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사 가족 최근 주장…“유해 송환운동 펼칠 것”

▲지난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북한의 계순희 선수와 기념촬영한 김동식 목사 모습ⓒ연합
지난 2000년 1월 중국 옌지(延吉)에서 탈북자를 돕다 북한의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됐던 김동식 목사의 가족들이 김 목사가 피랍된지 1년 만에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김 목사의 부인 정영화 씨는 7일 데일리NK와의 통화에서 “지난달 29일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차온이 선교사가 '시카고 성결교회 36주년 부흥회에서 김 목사가 피랍된지 1년만에 사망했다'고 말했다”고 오열했다.

김 목사의 사망 이유에 대해 차 선교사는 '김 목사가 예수를 부인하라는 북한 당국의 말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사망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씨는 “차 선교사가 최근 중국 선양에서 북한 내부 소식통에게 이같이 사실을 듣고 나에게 말해줬다”고 덧붙였다.

그는 “남편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지난 2005년에도 들었다”면서 “남편은 2000년경 강제 납치당해 북한의 수용소에 끌려갔으며, 이후 영양실조와 고문후유증으로 숨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남편에게 주체사상으로 전향할 것을 강요하면서 식사를 주지 않아 80kg에 달했던 체중이 급격히 줄어 사망전에는 35kg밖에 나가지 않은 것으로 안다”면서 “향후 남편의 유해송환 운동을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김 목사 송환 운동을 펼쳐온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는 김 목사가 납치당한 이듬해 고문과 건강상의 이유로 사망했다고 2005년에 이미 주장한 바 있다.

당시 도 대표는 북한 내부의 소식통을 통해 “북한 국가안전보위부가 김 목사에 대한 간첩조작, 자진월북 회유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김 목사를 고의적으로 방치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며 “김 목사는 사망 당시 직장암, 각종 고문 후유증, 폐쇄 공포증에 의한 우울증, 영양실조로 처참하게 순교했다”고 밝혔었다.

도 대표에 의하면 김 목사 시신은 현재 평양 근교 상원리 소재 조선인민군 91훈련소 위수구역내 안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당시 국내 NGO 단체들은 김 목사 사건 일체를 파악하고 있는 정부에게 정보공개 요청 및 송환 노력을 촉구하는 등 김 목사 송환운동을 벌였었다. 한편, 김 목사 납치에 가담한 혐의(국가보안법)를 받고 구속기소 된 중국 동포 김 모씨(39)는 2006년 3월 징역 5년이 선고돼 국내에서 복역 중이다.
김동식 목사는 누구인가?

김동식(2001년 당시 54세) 목사는 장애인과 탈북자들을 돕는 활동을 벌여온 미 영주권자 목사다.

부산의 고신대 재학중이던 1968년 불운의 교통사고로 인해 한쪽 다리가 불편하게 된 김 목사는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사 교육을 받았다. 1982년 케냐에서 목회활동을 펼치려 했으나 지병으로 이를 포기하고 경상남도 창원의 평성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1986년 또 다시 교통사고를 당해 아버지와 아내를 잃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이후 입양한 5명 포함 7명 자녀와 서울에서 영동교회에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목회활동을 준비하던 중 현부인인 정영화씨를 만나 재혼했다.

1998년 장애인전도협회를 설립하고 서울올림픽 당시 장애인 예술제 등을 개최해 해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이 행사를 이어가면서 장애인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이어 1988년 서울 장애인올림픽 때 만난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과 친분을 쌓으면서 선교영역을 중국으로 옮기게 된다.

미 영주권자로서 한중수교 이전부터 중국을 드나들며 장애인 선교를 펼치다 중국 옌지에 정착, 탈북자들을 돕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중국내에서 미션홈을 9개를 운영하며 탈북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이들의 한국행을 도왔다.

미국내 각 도시를 돌며 북한바로알리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던 김 목사는 1999년 9월 직장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위해 한국에 입국 후 중국으로 돌아간 2000년에 옌지에서 피랍됐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