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홍성철 목사 Wales University(Ph.D) 주는교회담임

신학은 조직신학의 교리에 근거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성경주해에 근거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신학은 초기 기독교의 기록된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고 연구하여 그 근거를 바탕으로 용어들을 정확히 사용해야 한다.  

성령강림주일을 맞는 교회는 약속의 성령인 삼위 하나님의 영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논의 주제는 이것이다. 과연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단회적인가, 영속적인가? 영속적이라면 어떤 면에서 영속적인가? 성령의 오심의 지속성과 비지속성은 무엇인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가, 다른가? 다르면 어떤 면에서 다른가? 성령세례는 무엇인가? 성령 충만은 무엇인가?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사용하는 9개 동사는 성령의 주어짐을 묘사한다. 성령은 주어지고, 받고, 부어지고, 내리시고, 오시고, 세례를 베풀고, 그리고 채워진다. 4번이나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진다. 이 용어에서 성령은 세 가지 주요 파이프들을 통해 그 소리가 난다. 누가가 묘사하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1) 성령은 종말론적 선물이다. 하나님이 약속한 선물을 아들이 붓고, 회개한 사람에게 부어진다.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부어진다. 2) 둘째로 누가가 사용하는 용어는 성령으로 충만한(명사 pleres와 동사 pleroo) 성령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묘사한다. 3) 세 번째는 다른 두 용어와 구별된다. 특별히 어떤 사람들이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채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동사 pimplemi)이다. 하워드 마샬은 이 누가의 사용법을 인식한다. 이 주제는 어떤 학자들은 무시하고 어떤 학자들은 평가절하한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사용하는 성령의 사역은 어떤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어떤 바람이 부는지, 언제 부는지, 언제 함께 부는지, 언제 홀로 부는지 알 수 있고 구분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바람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종말론적 선물; 성령충만한 크리스천 생활의 지속적인 순풍, 그리고 특별한 성령의 채우심이다.  

1. 성령의 종말론적 은사-성령 세례

‘성령을 준다’(didomi)와 ‘성령을 받는다’(lambano)는 사도행전에서 종말론적 선물인 성령의 도래를 나타내는 기본적인 용어들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성령을 주고 신자는 성령을 받는다. 예수를 믿는 자는 성령을 받는다. 조지 래드는 성령의 도래로 종말론적 경험이 오는 시대가 현재 시대로 도달했다고 말한다. 11)  

누가가 사용하는 7개의 동사들은 소위 성령 세례를 언급하는 2장, 8장, 10장 그리고 19장에서 성령의 도래를 나타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사용된다: 1)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 2) 성령을 부어준다, 3) 성령이 오신다, 4) 위로부터 온다, 5) 성령이 떨어진다(fall upon), 6) 성령을 준다(give), 7) 성령을 받는다(receive). 12)

오순절의 성령의 바람은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그리고 19장에서도 지속적으로 분다. 사도행전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구원 역사 중에서 가장 주요한 운동이 되었다. 이 용어들은 초자연적 성령 세례가 발생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13) 

1.1. 성령으로 세례(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사도행전 1:5절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며, 세례요한도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약속을 반복한다.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예수님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40동안 가르쳤다(1:3). 예수님은 승천 전에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가 발생할 것을 예측했다(1:5). 1:5절에서 예측된 성령세례는 오순절 날에 사도행전 2장에서 발생했다. 다른 성령세례 용어(baptizo)는 11:16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구절에서 사용된다. 14)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어구는 유일한 경험으로 등장한다.  

누가는 오순절 날 성령세례의 성취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고넬료와 그의 가솔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를 준다'는 동사 (baptizo)는 사도행전 2장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누가는 사도행전 2, 8, 10, 19장에서 다른 동사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세례를 준다는 동사는 이 용어들과 중첩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성령의 종말론적 선물의 출현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 성령 세례가 발생했다는 것을 누가는 강조한다(행 1:4-5, 9-11). 그리고 성령의 도래로 마지막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2:17).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로부터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땅에서 너희를 모을 것이다(겔 36:24; 신 30:3-5). 누가는 사도행전 2:5절에서 성령이 부어질 때 모든 나라에서 이방인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그리고 누가는 그들의 어디에서 왔는지 상세히 묘사한다(2:9-11). 여기에서 에스겔의 예언을 지적하고 싶다. 요엘의 예언처럼 오순절 날에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 15) 그래서 승귀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성령 세례로 사역한다. 그리고 이 오순절 사건의 중요성은 죽임당한 예수의 추종자들을 하나님이 인정하고 마지막 날인 종말(2:17)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2. 성령이 너희 위에 올 것이다

누가가 성령이 '임하다'는 용어(eperchomai, erchomai)를 사도행전에서 2번 사용되었다(1:8; 19:6).  

