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하는 교황을 배척하는 태도는 성도의 바른 태도 아니다

교리적 다름을 인정하는 종교적 관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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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중세의 가톨릭과 종교개혁 이후의 가톨릭

머리말

▲ 김영한박사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회장 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오는 814일부터 18일까지 로마 가톨릭(이하, 가톨릭)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다. 그는 세계가톨릭교회의 목자로서 한국에 있는 약 450만명 가톨릭인들의 신앙을 격려하러 온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나 방한한 데 이은 25년만에 교황의 한국방문이다. 이러한 교황 방문에 대하여 지난번 WCC10차 부산대회를 반대하듯이 한국개신교의 일부 극단한 보수주의자들이 교황 방한을 배척한다는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다. 이들은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다, ”가톨릭은 이단이다. “가톨릭은 교황을 우상화하고 있다”, 심하게는 교황은 적그리스도라며 방한을 극렬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적으로 맞지 않고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차이점은 적지 않다. 교황 무오설, 마리아 승천설, 고해성사, 연옥설, 성인 숭배, 마리아 숭배, 조상제사 허용, 천주십계라고 해서 제 2계명을 없애고 제10계명을 둘로 쪼갬 등은 개신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지나치게 가톨릭은 기독교가 아니라 이단종교라고 주장하는 극단한 보수주의자들인 근본주의자 신자들의 발언은 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와 같이 가톨릭이 예배 시 사도신경을 받아들이고(김영재, 기독교 신앙고백, 서울: 영음사, 2011, 36), 니케아 콘스탄티노블 신경을 고백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톨릭을 기독교로 받아 들여야 한다. 이웃 종교에 대한 배척 태도는 모든 사람들과 화평과 성화를 좇으라는 성경의 말씀에 거슬리는 독선적 태도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4).

기독교에는 큰 범주로 정교회, 가톨릭, 개신교가 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가 종교화된 4세기경부터 타종교에 대한 배척이 심했다. 로마 제국에서는 기독교가 국교화 됨으로써 타종교는 허용되지 않았다. 배척 전통이 정교회, 가톨릭, 개신교에 모두 계승되어 내려왔다. 다만, 정교회의 경우는 이슬람교에 의해 지배받던 15세기 이후 이슬람교에 의해 관용의 정신을 배워서 지금은 배척하지 않는다. 근본주의 이슬람이 아닌 온건한 이슬람교는 우상 숭배 행위만 아니면, 기독교, 유대교를 존중해 준다. 가톨릭의 경우는 타종교에 대한 배척 사상이 매우 강했는데 1963년 제2 바티칸 공의회 이후 타종교를 인정하였다. 불교 등 타종교들과 너무 친하게 지낸다. 개신교의 경우는 19세기 말 미국으로 중심으로 한 대두한 근본주의의 영향으로 타종교에 대한 배척 사상이 매우 강하다. 특히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는 자유주의를 배격하면서 타종교와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타종교를 배격한다. 한국 일부 보수교회는 미국의 근본주의를 그대로 답습하여서 타종교를 배척하고 있다.

한국 보수교회에서는 교리절대주의 내지 장로교 지상주의가 팽배하여, 칼빈 사상 내지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맞지 않으면 이단 내지 유사종교로 배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루터나 칼빈은 초창기에는 당시의 타락한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보았다. 그리고 가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종교개혁 운동을 통해서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루터교회를 설립했고, 한 세대 후인 칼빈도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개혁파 교회를 세웠다. 이때부터 이들은 공교회인 가톨릭 자체를 이단으로 보지 않고 가톨릭과의 연합과 일치를 시도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서구 교회사를 통하여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나온 개신교 루터파 교회와 칼빈파 교회가 어떻게 대립갈등을 통해서 결국 공존하기에 이르렀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1) 중세의 타락한 교황들: 적그리스도의 모습

로마 가톨릭 교황들(니콜라스 5, 바오르 2, 식스투스 4, 인노센트 8, 알렉산터 6, 쥴리우스 2, 레오 10세 등)도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에는 성경대로 믿으려는 자들을 박해하고, 면죄부를 팔고, 종교권력으로 반대자들을 마녀재판으로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는 등 각종 비리를 저질렀던 때가 있었다.(최덕성, 종교개혁전야, 본문과 현장사이, 2003, 447-453) 당시에 교황들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적그리스도라고 칭함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황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남미 아르젠티나 출신의 로마 교황 프랜치스코는 가난, 겸손, 섬김을 추구하고 권위주의에 탈피한 서민적 사목자 상()을 보여줌으로써 세계적인 존경을 받는 자이기도 하다. 특히 오늘날 한국 개신교 대형교회에서는 목사직이 세습되는 나쁜 관행이 있으며 개신교 총회장 선거에서는 금품이 오가는 일이 있어 세상의 비난을 받으나 로마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은 전세계의 추기경들이 비밀투표로 선출하기 때문에 가장 공정하게 선출된다. 이 점은 로마 가톨릭이 지니는 강점이기도 하다.

