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혁신학회, 신반포중앙교회에서 103회 정기학술발표회 열어

▲ 발표회가 진행되고 있다.
6월 15일(토) 한국개혁신학회 제103차 정기학술발표회가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중앙교회(담임 김성봉 목사)에서 열렸다. 이 날 발표회에서는 이혜정 교수(대신대학교 초빙교수)가 “한경직의 정치-종교 관계인식”, 정미경 교수(성결대학교 겸임교수, 선교학)가 “4/14창을 중심으로 한 이주민선교 교육방안”이라는 제하의 발표가 있었다.

▲ 발표자 이혜정 교수
한경직의 정치-종교 관계인식 / 이혜정 교수

한국사회에서 전쟁의 경험은 전쟁을 경험한 세대 뿐 아니라 전 세대에 거쳐 각기 다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한경직 목사(1903-2000)의 사례를 그의 설교를 가지고 분석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정치-종교 관계 인식의 한 단면을 고찰하는 것이다. 그동안 김재준이나 박형룡에 비하여 한경직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경직은 그동안 특별한 사상을 남긴 것은 아님에도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그간 한경직의 생애와 사상의 해석틀로 ‘기독교적 건국론’을 제시했다. 그리고 세 가지 키워드로 ‘기독교, 애국, 신문명’을 제시했다. 한경직의 기독교적 건국론은 한경직의 시대인식을 바탕으로 한 민족적 과제였다. 한경직은 구원의 의미를 국가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의 두 가지 측면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한경직 사상은 마틴 노트(Martin Noth)가 제시하고 이후 학자들이 발전시킨 ‘신명기 신학’과 연관된다. 노트와 이후 학자들의 견해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종교적 헌신도와 국가의 운명이 직접적으로 관련된다는 일관적인 해석은 한경직의 기독교 건국론과 일치한다.

신명기 역사해석이 한경직의 사상이 유비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의 운명과 이스라엘 민족국가의 운명이 동일시된다. 둘째, 국민의 신앙이 국가운명을 결정한다는 의식이 나타난다. 민족의 종교적 각성은 그 민족의 현실적 축복과 연계된다. 한경직의 설교에는 이 관점이 그대로 나타난다. 첫째, 국민의 행복은 안정적인 국가존립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둘째, 한민족의 불안한 국가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운동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정신개조가 일어나야 한다. 셋째, 한민족의 신앙운동, 전도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되면 민족의 현실적 목표인 정치안정, 경제번영, 사회안정, 남북통일이 이루어진다.

한경직은 자신의 시대인식으로 한국사회를 진단하였고 한국사회가 고난을 당하는 원인을 민족의 신앙적 죄에서 찾았다. 또한 한경직은 자신의 설교를 듣는 청중을 기독교인에 국한시키지 않고 국민 전체를 상정하고 있다. 한경직은 신명기 신학의 메시지를 국가와 민족상황에 적용하고 있으며 개인의 신앙차원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차원의 메시지임을 강조한다. 한경직은 가나안 복지의 의미를 개인, 민족, 영적 차원을 비롯하여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였다.

한경직은 가장 바람직한 정치형태로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그는 공산주의와 독재를 배격하는 민주주의자다. 그에게 있어 민주주의는 곧 기독교와 동일한 의미로 인식되었다. 한경직의 건국론은 국가위기의식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회불안요소들은 공산주의 침입의 발판이라는 해석을 내렸다. 한경직의 철저한 안보정신에 입각한 “독재를 하더라도 반공만 지켜달라”는 발언은 당시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92년에 이만열은 한경직과의 면담에서 군사정부 당시 지도자적 발언이 소극적이었던 이유를 물었다. 이에 대해 한경직은 “정부가 나빠도 무정부보다는 낫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한경직은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다만 개인 자격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한경직은 자본주의의 단점인 경제분배에도 관심을 가져 경제정의 실현도 자주 언급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경직의 경제정의론이 설교강단을 넘어 사회적으로 실제 영향을 끼치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다. 그가 경제정의 실현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원인은 투철한 안보의식에 있었다. 한경직은 노동자와 기업가의 의견차이를 관용과 대화와 같은 선의의 방편으로 해결하고자 하였지만 이러한 이상적 주장은 현실에서는 전적으로 약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 논평하는 박용규 교수
한경직의 신학과 신명기 신학은 과연 관련 있는가?

