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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순수한 기고자의 주장임을 알려드립니다. -코닷-

 

코람데오 닷컴에 올라온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공개질의샬롬나비측에서 답할 차례다]의 기사를 보았습니다기사 말미에 붙은 공개 질의서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형식은 공개 질의서 내용을 소개하고(굵은 글씨) 이에 대한 의문을 대꾸하는 형식으로 하도록 합니다공개 질의서 내용이 많지 않아서 발췌한 부분을 일일이 표시하지 않아도 충분히 어느 부분 인지를 확인하실 수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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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족주권을 찬탈하고,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는 무고한 생명을 감금, 살상하고, 민족의 재산을 몰수하여 우리 민족의 융성과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보를 가져온 일제 식민통치와 침탈의 역사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이름으로 통렬하게 비판하기는커녕

 

의문 제시:

▲ 천기쁨 부산대학교 부산대학교 대학원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판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또는 에게 유익이 되지 않았고 손해가 되었기 때문인가

우리 민족이 융성과 발전”을 해야 하는데 퇴보를 안겨주었다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동원하여 비판해야 한다는 말이 옳은가

어느 한 민족의 융성과 발전을 가로막은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판받는 근거가 된다면 일제시대에 일본 성도에게 있어서 일제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진 것인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어떠한 사건에 대하여 /악으로 나누어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 이면에는 "나는 억울하고 피해를 봤다"는 피해 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인간의 그 피해의식을 비판과 칭찬의 근거로 삼고 있다.

[기독연구원 느혜미야]는 적어도 이 질의서에서 일제 식민통치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악이고, 우리 민족의 번영은 두말할 것 없는 선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고 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나오는가비판 받아야 할 악, 칭찬 받아야할 선에 대한 판단기준을 하나님에게 두지 않고 "사람"에게 두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을 보라.

"민족주권을 찬탈하고,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는 무고한 생명을 감금, 살상하고, 민족의 재산을 몰수하여 우리 민족의 융성과 발전이 아닌 역사의 퇴보를 가져온 일제 식민통치와 침탈의 역사..."

결국 사람의 행복인간의 가치 상승이 그 기준인 것이다. 그것도 특별히 ”, “우리에게 그 기준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정의 내린 것에 반한다면 비판받아야 할 악으로 규정할 참이다.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경륜하시는 세상일에 대해서 절대선/절대악을 인간의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한단 말인가아니면 스스로 절대선 절대악이 판단 가능한 하나님인가어찌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이것이 선! 저것이 악!" 두 마음으로 판단하려는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시고 피조물이 그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게 절대선이고, 피조물이 그 자리를 떠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절대악이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면 '' 하고 먹지 않고, 먹으라 하면 '' 하고 먹는 것이다하나님이 아파 누우라하면, '' 하고 아파 눕는 것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라 하면 ''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다하나님이 죽으라 하면 '' 하고 죽는 것이고, 살아나라 하면 '' 하고 살아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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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36년간 민족사의 운명을 송두리째 결박시켜 부자유하고, 억압의 역사로 몰아간 그 역사를 긍정할 수 있으며, 대일본 제국의 번영이라는 미명하에 동아시아 국가와 민족 전체에 전쟁의 광분으로 날 띤 그 역사를 신앙의 이름으로 찬양할 수 있는가? 불의한 역사요, 어두움의 악의 역사요, 인류문명사의 비극의 역사를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적 역사로 변조할 수 있는지 묻고자 한다.”

 

의문 제시:

어떤 누가 일제 강점 자체를 신앙의 이름으로 찬양했는가? 문창극 씨가 했는가? 샬롬나비가 했는가? 문창극 씨 강연의 맥락이 일제가 정당하다였던가아니면 일제란 몽둥이를 드신 하나님이 정당하다였던가? 

만약 하나님이 찬양받으시면 그 손에 들린 몽둥이도 같이 찬양받는 것인가? 매 맞고 눈이 떠지면 그 손에 들린 몽둥이는 죽은 나무 쪼가리로 보이게 될 뿐이다. 이제 하나님 들으시라고 죽은 나무 쪼가리에 너 왜 내 종아리에 부딪혔나?”고 화를 낼 참인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악한 일을 하나님은 왜 가만히 두셨나?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그 악한 일을 예수님은 왜 보좌에서 서서 그저 보시기만 하셨는가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인 것을 모르는가? 

