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해무 박사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미국의 장로교회가 400만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는 충격 그 이상이다. 31년간 미국 유니온 신학교(Union Seminary in Richmond, Virginia)에서 교수하였던 리쓰(John Leith)는 한 출판사의 의뢰를 받고, 신학교육의 관점에서 미국장로교회 안의 위기를 진단하였다. 그가 말하는 교회의 위기는 미국장로교회의 교인이 줄고 목사와 선교사와 특히 남성 신학생 수가 격감하는 상황을 말한다. 그는 이 위기를 신학교육과 바로 연결시키면서, 장로교회의 위기는 신학교가 교회의 효율적인 지도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충분한 단서가 된다고 말한다1). ‘교육받은 목회’(an educated ministry)의 위기이기도 하다.

        

비록 감소하고 있지만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고수하는 미국 장로교회와는 달리 한국의 장로교회는 그 정체성을 유지하지 않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장로교회가 왕성한 지역은 한국이지만, 한국의 장로교회가 순수한 장로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는 않다. 감리교회나 침례교, 또는 종파적인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의 현장에서 그 영향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안타깝게도 신학은 이런 현장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교회보다는 학당의 영향을 더 받고 있다. 신학과 현장의 괴리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현재는 그 정도가 아주 심각하다.

        

그런데 개혁교회를 자처하는 고려파 안에서는 가정교회의 도입을 두고 많은 말이 오고 가며 지난 봄 정기노회 때에는 한 노회에서 이 문제를 두고 연구보고서가 제출되었고, 노회는 해당 교회의 목사에게 가정교회를 중단하게 하였다고 한다. 비록 늦었다는 감이 들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정교회에 대한 교회론적 접근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본고는 미국 휴스톤 소재 서울 침례교회와 그 담임 목사인 최 영기 목사의 가정교회론을 살피고 평가하려고 한다.


        

1. 목회와 그 방법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목회를 명하셨다. 시몬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6,17)는 말씀은 목회를 명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마 9:36)과 같이 유리함을 보셨다. 3년의 훈련을 받은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목자의 삶을 출발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훈련시키고 임명하신 11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여 목양(목회)의 사명을 맡기셨다. 제자들은 성령님을 받아 사도로 거듭나고 교회를 세운다.

        

목회는 섬김이다. 목자장이 스스로 섬기려하고 많은 이의 대속물로 자기를 바치셨기 때문이다(막 10:45). 그리하여 많은 이들을 살리셨다. 목회와 모든 직분의 본은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이시다. 목회는 섬김의 방식으로 죄인들을 살리고 세우며, 이들을 섬기는 자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목회는 성령님의 사역에 속한다. 성령님은 사역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훈련시키시고 임직받아 사역하게 하신다. 불의 혀의 갈라짐과 같이 성령님은 각자의 재능과 개성을 존중시키시는 방식으로 사역하고 목회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목회의 방법은 다양하며, 목회 방법론은 획일적이지 않다. 때로는 방법론이 목회의 성격을 결정하거나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이 통일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님은 같기”(고전 12:4) 때문이다. 은사의 다양성과 목회 방법론의 다양성은 몸인 교회를 세우며 통일을 이루고 분쟁을 없앤다(고전 12:25 참고).


        

2. 발제의 특징과 한계

        

위에서 지적한 대로, 신학과 교회 현장의 괴리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발제자는 이 괴리 현상을 ‘고부 관계’로 비유하였다. 과연 이 발제가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발제자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의학(조직신학)이 가정교회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실천신학 교수가 발제자라면 더 낫지 않을까.

        

고려파 안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여러 목회 방법론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에만 하더라도 성령세례 논쟁이 있었고, 다락방의 전도 방법론, 빈야드 운동과 치유 사역, 열린 예배 등이 있었고, 현재는 가정교회가 논의의 중심에 있다.

        

대부분의 목회 방법론은 고려파 밖에서 들어왔다. 방법론의 도입에는 고려파의 정체성의 관점에서 해당 방법론에 대한 반성적인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토론과 의견 수렴 과정에 익숙하지 않다. 논의가 될 정도이면, 이미 어디엔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이다.