박용규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는 논평을 통해 “프린스턴에서 수학하였고 한국에서는 교수가 되려고 했었던 한경직의 신학을 도출하는 것이 과연 어려웠는가” 하는 질문과 더불어 “복음주의권에서 수용하지 않는 신명기 신학에 대해 문제의식 없이 수용해서 한경직에게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가”를 지적하였다. 신명기 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신명기 신학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경직의 신학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역시 지적한 것이다. 한경직은 프린스턴에서 공부했긴 하지만 마틴 노트가 신명기 신학을 주창했을 때 한경직은 이미 한국에 있었고 그 흐름의 신학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이에 대하여 이혜정 교수는 “개인적으로 신학계가 아닌 역사학회와 종교학회에서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신학학회에서의 반응이 필요했다. 그간 학계에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소회를 밝힌 뒤 “한경직 목사의 신학사상을 추출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유는 한경직의 일생의 중요한 순간에 그가 선택하고 행동한 내용을 보면 그 신학적 근거가 미약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신명기 신학과 한경직의 연관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종교학 연구방법 중 비교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유비란 표현을 썼다. 물론 한경직은 신명기 신학을 배우지 않았으며 본인이 신명기 신학을 끌어다 쓴 것은 인정한다. 다만 본인의 의도는 한경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쓴 것이다. 얼마나 신학을 꼼꼼하게 분석했는가에 있어서는 본인의 연구가 미진했을 수 있다”고 답변하였다. 청중 가운데서는 “신명기 사관은 왕들을 위주로 한 사관이다. 우선 사관에 대한 어떠한 입장을 정리하고 나서 한경직 목사의 사관을 명확하게 정리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 발표하는 정미경 교수
4/14 창을 중심으로 한 이주민 선교 교육방안 / 정미경 교수

교육은 되도록 어릴 때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본고는 4세부터 14세까지 아동의 연령대를 일컫는 ‘4/14창(4/14 Window)’이라는 선교운동을 다룬 것이다. 4/14창 운동은 뉴욕 프라미스 교회의 담임 목사인 김남수 목사와 10/40창(10/40 Window) 운동의 제창자인 루이스 부시(Luis Bush) 박사가 함께 일으킨 운동이다.

2011년 안전행정부의 외국인주민 자녀 통계를 보면 만0세는 16,428명, 만1세는 17,304명, 만2세는 16,607명, 만3세는 15,584명, 만4세는 10,775명, 만5세는 8,844명이다. 또한 초, 중, 고등학교 재학중인 다문화학생(국제결혼 및 외국인가정 자녀)은 2011년을 기준으로 총 38,678명으로 전체 재학생의 0.55%를 차지하고 있다. 다문화학생의 55%는 수도권 및 광역시에, 45%는 비수도권 도지역에 재학중이다. 외국인 가정 자녀 중 읍, 면 지역에 재학 중인 학생은 11.5%이나 국제결혼가정 자녀는 전체의 38.7%가 읍, 면 지역에 재학중인 것으로 나타나 농촌의 국제결혼 증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4/14창을 중심으로 한 이주민 선교 교육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4/14창 아동의 주일학교 참여와 적응을 위해 예비학교 및 다문화 코디네이터 사역자의 양성이 필요하다. 둘째, 멘토링을 통해 4/14창 아동의 다양한 맞춤형 돌봄을 시도해 나가야 한다. 셋째, 4/14창의 이주민 자녀와 일반학생이 함께 배우는 이중언어 교육을 시도해 나가야 한다. 넷째, 다양한 직업과 일자리가 있음을 소개함과 동시에 꿈과 비전의 사람이 되도록 일깨우는 교육을 해야 한다. 다섯째, 다문화와 이주민선교에 대한 지역교회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여섯째, 일반학생과 학부모에 대한 선교 교육적 지원도 함께 강화해 나가야 한다.

논평자인 김현진 교수(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교, 선교학)와 김성욱 교수(총신대학교 선교대학원)의 논평에는 발표의 논지를 정리하는 것 외에 특별한 내용은 없었고 공통적으로 구체적인 사례 제시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청중 가운데서는 “이주민 자녀보다 어머니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정미경 교수는 “어른들은 겉으로는 친절할 수 있으나 실제로 변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쉽다. 굳이 어른과 아이를 나눌 필요는 없으나 집중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시각에서는 아이들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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