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1일 목요일 오후7:30분에 양화진 100주년 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제 1회 꿈의 숲 기독교 인문대학 5월 강좌가 꿈의 숲 기독교 혁신학교가 주관하여 개강을 하였다매주 목요일 저녁7:30-9:30까지 열리는 5월 강좌는 5번의 강의가 계획되었다. 1일에는 이만열 교수가 한국교회와 민족운동 그리고 통일이란 주제로, 8일에는 손봉호 교수가 현대 크리스천의 윤리 의식으로, 15일에는 이이화 교수가 갑오농민전쟁 120주년 특강으로, 22일에는 김희선 전 의원이 정치와 신앙 그리고 여성독립운동에 대해서, 29일에는 윤경로 교수가 일제 강점기 한국 교회와 친일파 문제를 다룬다.

 

▲ 꿈의 숲 인문대학을 주관하는 박원홍 목사

한국 그리스도인의 민족 운동이만열 교수 

선교사가 오기 전에 이미 수세자 3인이 있고[1879], 1882년에는 존 로스가 쪽복음인 누가복음을1883년에는 요한복음을 만주 심양을 오가던 서북상인들인 이응찬이성하서상륜 등의 도움으로 번역 출간 배포했다. 1885년 만주 심야에서 대영성서공회에 보낸 편지에는 이미 서울에 70명의 개종자가 있어 세례받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기독교는 외세의 강압이 아니라 스스로 기독교를 수용한 나라임을 말한다기독교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나라를 사랑했다시대를 거치면서 나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로국권이 위기에 있을 때는 항일 국권 수호를 위하는 모습으로일제 강점기에는 국권을 되찾는 항일 독립운동으로해방후에는 식민잔재 청산의 과제로그리고 독재 군사 정권아래서는 인권과 민주화릐 과제로 발전되었고분단이 민족 공동체의 제반 사회적 조건들을 제약한다는 것을 통절하게 깨달은 때는 통일국가의 실현이 가장 뚜렷한 민족사의 과제로 여기고 운동하였다. 

한말 사회개혁운동 

한말 봉건 말기에 수용된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미친 중요한 개혁의 하나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주는 영향이다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인간은 하나님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말했고 이는 양반과 상놈 그리고 남여의 차별을 없애는 것으로 나타났다백정 박성춘이 예수를 믿고 난 뒤 독립회협 주회의 만님공동회를 돕고나중에 승동교회 장로가 된다진주에서도 양민과 백성이 함게 교회를 이루게 된다. 

반상의 차별을 없애가던 기독교는 직업관과 가치관을 변화시켰다그리고 한말 관료들의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한말 민씨 가문들의 부패가 점증한다이에 기독교인들이 항거하기 시작했다그래서 1899 3 1일자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는 새로 임명된 북도 군수는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라고 하는 기사를 게재하고 있는데이는 황성신문에도 난 기사이다도산은 거짓은 나의 불구대천지 원수라고 하면서 가르쳤다기독교인들은 거짓부정 부패와 항거하였다. 

항일 국권수호 운동 

반봉건 사회개혁운동은 상황에 따라서는 반외세 국가 자주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1890년대 후반부터 국가 자주운동에 참여했는데독립협회와 협성회 등이다또한 1905년 을사늑약이후로는 국가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수천명이 상동교회에 모여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일제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던 기독교인들은 자결도 하였다정재홍홍태순등이다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 국채보상운동등에 참여하였다그리고 폭력적인 무력행사에서도 나타났다정재홍이 이토오를 암살하려고 했고안중근과 뜻을 같이한 우순근도 기독교인이고,, 스티븐스를 제거한 장인환이완용과 이용구를 명동성당에서 처단하려 했던 이재명 등이 있다한말 항일운동의 큰 두 흐름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이지만 기독교인은 의병투쟁에서는 소극적이었다.

