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남교회를 중심으로)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교회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교회를 향하여 있고,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 어떤 곳 보다 교회가 잘되기를 기뻐하시기에 우리가 뜻대로 순종을 하면 마침내는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교회에 쏟아 부어질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돌이켜 보니 목사 안수를 받을 즈음에 주변의 교회들을 살펴 보니 어렸을 때에 생각했던 그 영광이나 은혜는 이론에 불과했으며 앞으로 섬겨야 할 교회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이 실재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누군가를 통해서 그런 교회가 보여질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그 실재를 위해서 교단 안팎의 큰(?)목사님을 찾아 다니면서 자문을 구하곤 했다. 그 때의 고민은 이런 것이었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곳 보다도 재미가 있어야 하며, 행복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도 사람의 모임이기에 재미가 있어야 사람이 모일 것이며, 더구나 우리가 행복한 천국에 갈 사람들이며 그 천국을 이미 받은 자들이기에 세상에서도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대부분 행복해 하지 않았으며 목사님 역시 행복하지 않은 분이 의외로 많았다.

 

두 번째로 교회는 순수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날마다 생겨나야 한다. 즉 다른 교회를 출석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우리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있어야만 참된 교회이다.(이 말에 누가 반문을 하겠냐만 실제로 이 일이 현실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에 늘 목말라 있었고, 이웃 교인이 찾아와서 자리를 채워 주어도 숫자만 많아지면 부흥이고, 사람들은 그 교회를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셋째로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무언가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 어렸을 때에 교회에서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는 부흥사를 보면서도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목마름이 있었다. 방언과 치유보다 더 나은 인격의 변화를 교회는 줄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넷째로 교회는 세상의 어떤 모임과는 구별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실천하는 곳이어야 한다. 어릴적에 교회에서 어른들이 토론을 하다가 때로는 급기야는 심하게 싸우던 분들을 종종 보았다. 직분자는 논쟁을 즐기기 보다는 누군가를 따라 오게 하는 거룩한 본을 교회는 보여 주어야만 한다.

 

다섯 째, 교회는 힘의 과시나 형식이 아니라 당연한 마음으로 미자립 교회나 선교지를 향하여 은혜를 나눌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약한 교회는 마음이 있어도 그것이 부담이었고, 규모가 좀 있으면 돈으로만 되어질 뿐 진지한 기도의 제목이 성도들의 관심에서 조금씩 밀려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섯째 목회자의 과다한 사역이 엄청난 부담이 되었으며 실제로 탈진하는 분을 보면서도 목회자만 교회를 책임져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있었다. 하루라도 사역에서 손을 떼면 교회가 흔들릴것 같아서 순교하는 마음으로 일에 혹사를 당하는 것이 목회자들이다. 이 모든 고민에 대하여 검증된 교회(휴스턴 서울교회)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2002년 휴스턴서울교회의 세미나와 연수를 다녀오면서 벤치 마킹을 한 이후에 지금은 행복한 교회가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1. 재미있고 행복한 교회  

교회가 재미있고 행복해야 한다면 불경스럽게 들릴 수 있고 교회를 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교회는 재미있어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재미가 있고 어떻게 하면 행복한 교회가 될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 대해서 휴스턴 서울교회를 방문하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행복하다는 말을 했고 실제로 행복해 보였다. 너무나 부러워 보였기에 내가 목회하는 성도들에게도 이런 행복을 안겨 주고 싶었다.

 

그들의 행복은 성도와의 친밀한 교제에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서로가 마음을 같이하면서 음식을 나누고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공동체인 목장(가정교회)은 각자의 형편과 처사는 달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을 보았다. 문제는 우리도 가능할까에 라는 문제로 주저주저 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교회의 구성은 대기업의 연구원들과 생산직에 있는 공장 근로자들이 적당히 섞여 있기에 배움의 차이가 있으므로 서로간에 대화가 어려울 것이며, 미국의 교인들이 거주하는 넓은 주택과는 달리 우리는 비좁은 아파트이기에 여러 명이 함께 모일 공간이 절대 부족하기에 수용이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다.

