jr.는 효과적인 설교 사역을 위해 율법의 두 가지 특성이 주목되어 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 중의 하나는 율법의 수직적 측면이다.  이 측면은 우리의 죄악 된 삶에 수직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해머로서의 말씀이다. 다른 하나는 율법의 수평적 측면이다.  여기서 율법은 우선적으로 우리의 삶의 존재를 반영하는 것인데 우리 삶의 걱정, 소원, 무의미, 깨어짐, 유한성, 의심, 그리고 절망 등을 나타낸다. 율법의 이 각각의 특징들은 그 나름대로 상응하는 복음의 말씀(gospel correlate)을 가진다.  그래서 만일 율법이 심판의 햄머로서 설교되면 복음은 그에 상응해서 용서 또는 이신칭의의 말씀을 선포한다.  만일 율법이 우리 삶의 존재를 드러내는 거울로 사용되어 우리 삶의 절망을 부각한다면 복음은 이것에 대한 교창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을 선포하게 된다.

 

2. Eugene Lowry

Davis와 같이, Eugene Lowry는 생각하기를 설교는 주어진 일정한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이벤트”(“events-in-time”)라고 생각했다.  이 말의 의미는 설교가 단지 어떤 개념들이나 명제적인 진리들을 알려주는 데서 그치기 보다 경험을 형성하도록 돕는 어떤 유기적인 전체로서 일반적인 이야기가 갖는 어떠한 방향성 또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원칙적으로 전통적이고 논리적인 연역법적 설교 개요를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개요는 인간의 내면에 경험을 형성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Lowry에게서는 오직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줄거리(“plot”)만이 이것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Davis의 도움을 입으면서, Lowry는 모든 설교를 위한 설화체 형태의 설교학, , The Homiletical Plot(“설화체적 설교”)을 주장했다. 이는 Stuempfle, Jr.의 이론과는 이질감이 있지만, 그 속에 율법과 복음의 틀과 유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내러티브 설교는 처음에 다섯 단계의 진행을 가지고 있었다: (1) Upsetting the equilibrium(평형을 깨뜨림), (2) Analyzing the discrepancy(모순의 분석), (3) Disclosing the clue to the resolution(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냄), (4) Experiencing the gospel(복음을 경험), and (5) Anticipating the consequences(결과를 기대함).  그러나 최근에 그가 The Homiletical Plot에 가해진 설교자들과 학자들의 비평을 고려하면서 출간한 The Sermon: Dancing the Edge of Mystery에서는 종전의 다섯 단계의 고리(loop) 대신 네 단계의 고리를 가진 설화체 설교를 주장했다: (1) 갈등(conflict) (2) 갈등 증폭(complication) (3) 갑작스런 반전(sudden shift) (4) 해결(unfolding).

            

C. 서사설교의 확장으로서의 L-G 설교

1. Richard Lischer

서사 설교(narrative preaching)를 변호하는 대신, 그의 설교의 신학: 복음의 역동성”(A Theology of Preaching: The Dynamics of the Gospel)이란 책에서 Richard Lischer는 기독교 설교는 부활 설교”(“resurrection preaching”)의 모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교가 설교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승리를 재현하고 거기에 참여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설교는 율법과 복음 사이의 변증법을 취해야 하는데, 전자는 소외, 고독, 걱정, , 악 등과 같은 죽음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하고, 후자는 거기로부터 승리의 음률이 솟아나게 해야 한다. 그런 후 Lischer는 설교 본문을 통한 율법과 복음 사이의 이러한 역동적인 변증법을 설교하기 위한 하나의 틀로서 분석(Analysis), 변천(Transition), 종합(Integration)”이라는 삼중의 설교적 흐름을 제안했다.