교황청 특명을 받은 독일의 사제 테첼(Johann Tetzel)은 면죄부(indulgentia) 판매에 관한 설교에서 동전이 돈궤 속에서 짤랑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으로부터 튀어 오른다라고 선언했다. 당시 가톨릭 사제(司祭)요 신학교수인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명제를 맹렬히 공격했다. 루터는 15171031일 정오에 비텐베르크대학의 벽보로 사용되는 교회당 출입문에 95개조의 논제를 제시했다. 교황은 연옥의 형벌로부터 어느 누구도 해방시킬 수 없다(20논제). 돈이 돈궤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닌 인간의 가르침이다(26논제-27논제). 면죄부가 그들의 구원을 보장한다고 믿는 자들은 영원히 저주를 받는다(32논제). 사람들은 면죄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될 수 없다(33논제). 참된 통회(痛悔)는 죄의 용서와 죄의 면제 둘 다 받는다. 그것은 면죄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36논제). 교황은 부요하면서 자신의 돈으로 성 베드로 성당을 지으려고 하지 않는가?(86논제). 교황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루터는 로마 교황청에 의하여 악명높은 이단자로 선언되었다. 1520615일 루터는 로마교회로부터 파문받기에 이른다.

루터는 1520년 출판된 독일의 기독교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교황직 자체가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추기경, 교황, 로마의 압제에 대항하여 독일 황제와 귀족들이 투쟁해야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글은 로마에 짓눌린 독일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고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루터는 개혁의 시작에 있어서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적극적 행동주의를 경고하였다. 선행이 자신의 힘과 이성에 의존해서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이것과 관계하지 않으신다(WA 6).

루터는 교황주의의 세가지 벽을 지적한다. 첫째 벽은 교황의 권세가 세속권세보다 우월하다는 논제다. 둘째 벽은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논제다. 세째 벽은 교황만이 교회회의를 소집권을 가진다는 논제다. 이에 대항하여 루터는 세가지 방어벽을 구축한다.

첫째 방어벽은 모든 신자는 사제직을 갖는다는 논제다: “모든 기독교인은 진실로 영적 지위를 소유하고 있으며, 직분의 차이 이외에 그들 가운데 어떤 차이도 없다.”(WA 6, 407, 13). 둘째 방어벽은 교황의 해석은 오류를 범한다는 논제다. 교황만의 성경 해석권은 공상우화(空想寓話)”에 지나지 않는다.( AE 44, 134.). 셋째 방어벽은 역사적으로 교황은 그러한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는 논제다. 역대의 사도 공의회는 사도들에 의해, 니케아 공의회는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다.(AE 44, 136-137.). 루터는 피력한다: "()을 증진시키는 것 외에 교회의 권위는 없다.“(WA 6, 414, 6).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 교황의 부패에 불만을 가진 독일 영주들. 특히 작센의 프리드리히 현인을 비롯하여 많은 농민 지지자들을 결집하여 루터파 교회를 이루며, 츠빙글리와 칼빈도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개혁파 교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며 그 세력은 갈수록 커져 가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도 이러한 개신교 세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신성로마제국황제는 정치적으로 이들의 종교적 화해를 중재하기에 이른다.

 

2) 아우구스부르그 종교 화의(和議)

신성로마제국황제 카를 5(Karl V, 1500~1558)는 제국이 통치자의 입장에서 교회가 구교(로마 가톨릭)와 신교(루터파)로 나누어진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도모하기 위하여 아우구스부르그 제국회의를 소집하였다.

1530년에 루터는 아우구스부르그 의회에서 황제 카를 5세 앞에 출두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아우구스부르그의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으로 알려지게 될, 그의 신앙에 대한 진술을 하였다.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은 특색이 있다. 첫째, 루터의 강조점이 되었던 신앙에 의한 의인 (義認)으로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강조, 자유의 소중성, 초대 기독교 정신의 계승이다. 둘째, 내용상으로 보아 결코 어떤 새로운 교리는 논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여러 세기를 걸쳐 교회가 가르쳐 온 기독교 신앙의 중심,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에 의한 의인 (義認)의 가르침과 성서의 기본적 교의 (敎義)를 재강조한 것이다. 셋째, 모든 항목의 시작은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es wird gelehret)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아우구스부르그 의회는 이 신앙고백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평결을 내렸다. '아우구스부르그의 신앙고백'은 독일의 저명한 인문주의자이자 신학자였던 멜랑히튼(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이 받아적었는데, 그는 비텐베르크의 대학에서 루터의 동료였다.

아우구스부르그 의회 이후에 다수의 루터파 독일군주들과 도시들은 가톨릭 합스부르그 가문에 대항하는 종교적, 군사적 동맹인 쉬말갈덴 동맹 (Schmalkaldic League, 1531)을 결성하였다. 독일이 루터파와 가톨릭으로 점점 더 뚜렷하게 분열됨에 따라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1546년부터 1555년까지 독일은 종교적 내전으로 분열되었다.

1555년에 양측은 타협안을 찾았는데, 그것이 아우구스부르그 종교 화의(和議)조약이다. 이것은 각각의 독일군주들에게 로마가톨릭과 루터파 중에서 자신의 국가의 종교를 선택할 권리(cuius regio, eius religio)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루터파는 독일의 많은 지역, 특히 북부와 동부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남부독일의 대부분과 서부의 라인란트는 동부의 실레지아와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으로 남게 되었다. 루터파는 곧 스칸디나비아로 확산되어 스웨덴과 스웨덴이 통치하고있던 핀란드, 에스토니아 및 라트비아의 발트해 지역에서는 물론, 덴마크와 덴마크의 통치하에 있던 노르웨이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카를 5세를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1(Ferdinand I, 1503~1564)15559월 아우구스부르그 제국회의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의 대표를 불러 모아 일정한 타협을 모색했으며, 그에 따라 루터파 개신교도에게 가톨릭교도와 같은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하나의 제국, 하나의 신앙을 고집했던 카를 5세의 노선이 포기되었으며, 지방 영주들이 세속권력만이 아니라 종교권력까지 갖게 됨으로써 황제에 대항할 동기가 감소되었다.