헬라의 경건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온다는 용어다(erchomai). 신적인 존재가 온다는 용어() 기도의 본문과 마술 파피루스에서 살펴볼 수 있다(cf. J. Schneider, TDNT II 927). 

사도행전 1:8절에서 성령은 너희 위에 임할 때(eperchomai), 그들은 능력을 받는다. 성령은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에게 임한다(come upon). 그러나 누가는 2장에서 그 동사 성령이 임한다는 동사를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 누가가 사용하는 성령이 오신다는 용어는 성령이 임한다는 에펠코마이와 중첩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령이 임한다(coming upon)는 사도행전 19:6절에 발견된다. 바울은 성령의 시대를 믿었던 제자들이라고 본다. (19:2). 그래서 그는 그들 머리에 안수하고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한다(erchomai).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약속과 에베소 신자들이 경험한 경험은 마지막 시대인 종말이 왔다는 사인으로서 성령이 오신 것이다(행 2:17; 19:2). 성령은 교회가 경험할 종말론적 축복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로 '오실 것에 대한 약속'이다(엡 1:13-14).  

1.3. 내가 나의 영을 부어 줄 것이다

동사 ‘부어준다’(ekcheo/ekchunno)는 유대인의 비문에서 순교자의 피를 흘리는 것을 말한다. 부어준다는 성령을 부어준다는 의미로 요엘서 2:28-29절을 따른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준다(행 2:17-18, 33; 10:45; 딛 3:6). 

이 모든 동사는 베드로가 사용한다. 성령이 부어진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이다. 성령이 부어진다는 것은 요엘서 2:28-32절의 성취다. ‘성령이 오신다’는 용어는 사도행전 2:16-21절에서 요엘서 2:28-32절을 성취한다. 

오순절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베드로는 설명한다: "이것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 예언했던 것이다"(2:16).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말한다: “나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줄 것(ekcheo)이다”(행 2:16). 성령의 오심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말했던 것이다. 요엘이 선포된 것은 종말에 관한 내용이다(2:17).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해 약속된 약속이 오순절 성령의 도래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성령은 지금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자에게 주어진다(2:38).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약속을 받아 성령을 붓는다(ekcheo). 군중들이 보고 들었던 사건은 성령이 오셨던 사건이다(2:33).  

후에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에게 성령의 오심을 다시 설명한다(10:34-44). 베드로를 따라왔던 할례를 받은 신자는 모두 놀랐다. 왜냐하면 이방인들 위에도 성령의 선물이 부어졌기 때문이다(10:45). 베드로는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먹는 문제로 의견이 생겼을 때(11:3), 베드로는 그와 함께 하는 자들이 오순절에 경험한 메시지로 다시 반응한다(11;15). 사도행전에서 부어진 성령의 부어짐은 하늘 아래 모든 민족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경험한 성령의 부어짐이라고 인식한다(2:5, 17-18).  

사도행전 10장에서 성령의 부어짐(ekceo)는 ‘세례를 받다’ baptizo, erchomai, 그리고 eperchomai 동사와 중첩된다. 성령의 종말론적 본질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중첩된 동사다. 유대인들이 먼저요(행 2장),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는다(행 10장). 

1.4. 성령은 그들 위에 떨어진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빌립의 설교를 들었다. 예수 이름에 관해 전도함을 듣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았다(8:9, 12). 예루살렘 사도들은 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다(8:14). 그들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8:15). 누가는 이 용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어떤 사람도 성령이 내리신 일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epipipto). 사도들은 오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이 아직 내리신 일이 없고(epipipto), 그러나 그들은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성령을 받았을 뿐(lambano) 이었다(8:16). 그러나 사도들은 사마리아 신자들 위에 손으로 안수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lambano, 8:17).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었던 때(8:12)와 그들이 성령을 받았던 때(8:17) 사이에 시간 간격이 있었다. 이것은 성령의 오심이 구원의 첫 경험으로 동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교회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다. 그래서 비록 성령은 예수 이름으로 그들에게 반드시 와야 하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의 권위와 전통을 인식해야 하지만,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선물인 성령을 준다. 18)  

성령은 말씀을 듣는 고넬료 사람들에게 내려오신다(epipipto, 10:44). 베드로는 다시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이 동사 '성령이 내려오신다'는 동사로 다시 사용하여 설명한다(11;15). 그래서 성령이 내려오신다(epipipto)는 위에서 사용된 동사와 중첩된다. 그래서 이수는 하나님이 이방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받아들였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성령의 오심의 종말론적 본질을 제시한다.  