     

2. Paul Scott Wilson

현대 설교학 세계가 신학, 하나님, 그 분의 은혜, 그리고 청중에게 관련된 메시지를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는데 실패한 것을 보고, 그는 네 페이지의 설교” (The Four Pages of the Sermon)를 출판했다.  여러 일들 중 그가 이 책에서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설교에서 복음이 들려질 수 있도록 하는 신학적 초점과 하나의 신학적 구조를 추천하는 것이며, 결과 설교에서 어떤 기본적이고 신학적인 그램머(grammar)의 필요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이 기본적이고 신학적인 그램머를 설교가 가지는 하나의 깊은 신학적 구조(a “deep theological structure of the sermon”)라고 부른다. 그는 이 네 페이지의 설교가 일반 설교자들에게 몹시 쉽게 사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 원리가 “[좋은] 대부분의 설교들에서 발견되는 기본적이고도 신학적인 자세들의 순서에 상응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윌슨 교수의 설교의 네 페이지는 네 가지 다른 종류의 신학적으로 구성된 초점을 갖는다: (1) 성경 속의 곤란(trouble in the Bible), (2) 이 세상 속의 곤란(trouble in the world), (3) 성경 속의 하나님의 행동(God’s action in the Bible), (4) 이 세상 속의 하나님의 행동(God’s action in the world).  이러한 네 구조적 틀 속에서 Wilson 교수는 설교에서 곤란부분의 구성을 위해 우리가 수행해야 될 무거운 짐들을 인간 위에 올려놓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부분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곤란으로부터 구원 해야 할 짐을 하나님께 올려 놓는다.  그래서 "곤란"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정죄를 가리키며; 은혜는 인간에게 부족한 것을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곤란과 은혜를 이러한 방식으로 상응되게 나열 하여 그들 사이에 어떤 “spark”를 창조함으로써, Wilson은 궁극적으로 설교의 목적인 사람을 믿음으로 초청하는 것을 성취하려고 한다.

 

D. 여러 교파에 나타난 L-G 설교의 변형된 형태

L-G 설교는 루터와 칼빈의 율법과 복음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하나의 큰 틀을 기본적으로 취하면서 발전한다. 따라서 L-G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핵심 요소인 율법-복음의 틀이라는 기본적인 구도를 중심으로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율법과 복음의 틀을 핵심으로 갖는 L-G 설교는 서사적 설교학의 문화적 잠재력과 율법-복음 구조의 드라마틱한 신학적 힘의 결합을 가지므로 지난 세기의 거대한 문화적 변화 속의 청중을 성공적으로 섬겨올 수 있었다. 이러한 평가가 의미하는 바는 L-G 설교는 어떤 한 부류의 사람들이나 또는 교파에 국한된 설교의 형태가 되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설교를 강조하는 주요 개신교 교파의 말씀의 강단 속에서 L-G 설교가 어떤 변형의 형태로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1. 헨리 H. 미첼(Henry H. Mitchell)

헨리 H. 미첼(Henry H. Mitchell)은 아프리칸 어메리칸(흑인) 설교학의 대부인데 그의 책 축제와 경험의 설교”(Celebration and Experience in Preaching)에서 그의 설교 신학을 엿 볼 수 있다. 그는 모든 설교는 축제로 이끌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보통 그들이 축하하는 것들을 삶 속에서 또한 실천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축제로 이어지는 설교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의미이다.

 

설교의 구조(structure or outline)와 관련해서, 미첼은 서사설교(narrative preaching)의 진행을 따르면서 설교자들이 설교의 구조를 단순히 아이디어들의 연속된 배열로 보지 말고 사람 속의 의식의 흐름으로 보도록 조언한다. 그리고 사람의 의식 속의 흐름은 연극 속의 '움직임들' 또는 '행위들'이 잘 반영하는데, 이들은 구체적인 소재들을 동원해 그 연극의 줄거리(plot)라는 형태로 그 흐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설교에서 각 요소의 움직임들은 의미 없는 추상적이 내용들 또는 일반적인 진술들의 나열처럼 간주되어서는 안되고, ‘연극 속의 행위들과 같아야 한다 고 주장한다.