 

3) 칼빈의 종교 연합정신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은 개신교의 심각한 분열(루터파, 츠빙글리파, 칼빈파, 재세례파 등)에도 불구하고 부처와 멜랑히톤처럼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정신을 가장 많이 보여줬다. 칼빈의 교회 일치에 대한 관심과 입장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특별히 칼빈이 교회의 하나됨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트리엔트 종교회의(Council of Trient)를 통해서였다. 18년 간 계속됐던 트리엔트 종교회의 기간(1545-1563) 동안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자로 활동했다. 칼빈은 이러한 종교회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4권 제1장의 제목에서 벌써 교회의 하나됨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것은 참된 교회에 관한 설명으로 참된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이므로 우리가 그 교회와 더불어 하나됨을 유지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칼빈은 그보다 한 세대 앞선 종교개혁자 루터와 같이 근본적으로 교회가 신자들의 공동체라고 말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칼빈의 교회관은 교회를 제도나 기구로 보는 개념적 이해에서 출발함으로써, 성도의 교제를 강조한 루터와 다르다. 칼빈은 교회의 하나됨에 있어서 분명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하나됨의 실현을 위해 모범을 보인 인물이다. 칼빈은 마지막까지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정일웅, [정일웅 칼럼] 로마 카톨릭과 연합하려 했던 칼빈, 입력 : 2011.02.24. 16:01, 크리스천투데이). 칼빈은 1540년 독일 하게나우(Hagenau)1540~41년 개최된 보름스(Worms) 종교회의, 레겐스부르그(Regensburg) 종교회의에 대표로 참석했다. 이 모든 노력들이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과의 하나됨을 위해 힘썼던 노력의 역사적 사건들이다.(정일웅, [정일웅 칼럼] 로마 카톨릭과 연합하려 했던 칼빈, 입력 : 2011.02.24. 16:01, 크리스천투데이)

이 외에도 칼빈은 교회의 분리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비난에 대해 처음부터 신경을 쓰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명을 제시하기도 했다. 첫째는 프랑스의 황제 프란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다. 둘째는 1539년 사돌렛 추기경 앞으로 보낸 그의 유명한 답변서에서 칼빈의 교회 하나됨의 입장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로마 가톨릭 사람들은 내가 교회를 버리고 떠났다고 비난하지만, 나의 양심은 전혀 나를 고발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패잔병들이 패주하고 흩어지며 대열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부대장의 표준을 높이 들고, 이들에게 원대복귀하라고 부르는 탈영병과도 같기 때문이다. 오 주님! 이처럼 당신의 모든 종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당신의 명령을 전혀 들을 수 없고 거의 자신들의 부대장, 자신들의 의무 및 군 입대시의 서약을 잊었나이다. 나는 흩어진 이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낯선 표준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백성으로 머물기 원하는 한, 따라야 할 당신의 고상한 기치를 높이 들었나이다. 그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을 대열 안에 계속 있게 해야 할 자로, 이들을 흩어버린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내가 전혀 단념하지 않고 있을 때 이들은 폭력으로 나를 공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서글픈 소요가 일어났고 싸움이 불붙어 폭발했습니다. 오 주여! 과연 누가 비난을 받아야 할지 당신이 판단하소서. 나는 일치추구의 열정 때문에 항상 말과 행동으로 항변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교회의 일치란 당신으로부터 시작해 당신 안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우리들에게 펑화와 일치를 천거하실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이 일치와 평화를 유지케 하는 유일한 결속의 끈이심을 보이셨습니다.”(칼빈, 1539추기경 사도레토에게 보내는 서한)

칼빈이 제시한 교회관은 오늘날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중요한 지침을 제공해주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다스리시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이며, 그 참된 교회 안에서만 하나됨이 가능하다고 이해했다. 칼빈에 따르면 유일한 참된 교회 안에 보편적인 교회와 개별적인 교회가 구분된다. 이 둘은 물론 가시적인 교회이다. 그는 가시적인 교회를 중요시했다.

둘째, 보편적인 교회는 공간적으로 나누어져 있고, 떨어져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하나님의 참된 교리에 동의하고 같은 신앙의 매는 줄로 뭉쳐 있는 교회를 말한다. 이에 비해 개별적인 교회는 마을과 도시에 사람들의 수에 따라 필요한 대로 나누어진 교회를 뜻한다.

셋째, 구체적인 지역교회 내에서 교리가 일치해야 하지만 교회들의 상호관계에서는 교리적인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교리의 공통성이라 할 때 개개인의 신앙표현이 모두 동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매사에 확실하고 의심할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긍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교회들 간에 신학적인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신앙의 하나됨을 분열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정일웅, [정일웅 칼럼] 로마 카톨릭과 연합하려 했던 칼빈, 입력 : 2011.02.24. 16:01, 크리스처투데이).