분명 일제의 참혹한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할 때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때린 몽둥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왜 맞았는지를 잊어버리면 안 될 일이다하나님의 백성은 몽둥이가 멸망할 때도 "저 몽둥이로 왜 내가 맞았었는가?"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몽둥이에 대한 처벌은 하나님이 하시도록 놔두는 게 상책이다. 기도로 그 머리에 숯불을 쌓으면 될 일이다스스로 나서는 일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태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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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권력은 선을 행사하도록 허락된 것이므로 악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전쟁과 살육으로 훼손되 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전적으로 어긋나는 것이다

 

의문 제시:

여전히 선이라는 개념이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 대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선이고 그 반대의 것은 악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한 가지 사건에도 바라보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선/악을 달리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기준을 '', '우리', '인간'에 두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에게 두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선이고, 그에 반하는 것들이 악일 뿐이다. 가나안 정복은 어찌 해석할 것인가? 42명의 아이를 찢은 곰은 어찌 해석할 것인가? 하나님이 스스로 지은 인간을 어린아이까지 무참히 죽이셨으니 스스로 죄를 지으신 것인가? 하나님의 귀한 형상인 사람을 한낱 동물이 죽였는데 성경의 이 부분을 볼 때마다 억울함을 느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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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앞에서 민족사에 대한 기독교인의 인식을 보여준 것인데, 이를 마치 지극히 사적인 신앙고백인 것 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사적인 종교영역안으로 유폐시키면서 신앙적 특수성을 이유로 공론의 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사고를 보편타당하게 입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세계관은 교회의 담장 안에서 혹은 기독교권 역에서나 통용되는 게토화의 위험이 매우 높다고 본다.”

 

의문 제시:

공중 앞이건 어떤 한 개인 앞이건 또는 아무도 없이 혼자이건 기독교인의 역사 인식이 변할 이유는 없다. 위의 말의 뉘앙스를 좀 쉽게 풀어보자면 뭐 우리끼리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공중 앞에서, 특히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이렇게 한다면 어떻게 그들과 섞일 수 있겠느냐? 우리들은 고립될 것이다.”와 같다고 하겠다. 

주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다. 심령을 찔러 쪼개는 좌우에 날 선 검이 떨어지는 그곳에서는 거룩(분리)이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께서 목숨을 값으로 성도를 세상에서 분리하셨는데 이제 다시 그들과 섞이기를 원하는가? 그런것을 간음이라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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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개혁주의 관점에서 사회-문화의 변혁을 꿈꾸며 실천하고자 하는

 

의문 제시:

개혁주의 관점? 기독교적인 사상으로 사회 문화의 변혁을 이루어 내는 것이 개혁주의의 목적인가? 세상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등에 업고 뭔가를 이룩해 내거나 뭔가를 성취해 내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그 백성을 하늘 백성답게 교육하는 교육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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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로부터 자질미달로 평가받아 이미 사퇴한 분에 대해, 그리고 장로로서 교회 안에서 행한 그의 발언과 처신으로 인해 한국기독교에 대한 상당 부분 부정적인 여론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창극 후보를 여전히 옹호하는지 묻고자 한다.”

 

의문제시

부정적 여론? 성도가 인간들이 결론지은 자질 평가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이유는 뭔가인간들에게 아부하고 싶은 건가? 육을 죽이는 사람이 두려운 건가? 

하나님 말씀은 거룩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백성에게 떨어지면 그들을 생명으로 구원하시고, 죄인 된 인간들에게 떨어지면 불로 심판한다. 죄인들의 입에서 싫은 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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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연구원 느혜미야]가 제시한 질의서 전반에 흐르는 비판의 기준이 사람에 있음을 보았다. 정말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가? 지금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세상 살아가는 윤리도덕으로 만들어 인간은 보다 존엄해! 인간은 가치 있어!”를 추구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다시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면 또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부디 이 글에 대해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문창극 씨도 샬롬나비도 지금 글을 쓰는 필자도 분명 부족한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족한 면이 있다고 해서 사람을 기준으로 한 판단으로 문창극 씨의, 샬롬나비의, 글쓴이의 신앙이 비판 받을 이유는 없다. 그런 것이라면 정중히 사양한다.

[기독연구원 느혜미야]하나님을 기준 삼아 비판을 해 주길 바란다. 그것이 비판 받는 자와 비판하는 자들 및 이들을 바라보는 여러 성도의 신앙을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성도의 거룩함을, 확실히 세상과 분리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세상의 인식이 기독교를 공격하고 성도를 핍박 하겠지만, 우리는 그 십자가를 수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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