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신자들은 복음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 당시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인 로마의 복음에 반대되는 복음이었다. 1세기 당시 로마가 준다는 복음인 황제의 취임과 황제가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로마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과 사도들은 이 복음이 전정한 복음임을 전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은 순교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역사를 연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가 살아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고 인류에게 구원을 주었다는 것이 진정한 복음임을 담대히 선언한다.

초대 교회 신자가 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순교를 각오한 모험과 행동이었다. 그들은 순교와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가 세상의 구주로 오셔서 인간에게 구원을 준다는 소식이 구원의 참 복음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복음은 로마 제국의 위협과 그들의 박해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초월한 진정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었다.

초대 교회 예수 운동이 로마 제국에 인정되지 못하였고 미신 종교와 불법 집회의 교리를 전한다는 주변적인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다. 그들은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갖고 있는 예수의 복음은 박해가 없는 좋은 환경 가운데 예수의 복음은 값싸게 취급 당하고 있다. 좋은 환경 가운데 사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초대교회에서는 어떤 복음이었고 그 용어 자체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잘 모른다. A.D. 1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전하는 자가 자신의 목숨을 감수하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의 관점에서 예수의 복음은 로마가 전한 복음과 반대되었고 로마 제국의 질서 자체를 뒤흔드는 불법적인 교리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대 선교와 복음 전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하는 자가 죽음을 각오하는 선택과 자기 결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용어 자체에는 생명과 죽음을 각오하고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확신과 결정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 나라의 선교사들은 많이 세계 각국에 많이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예수의 이 원색적인 복음으로 인해 왜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고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로마 황제가 새로 취임하고 네로가 새로운 시대를 연 로마의 복음 (euggelion) 앞에 진정한 복음이 예수의 복음을 확신하고 전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과 사도들은 로마의 복음과 이데올로기의 압제와 법적 구속력에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정한 복음임을 확신했다. 나는 물론 그들이 성령 충만했고, 성령님이 그들을 지배하였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죽어도 죽음 저편 너머 천국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 신자들의 믿음이 강했다고 일부러 지적하고 싶지 않다. 내가 단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초대 교회 신자들과 사도들은 로마 제국이 그들을 박해하고 정치적으로 압제하는 복음을 반대하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불법이고 반 로마 제국주의적 행위임을 알고도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의 복음을 전했던 신자들의 복음을 가지고 전했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교회는 1세기 복음의 의미를 재발견하여 값싼 복음을 전하지 말고 이 복음의 본질과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복음의 야성을 발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값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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