 

4) 30년 전쟁 후 체결된 베스트팔리아 조약

아우구스부르그(Augusburg) 제국 의회에서 이끌어진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和議)조약에서 가톨릭과 루터파 교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으나 로마 가톨릭은 개혁파 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和議) 협약(cuius regio, eius religio)에 따라 영주가 개신교를 선택할 경우, 자유로운 종교생활이 가능했다. 이것은 카톨릭과 루터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어서 사실 칼빈파 등 다른 신앙노선의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유럽에서는 칼빈파가 활발했던 반면에, 독일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상태에 있었다.

루터파와 달리 칼뱅파 개신교도는 여전히 아무런 권리를 얻지 못했으며, 영주의 신앙을 강제로 따라야 하는 지역민들의 저항도 끝이 없었다. 루터파에게 양보를 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제후가 개신교로 개종하는 일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황제는 가톨릭을 후원함을 분명히 했다는 점도 불만 요소였다.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화의는 중세 이래 교황의 보호자로서 가톨릭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온 신성로마 황제와 소수의 가톨릭 제후들이 이미 주민의 다수가 개신교도로 바뀌어 버린 제국을 통치한다는 정치적인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 1618~1648년에 있었던 30년 종교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30년 종교전쟁을 치른 후 독일 북부 뮌스터에서 베스트팔리아 조약을 체결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처음으로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칼빈주의) 교회를 인정했다.

오늘날 유럽에서 유지되는 종교 간의 평화는 30년 종교전쟁의 참화를 거쳐서야 비로소 오게되었다. 30년 전쟁이라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양편 신자들이 모두 삶의 터전이 황폐해지는 참혹한 고통과 무의미한 참담한 현실을 맛보았기 때문에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이르런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앞서 간 유럽교회의 사례를 거울삼아 타종교에 대한 존중과 공존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르다.

필자는 오늘날의 로마 천주교 교황이 중세나 종교개혁 당시의 교황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하고 싶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는 1970, 80년대 90년대에 걸쳐 근 10년간 독일과 영국 등 현지 유학과 연구생활을 통하여 몸소 유럽의 천주교회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유럽 기독교인들(신학자들과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대화를 통하여 저들의 이웃 종교관을 체험한 데서 형성된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 유럽 기독교인들로부터 천주교가 이단이라거나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평가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제 13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 기독교인들은 종교개혁 이후 천주교에서 개신교가 분리되어 나온 후 근 500년 가까이 되고 있는 유럽 기독교인들의 이웃 종교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5)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을 계기로 가톨릭 내에 개혁운동의 급물살

종교개혁 당시의 루터, 츠빙글리, 한 세대 후예인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가톨릭교회 내에 개혁운동은 급물살을 탔다. 독일에서는 열정적이고 유능한 많은 경건한 주교들이 개혁을 시도했고 각 수도회 안에서도 개혁이 일어났다. 수도회마다 개혁파들이 생겨났다. 황제 카를 5(Karl V)는 공의회 개최를 위해 역대 교황들과의 투쟁에 나섰다. 황제는 진작부터 공의회 개최를 주장했고 루터 역시 이미 1518년 공의회에 공소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사건을 공의회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시 제기됐고 독일의 제후들은 지속적으로 공의회 개최를 요구했다.

로마 교황은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교황의 권한이었던 공의회를 모집하게 된 것이다. 교회사에 나타난 몇 차례 공의회를 통하여 로마 가톨릭은 많은 변신을 거듭하였다. 16세기의 트리엔트 종교회의(the Council of Trient), 19세기 제1차 바티칸 공의회(Concilium Vaticanum I), 20세기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Concilium Vaticanum II) 등을 통하여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자기 개혁을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역사적인 자기 개혁운동을 통하여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은 중세 암흑기(특히 14세기-16세기)의 가톨릭교회보다 개방적이 되었고, 많이 자체 개혁되었다. 물론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앞서 열거한 바같이 교리적으로는 아직도 비성경적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 내지 서방교회는 비록 11세기(1054)에는 필리오케(filioque) 교리문제로 동방정교회가 분리해 나갔으나 역사적으로는 사도적 교회에서 발전해 나온 하나의 공교회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필자의 해석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역사적 예수로부터 초대 베드로가 받은 천국 열쇠를 계승한 유일한 정통기독교라는 천주교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적 정통교회의 기준이란 베드로와 같이 역사적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모든 신자들과 이러한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인 성도의 교제”(comminio sanctorum)를 말한다. 그러므로 정교회, 천주교, 개신교 어느 교회도 사도적 계승을 독점할 수 없고, 오로지 바른 신앙을 가진 개인 성도와 그러한 성도들이 모임 단체가 함께 나누는 것이다.

 

6) 16세기 트리엔트 종교회의: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적인 자체개혁

트리엔트공의회(Council of Trient, 1545-1563)1545년 북부 이탈리아의 트리엔트(Trient)에서 교황 바오로 3(Paul III) 주관으로 개최된 로마 가톨릭의 공의회를 말한다. 바오르 3세는 1536년에 가톨릭교회 내의 일련의 개혁 투사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교회개혁을 위한 개혁위원회를 구성했다. 15453월 공의회가 소집되어 12월에 공의회 첫 회의가 열렸다. 공의회는 15451213일부터 1563124일까지 18년 동안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Trento)에서 열렸다. 두 차례 논의가 중단되어, 바오로 3세 때의 제1(1545~1547), 율리오 3(Julius III) 때 속개된 제2(1551-1552), 비오 4(Pius IV) 때의 제3(1562-1563)로 구분된다. 교황은 종교개혁이 주도적으로 일어나 이미 루터파 교회가 주도적으로 형성된 독일 영토를 피하여 로마 교황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교황권의 영향이 미치는 북 이탈리아 도시 트린엔트로 정한 것이다.