 

더욱이나 매주 모여서 음식을 나누기 위해서는 희생적인 수고와 지출은 현실적인 문제인데 우리의 형편으로는 큰 부담으로 닥아 왔다. 무엇보다도 퇴근 시간이 명확하지 않는 교인들의 직장 생활을 뻔히 알면서도 매주 금요일 저녁에 모이라고 강요를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하는 기간을 거친후에 교인들의 동의를 얻어서 가정교회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앞에서 열거했던 모든 염려는 기우였다. 정말 기우였다. 성도들은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이 기꺼이 헌신을 했으며, 재미를 느끼면서 행복하다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4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힘들지만 행복하다고 한다.(세상에 의미있는 일치고 힘들지 않는 것이 있겠냐만 ...) 섬기는 자에게는 행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고 한다. 가정교회는 매주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오픈한다. 그것은 힘들지만 재미있다. 그 섬김을 통하여서 나타나는 변화는 하늘에서 받을 상이기에 설레임으로 기대하고 있다. 가정교회는 집에서 모이는 친밀한 교제로서 거기에서 느끼는 재미와 행복은 신약성경에서 보여주시는 원형교회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초대교회가 재미가 없었는데도 매일처럼 집에서 모였을까?           


                                  

2. 영혼구원이 목적인 교회

왜 가정교회를 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교회의 본질적 목적을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자신있게 대답을 한다.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 오게 하는 영혼구원의 사명이라고 대답을 한다. 문제는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현대 교회에서는 점점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도시 문화의 단절된 이웃은 전도자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며, 현대인들의 다양화된 전문직은 대화의 접촉점이 어려우며, 더구나 낯선 사람을 주기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도시 문화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그래도 예전대로 하라고 주장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잘 하고 있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다. 현대인들은 교회에 한번이라도 나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매스컴을 통해서 자꾸만 확산되기에 전도의 접촉점을 찾는것 자체가 고민이다. 이런 고민에 대해서 가정교회는 복음을 본질이나 신학은 교단별로 그대로 간직한채 방법론적인 면에서 지혜로운 역할분담을 하고 있다.

 

우리는 가정교회를 전환한 후에 우리의 집을 단순히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라 교회로서의 기능을 감당하도록 사고의 전환을 시도했다. 가정에서 모이는 목장 모임은 필요에 따라서는 성경공부나 예배와는 또 다른 편안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참여할수 있게 하고 누구든지 말할수 있는 재미있는 장이 되게 했다. 가르침이 주목적이 아니라 삶의 나눔에 목적을 두므로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행복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목적이 되게 했다.

 

그 일을 위해서 음식을 나누며, 삶속에서 일어나는 고민을 나눈다.(가정교회를 비판하는 분들은 교인의 고민을 강요하므로서 분란을 일으킨다고 예측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비밀을 지켜주며, 함께 아파하므로서 친 형제 이상의 돈독한 사이가 된다) 그렇게 나눈 내용은 기도의 제목이 되고 많은 경우에는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주인 되심을 체험하곤 한다. 믿음이 막연하거나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내 삶속에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한다.

 

그 사랑과 체험이 느껴질 때 쯤에는 그들은 반드시 교회로 나아오게 된다. 가정교회의 전도는 갓 믿은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웃을 목장으로 데려오고 목장의 리더인 목자는 그들을 잘 섬겨서 교회로 오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 후에 담임목사가 인도하는 성경공부 반으로 인도하며, 목회자는 삶(성경)공부를 통하여 그들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한다. 목장을 통한 전도의 방법이 효율적인 것은 그들이 담임목사와 성경공부를 하는 자리에 오기까지 이미 섬김을 받은 후에 들어 오기에 목회자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가르칠 수 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얼마든지 선택할 것이다. 가정교회의 시스템은 집에서 교회로 이어지게 하고, 믿음에 연륜이 있는자와 초신자가 협력할 수 있으며, 성도와 목회자가 동역하는 우리시대를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영혼구원하여 제자 삼는 이 기쁨을 어찌 내려 놓을 수 있으랴? 


                                  

3. 생생한 간증이 있는 교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늘 새로운 이야기로 시간이 가는줄 모른다.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공동체이기에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로 넘쳐나야만 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이야기와 성도에게 입은 사랑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신약의 원형교회는 이 사랑으로 넘쳐났는데 현대교회는 언젠가부터 성도들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중단되었고 목회자의 원맨쇼(?) 비슷하게 변하여 가고 있었다.

 

목회자도 성도들의 생생한 고백을 들으면서 함께 힘을 얻어야 하련만 그런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가정교회로 전환을 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간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간증의 주 내용은 영혼구원을 위한 섬김과 그에 따른 열매의 이야기였다. 예배 때 마다 5분 간증을 한다. 그 간증은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이런 고달픔과 어려움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나를 이기게 했습니다. 그 고통조차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위장된 축복이요 선물이었습니다. 라고 눈물을 훔치노라면 여기저기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여느 교회에도 있겠지만 가정교회는 목장에서 나누던 이야기가 은혜로우면 자연스럽게 간증자로 추대되어진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삶을 워낙에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기에 거짓을 말하거나 꾸며낸 이야기는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설교자의 원고를 통하여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그들의 눈물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빛을 보게 하신다.