중첩되는 점들

'성령 세례'(1:5; 11:16), '임한다'(1:8; 19:6), '성령을 부어주신다'(2:17-18; 10:45), 그리고 '성령이 내려 오신다'(8:16; 10:44)는 종말론적 '성령을 주다'(11:17), '받는다'(8:17)를 설명하는 큰 부분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세례요한의 예언 성취다(1:5).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다(2:17). 성부 하나님은 아들에게 성령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아들은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2:33). 성령의 오심을 누가는 종말론적 선물인 성령의 선물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  

2. '성령으로 세례'와 '회심'은 같은가?

사도행전 2장, 8장, 10장과 19장에서 성령 세례들은 회심 때에 발생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20) 조지 래드의 견해에 따르면, "성령의 세례는 구원하는 믿음을 받아들인 순간 일어난다"고 말한다. 21) 그러나 이 견해에 반하여 누가가 사용하는 용어인 '성령으로 세례는' 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험을 말하는 것 같다. 누가는 성령 세례의 경험을 말하는 네 개의 성령 세례의 경험에(2, 8장, 10장, 19장)에서 성령 세례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바람은 구원 역사가 세상을 향해 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의 회심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회심과 성령세례를 같은 사건으로 이해하는 자들에게 사도행전 자체가 강한 증거가 갖고 있다. 누가는 최소한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와 별개로 14개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다. 22) 베드로는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제공한다(행 2:38-29). 그러나 누가가 2:41절에서 회심을 기록할 때, 2:1-4절에서 발생한 드라마틱한 성령의 부어주심을 암시하는 구석이 없다. 십자가를 믿는 신자는 회심 때에 성령이 내주한다. 신자에게 종말의 끝까지 성령은 내주하는 반면, 누가가 성령세례와 성령의 부어주심을 말할 때 회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을 부어주심은 종말론적 선물이 도래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누가는 신자 속에 내주하는 성령의 내주를 말할 때는 다른 용법을 사용한다(성령 안에서 신앙생활). 어구 '성령으로 충만한'(pleres pleroo)은 '성령으로 세례'와 구별되는 표현이다.  

성령 세례는 종말론적인 성령의 선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성령 세례와 성령충만은 구별된다. 회심에서 정상적인 패턴은 성령세례로 드라마틱한 세례를 제외하고 내주하는 성령을 받는 신자를 위해 사용되는 용어다(14개의 회심 장면을 보라). 

성령세례의 각 예로서 그들에게 성령이 내리셨을 때 그들은 이미 신자들이었다. 23)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를 메시야로 믿었다. 예수님에게 언제 이스라엘을 회복하느냐고 회복의 때를 물었다. 24)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리시기 전에 그들은 믿었고 세례를 받았다(8:12). 그러나 이방인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임할 때 고넬료는 유대주의를 신봉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였다. 25)  

누가는 에베소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던은 바울이 그들은 신자임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27) 그러나 누가가 왜 이 실수를 계속하는가? 그리고 이 사람들이 신자임을 실로 인상을 주는가? 바울이 실수했다는 던의 주장은 회심과 성령 세례의 두 가지 단계의 경험을 반대하는 주장을 몰아가고 있다.  

만일 우리가 누가가 2장, 8장, 10장과 그리고 19장에서 성령 세례를 설명하는 어떤 것이 회심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회심을 묘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2장, 8장 10장, 그리고 19장을 회심으로 묘사하지 말아야 한다. 이 장들에서 성령의 세례가 발생했음을 제안하는 것이다.  