 

미첼의 설교 구조에 있어서 발견되는 이러한 서사체적인 특성들 때문에 그는 설교는 반드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먼저 언급하도록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축제와 경험의 설교에서 진술하기를, “아무리 탁월한 아이디어라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사람의 실제적인 필요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디어는 쓸모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필요를 언급하는 진정한 설교는 인간으로서의 그 사람의 구체적 문제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후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믿음의 진작을 위해 희망’(hope)이나 더 좋게는 축제’(celebration)적 분위기로 마감하는 설교를 구성할 것을 강조한다.

 

미첼의 설교학에서 그는 율법이나 복음이라는 단어 등을 사용하지 않지만, 청중의 삶 속의 절실한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그리고 설교를 하나의 축제로 마감하는 그의 구성은 L-G 설교학에서 강조하는 것과 유사한 설교의 저변에 흐르는 어떤 신학적 기본 원리가 적용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그것이 율법의 수평적인 면을 많이 강조하는 균형을 잃은 면이 아쉽기는 하지만.

 

2. 시드니 그레이다너스(Dr. Sidney Greidanus)

개혁주의 설교학의 선두 주자 중의 한 사람인 시드니 그레이다너스(Dr. Sidney Greidanus) 교수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성경의 성격(the nature of the Bible) "적용된" 계시("applicatory" revelation)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레이다너스에게 있어서 성경의 모든 계시는 [과거 특정한] 믿음의 공동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적용된" 계시였다. 달리 말하자면,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말씀들은 과거 역사적 믿음의 공동체들이 직면했던 어떤 필요(need)에 대한 하나의 '이미' 적용된 메세지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성경은 적용되어 있는 말씀이기에, 그 메세지의 '적용된' 성격을 전달하는 것만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고 한다. , 과거 역사상의 원래 청중이 들었던 것과 "동일한 적실성을 가지는 말씀"(the same relevant message)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설교자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그레이다너스는 (1)본문의 주제 파악(하나님 중심적 형태로) - 본문의 목적(왜 본문이 쓰여졌는가?의 질문 통해) 파악 - (본문의 필요 파악)[암시적으로만 언급] => (원 청중이 들었던 것과 동일한 적실성의 메세지를 전달(TRANSFER) 하기 위해) 현대인의 삶 중에서 본문의 것과 동일하거나 또는 유사한(similar) 상황이나 필요(need)를 발견 후 그것을 중심으로 (2)본문의 원래의 의미에 집중하면서 상응하는 설교 주제 진술 - 설교의 목적 진술 - 설교의 필요 진술을 요청한다.  그렇게 될 때 과거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의 교회에게도 관련성있는 주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의 강해설교 방법론의 핵심이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시드니 그레이다너스 교수의 설교학의 주요 관심사들 중의 하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살아있는(또는 관련된, relevant)말씀이 되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교학적 숙제로서 고민하는 가운데, 그는 먼저 최초 독자의 필요를 발견하는데 촛점을 맞추고, 그런 후에는 오늘 현대 청중들의 삶 속에서 발견되어 지는 동일한 또는 비슷한 필요를 발견 정하게 했다.

 

이러한 말씀의 관련성에 촛점을 맞추는 그의 설교학 과정 중에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용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적용 중심의 설교학에서 두더러진 점은, 먼저 설교 본문과 설교의 목적("필요"와 관련된)에 촛점을 맞추고, 그런 후 본문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 중심의 메세지로서 설교의 '필요'에 응답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그레이다너스 교수의 설교학은 기본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설교와 잘 연결이 되며, 그래서 그의 설교법은 그 안에 어떤 깊은 신학적인 구조(또는 문법)를 가진 'L-G 설교'의 한 변형이다 고 말할 수 있다.

 

3. 브라이언 채펠(Bryan Chapell)

기독교의 메세지들이 도덕주의나 율법주의적으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1994년 복음주의 설교학자 중의 한 사람인 브라이언 체펠(Dr. Bryan Chapell) 교수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Christ-Centered Preaching: Redeeming the Expository Sermon)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현대 교회의 설교가 직면하고 있는 두 가지 극단적인 위험을 고발했다: 그 첫 번째는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를 방해하는 '권위의 부식' 현상이며, 다음은 교회와 사회의 세속화에 대처하기 위해 현대의 많은 설교자들이 "도덕적인 교훈들이나 사회 개혁을 그들의 메세지의 최전방에 두려는" 노력들이다.