        

3. 서울 침례교회와 가정교회

        

최 목사는 아주 겸손한 성품을 지닌 분이다. 이는 신뢰와 관계를 중시하면서 교인들에게 자기의 모습을 아주 진솔하게 보이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즉 평신도도 목회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자신의 목회에서 구체적인 성과로 검증하였다. 친교와 전도를 내세우면서 모든 교인을 제자로 만들겠다는 목양 일념을 가지신 분이다. 또 스스로 제시하는 참고 문헌도 몇 권에 불과한데, 이런 목회 방법론을 창안하려고 대단하게 공부하였다고 으스대지도 않는 겸손함을 보인다.

        

이런 좋은 품성과 태도를 지닌 목회자가 지향하고 정립한 방법론이 가정교회이다. 가정 교회는 구역, 순모임, 제자훈련, 기도 모임의 특성들을 다 포용한다고 말한다. 조 용기 목사가 한국교회의 성장을 주도하였다면, 홍 정길, 옥 한흠, 하 용조 목사는 제자 훈련으로 교인들의 영적 수준을 높였고, 가정 교회는 교인들을 사역의 단계로 세우는 다음 단계라는 것이다.2) 그러면서도 “가정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교회 조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는 여유와 유연성을 보인다.

        

최 목사는 랄프 네이버의 말에 동의한다. 즉 랄프 네이버는 전통적인 교회가 불신자를 구원하는 데에는 점점 힘을 잃어 가면서 사역의 초점을 주로 믿는 자들에게만 맞추는 현실을 한탄한다.3) 최 목사는 이 말에 동의하면서 교인들을 활성화하는 가정교회를 시도하였다. 가정교회는 관계성에 기초하여 전도하고, 영접은 목사의 몫이다. 목사는 전도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제시한다.4)

        

가정교회는 개교회 역할을 하며, 어떤 목장은 완전히 교회 형태를 취한다. 그럴 경우 나타날 문제를 예견하고 마지막 주일은 합동 목장으로 모인다. 나아가 목장 모임이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대치하지 않도록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할 것을 권면한다.5)

         

목회자는 평신도가 사역할 수 있도록 은사를 발견하게 하고 훈련시키고 사역의 기회를 만든다. 목회자가 평신도의 목회를 도와준다.6)

        

최 목사는 기도로 하는 목회를 강조한다. 자신은 하루에 3시간 정도 기도한다고 말한다. 아주 옳고 좋은 태도이다. 나아가 목사의 전문 분야는 성경이며, 설교는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7) 목회자로서 갖추어야 하는 기본을 잘 알고 있다.

        

가정교회는 교회 성장보다는 영혼 구원을 추구하며, 신약교회의 회복을 목적으로 삼는다.8) 이 외에도 최 목사의 목회 태도는 배울 것이 많다.  한 목회자가 자기의 몸에 맞는 목회 방법론을 계발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최 목사와 가정교회론의 특징이 있다. 문제는 이 방법론이 모든 목회자들과 교회에 맞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4. 개혁교회론: 위로부터의 교회론

         

최 목사는 가정교회가 추구하는 목적을 내용을 담아내려고 신약 성경 3곳을 자주 인용한다(마 28:19-21; 막 3:13-15; 엡 4:11-12). 그 중에 마태복음 28:16-20절이 있다. 이 본문은 제자 훈련의 기초 본문이기도 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11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임을 말한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고 성례를 집례(시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3,6; 4,15,20). 칼빈은 “그리스도의 일군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고전 4:1)라는 말씀과 “감독은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딛 1:9)해야 한다는 말씀으로부터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례하는 목사의 직분을 증거한다(4,3,6).

        

그런데 목사가 받은 이 두 가지는 교회의 표지이기도 하다. 주님은 구체적 표지와 징표로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경청되며, 성례가 그리스도의 제정을 따라 집례되는 곳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4,1,9). 교회는 목사직의 수행에서 가시적이고 구체화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칼빈이 직분, 특히 목사직으로부터 교회의 표지를 제시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우리가 이 표지를 아는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4,1,8). 복음의 직분만큼 교회 안에서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님의 직무이고 의와 영생을 배포하는 직무이기 때문이다(4,3,3). 말씀의 순수한 직분과 성례를 집례하는 순수한 방식은 이것들을 지닌 교제를 안전하게 교회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보증이다(4,1,12). 열쇠권도 목사의 직분으로서 복음의 설교나 성례의 집례로 교회의 고유한 은덕을 배포한다(4,1,22). 칼빈은 목사직을 이처럼 높이 평가한다. 목사직에 교회가 존재하며, 가히 의존적이라 하겠다.9)