 

생각해 보면 교회에 갓 나온 사람들이 설교자의 원고는 어려울지라도 같은 형편에서 애달파 하는 내 이웃의 이야기에는 쉽게 마음의 문을 열게 게 된다. 마음을 문 연 그들에게 기름 부어 주시고 믿어지게 하는 성령님의 역사는 목회자의 설교 시간이지만 마음을 열어 젖히는 것은 평범한 성도들의 간증이 너무나 복된 것이었다. 가정교회를 하기 전에는 간증이 부담스럽거나 옛날 이야기들 뿐이었는데 이제는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자부심이다.

 

우리교회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의 목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특히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으시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시켜 주시는 사실을 당당하게 자랑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교회의 영광을 보게 된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에게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간증이 많은 교회는 은혜입은 성도가 많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4. 섬김의 리더쉽이 있는 교회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그가 나를 따라오는 것이 리더십이라고 한다. 오늘날 교회안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기에 나도 그를 닮고 싶다는 고백이 있다면 건강한 교회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섬기는 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언젠가부터 교회의 직분자들은 결정하는 사람과, 그 일에 대하여 보고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지면서 장로교가 오히려 감독제로 바뀐것 같았다.

 

교회의 주인이 목사냐? 장로냐? 혹은 당회냐? 제직회냐? 라는 기싸움이 교회를 병들게 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은 가정교회는 침례교회의 회중 제도에서 나온 정치제도가 아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오해를 한다. 가정교회는 침례교의 교리와는 무관하다.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구체적인 원형교회 운동일 뿐이다. 우리는 가정교회로 전환을 하면서 많은 성도들이 장로님을 존경하고 장로님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관리하는 교회가 아니라 목양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관리하는 교회라는 말은 더 이상 교인들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긴장하면서 교인을 감독한다는 뜻이며 목양하는 교회란 하나님의 양떼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으로 우리가 구원해야 할 우리(울타리) 밖에 있는 더 많은 양떼를 찾아서 구해낼 수 있도록 용기를 복돋우어 주는 교회를 말한다. 우리의 스승이요 주인이신 예수님은 너희중에 큰 자는 섬기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섬기는 자들이 교회의 리더가 될 때에 목양하는 교회로 바뀌어진다.

 

목장의 리더를 목자, 목자의 아내를 목녀라고 부른다. 이 호칭에 대해서 거부감을 표시하거나 침례교회의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전환을 하면서 목자(녀)라고 불렀다. 물론 장로 집사 권사는 그대로 존속한채로... 누가 목자(녀)가 되는가? 섬기기로 자원하면 그는 장로이든 집사이든 관계없이 목자가 된다.(규정하는 공부만 끝이 나면) 호칭에 대해서 논란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새로운 운동을 규정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이름에 불과할 뿐, 정치적인 권한은 전혀 없다.

 

목자는 섬기는 사명만 있다. 행정적인 절차는 철저하게 당회에서 의논을 하고 결의를 한다. 우리는 장로님들이 모두가 목자에 헌신하고 있으며, 목장을 6-7개씩 모은 초원의 리더인 초원지기로 섬기고 있다. 장로교에서 제기할수 있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초원지기는 장로가 되어야 하며, 목장의 숫자가 많아져서 초원지기를 증원할 필요가 있으면 장로를 증원하기로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장로는 반드시 사역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하지만 그 질문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것을 왜 모르는지? 성도들이 장로님을 존경할 때에는 남다른 학벌이나 사회적인 위치가 아니라 성도를 섬기기만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섬겨주는 사람을 존경한다. 섬기면서도 존경받지 못하는 지도자가 또 있을까?


                                  

5. 선교가 자연스러운 교회

교회를 우주적이라고 전제할 때에는 개인주의와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거룩한 나라에 속해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에 속해 있기에 그 나라를 위한 사역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가정교회로 전환을 한 이후에 성도들의 섬김이 자연스럽게 선교지를 향하여 열리게 되었다. 단기선교사로 직접 헌신하여서 오지에서 사역을 하는 이들도 여러 명이나 생겼다.