 

채펠 교수는 이러한 교회의 적들에 대해 고발한 후 모든 성경 본문의 궁극적인 결론이며 모든 기독교 교훈과 거룩을 가능하게 하는 [복음의] 은혜(grace)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메세지를 구성하는 강해설교(expository preaching)의 회복을 주장했다. 강해설교가 이렇게 회복될 때 현대 설교가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위험으로 부터 구출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설교의 신학 때문에 체펠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동기유발이나 순종을 가능케 하는 요소들을 설교에 합체시키지 않는 사람들은 단지 바리새적인 설교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달리 말해서 복음의 동기부여나 그리스도-중심을 설교에 적용하지 않고 단지 '. . . 같이 되라', '선하게 살아라', ' . . . 하게 행동하라' 등의 메세지를 전하는 설교자, 즉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도덕적인 의무나 행동 앞서 나아가도록 하지 않는 설교자는 바리새주의가 되어 삶의 절망을 조장하고 그래서 성도들의 신앙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게 된다 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 . . .이 되라 는 메세지가 그 자체에 있어서는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강해설교 작성을 위한 요소는 세 가지이다. 설교자는 제일 먼저 본문의 명확한 한 주제(a single clear idea of the text)를 발견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본문의 배후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구원사적 목적을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이 두 가지를 발견할 때 도움이 되는 요소인데, 그것은 본문 속의 타락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Fallen Condition Focus)이다. FCF는 본문의 특별한 삶의 정황 속에서 사람들이 드러내는 어떤 필요들의 단면들이다. 더 간략하게 요약하면, 채펠의 설교학의 큰 두 기둥은 (1) FCF 발견과 (2) 주제와 목적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반적인 구속사적인 계획 속에서 본문이 가지는 위치와 역활이 결정되어 질 때 본문의 구속사적인 메세지가 그 본연의 흐름을 타게 되고 그 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본문의 FCF를 둘러싸고 드러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본문의 FCF를 결정하는 과정과 FCF에 상응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하는 강해설교가 선포될 때, 그 속에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연동 속에서 보는 것같은 어떤 설교학적 구조(a homiletical structure)를 발견하게 된다. 채펠 교수의 이러한 강해설교의 면모 때문에 필자는 그의 설교법을 따르는 개혁교회의 설교가 L-G 설교(law-gospel preaching)의 한 변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VI. L-G 설교의 원리

L-G 설교는 그 신학적 근거로써 기본적으로 루터와 칼빈의 율법과 복음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에 율법-복음-복음(Law-Gospel-Law)이라는 하나의 큰 틀을 취한다. 루터의 성화론에서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율법-그리고-복음'의 큰 틀로 나타난다.  칼빈은 루터의 신학적 용법을 넘어서는 제 3의 용법을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성화론에 있어서 '율법-복음-율법'의 프래임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은 루터와 칼빈의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였지 설교학적인 이해는 아니었다. 설교학적인 관점을 여기에 적용한다면, L-G 설교의 보다 정확한 형태는 {율법}-{복음-율법}이며, 그래서 그 형태를 'L-G 설교'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좋은 설교에서 발견되는 것이므로 '하나의 신학적 원리'이며, 그 형태가 {율법}-{복음-율법}인 이유는 이 원리의 마지막 '율법'은 복음의 영토(territory) 안에서 역사하는 '율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율법'의 심판(judgement) '복음'의 은혜의 메세지가 힘있게 선포되고 전개되면 이 마지막 율법은 복음의 힘에 의해 그 날개를 펴고 비상(안내/ 권면 또는 채찍)하게 된다.