2장 8장, 10장, 그리고 19장은 회심 때에 발생한 것을 언급하는 것이 아닌, 성령세례로 하나님이 개인과 공동체를 인증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해 주어진 구절들이다. 28) 누가는 2장, 8장, 10장, 19장에서 성령세례 용어를 사용한다. 누가는 회심 때에 일어나는 사건을 성령세례로 묘사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2장은 교회가 성령세례를 받는 자들로서 첫 번째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믿는 자들에게 자신이 함께 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거기에 사마리아 기독교, 사마리아 유대교가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기독교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알려준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사도들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 성령을 받았다는 점을 알려준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의 성령받은 사건을 3번이나 언급한다(행 10, 11, 15장). 29) 사도행전 19장에서 세례요한의 추종자들에게 세례요한이 예언했던 예언 내용은 예수 안에서 발생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구약 예언자의 선포와 예언은 선포된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점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이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받기 전에 신자였다는 점은 성령의 두 단계의 사역을 위 사역을 위해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들의 유일성을 나타내며 이 사건들이 회심의 모형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1) 어떤 학자는 누가가 성령 세례는 모든 회심 때에 발생한다고 암시하는 주장을 한다. 32). 이 신학적 주장은 본문 연구상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오순절 2장의 성령의 세례는 어떤 면에서 유일한 사건이다. 유일성은 외적 유형적인 현상이 유일하다. 바람 소리와 불이 각 개인에게 임재하고, 각 나라의 말로 방언하여 민족들 가운데서 온 사람들이 동시에 자기의 말로 들을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역사상 반복되지 않는 유일한 현상으로 역사 속에서 반복되지 않는다.  

3. 성령 안에서 크리스천의 생활-성령충만

누가는 스데반, 바나바, 그리고 다른 제자들을 성령충만한 신자로 묘사한다(행 6:5; 7:55; 11:24; 13:52). 집사들도 성령충만한 신자였다(6:3). 33).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는 다르게 묘사되고 있는 다른 부분이다. 고난과 박해를 받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변화시키고 놀라운 기쁨으로 감정을 경험하는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다(13:52). 성령충만은 헌신(7:59), 그리고 성령 충만하여 박해자를 용서하는 신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7:60). 성령충만한 황홀경의 음악이 아니다. 지속적인 성령충만이 초대 교회의 신자의 특징이다. 누가는 성령충만한 신자를 묘사하기 위해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성령충만하다'는 용어 ‘pleres’/‘pleroo’란 용어는 성령세례란 용어와 구별된다. 성령충만은 ‘pimplemi’의 종말론적 예언 성취와는 다르게 구분된다. 34) 성령충만한 신자의 삶은 크리스천 삶 속에서 특징짓는 용어다. 다시 말해서 성령충만은 신자들이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 아래 산다는 의미다(5:32; 9:31; 13:52).  

맥스 터너(Max Turner)는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 설교에서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성령은 요엘이 예언한 예언의 영이라고 주장한다. 35) 이 주장은 과장된 표현이며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베드로가 2:38-39절에서 군중들에게 요엘의 예언의 영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36) 그러나 모든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했다(13:52). 차라리 베드로가 말하는 설교는 마지막 날에 종말론적 영이 그들에게 주어졌다고 보는 것이 낫다. 만일 터너의 말대로 성령이 예언의 영이라면 사도행전에서 예언자가 교회에서 유력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누가가 모든 신자가 예언의 영인 성령을 받았다면 모든 신자는 다 선지자(11:27; 13:1; 15:32)란 말인가? 터너의 두번째 주장대로 사도행전 전역에서 예언의 영의 충만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는가? 37) 성령의 역사로 수많은 예언적 행동이 있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역사로 예언적인 행동과 선지자의 사역만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성령은 위로(9:31)와 기쁨(13:52)의 사역으로 성령충만한 신자의 일상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오순절의 성령을 종말론적 축복이며 선물로 인식하는 것이 더 낫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은 자의 역사가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다. 단지 예언만 한 것이 아니다. 누가가 사용하는 '성령충만하다'는 두 가지 용법 plerespleroo를 연구한다.  

누가의 pleres-충만하다

누가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특징짓기 위해 충만한 pleres를 사용한다. 누가는 성령이 아닌 다른 것으로 충만한 상태를 3번이나 묘사한다. 다시바는 선행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9:36). 다시 말해서 그녀의 삶의 방식은 선행과 자비로 충만한 자였다. 38). 바울은 박수 엘루마는 모든 악이 '충만한 자'로 마귀의 아들로서 묘사한다913:10). 바울은 악한 행동과 속이는 행동이 충만한 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세 번째로 에베소에서 대장장이 데메드리오는 '분이 충만한' 자였다. 바울이 행한 역사 때문에 비니지스에 문제가 생겼다. 바울을 향한 '분노가 충만한' 상태였다(19:28).  

