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로 비추어 본 한국교회와 신학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문창극 후보의 강연과 관련한 샬롬을꿈꾸는나비의 논평에 대한 공개질의서를 냈다. 이는 623일 국민일보 광고에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이하 샬롬나비)샬롬나비를 지지하는 목회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문창극 후보 발언 지지 성명서에 대한 공개질의서이기도 하다. 성명서에는 한국교회 복음주의권 내에서도 개혁적 목회자를 대표하는 이동원(지구촌교회 원로), 홍정길(남서울은혜교회 원로), 류호준(백석대 신학대학원장) 목사, 이상규(고신대) 교수 등은 물론 한국교회의 이름있는 목사와 교수들의 이름이 들어있다.

느헤미야연구원은 문창극의 역사관이 과연 신앙적 민족사관인가? 이는 역사인식의 혼절이요 변절이 아닌가? 문창극의 발언이 과연 과연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성경적 신앙인가? 문창극의 강연이 신앙간증이냐 민족사에 대한 기독교인의 인식이냐? 아직도 여전히 문창극을 옹호하느냐? 하는 다섯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는 샬롬나비와 함께 성명서에 참여했거나 동조했던 모든 이에게 내는 공개질의서이다. 이제 샬롬나비와 함께한 사람들이 답할 차례다.

7월 30일 들풀 서교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샬롬나비측과 공개토론회를 열자고 합의했으나 강사 선정문제로 연기되었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오프라인 토론회에서 밝히든 온라인에서 밝히든 이제 느헤미야연구원의 공개질의서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공개질의서는 맨 하단에)

기독연구원 느혜미야는 지난 725() 저녁 7시부터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로 비추어 본 한국교회와 신학이란 주제로 긴급포럼을 열어서 연구원의 7인 교수가 분야별로 발표하고 토론하면서 공개질의서를 발표했다.

김형원 연구원장은 인사말에서 세월호 사건 이후 기독교계의 볼썽사나운 발언들과 문창극 사태에 대한 샬롬 나비의 논평을 보면서 한국교회와 신학의 현주소를 분석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서 모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 인사와 기조 강연하는 김형원 원장

기조 발제: 사회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의 실패, 이제는 넘어서자/ 김형원 원장

1950-80연대까지의 한국 보수교회 사회 참여의 역사

이승만 정권 시절 보수 기독교는 정권 지지를 하였다. 그러다가 4.195.16 혁명이후 정치와 일정 거리를 두었다. 유신과 군부 독재 시절인 1974년에 로잔 대회가 열려서 복음주의권이 사회적 책임을 논하였지만 참석한 한국대표들이 이를 한국교회에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이런 시대에 정치와 거리를 두는 신학적 근거가 먼저는 롬13장에 근거한 '정교분리'신학이다. 둘째는 성속 이원론이고 세번째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개인 변화라는 순진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분리의 태도는 일관성이 없었다. 유신 헌법 공개적 지지와 국가 조찬기도회는 정교유착에 가깝니다.(발제논문은 논문방에서 볼 수 있다)

 

적극적 정치 참여로 전환

1998년 한기총이 세워지고, 1992년 장로 대통령 만들기를 통해서 정치 현장에 기독교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90년대 말에는 광장에서 정부비판 집회와 시위, 기도회와 예배를 흔히 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이유에 대해서 정치적 상황이 바뀐 것 외에 어떤 신학적 이유도 없었다. 이런 적극적 참여의 요인을 보면 먼저 87년 이후 민주화 요인이다. 둘째는 권력요인이다. 초대형교회들의 등장으로 권력 욕구와 맞물렸다. 셋째는 가치관의 위기로서 친미-반공 논리를 보수 기독교가 같이 갔다. 이는 신학적 기초가 매우 빈약함을 말한다.