1회기(1545~1548)에서는 성경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루터의 주장을 배격하고 그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경과 교회 전통 모두를 신앙의 원천으로 확인했다. 아울러 성경의 해석 권위는 교회만에게만 있음을 명백히 하고 루터파의 오로지 은총설과 정의 동반설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義化) (개신교: 의인 義認)에 대한 정의를 규정했다. 또한 예정설과 믿음에 의한 면죄설을 배격하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과 더불어 선행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만인제사장설, 화체설 부정 등 개신교의 교리들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그리고 니케아-콘스탄티노블 신경을 신앙의 기초로 재확인, 성경과 교회 전통 모두를 신앙의 원천으로 확인, 교회가 계시 해석의 유일한 권리를 갖는 것,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의 실천에서 생겨난다는 것, 외경(토비트》 《유딧》 《지혜서》 《집회서》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을 성경에 포함시킴,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vulgata)를 공식적인 성경으로 선포, (J. T. McNeill, “Council of Trent,” In: Alan Richardson & John Bowden(ed.), A New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 London: SCM Press, 2002, 580.) 아울러 교황의 권위와 교황-대주교-지역사제에 이르는 성직계서제(聖職階序制)를 재확인했다.

2회기(1551~1552)에서는 바오로 3세에 이어 율리오 3세 교황이 즉위해 속개됐다. 성체(성만찬) 성사(성례전)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과 실체 변화,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됐다. 2기에는 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의 주교들이 참석했고 개신교 지도자들도 참석했다. 이 당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했던 칼빈은 비록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이 트리엔트 공회의의 진행과정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것이다. 이 공의회에 참석한 개신교 대표들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지금까지의 결정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공통된 토론의 토대가 없었음이 명백해졌고 교황은 개신교 대표들의 요구에 대해 더 이상 토의하는 것을 금했다. 이어 독일 제후들의 봉기로 공의회가 중단됐다.

3회기(1562~1563)에서 공의회는 가장 큰 성과를 내었다. 2회기가 끝난 뒤 10년 후에 이어진 공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심의 대상은 성체 성사와 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것들이었고 이에 대한 교리가 규정됐다. 그 외에도 모든 성인의 통공(성도의 교제, Communio Sanctorum), 성인 유해의 공경, 연옥, 대사(大赦)(면죄 免罪), 성화상의 사용, 교구 신학교 설립, 주교 임명, 교구 회의, 강론 등에 대한 교령이 반포됐다. 199명의 주교와 7명의 대수도원장, 7명의 수도회 총장들은 수많은 교령과 개혁령을 서명해 교황에게 보냈다. 바오로 4세는 1564126일 모든 교령과 개혁령을 예외없이 승인했다.

공의회는 면죄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지며 그 은총은 성사(聖事)(성례전)를 통해 인간들에게 내려온다고 하여, 성사(聖事, 성례전)를 집행하는 성직자들을 일반 신도들과 엄격히 구분했다. 성만찬에 관한 화체설(transubstantiation) 확인, 7성사(baptisma(세례), comfirmatio(견진), paenitentia(고해), Eucharistia(성체), ordo(신품), matrimonium(혼인), extrema unctio(종부)는 불가결한 것으로 존속되었으며, 면죄부 판매라며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각종 면죄부(免罪符)가 대폭 폐지되었고, 사제(司祭)의 독신이 강조되었다. 성찬 전례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화체설’, 고해성사의 비밀, 병자성사, 보속(補贖, 보상補償), 신품성사, 혼인성사 등의 교리가 명확히 정의되었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복음서의 진리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은 반드시 주교의 권위 하에서 행해져야 했으며, 주교와 사제는 그들 각각의 주교관구와 교구 안에 거주해야만 했다. 나아가 성직자들은 엄격히 선발되어 주교관구와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필자는 이러한 트리엔트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나 역설하고 싶은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루터나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운동에 상응한 철저한 자기 갱신, 즉 반종교개혁을 했다는 것이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를 명백히 했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트리엔트공의회는 예딘(H. Jedin)의 말처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해 교회의 교도직으로 응답한 최고의 대답이었다.(H. Jedin, Breve histoire des conciles, Desclee,1960; http://blog.naver.com/cosmos5619.do). 트리엔트공의회는 개신교가 제기한 문제와 관련해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하여 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내부 개혁을 추진하는 기초를 놓았다.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로욜라(Loyola, 1491~1556)가 결성한 예수회의 확장과 더불어 개신교의 진출을 막으며 가톨릭 신앙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신학적·교회적인 근본적 재정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근대 가톨릭교회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트리엔트공의회는 개신교에 맞서 로마 가톨릭교회 자신이 스스로를 개혁한 반종교개혁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천주교 신자들도 이 공의회에 대하여 개혁교회가 자신에 대해 사용하는 슬로간 항상 쇄신되어야 할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필자에 의하면 트리엔트공의회는 오로지 믿음에다 인간의 선행 부가를 구원 조건으로 확인함으로써 바울이 선언한 오로지 믿음”(sola fide)에 의한 성경의 복음주의에서 멀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소아시아 갈라디아교회에 나타난 믿음 외에 행함을 추구한 믿음과 행위 종합주의자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같이 경고하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기 편에서 적극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교회일치를 위한 개신교회들(루터파 교회와 개혁파 교회 등)과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끝내 연합과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교황의 절대적인 통치제도와 성경과 전통의 두 권위, 그리고 성만찬의 화체설 등의 천주교의 교리가 모든 성도 제사장설, 오로지 성경, 영적 임재설 내지 공재설을 믿는 개신교 지도자들에 의해 수용될 수 없는, 그리하여 서로 간에 좁혀지지 않는 논쟁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7) 1, 2차 바티칸공의회: 19세기와 20세기 로마 가톨릭의 자기 개혁