그러나 사도행전에 성령으로 충만한 집사들이 있었다(6:3).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한' 자였다(6:5). 바나바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11:24).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으로 삶 중에서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 있던 사람들을 묘사한다. 41)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별한 열매를 언급한다.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6:5). 바나바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11;24). 제자들은 성령과 기쁨으로 충만한 자들이었다(13:52). 성령이 충만한 자의 표현이 어떤 학자의 주장에 반한다. 키너는 성령충만이 예언적 능력으로 부여됨으로 충만하다고 상반된 주장을 한다. 42). 바울은 믿음과 선행과 기쁨은 성령의 열매라고 언급한다(갈 5:22-23).  

스데반은 성령충만한 상태가 삶의 일부였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스데반은 돌로 맞아 죽는 순간에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성령충만한 상태를 유지했다(7:55). 스데반의 상태는 분사 '성령 충만한' 상태가 됨으로(huparcho, being)란 분사가 사용되었다. 스데반의 생활양식은 성령충만한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빌 2:6). 그러나 비록 누가가 7:55절에서 pleres의 사용은 pimplemi의 사용에 더 가깝다. 43). 누가는 성령으로 충만한 어구를 형용사 pleres로 사용한다. 스데반은 항상 성령충만한 상태로 유지하고 있던 삶을 묘사한다. 하워드 마샬(Harward Marshall)이 사용하는 것처럼 형용사 pleres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래서 성령충만은 사람의 인격의 한 부분이 되는 영구적인 능력의 부여하심이란 의미로 언급된다. 형용사 pleres와 동사 pleroo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으로 이용되었다. 성령이 충만한 상태인 시제는 완료형이다. 따라서 '성령충만'한 시제는 지속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44)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한 지속적인 상태를 유지하였다. 누가는 pleroo를 사용하는 것을 살펴보라.  

누가가 사용하는 '성령충만하다' 동사 'pleroo'

성령의 열매로 특징짓는 성령 충만한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동사 pleroo가 사용된다(13:52). 제자들은 성령과 기쁨으로 충만했다(눅 6:23; 행 5:41; 갈 5:22; 살전 1:6). 동사 pleroo는 미완료형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지속적인 상태와 기쁨을 묘사한다. 심지어 박해가 있었고 핍박이 있었어도 제자들을 낙망하게 만들지 못했다. 45) 기쁨과 성령충만은 초대교회의 특징이었다. 46) 이에 반하여 터너는 누가는 모든 교회가 성령으로 가득찼다고 믿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일반인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47) 초대 교회 집사들은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여 좋은 평판을 얻었다(민 27:16-20; 행 7:55; 11:24; 13:50). 성령과 지혜는 소유격으로 그 내용을 의미한다(Wallace 1996: 93; NET, HCSB). 이 문맥에서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말은 성령에 민감했고, 신자의 삶이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았다는 점이다(고전 2:14-15; 히 5;14; 창 41:33; 출 18:21; 민 27:18; 신 1:13, 15; Schneider 1980: 426). 성령이 역동적으로 활동하여 신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고, 성령의 능력의 부여하심을 받았다(BAGD 670; BDAG 827). 신자들이 삶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성령의 열매였다. 누가와 요한과 바울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런 성령의 열매가 얻어진다고 동의한다(요 14:16-17; 고전 6:19). 누가가 사용하는 성령의 충만인 pleres/pleroo는 성령의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 세례로 성령이 임한다(1:8; 19:6)

성령이 붓는다(2:17-18; 10:45)

성령으로 세례(1:5; 11:16)

성령이 내리신다(8:16; 10:44; 11:15)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설교와 선포를 할 때 성령의 특별한 충만은 성령으로 채워준다(2:4)는 의미다. 또한 성령충만은 성령으로 충만하다(4:8, 31; 9:17; 13:9)는 의미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하나님이 인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는 삶을 나타낸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는 성령충만 pleres/pleroo으로 중첩되지 않는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구분되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오순절 성령세례로 발생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48) 따라서 구원역사에서 '성령충만'은 오순절 성령세례에 의해 그 뒤에 따라오는 별도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령충만과 성령세례를 사도행전에서 동일한 사건으로는 보지 않는다.  