 

그 보다는 목장마다 선교지를 정하고 기도하면서 후원하는 열심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자연스럽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름이 주는 의미가 크게 작용을 한것 같다. 예를 들면 뚜게가라오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를 후원할 때에는 이름이 뚜게가라오 목장이다. 목장의 이름이 그러하다 보니 성도들이 그 선교지에 대해서 물어 볼 것을 예상해서 최근의 동향을 이메일로 주고 받는다. 물론 목장의 내용도 보내곤 하기에 선교사님들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준다.

 

선교사님을 향한 후원 그 이상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다. 더구나 목장의 헌금에다 교회의 재정을 보태어서 보내는 매칭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선교지의 근황을 생생하게 듣다 보니 선교지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기꺼이 동참하는 일이 개인, 혹은 교회차원에서 종종 일어난다. 선교하는 교회가 따로 있거나 선교를 위해서 구별된 헌신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당연히 선교공동체이어야 하고, 성도는 선교지를 위하여 기도하며 헌금해야 한다는 것을 가정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실천하고 있다.

 

교회가 선교지를 위하여 충분히 헌신하기 시작했을 때에 선교지에 대한 간증이 구체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교회의 부흥이 선교지와 협력이 될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그 증거는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넘치도록 채워주신 것을 보면 알수 있다. 하나님의 일, 선교가 어찌 선택 사항이겠는가?  


                                  

6. 은사를 따라 사역하는 교회

교회는 소외되는 이가 없이 비젼을 공유하고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으면 건강한 교회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구조적으로 그게 쉽지가 않았다. 모두가 일을 하기 보다는 한 두 사람에게 책임이 부여되면서 일부분만 사역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사역에 대한 주체자인 목회자은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하며, 때로는 책임을 진다. 실제로 목회자는 너무 많은 일을 혼자서 한다.

 

더욱이 교회가 갈등이 있을 때는 짐을 더 많이 져야만 한다. 많은 일로 인하여서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가고 몸이 병들때에도 오히려 목회자는 자신이 무능함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실제로 그 많은 일을 목회자가 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대신할 수 있다. 상당 부분의 일을 평신도에게 위임하면 재능을 발휘하고, 신나게 일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쌓이게 된다. 우리는 가정교회를 전환하면서 많은 사역을 나누어서 분담 하였다.

 

목장에 속한 목원은 전도대상자를 목장으로 초청해 오며, 목장의 목자는 초청되어 온 그들을 잘 섬겨서 교회로 인도하여 담임 목사가 인도하는 삶공부의 자리에 앉히우는 일을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사역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서로의 기도제목을 자연스럽게 나누게 된다. 더구나 목자는 목원이 사랑스러워서 더 많이 기도를 하고 함께 인도했던 그가 세례를 받는 날이면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담임 목사 역시도 자신이 직접 가르쳐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했기에 교회에 첫발을 내 딛는 그에게 말씀을 가르친 스승으로서 기쁨을 공유하게 된다.

 

나아가 우리는 목장에서 성도들이 한 가지씩의 사역을 한다. 찾아 보면 얼마든지 역할이 있다. 열명 내외가 모이는 목장에서의 찬양인도, 성경공부 교사, 주보 광고, 모임을 정리하는 서기, 경조사를 위한 총무, 선교지의 기도제목을 알리는 선교담당, 선교지에 보낼 헌금을 위한 재정담당, 목원에게 모임의 장소를 알리는 알리미, 등등 얼마든지 필요한 역할을 나누어서 모두가 사역자가 되게 한다. 물론 교회에서도 일인 일 사역의 원칙이 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언제나 봉사자로 넘쳐난다.

 

많은 경우 목회자들은 성도가 해야 할 사역을 목회자 자신이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서 쓰러지곤 한다. 성도가 사역을 한 후에 받아야 할 상을 목회자는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짐을 나누어서 지므로 함께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맺으면서 다짐하는 말

교회의 부흥은 인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대로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대로 애를 쓴 후에도 안되었다면 주님 앞에서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우리교회는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달려왔다. 교회의 매뉴얼인 성경을 따라서 신약의 원형교회를 회복하려고 했다. 더 좋은 성경적 근거가 있다면 언제든지 새로이 접목할 것이다.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지시를 따라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을 할 것이며, 그 분이 부어 주시는 축복의 열매로 인하여 우리는 더 행복해 할 것이다. 이 기쁨의 충만함과 교회의 찬란한 회복을 위하여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교회는 계속 나아갈 것이다.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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