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집트 다시 분쟁 속으로? (Economist │ Feb 2nd 2013)

정권 교체 2년 만에 다시 위기를 맞고 있는 이집트 원인을 분석한 이코노미스트의 특집기사를 요약 게재합니다.  

2013년 1월 25일은 2년 전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전임 대통령을 퇴위시켰던 시위가 시작된 기념일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날짜뿐만 아니라 모하메드 무르시(Mohamed Morsy) 현 대통령이 처한 형편이 2년 전 무바라크 대통령이 겪었던 상황과 똑같다. 모하메드 무르시 현 대통령은 매우 독실한 무슬림형제단(Muslim Brortherhood) 회원이며 이집트 최초의 자유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한 그가 무바라크 전 대통령과 거의 같은 상황에 처하자, 일부에서는 그 역시 곧 퇴위할지 모른다고 예측하고 있다. 

과거의 관습을 벗어던지기

2011년의 혁명 이후 새 정부가 확실한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이집트 경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최근 이집트 정국은 이슬람 교리에 따라 국가를 지도해야 한다는 종교적 집단과 비록 소수이지만 학식이 있고 현실적인 그러나 소외 받은 도시 엘리트 출신들의 불만과 혼란이 충돌하고 있다. 현재 이집트 국민들이 무르시 현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변화>이다. 즉 그가 단지 무슬림형제단의 대표로서 대통령 직무를 담당할 것이 아니라 이집트 국민 전체의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인 것이다. 

2년의 세월, 두 개의 다른 사연

모든 계층의 이집트인들이 서로 다른 이념에도 불구하고 음식, 자유, 품위를 요구하며, 지난 30년 동안의 무바라크 독재를 종식하고자 단결한 결과 2011년의 변화가 가능했다. 이로 인해 혜택을 받은 사람도 있지만 불안해진 사람들이 더 많다. 보는 사람에 따라 최근 발생한 이집트의 정치적 변화에 대한 평가가 서로 다르다. 그 중 이슬람주의자들은 최근 이집트의 변화를 성공 신화로 본다. 

가령 무슬림형제단이 그 대표적인 예다. 1928년 설립된 이후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인들에게 서양을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줌으로써 무바라크에 반대하는 어떤 다른 세력도 누릴 수 없었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물러난 후 군부가 잠시 정권을 잡았을 때 군부는 형제단이 군정의 업무를 수월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들은 임시 군정의 이런 시도를 이용하여 2011년 3월 선거에서 77%라는 압도적 다수로 승리, 이집트의 새로운 지도세력이 되었고 2011년 12월부터 2012년 1월까지 치러진 선거에서는 국회 전체 의석의 47%를 차지했다.

2012년 이집트 상원의원 선거 때는 이집트 상원을 확보했다. 2012년 6월, 무르시는 드디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득표율은 25%에 불과했다. 당선 후 모르시는 모든 이집트인들을 위한 대표자가 될 것이며 올바른 헌법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무르시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째는 무바라크 시절 임명된 군 수뇌부에 대한 인사개혁을 단행함으로 군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르시 대통령과 형제단과의 긴밀한 관계가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무르시 대통령에 대한 이집트 국민들의 신뢰는 더욱 시들어 들었다. 비-이슬람주의적 비평가들 역시 이집트의 현 정부가 무바라크 시절과 마찬가지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비민주적인 부패에 물든 정부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하고 있다.  

또 다른 측면

두 번째 방책은 이집트 상원과 제헌의회는 법원 결정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법률을 발표한 것이다. 명분은 법원의 횡포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함이라 한다. 그러나 무르시 대통령이 위와 같이 제헌의회 구성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이집트 의회를 형제단 회원으로 “도배”하기 위한 조치에 불과하다. 무르시 대통령은 이 헌법초안에 대한 이집트국민의 승인을 얻고자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러나 유권자 3 분의 1 정도는 투표에 참가하지 않았고 이집트의 가장 큰 도시 카이로 시민들도 이 초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무르시 대통령은 곧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며 “국민과의 대화”에 나섰고, 11월에 자신 스스로에게 부여한 특별한 권한을 모두 포기했지만 이는 이미 모든 입법권을 사실상 이집트 상원에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무르시 대통령 자신이 개입할 필요가 없기에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침묵도 없고 절대 다수도 없는 상태

무르시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 인근 도시들에 통행금지명령을 내리자 다른 도시에서 대중들의 시위는 더욱 심해졌고 대통령의 권위도 실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전역에서 포트사이드 시민들의 분노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문 것은 많은 이집트인들이 이러한 파괴적인 장난에 염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모든 이집트인들을 좌절시킬 정도로 놀랍게 상승하는 실업률과 물가는 국민들의 실망을 낳고 이는 결국 정치적 불만으로 폭발하고 있다.

무르시 대통령은 비-이슬람주의적 정당 민족구제전선(NSF) 대상의 포섭과 더불어 이집트 경제 개혁을 위한 국제통화기금(IMF) 후원 확보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보다 폭넓은 지지와 국민화합이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무르시 대통령이 과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취했던 과감한 조치들을 국민화합을 위해서 시도할 수만 있다면 이집트의 도약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이집트의 분열된 여론은 이집트를 더욱 산산 조각 낼 것이다.