4. 영감된 선포를 위해 채워지는 용어-누가의 pimplemi의 사용

이 동사 pimplemi는 일시적인 혹은 영속적으로 채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특별한 사역을 위해 특별한 말씀을 위해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에서 최소한 4-5개의 동사가 pimplemi다. 이 용어는 누가는 성령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채워지는 용법으로 사용한다. 이 동사 pimplemi는 성령으로 가득채워지는 어떤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복음 선포의 영감있는 선포를 위해 사용되는 용어다(2:4; 4:8, 31) 

바울의 시력이 회복되어 지속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게 될 것을(9:17), 혹은 사도들이 권위있는 금지령(13:9-11)에서 pimplemi가 사용된다. 49) 누가는 pimplemi는 사도행전에서 일시적인 본질을 나타낸다. 누가가 사용하는 동사 'pimplemi'는 성령이 각 개인을 일시적으로 채우는 역사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따라서 동사 'pimplemi'는 성령의 파워가 일시적으로 폭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에서 일시적으로 성령으로 가득찬 모습을 나타낸다. 성전에서 앉은뱅이가 나은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은 경의에 찬 모습으로 채워졌다(3:10). 신자들은 사도들의 영향력으로 가득찼고(5:12-16),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질투로 가득찼다(5:17). 비시디아 안디옥 유대인 질투로 가득찼다(13:45). 에베소에서 도시는 혼란으로 가득찼다(19:29). 50)  

사도행전 2:4절에서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찼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선포한 것과 같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된 이유는 성령세례의 때문이었고, 성령세례가 그 이유이다(10:46; 19:6). '채우다'는 말은 일시적으로 보이도록, 듣도록 '채우다'는 의미다. '채우다'는 하나님이 능력있게 나타나는 것인데, 종말론적 성령의 선물을 붓는다는 의미로 외적 형태로 나타난다. 채운다는 말은 사도들에게 회심에 사용되지 않았다. 사도들은 이미 신자였다. 51) 게다가 이 채운다는 성령의 내주의 경험하는 지속적인 경험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다시 채워져야만 했다(4:8). 베드로는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선포하기 위해 다시 채워져야 했다. 공동체는 기도 후에 채워졌다(4:31).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예배를 위해 채운다(9:17),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도록 채운다(4:8, 31; 13:9-10). 사역을 위해 채워져야 한다(6:3-5; 7:55). 성령으로 채워진다는 말은 성령세례와 유사하다. 이 경우에 성령으로 채워진(pimplemi) 사람들은 이 전에 성령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은 요한복음 20:22절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53) 

누가는 동사 pimplemi를 일반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에 영감을 부여받는 경우를 설명할 때 '성령이 채운다'는 표현으로 사용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사가랴의 아들 세례요한은 성령으로 채운 자였다(눅 1:15). 누가는 다시 이 동사는 동정녀 마리아가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베스에게 예언적 인사를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pimplemi를 사용한다(눅 1:41). 세례요한에 출생에 대해 사가랴는 성령으로 채워지고 예언한다. 그리고 누가는 사가랴가 성령으로 채워진다고 말한다. 이 때에 동사 pimplemi를 사용한다. 약속된 아들 세례요한은 예언자가 된다(1:15). 구약에서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채워진다는 의미는 pimplemi로 사용된다. 히브리어 채운다(fill, ml)은 헬라어로 pimplemi이다(출 28:3; 31:3; 35:31; 신 34:9-empimplemi). 