 

마지막 율법의 권면의 역할은 유진 로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이나 폴 윌슨의 설교에서 충분히 강조되지 않는 부분이라 하겠다.  로우리의 설교 이론의 큰 두 단점은 먼저 그의 이론이 신학적 근거보다 일반 심리학의 문제-치료 접근법에 근거를 더 많이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음은 그의 설교 이론에서 복음이 너무 늦게 등장해서 권면을 위한 부분이 너무 소홀히 다루어 지는 것이라 하겠다.  그는 설교를 너무 드라마틱하게 전개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 

 

윌슨은 그의 네 페이지 설교에서 설교의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Mission”이란 타이틀을 복음부분에 제한적으로 첨가하고 있다. 설교에 적용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의 제 3의 용법으로서의 '권면'과 그 ""이 느껴지도록까지 나아가는데 조심한다. 그 이유는 권면 부분이 너무 강조됨으로써 복음다음에 신자가 해야만 하는 무엇을 가리키는 율법이 다시 등장함으로써 설교가 율법적으로 변하는 것을 우려해서이다. 그는 복음의 은혜에 더 치중하는 설교 학자이다. 윌슨의 노파심을 극복하는 방법은 '복음'(하나님의 은혜 또는 하나님 중심의 구속사적인 메세지 등)을 더 힘있고 깊게 선포하므로 말미암아 '권면'이 자연스럽게 날개를 펴 날게하는 일일 것이다.

 

L-G 설교는 하나의 신학적 원리로써 작용하는 것이므로, 본문의 장르의 중요성이나 다양한 설교 형식(Form)이나 종류를 인정하며 제한하지 않는다. 단지 L-G 설교의 원리가 각 설교의 근저에서 작용할 때 표면적인 레벨의 설교 작성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가 있을 때 더욱 효과적이다. 그 도구들은 본문에서 발견되는 복음을 드러내는 '진리절', 진리절의 적용을 다루는 '적용절' 그리고 진리절과 적용절의 존재 이유가 된 '필요절'이다.

VII. 세 페이지 설교의 방법론

설교 개요(Sermon Outline): 살전 5:23-28

진리절: 하나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 부르셨기에, 온전히 거룩케 하신다.

적용절: 이타적인 삶을 사는 온전히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자!

필요절: 신앙 공동체 속의 이타적인 삶의 부족

 

대지:

<서론> 이기적인 삶이 인정받고 성공하는 시대상

        -> 신앙의 공동체 가운데에도 만연한 이기주의적 신앙요소

 

1.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온전히 거룩하길 원하신다! (필요절 전개)

   A.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모습 (Then & Now)

   B. 그래서 이그러진 '공동체' 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 (Then & Now)

   C. 그러나 희망은 있다.

     

2. 하나님은 교회가 온전히 거룩하기를 원할 뿐 아니라 끝까지 지키신다! (진리절 전개)

   A. 마음만의 거룩이 아니라, 영과 혼과 몸의 온전한 거룩을 원하시고 지켜내신다.

   B.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를 이루어 오셨다(구약에서).

   C.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함을 이미 이루셨고 또한 지켜 가신다(신약에서).

   D. 그러면 어떻게?

 

3. 이기적인 삶에서 돌아서서 이타적인 삶을 드러내라(적용절 전개).

   A. 교회의 온전한 거룩하심은 이타적인[또는 공동체적 관계의] 삶에서 드러난다.

      이기적인 삶에서 돌아서라! 그러한 삶이 아름답고 거룩하고 행복한 삶이다.

   A. 중보기도 하라!

   B. 거룩한[평화의] 입맞춤으로 서로 화평하라.

   C. 은혜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세워 나가라.

  

<결론> 받고만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 믿고 주는/희생의 삶을 살아 온전히 거룩한 공동

        체를 이루어 가자!

 

나가는 말:

복음적인 성화론을 추구하는 L-G 설교를 효율적이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는 '율법'을 깊게 적용하는 것이다. 다음은 하나님의 은혜 또는 하나님 중심의 구속사적인 메세지를 품은 '복음'을 더 힘있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럴 때 성령께서 행하시는 적용('권면')이 날개를 펴 그 변화의 바람을 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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