보수 교회의 사회 참여의 두 가지 행동원리가 있는데 하나는 반공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주의이다. 경제주의는 맘모니즘이다. 이런 결과로 기독교가 보수 정치 세력과 연결되고, 이에 대한 맹목적 지지의 왜곡된 모습이 나타나고 기독교적 가치보다 이데올로기가 우선이 된다. 이렇게 신학적 기초가 결여된 사회참여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된다. 그리고 성경적 가치보다 현실적 가치가 더 중요한 반 기독교적 가르침을 전한 결과 정의와 공평의 감각이 뛰어난 젊은 세대들은 점차 교회를 떠난다. 또한 불신자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전한다. 개독교 먹사 등의 구호를 만들게 한다.

따라서 반공주의와 우상숭배적인 경제주의라는 허상에 기초한 현실인식을 버리고 수구 정치세력과의 합세하지 말고 성육신적 낮아짐과 성김의 정신의 본을 보이는 길을 걸어야 한다.

 

성서학적 통찰: 세월호 참사는 하나님의 뜻인가?/ 조석민 연구위원

▲ 조석민 연구위원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의도, 계획, 생각으로 이해되고 명령, 가르침, 약속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뜻이란 표현이 인간의 어떤 사고나 사건에 대하여 사용할 때는 먼저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고 보다 적절한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를 악용한 사악한 인간들의 잘못이다.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뜻은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에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성서학적 통찰: 성서의 하나님은 일제의 식민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실까?/ 김근주 연구위원

▲ 김근주 연구위원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돌이키는 삶은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이다. 다니엘의 경우에 느부갓네살 왕의 통치에 정의를 요청한다.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부수어 달라고 요청한다. 진리를 이방적 현실 즉 일상의 용어로 풀어낸 것이다. 137편에서는 개인적 원한의 보복이 아니라 비폭력적인 기도이다. 시편은 참담한 원인을 내부와 더불어 외부의 대적에게서 찾았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 시대를 하나님의 뜻으로만 치부하는 것보다 무엇을 잘못하고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를 반성하고 숙고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식민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전의 불의를 고치고 기득권의 이익 도모를 철폐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성서학적 통찰: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뜻인가? 악과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권연경 연구위원

▲ 권연경 교수

하나님의 뜻이라는 고상한 표현이 내의도를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하지만 내 행동 자체가 신앙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해석의 틀이된다. 조명은 전체 조명과 부분조명이 있다. 섭리적 차원에서 전체 조명으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는 부분적인 집중 조명이 필요하다. 선악의 구도가 있다. 부분 조명으로 상황을 파악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 전체 조명에 드러난 그림을 말하려 든다. 이런 성급함이 당면 상황속에서 우리가 분별하고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회피하는 기제가 된다. 기독교인의 신앙적 언사에 대중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도덕적인 무책임 혹은 비도덕적 형태를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신앙적 언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태에 대한 거시적 하나님의 뜻은 불편한 현실적인 도덕적인 물음을 서둘러 벗어나게 만든다. 책임규명을 흐리게 한다.

 

교회사적 분석: 문창극 장로의 역사관의 실체: 식민사관인가? 신앙적 민족사관인가?/ 배덕만 연구위원

▲ 배덕만 연구위원

먼저 문창극 장로의 역사관은 식민사관이다. 노골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한민족의 민족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독립을 위한 민족의 치열과 투쟁과 노력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해방 이후의 민족 발전을 미국과 일본의 절대적 도움으로 풀이한 것은 식민사관의 핵심적 요소이다.

둘째, 문창극 장로의 역사관은 기독교와 상관없다. 하나님의 뜻으로 한국 근대사를 설명했지만 근저에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를 배타적으로 유착시키고 반공주의와 자본주의에 경도된 이념적 시간에서 풀이했다. 철저히 세속적이다.

셋째 문창극 장로의 역사관 속에 인간의 자리는 없다. 본인은 신본주의적이라고 하지만 현재 한반도가 처한 상황에선 무책임하고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기도와 하나님의 터치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정당하고 필요한 행동도 무시하거나 포기해선 안된다. 훌륭한 지도자가 왜 필요한가?