 

▲ 강의하는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교수, 제8대 국사편찬위원회 워원장]

일제하 항일독립운동국권회복운동 

일제하의 항일독립운동에는 3.1운동 같은 거족적인 항일독립만세 운동이 있었다그 후에 항일민족돌립운동이 본격화되는 단계에서는 임시정부운동과 외교투쟁무장투쟁과 사회[공산]주의 운동,무실역행운동과 젤제운동농총운동사회운동독립운동자금 지원 및 기도회 운동과 신사참배반대투쟁 등에 기독교인들이 관련되었다이런 운동들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계의 주류가 아니고 기독교계의 합의에 의한 운동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의사표시가 아니라고도 할수 없다또한 애국심과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의 관련문제가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기저에 있었다고 본다.신사참배 거부가 현인신인 천황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일본의 국체를 거부한 것이며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으로 보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한다. 

식민 잔재 청산과 민주화 운동

해방후 민족적인 과제는 분단과 민주사회의 기초를 놓는 일과 일제 잔채를 청산하는 세가지였다. 

해방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는 일제 잔재 청산이었다그러나 이에 있어서 이승만정권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오히려 개혁세력들이 주류에서 축출되었다. 

기독교는 4.19혁명과 5.16 군사 쿠테타 이후에 예언자적 목소리를 가지게 된다. 1965년 일본의 굴욕외교에 저항하고 1970년대 삼선개헌과 유신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고 이를 뒷받침한 것이 민중신학이었다그러나 이런 인권 민주화 운동도 한계를 가졌는데진보와 보수의 분열계급적 성향과 지역성으로 편가르기와 정권에 협력하는 예언자적 순수성을 지키지 못한 점들이 있다. 

인권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이를 저해하는 세력의 논리가 '안보'라는 것을 깨닫고 이 안보논리가 분단을 전제로 한 것이고 그 배경에 민족분단이 있음을 알고 통일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그래서 인권 민주화 운동의 다른 한면이 통일운동으로 1980년대 이후 자리잡게 된다. 

민족 통일 운동과 북한돕기 운동

70년대에 인권 민주화 운동 가운데에서 민족 통일의 긴급성을 성명서로 발표하곤 했다그리고 해외 교포들이 북한 동포들과의 만남도 통일을 논의하기도 했다그리고 NCCK를 중심으로 통일 운동이 전개되었다미국이 분단의 책임이 있기에 미국교회가 통일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나아가 세계교회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글리온에서의 남북교회의 만남등이 진행된다그런 중에 1988.2.29 NCCK통일선언이 나온다이는 민간 차원에서 통일논의에 물고를 트는 중요한 선언이다이후 방북 인사들의 활동들이 이어졌다그리고 90년대 이후에는 독일의 통일과 러시아의 붕괴와 동구권의 붕괴와 맞물려 북한의 홍수로 인한 기아사태가 벌어진다이로 인해서 한국 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구별없이 협력하여 북한을 돕는 일을 하게 되고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기독교가 인간과 사회를 변화개혁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기독교인은 그가 처한 민족과의 문제를 외면할수 없다지금까지 한국기독교는 시대상황에 따라 단계적인 소명을 의시갛면서 자체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나라 사랑 우동에 노력해 왔다앞으로도 기독교는 자신의 영적 영역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실천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각 시대마다 부과된 역사적인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후 질의 응답 시간이 진행되었다. 

기독교가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있는 때에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무엇인가?

통일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종북이라고 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북한이 주장하는 것을 하면 모두 종북인가한미 군사 훈련도 평화를 추구한다면 대놓고 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대형교회에 대한 지적을 한다대형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신에 십자군을 형성하려고 한다이것이 사회에 혐오감을 형성한다.

이 교수는 통일에 대한 확고한 태도가 필요하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이해를 높이고개성공단과 같은 서로의 이익을 나누고 공유하는 방식을 제시했다개성공단과 같은 것이 휴전선에 100개가 들어서면 전쟁이 가능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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