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20회 공의회)1869128일 교황 비오 9(Pius IX) 시대에 열렸다.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300년 만에 열린 이 회의에서는 근대합리주의 ·유물론 ·무신론 등의 근대 반()기독교적 철학체계 및 얀세니즘(Jansenism) ·페브로니우스주의(교회에 대한 국가우위설 주장) 등의 이단설을 배격하였다. 그리고 교황의 무오성(無誤性)교리를 선언하였는데, 교황의 우위성을 교리적으로 확립한 점은 천주교 교회 역사상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의사(議事)를 다루지도 못하고 18701020일 정회하였다.

이 회의 결과 교황 무오설에 반대하는 사제 ·신학자들에 의해 구가톨릭교회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독일의 사제 되링거(Döllinger)가 익명의 책에서 교황무오 교리를 비판했고 헤페레 폰 로텐베르그(Hefele von Rottenburg)7세기 교황 호노리우스(Honorius)가 오류 때문에 공의회에 의하여 죄로 지적된 일을 제시했다(Walther von Loewenich, Die Geschichte der kirche. Von den Anfängen bis zur Gegenwart, 전준식 역, 교회사개론, 마라나다, 1995, 450). 교황 무오설은 오늘날 천주교와 개신교 간 종교대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걸림돌이다. 필자는 교황 무오설은 교황직을 절대화하고 교황이라는 인간을 우상화 시키는 오류가 있다고 본다.

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는 가톨릭을 획기적으로 개혁하는데 이바지하였다. 2차 바티칸 공의회(21회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재위 1958~1963)에 의해 소집되었는데, 회의 도중 그가 별세하자 바오로 6(1963~1968)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 회의는 19591월 교황 요한 23세의 가톨릭교회의 쇄신(현대화)과 교회(가톨릭과 개신교) 일치를 표방한 담화 발표로부터 비롯되어, 개신교 교파들에서 옵서버 60여 명이 참석하는 등 사상 최대규모의 공의회로서, 공의회 사상 유례 없는 열기를 보였다.

1차 바티칸공의회가 반기독교적 근대 사상인 유물론과 무신론과의 대결을 강력히 제시한 데 반하여, 2차 공의회는 시대에의 적응을 내세워 교회의 보수적인 면을 완전 탈피, 과감한 교회제도 ·전례의식 ·교육 ·계시 등에 관한 재해석과 개혁의 자세를 드러내 보여 교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1965128일의 폐회 전날, 1054년에 있었던 동방교회(東方敎會)에 대한 파문(破門)을 피차간에 취소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근 10세기 가깝게 등져 온 동 ·서 교회 간에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성과를 보았다. 이 공의회는 교회 ·전례 ·사목(司牧) ·계시 등에 관한 4개의 헌장과, 교회일치 ·매스미디어 등에 관한 9개의 교령(敎令), 기독교적 교육 등에 관한 3개의 선언을 채택함으로써 획기적인 교회개혁의 성과를 거두었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열었다. 개신교를 형제라고 칭했다. 평신도의 역할을 인정했다. 그 결과 한국 등 세계의 가톨릭 국가들의 전례(典禮)에서 라틴어 사용 대신 모국어 사용이 단행되고, 한국에서는 신 ·구교 공동번역 성서가 나오게 되었다.

필자는 개신교 복음주의 신학자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천주교가 스스로 내적 갱신을 시도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천주교가 제2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종교개혁 당시 445년 전 파문했던 당시 천주교의 신부였던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루터교와 화해를 선언하고 루터교와 개혁교회 등 개신교 신자들을 형제라고 받아들인 점이다. 그리고 미사를 각국의 모국어로 집행하도록 했으며, 사제 위주의 예배 진행에 평신도를 참여시키고 평신도 역할을 크게 인정했다는 점이다.

 

8) “익명의 그리스도인사상과 타종교 구원 선언: 종교다원주의 수용

필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타종교와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은 바람직했으나 타종교도 구원의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종교다원주의의 길을 연 것은 개신교 복음주의 신학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길이라고 본다. 종교다원주의의 길에 독일 신학자 칼 라나(Karl Rahner, 1904-1984)와 프랑스 신학자 공가르(Yves Congar, 1904-1996)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차 바티칸공회회가 선포한 교회헌장은 이슬람, 불교 등 타종교를 통한 구원을 인정하고 있다. “복음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 유일신을 신앙하는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도 구원의 가능성 있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2장 하느님의 백성 15항 교회와 비가톨릭 그리스도인).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분명히 하나님을 모르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교회헌장 16항 교회와 비그리스도인). 가톨릭교회는 이 교회헌장에서 개신교나 유대교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이슬람교나 불교나 타종교도 구원 가능성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라고 한다.