마지막으로 문창극 장로와 함석헌은 아무 상관이 없다. 같은 하나님의 뜻이란 단어를 사용했지만 용어의 이해와 고난의 의미 그리고 민중의 가치, 한국의 사명에 대해서 두 사람은 대화가 불가능하다. 함석헌에게 있어서는 세계의 시궁창과 같은 한국의 고난의 역사에서 주어진 사명이 세계의 약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불의의 세력이 이기지 못함을 증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리적 진단: 왜 개신교 신앙언어는 공공성과 충돌하는가? / 김동춘 연구위원

▲ 김동춘 연구위원

한국 개신교가 직면한 위기의 두 축은 도덕성의 상실과 공공성의 문제이다. 문창극 장로의 발언이 사적인 차원이 아닌 전국민적 논쟁거리가 되는가? 이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과 기독교의 위상의 변화와 기독교 신앙의 사회속에서의 타당성이 문제가 된다. 오늘날의 사회는 세속적이면서도 종교적이다. 그래서 종교화된 세속 사회에서 특정한 신앙언어는 그 자체가 복음 선포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개신교의 신앙언어가 공공성에 출돌하는 이유는 먼저 신앙고백적 언어가 공론장에서 공적 담론과 연결된다는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창극 발언을 사적인 신앙의 확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창극의 발언은 사적 신앙언어 형식으로 던져진 공적언어이다. 그리고 교회의 사적 신앙언어가 공론장에서 증폭될 경우 교회는 자신들의 공적 담론을 사적 신앙의 자유권 보호라는 위장막 속으로 신속히 도피한다. 개인적인 차원과 사적인 차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개별적일 수 있지만 사적일 수 없다. 따라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교차적으로 공존하는 현대사회이고 종교인의 신앙언어는 사적 언어만이 아니라 공적 언어가 된다.

둘째로 개신교 신앙이 무례한 종교로 비춰지는 것은 본래의 순수성과 정체성의 상실과 더불어 교회 밖에 사람들과는 너무 동떨어진 언어구조, 사유체계, 가치 지향점을 너무 자주 표출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전환기 한국교회에게 요청되는 종교의 합리성과 타당성 결여에 기인한다. 한국교회의 강단 설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비약과 역설의 신앙언어를 관행적으로 즐겨 사용하였다. 이것이 현실과 격차와 괴리를 벌이고 있다.

이제 한국개신교는 자신의 확고한 신앙의 신념과 언어 표현이 사회 일반에서 적합성과 타당성을 지니는지, 그리고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인지 고민해야한다.

 

윤리적 진단: 세월호 이후의 한국 기독교; 자본주의 극복이 대안이다/ 박득훈 초빙 연구위원

▲ 박득훈 초빙 연구위원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는 한국사회와 교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이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와 한국기독교를 새롭게 세우려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자본주의가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의 궁극적 원인이라는 근거를 밝히고 둘째는 자본주의를 극복해 갈수 있는 길에 대해서 제시한다.

자본주의가 궁극적 원인이라고 판단되는 근거들

세월호 참사를 분석하는 기능주의적 관점, 갈등론적 관점, 중도적 관점이 있다. 그런데 갈등론적 관점을 선포해야 할 신학적 정당성이 있다. 갈등론이 사회과학적 분석의 차원에서 논리적 정합성과 실증적 증거의 차원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사회 윤리적 차원에서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담는다. 교계 지도자들이 세월호 유족을 폄하하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시 하는 태도가 있다.

문창극의 역사관은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다. 이런 가치관을 교계지도자들이 옹호한 이유는 자본주의 친화적인 신앙적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있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함석헌과 너무 다르다. 세상의 모든 불의를 받아낸 다음 착함으로 비상한 용맹과 비상한 도덕으로 온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움으로 세상의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다. 이것은 문창극의 자본주의적 논리와 다른 하나님의 뜻의 귀결이다.

자본주의 극복이 대안이다.