        

목사직에서 다른 직분은 파생한다. 사도직에 이어 새로운 직분이 필요하였다(행 6:1-6). 말씀과 성례는 믿음을 일으키고, 교회를 세우며, 믿음과 교회를 강화하고 성장하게 한다. 이때에 새로운 직분이 세워져야 한다. 이렇게 파생된 직분이지만, 직분에 상하나 고하는 수반되지 않는다. 장로교회는 이런 성경적 배경에서 감독제나 회중교회제도를 거부한다.

       

 개혁교회론에는 이른바 ‘평신도 사역’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평신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反로마교회적 입장에서 성직자와 대비되는 평신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유는 ‘전도’나 기도에 대해서 미국 교회와는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럽 대륙과 영미 전통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라 목사의 설교를 아주 중시하며, 교인들의 말씀 이해도 그 수준이 아주 높다. 특히 화란 교회에서는 목사가 매주일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설교한다. 이렇게 교인들은 말씀으로 무장하고 사회 속에서 기독신자로서 확실한 삶을 산다. 말하자면 목사의 사역터는 교회이고, 교인들의 일터는 세상이다. 교인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한다.

        

개혁교회는 지역에 따라 구역을 편성한다. 한 구역을 장로 한 사람이 담당하며, 두 구역마다 집사가 한 사람씩 있다. 구역 장로는 수시로 자기 구역에 속한 교인들이 성경과 신조를 따라 살아가는지를 살핀다. 매년 인접한 구역 장로와 협력하여 정기 심방을 하면서 정식으로 신앙생활을 살피고 권면하고 함께 기도한다. 목사의 설교로부터 부부 관계나 자녀 교육까지 삶을 전반적으로 다 살핀다. 필요하면 집사회에 알려서 재정적인 도움을 주게 하고, 또 다른 도움이 필요하면 목사가 심방하고, 영적인 도움과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 목사와 장로는 협력하여 함께 ‘목회’한다. 직분의 남발은 있을 리 없고, 직분자는 직분의 의미를 알고 이를 받아들이고 수행한다.

        

이것은 화란의 우리 자매교회의 현 모습이다. 개혁교회는 언약에서 출발한다. 말씀은 언약을 선포하고, 세례와 성찬은 언약의 표지이다. 목회는 언약이 지닌 공동체 정신의 구현을 목표로 삼는다. 교인은 언약 백성으로 예배로부터 은혜를 받고, 세상에서 언약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바를 실천한다. 이것이 굳이 말하자면 개혁교회가 추구하는 ‘평신도 사역’이라 하겠다.10)


        

5. 가정교회론

        

a. 성경적인 사역 분담(엡 4:11-12)에 근거하여 마태복음 28:19-20을 설명한다. 교회 개척의 명령은 교회에 주신 명령이요, 교회는 제자를 만드는 곳이다.11) 제자 만드는 길이 가정교회이다. 수많은 프로그램과 심지어 설교도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제자를 만들어 내는 것은 가정교회 구로조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최 목사는 제자 만드는 사역을 분담한다. 가정교회는 전도하고 목사는 성경공부와 침례로 제자를 만든다. 이런 식의 포괄적인 역할 이해는 성경 주석적 근거가 있다.

        

그렇지만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제시만 하면 됩니다. 사실 목사들은 전도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12)는 발언은 주석적 근거가 없다.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주석이 널리 퍼져있다. 그렇지만 전도 역시 설교자가 받은 직무이다. 목사는 설교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주석은 그 근거가 약하다(행 6:1 등 참고).