이러한 교리적 전환을 하는 데 있어서 라너(Rahner)익명적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그는 다음 같이 피력한다. “누가 하느님의 보편적 계시의 숨은 부르심을 받아들여 양심의 선의를 따라 산다면, 그는 이미 신앙과 희망과 사람 안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며, 익명의 그리스도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내포하고 있는 명시되지 않는 신앙이 그리스도교회와 만남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되고 심화되는 것이다.” 라너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든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양심의 선의(善意)를 따라 살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3세기 카프리안(Caecilius Cyprianus)의 유명한 구원의 공식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수정된 것이다. 이러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타종교 구원의 선언은 성경의 그리스도를 익명의 그리스도 개념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며 종교다원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천주교의 선언은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증언한 오로지 그리스도만으로”(solus Christus)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4:12). 이 선언을 통하여 가톨릭교회는 초대교회의 사도적 전승에서 벗어나서 가톨릭적 보편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9) 요한 바오로 2, 베네딕토 16, 프란치스코 교황

종교개혁 당시에는 천주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은 극심한 대립과 갈등을 이루었고, 그 이전에는 영국의 존 위클리프, 틴데일, 보헤미아의 후스 등 종교개혁 이전 수많은 개혁자들이 교황주의 천주교의 비성경적 행태를 비판하고 반대한다고 하여 화형을 당해 순교한 경우가 비일 비재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 민족주의의 울타리 안에서 독일 영주들의 정치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성공하고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그 지지자 층을 넓혀갔고, 스위스의 츠빙글리, 마르틴 부처와 칼빈을 중심으로 개혁파 교회가 독립적으로 지지자 층을 확산하여 갔다. 그리하여 가톨릭 교회의 세력이 쇠퇴하여 갔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보아야 하겠다.

종교개혁과 더불어 중세 가톨릭교회의 절대적인 교황권이 쇠퇴하고 개신교가 약진하면서 천주교와 개신교는 이미 11세기에 분리해 나간 동방 정교회와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큰 갈등이 없었다. 그러나 서구 유럽이라는 서로 이웃한 공간 안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는 역사적으로 갈등 분쟁하면서 앞서 말한 바 같이 30년 종교전쟁을 치루고 난 후에 1649년 베스팔리아 종교화의 조약을 체결하여 적대관계를 끝냄으로써 결국 사회제도적으로 공존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2천년대에 들어와 한국에서의 가톨릭교회의 약진은 1970년대 이래 선출된 3분 교황들의 종교적 리더십과 김수환 추기경 등 신앙의 공공성을 보여준 한국 천주교 지도자들의 리더십에 힘입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친근한 목자상 보여준 요한 바오로 2세

요한 바오로 2(Pope John Paul II) 교황(1978~2005)1978년 요한 바오로 1세가 등위 34일 만에 별세하자, 후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탈리아인이 아닌 교황은 사상 처음 455년 만의 일이다. 그는 세 번째 밀레니엄을 맞이할 기반을 닦았다. <3천년을 맞는 칙서(勅書)>를 통하여 구 ·신교 일치운동에 한층 화해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바오로 6세의 교회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교회 안팎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활약을 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식 때 내한하여 103위 복자(福者)에 대한 시성식(詩聖式)을 집례하였으며,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도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다. 199411월에는 <3천년을 맞는 칙서(勅書)>를 통하여, 교회가 과거에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불관용(不寬容)과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인간기본권의 유린을 묵인한 것은 잘못임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가톨릭 교회의 개방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요한 23세 이후에 조성된 천주교 ·개신교 일치운동에 한층 화해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는 동구 폴란드 출신으로 1989년 동구권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그의 용기있는 행동은 로마 천주교가 공산주의를 용납한다는 개신교 근본주의의 오해를 불식시켜 주었다. 그의 신앙은 보수적이지만 행보는 진보적이었다.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한 그는 한국인들에게 교황에 대한 친근하고 좋은 목자상을 남겨주었다.

 

(2) 높은 품격의 베네딕토 16

베네딕토 16(Benedictus XVI, 2005-2013)2005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별세로 인해 추기경들의 비밀투표로 교황에 선출되면서 자신의 이름을 베네딕토로 정하였는데, 라틴어로 '축복(blessing)'이라는 뜻이다. 그는 독일 출신으로 1966년에 튀빙겐대학교의 교수 시절, 당시 그의 신학 강의 내용이 보수적이고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학생운동에 가담한 학생들과 충돌을 일으킨 적이 있을 정도로 진리와 강경파 교리에 정통하였다.

그는 가톨릭 내의 진보성향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였고, 해방신학이나 종교 다원주의, 사제의 결혼이나 여성 사제 서품, 개신교와 합동 미사 등에 반대하였다. 마찬가지로 낙태동성애콘돔 사용혼전 성관계페미니즘인간복제 등도 반대하였다. 가톨릭이 세속주의와 다른 종교에 위협받지 않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도록 바티칸이 정통 가톨릭 원리에 충실하여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입장으로, ‘가톨릭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주장하는 진보적인 신학자 및 신자들과 갈등을 빚어왔다.

베네딕토 16세는 20132월 고령 및 건강 상의 이유로 들며 자진 사임을 선언했다. 그는 교황자리를 지키지 말고 평생 기도하는 데 열중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교회 역사상 600년만에 처음 스스로 사임한 교황이었다. 종신직인 교황의 생전(生前) 사임은 중세(中世)1294년 첼레스티노 5(Papa Caelestinus V)의 사임 이후 처음이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자진 사임 행동으로 가톨릭교회 안팎에 세계 종교 및 사회지도자들에게 큰 윤리적 모범을 보여주었고, 퇴임 후 명예 교황’(emeritus pope)으로 추대되어 조용히 기도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보수적이었고 정통신앙을 가졌으나 윤리적으로도 높은 품격을 지닌 자로 평가받고 있다.