해방직후 분단과 6.25등의 남긴 트라우마는 치유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등식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기독교 신앙을 뒤틀고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나아가서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능함을 믿고 실천해야 한다. 경제 민주화의 조항이 대한민국 헌법 1192항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 근사치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원들의 단체사진


문창극 후보의 발언에 대한

샬롬을 꿈꾸는 나비의 논평에 대한 공개 질의서

세월호 참사 100 일이 넘은 지금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희생자들을 생각하면서,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역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는 샬롬을 꿈꾸는 나비(이하 샬롬나비’)의 역사관의 변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의하는 바이다.

1. 샬롬나비는 문창극의 역사관을 식민사관이 아닌 신앙적 민족사관이라고 두둔했다. 우리는 민족주권을 찬탈하고,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는 무고한 생명을 감금, 살상하고, 민족의 재산을 몰수하여 우리 민족의 융성과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보를 가져온 일제 식민통치와 침탈의 역사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이름으로 통렬하게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앙적 민족사관이라고 찬양하는 이 어처구니없고 해괴한 역사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고자 한다.

2. 우리는 문창극의 역사관을 식민사관이 아니라 신앙적 민족사관이라고 해석한 샬롬나비의 역사관은 한 마디로 역사인식의 혼절이요, 역사의 변조라고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36년간 민족사의 운명을 송두리째 결박시켜 부자유하고, 억압의 역사로 몰아간 그 역사를 긍정할 수 있으며, 대일본 제국의 번영이라는 미명하에 동아시아 국가와 민족 전체에 전쟁의 광분으로 날 띤 그 역사를 신앙의 이름으로 찬양할 수 있는가? 불의한 역사요, 어두움의 악의 역사요, 인류문명사의 비극의 역사를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적 역사로 변조할 수 있는지 묻고자 한다.

3. 샬롬나비는 일제식민통치는 우리 민족을 번영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문창극의 발언을 하나님의 절대주권를 믿는 성경적 신앙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참으로 위험 하고도 왜곡될 소지가 많은 신학적 해석이다. 우리는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악한 권력자나 불의한 제국일지라도 그의 섭리가운데 사용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선을 행사하도록 허락된 것이므로 악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전쟁과 살육으로 훼손되 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전적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의 만행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한 번도 규탄한 적도 없고, 그 부당함을 역설한 적이 없는 문창극의 발언을 어떤 근거로 성경적 신앙이라고 호도하는지 묻고자 한다.

4. 샬롬나비는 문창극의 발언을 신자로서 개인적인 신앙고백이며, 신학적 발언인데, 그것에 대 해 성경과 신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변한다. 우리는 문창 극의 특강은 결코 개인적인 신앙 간증이나 종교적 체험과 같은 성격이 아니라 공중 앞에서 민족사에 대한 기독교인의 인식을 보여준 것인데, 이를 마치 지극히 사적인 신앙고백인 것 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사적인 종교영역안으로 유폐시키면서 신앙적 특수성을 이유로 공론의 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사고를 보편타당하게 입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세계관은 교회의 담장 안에서 혹은 기독교권 역에서나 통용되는 게토화의 위험이 매우 높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개혁 주의 관점에서 사회-문화의 변혁을 꿈꾸며 실천하고자 하는 샬롬나비가 어떻게 온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하나님나라의 구현을 꾀할 수 있을 것인지 묻고자 한다.

5. 우리는 샬롬나비가 공직자로서 갖추어야 할 바른 역사관과 합당한 자격에 대해 국민들로부터 자질미달로 평가받아 이미 사퇴한 분에 대해, 그리고 장로로서 교회 안에서 행한 그의 발언과 처신으로 인해 한국기독교에 대한 상당 부분 부정적인 여론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창극 후보를 여전히 옹호하는지 묻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차제에 샬롬나비가 한국교회와 사회를 향해 바르고 깨어있는 기독교적 지성을 사용하여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적인 지침과 방향을 제시해 주기를 권면 드리고자 한다.

2014725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 샬롬나비의 논평(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