        

b. 그런데 제자 삼는 방법 가운데 설교가 있다고 전제하지만, 설교에 대한 발언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막 4:13-15). “사람은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 보고 배웁니다. 제자는 가르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임으로써 만들어집니다. ... 목회자가 무슨 설교를 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은 보고 배우지 듣고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13) 기성 교회의 취약점을 잘 간파하고 있다. 최 목사는 겸손하면서도 자기의 삶을 교인들에게 다 공개하는 당당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발언은 문제도 안고 있다. 종교개혁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씀에 기초하여 설교를 중시한다. 실제로 마태복음 28장에서 제자들이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설교(전도) 사역이다. 그런데 “사람은 듣고 배우지 않습니다.”는 발언이나 “설교도 제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제자를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14)는 발언은 지나치다. 설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정하신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에 설교자의 임무 수행과는 관계없이 설교를 제정하신 주님의 명령과 그 명령에 담긴 설교의 방편적 성격은 절대적이다.

        

이 발언은 직분론적 문제도 담고 있다. 설교자는 설교에 생사를 걸어야 한다.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님께서 설교를 방편으로 삼아 역사하시게 섬겨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삶의 모범도 보여야 한다. 목사에 대한 대단한 질책을 담고 있지만, 이 질책이 목사직 자체에 어떤 훼손도 가할 수 없으며, 이를 근거로 하여 평신도의 위치를 더 부각시킬 수도 없다.

        

c. 최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침례는 서울 침례교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아주 옳은 입장이다. 그리고 영접과 침례는 담임 목사가 책임진다는 말도 직분론에서 보자면 옳은 말이다. 그러나 목자의 부담을 덜어주고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를 목사가 관장한다는 근거는 직분론적이지 않고 실용적이다.15) 세례가 지닌 은혜의 방편의 성격도 약화된다.

        

d. 가정교회에서는 친교를 위하여 공동식사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애찬의 근거로 사도행전 2:46절에 나오는 “떡을 떼다”는 표현을 제시한다. 그런데 과연 이게 애찬일까?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 중에 성찬을 제정하셨다. 이를 따라 초대교회는 식사 중에 성찬을 행하는 풍습을 지녔다. “떡을 떼다”는 성찬을 말한다. 46절 하반절에 나오는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가 애찬을 지시한다. 그러나 상당히 초기부터 이 풍습은 사라지고 성찬만 시행한다. 한국교회가 애찬을 회복한 것은 세계 교회를 향한 기여가 될 수 있다. 사도행전의 풍습을 회복하려면, 애찬과 성찬이 결합된 원래의 모습의 복원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이것은 가정교회의 역할이 아니라, 전체가 참여하는 예배, 곧 은혜의 방편으로 교회를 구현하는 교회의 본래적 직무이다. 이 직무는 목사의 직무이기도 하다.

       

e. 이렇게 볼 때, 가정교회를 ‘교회’라 부르는 것은 주석적으로 약하다. 최 목사는 가정교회가 지닌 포괄적 성격을 부각하면서 ‘교회’라는 표현을 굳이 고집한다. 그러나 자신의 말처럼 세례와 성찬을 시행할 수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될 수 없다.16)

        

또 가정교회는 개교회의 역할을 하며, 완전히 교회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지막 주일은 합동 목장으로 모인다. 같은 목장의 목원들끼리는 잘 알지만 다른 목원들은 잘 알지 못하는 폐단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목장 모임이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대치하지 않도록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할 것을 권면한다.17) 이런 권면의 근거는 실용적이다. 교회를 은혜의 방편론과 직분론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f. 가정교회는 침례교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가정교회가 재량권을 가진 만큼, 독자적으로 발전할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침례교와는 달리 가정교회는 ‘집단적인 개인’이다.

        

특히 가정교회는 성인 위주의 목회론이기 때문에 어린이의 위치는 여전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차라리 가정교회를 ‘구역’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특활’이라면 이런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g. 교회 정치적으로 회중교회론이다. 회중교회답게 등록교인과 회원을 구분한다. 이점은 장로교회의 일반적인 관례를 질타한다. 직분을 맡고 투표권을 갖기 위해서는 침례를 받아야 하고, 이미 침례를 받은 이들은 안수집사회의를 거치고 임시 신도 사무 총회에서 정식 의결을 거쳐 회원이 된다.18) 이것은 전통적인 회중교회의의 모습이다. 치리권을 회중이 지닌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목사가 주도적인 영향을 행사하는데, 이 점에서는 전통적인 회중교회론을 벗어나기도 한다.