 

2. 최대 위기에 봉착한 튀니지 (The New York Times │ February 7, 2013) 

지난 2월6일, 재스민 혁명의 진원지였던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세속주의 온건 좌파 성향의 인권변호사이자 민주 애국자당의 지도자인 초크리 벨라이드(Chokri Belaid)가 총격으로 사망한 후 촉발된 거리 시위로 튀니지는 정치적으로 최대의 고비를 맞이하고 있다. 3일간 시위가 지속된 가운데 대규모 군중이 그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수도 투니스(Tunis)를 비롯하여 많은 지역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 지지자들은 ‘이슬람’이 혁명(Revolution)을 납치(Hijacking)했다며 반정부 구호를 외쳤다. 또한 지난 2011년 1월, 반정부 시위로 축출되어 해외로 도피한 벤 알리(Zine el-Abidine Ben Ali) 전 대통령의 시대보다 지금이 훨씬 못하다며 분노했다. 초크리 벨라이드는 국민의 편에 서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 아니라, 이슬람 정당인 엔나흐다(ennahda)당의 독주와 이슬람화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주력 야당의 지도자였다. 

▲ 야당 지도자의 시신 운구 차량을 둘러싼 군중들

3. 이슬람을 비판한 덴마크 언론인 피격 (The Guardian│Tuesday 5 February 2013)

덴마크의 가장 큰 일간지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이며, 언론 자유 운동 단체의 수반인 라르스 헤데가드(Lars Hedegaard)가 이슬람을 비판한 이유로 코펜하겐의 자신의 집에서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자, 약 25세 가량의 남자가 그의 머리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다행히 실패에 그쳤고 범인은 실랑이 도중 도주하였다. 그는 지난 2011년 이슬람을 비하하고 모욕하는 연재물들을 만들었다는 혐의로 570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 받았으나, 유죄 판결에 상소하여 2012년 덴마크 대법원으로부터 무죄를 선고 받았다. 덴마크 총리인 헬레 토르닝 슈미트(Helle Thorning-Schmidt)는 라르스 헤데가드의 언론 표현의 자유를 막는 이러한 형태의 공격은 아주 악한 것이라며 이번 사건에 대해 규탄했다고 덴마크의 뉴스 에이전시인 Ritzau는 전했다.

라르스 헤데가드는 스위스의 아티스트 라르스 빌크스(Lars Vilks)와 네덜란드의 입법가인 헤르트 빌더스 (Geert Wilders)와 더불어 그동안 유럽의 이슬람에 대해 비판해 왔고 이러한 운동들을 지원해 왔다.

 

4. 무기를 훔친 혐의로 3년 형을 받은 이집트의 기독교인들 (The New York Times│February 4, 2013)

지난 월요일, 이집트 형사 재판소는 2011년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무슬림-기독교인 무력 충돌 가운데 군인들로부터 무기를 훔친 혐의로 두 명의 이집트 기독교도(콥틱)에게 3년 형을 선고했다.

2011년 10월 9일, 무슬림이 다수인 이집트에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소수 기독교인을 보호해 달라는 목적으로 수백 명의 기독교인들이 카이로 시내로 진출했고 이를 반대하는 극단주의 무슬림 시위대와 만나면서 충돌했다. 이 충돌로 27명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콥틱 교도들이었다.

당시 군대는 군인들로부터 무기를 탈취하는 시위자들을 방관하다가 이런 시위자들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후, 군부는 콥틱 교도들 중 일부를 부당하게 죽인 세 명의 병사를 지난 해 기소했지만 군사 법원은 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현재 콥틱 교도들의 변호인은 월요일 다시 항소할 것이라고 전했다.

 

5. 모든 가정교회를 폐쇄시키겠다는 중국 보고서 (UCA News│2013-02-06) 

지하 가정 교회를 통제하고 감시하라는 중국 정부의 비밀 문건이 폭로되었다. 이는 기독교인과 교회를 핍박했던 중국 정부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동시에 새로운 움직임이다. 중국의 개신교 지하교회에 대한 박해 상황을 보도하는 기관인 중국구호협회(ChinaAid)는 지난 7년간 중국 내 종교상의 박해가 더욱 심해진데다, 중국 정부가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구호협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 해 동안 4,919명의 사람들이 포함된 약132건의 박해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전년도와 비교할 때 약 125% 증가한 수치이다. 박해 비율 또한 2011년도와 비교할 때 약 41.9%가 증가했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는 관례적으로 가정 교회라고 불리는 지하 교회를 통제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는 중국 정부와 공산당의 뚜렷한 목적 하에 전략적으로 실행될 것이라 전했다.

 

6. 2월16일 종교문화연구소장 연구차 중동 방문

종교문화연구소의 전호진 소장은 2013년 2월16일부터 약 열흘간의 일정으로 중동(두바이, 요르단)을 방문하여 아랍 혁명 이후의 이슬람을 진단, 현장 연구를 진행코자 합니다.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주시는 통찰력으로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연구들을 진행할 수 있도록 기도로 동역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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