겹치는 점들

채운다 'pimplemi'가 충만한 'pleres'와 충만하다'pleroo'와 겹친다. 사도행전 7:55절에서 영감으로 채워진 사람은 성령의 열매의 맺는 삶을 산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다. pimplemi가 특별한 능력을 부여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pimplemi와 성령충만'pleres'은 성령의 두 가지 사역이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반면에 성령은 모든 크리스천과 함께 내주하여 활동한다. 성령의 내주인 동사로 묘사된 'meno'는 성령이 신자 속에서 활동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성령은 가만히 신자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신자 속에 내주하는 성령의 역사로 신자의 삶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pleres/pleroo). 반면에 지속적인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와 과업을 위해 능력을 부여받는다(pimplemi).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와 선포 시간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 용어 pimplemi가 사용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세례와 특별한 과업을 위해 '성령으로 채워지는' pimplemi가 서로 중첩되는 경우는 오순절 2:4절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다. 오순절 날에 신자들은 성령으로 채워졌다(pimplemi, 행 2:4). 그리고 이것은 성령세례라고 불려지고(1:5),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이다(1:8). 성령이 위에서 내리시고(10:44), 성령의 부으심을 받는 것은(10:45) 사도행전 11:17절에서 고넬료 집에 내린 사건이다. 성령 세례가 1:5절에서 '채우심'이지만(2:4), 모든 채우심이 모두 다 성령세례라고 주장되지는 않는다. 54) 두 파이프의 음악은 오순절에서 오지만, 역사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1:5절에서 성령 세례는 2:4절에서 오순절 성령의 채우심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교회를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고 악한 세상에 자신의 공동체와 개인을 개봉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2:6). 성령으로 채움을 받은 자들은 영감이 있는 선포를 수행한다(2:14-41). 사도행전 4:8, 31; 9:17절, 그리고 13:98절에서 성령의 채움은 성령세례로 불리지 않는다. 4:31절에서 "빌기를 다하매 성령으로 채우심을 받은" 것에 관해 F. F. Bruce는 말한다: "이것은 성령의 신선한 채우심으로 불리지만, 그것은 신선한 성령 세례로 불릴 수 없다." 55)  

성령세례와 성령의 부으심은 사도행전 2장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도행전 2장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왔다. 사도행전 19장에서 세례요한 제자들을 교회로 데리고 왔다. 하나님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에 유대인 교회를 인정하고 도장을 찍은 것처럼, 8장의 사마리아 사람들과 19장의 세례요한 제자들을 교회로 데리고 들어온 사건에 대해 하나님의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성령의 세례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 사이에 적의 관계는 폐지되어야 했다(요 4:9). 할례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는 것 없이 교회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약속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기회가 부여받았다(19:4-6). 56). 성령세례는 성령의 채움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성령으로 채움이 성령세례라고 말하지는 않는다(행 4:8, 31; 9:17; 13:9).  

결론

1.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사용하는 동사는 성령의 나타나심을 3가지로 특징지을 수 있다: 1) 종말론적 선물로서 성령 세례, 2) 성령충만한 크리스천 생활; 3) 그리고 영감있는 말씀 선포를 위한 성령의 채우심이다. 여러 동사는 성령의 종말론적 수여를 묘사하기 위해 중첩된다(성령을 받다, 성령을 주다, 성령이 내리신다, 성령이 임한다.. 등). 누가가 크리스천 생활에서 성령 안에서 크리스천 생활을 묘사할 때 pleres/pleroo를 사용한다. '성령 충만'이란 어구다. 크리스천이 사역을 위해 능력을 부여받을 때에는 누가는 성령으로 채우심을 받는다는 어구를 사용한다. 이 세 가지 부류는 사도행전에서 성령 사역을 나타낸다. 59) 누가는 세 가지 동사를 사용하여 성령의 사역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신자가 거룩한 성령 충만으로 살기를 바란다. 60)  

2. 따라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그리고 회심은 같은 용어가 아니다. 성령세례는 개인이나 공동체를 하나님이 인정하여 세상에 나타내 보여주는 사건이다. 성령충만은 성령세례 뒤에 오는 성령의 임재 아래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3. 오순절 2장의 성령 세례는 어떤 면에서 유일한 사건이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의 유일성은 외적, 유형적인 현상이 유일하다. 바람 소리와 불이 각 개인에게 임재하고, 각 나라의 말로 방언하여 민족들 가운데서 온 사람들이 동시에 자기의 말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교회 역사상 반복되지 않는 유일한 현상으로 역사 속에서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오순절의 성령을 기다리기 위해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철저한 회개로 성령의 도래를 기대했다. 제자들이 기대한 성령은 회개와 철저한 죄의 고백 위에 거룩한 성령이 임재했다.  

4. 사도행전의 2장의 오순절이 유대인을 위한 오순절이라면, 그 후의 성령세례 사건(8, 10, 19장)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확대되어 그의 백성이 되게 했다는 인증이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부어주었던 성령세례란 인증 사건은 오늘날도 지속되어 소위 준 오순절의 역사가 재현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하나님 백성으로 인증했다면, 이런 영적 세례의 경험은 하나님의 주권과 교회의 준비로 나타날 수 있다.  

5.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이 소위 종말론적인 이른 비의 성령이었다면 교회는 마지막 시대에 예수 재림을 기대하면서 마지막 과업 완성을 위해 하나님이 교회에게 부으실 종말론적 늦은 비의 성령을 기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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