        

미국 회중교회 역사의 초기에는 목사, 장로, 교사와 집사직이 있었으나, 이미 17세기 말에 장로와 교사직은 사라졌다. 가정교회론에서는 교사직이 회복되고 있음을 본다.19) 신도 사무 총회가 치리권을 갖는 한, 안수집사회는 당회를 대신할 수 없는 제도이다.

        

가정교회라는 목회 방법론도 목사가 주도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이 방법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장로교회의 노회와 같은 조직이 이 방법론을 시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노회가 이런 일을 바로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이미 교파의 분리가 전제되고 성장이 목회의 잣대가 된 상황에서 보자면, 장로교회의 노회는 이미 이런 역할을 감당하지 않고 있으며 못하고 있다.20)

        

h. ‘평신도 목회’라는 말이 지닌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평신도는 목회의 사명을 받지 않았다. 이 용어는 침례교회나 회중교회적 배경을 보여준다. 평신도를 활성화시켜야 하며, 이들이 교회 안에서 구체적인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목회’라고 부를 성경적 근거는 약하다. 목회자가 평신도 목회를 도와준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인 사람에게 목회의 사명을 맡기셨다. 직분자의 사역인 목회의 원래 의미를 순전하게 사용해야 한다.


        

6. 몇 가지 결론

        

목회는 성령님의 사역이며, 그 방법론은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다양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 목회는 목사직이 받은 사명이며, 다른 직분은 이 직분에서 파생한다. 그중에서도 장로는 더불어 목회하는 직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회는 의미가 없다.

        

가정교회론은 장로교회의 목사직뿐만 아니라 장로직에 대해서도 강한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장로가 목자이면 가정교회론이 지닌 장점도 살리고 회중교회론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21) 목자를 선발하는 인선위원회도 당회이면 되고, 안수하는 일도 장로로 세우면 해결될 것이다. 게다가 별따로 당회에 해당된다는 안수집사회를 둘 필요도 없다.

        

친교를 추구하는 가정교회는 현대 사회와 교회가 점차 개인주의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친교는 일차적으로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를 말한다(행 2:42 참고). 이점에서 ‘공’예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가 일차적이며, 이 일차적 교제를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형제자매의 관계를 예배에서 확인하며, 구역이나 소모임에서 강화한다.

        

이를 인지하고 전제할 경우, 공동 식사와 기도회,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고 선교의 사명을 확인하는 가정교회는 현대병을 치유하는 좋은 방편이며, 교회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비록 이 배경이 침례교나 회중교회론이라 하더라도, 장로교화하여 도입하고 배울만한 방법론이다.22)

        

가정교회는 성경적이며 초대교회를 회복하는 운동이라는 입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물론 다른 목회 방법론과는 달리 가정교회론은 세례와 성찬의 공적 성격을 확인하며, 가정교회만을 고수하는 아집을 보이지 않는 유연성도 지닌다.23) 그러나 회복하기 위하여 과거로 돌아가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이 조차도 오순절에 오신 성령님과 함께 영원한 현재인 장래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 초대교회를 회복하겠다고 나온 새로운 운동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여느 기성 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교회사적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방편으로 창조된다. 은혜의 방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셨고, 이 책임은 일차적으로 목사가 진다. 이를 기초로 하여 개혁교회는 언약론적 교회론을 제시한다. 이 교회론이 가정교회론이 지닌 ‘집단적 개인주의’를 교정할 수 있다. 언약론은 애초부터 개인주의를 경계하고 극복한다. 친교는 일차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를 말한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 백성을 교회의 예배의 자리로 부르고 교회에서 은혜를 베푸신다. 개혁교회는 설교와 성례와 목회를 통하여 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양육한다. 다만 개혁교회론은 교인들이 지금보다는 전도와 선교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인도하는 방법론을 꾸준히 계발해야 한다. 전통적인 교회가 불신자를 구원하는 데에는 점점 힘을 잃어 가면서 사역의 초점을 주로 믿는 자들에게만 맞춘다는 랄프 네이버의 한탄은 무엇보다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도 해당한다.

        

장로교회는 은혜의 방편론, 직분론, 예배와 교회정치에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우리 주변에 있는 다양한 목회 방법론을 단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수용하고 정체성을 바로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참석한 이들이 이것과 저것을 고려하여, 창의적인 목회 방법을 계발하며, 동시에 장로교의 전통을 존중하고 자매교회와 협력 사역자의 면모를 확보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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