 

(3) 겸허한 목자상 풍기는 프란치스코 교황

<1> 성장 및 사목 활동

프란치스코 교황(Francisco I)는 그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Jorge Mario Bergoglio)이며, 1936년 남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의 5남매 중 맏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도회사 회계원,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그는 중학교 때는 아버지의 권유로 양말공장에서 청소와 사무보조로 일하고 공업학교 진학해서는 오전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학교에서 식품화학을 공부했다.(이해인, 교황님 트위터, 236-7). 그는 1953년 한 젊은 사제를 만나 영적으로 큰 감동을 받고 고해 성사를 보며 사제 성소(聖召)(사제로의 소명)를 깨달았다. 1958년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공동체의 결정으로 칠레에서 인문학 기초를 닦았다. 1963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후 산미겔 산호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학위를 받았다.

1969년 사제서품을 받고 1973년 종신서원을 하였다. 198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성 게오르겐 신학대에서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1885~1968)에 대한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과르디니는 보수적 가톨릭 신앙을 대변하는 자로서 그의 저서 <권력>에서 권력은 필요하지만 나치의 권력 남용에서 보듯이 권력엔 제어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인물이다. 학위 취득 후 베르골리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코르도바에서 고해 사제와 영성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후 1992년 주교 서품을 받기까지 근() 20년 동안 고국 아르헨티나는 역사의 격랑 가운데서 있었다. 특히 전반 10년은 시민들의 피로 물든 민주주의의 암흑기였다. 이 암울한 시기에 있어서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다. 베르골리오 신부가 어느 자리에 있었는가이다. 베르골리오 신부가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대신 순응협조를 택했던 건 아니냐는 것이다. 그는 혁명투쟁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정권의 폭압에 손놓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저항자들을 위한 드러나지 않은 보호자로 남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가 된 그는 2000년 군사정권 시기 가톨릭교회의 죄를 고백하는 문헌 <내 죄>의 발표를 이끌었다. <내 죄>우리는 자유와 인권을 해친 사람들에게 너무 너그러웠다책임있는 이들의 침묵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교회 차원의 과거사 속죄를 이끌어낸 그는 사목활동의 평생 지침으로 삼았던 가난과 벗하는 교회의 실현에 한층 적극적으로 나선다.(한겨레 신문/ 휴심정,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교황, 2014. 08. 13,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20012월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을 때, 그는 아르헨티나 교인들에게 바티칸에서 열리는 서임식에 참석하는 대신 여행경비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기부할 것을 약속하였다.(이해인, 프란치스코 교황님 트위터, 2014, 236-7).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2001년에는 에이즈 환자들을 방문해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발에 입을 맞췄다. 직업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마약 중독자들의 재활을 도왔고, 암 말기 환자들을 꾸준히 찾아가 위로했다. 추기경으로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위험한 빈민가에 불쑥 나타나 가난한 이들과 차를 함께 마시고,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2> 가난한 자를 위한 교황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2013313일 세계에서 모인 120명의 추기경들에 의하여 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난한 이들은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빈민가의 교황이 탄생했다"며 기뻐했다. 그는 1282년 만에 선출된 비유럽 출신 교황이자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첫 미주 출신, 첫 예수회 출신 교황이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 가난과 평화의 성인인 아시시의 프란시스코를 교황명으로 택한 첫 교황이다. 교황이 방한하여 이용하는 차량이 방탄차가 아니라 소형 기아차 쏘올이라는 것은 소외된 장애인들의 발이 돼 주는 복지차량으로도 활용도가 높기 때문이다.(한겨레 뉴스, 교황이 쏘울타는 이유 있었네, 등록 : 2014.08.06. 20:00 수정 : 2014.08.06. 22:11, 박승헌 기자). 이러한 차량선택은 평소에 빼어 있는 소박하고 검소한 그의 삶 방식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여진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20년 인연을 가진 문한림 주교는 다음같이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견해를 가진 교황의 가난한 영성에 관하여 설명해준다. "제가 알기로 교황님은 부자도 많이 아신다. 그리고 부자를 배척하지 않는다. 다만 가난한 사람들은 '제외된 사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아들이 가난하게 태어나 자라고 살기를 원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게 '하느님 스타일'이다. 그걸 따르는 게 교황님이다. 교황님은 결코 부자들에게 '압력'을 넣은 적이 없다. 다만 물질에 묶이지 않는 것은 강조하셨다. 돈이 많아도 묶이지 않으면 '가난한 영성'이지만, 적게 가져도 묶이면 '가난한 영성'이 아니다."(교황과 20년 인연, 문한림 주교, "교황은 사랑 주러 오시는 분그저 받기만 하세요"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 2014.08.12 03:07 | 수정 : 2014.08.12 04:21 조선일보 2014 08 12 A21).

교황은 가난한 자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가지나 그렇다고 부자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필자는 이를 올바른 태도라고 본다. 오늘날 한국의 일부 개신교 보수주의 교회가 정통주의에 안주하여 교리적 지상주의와 배타와 독선에 안주하여 있으며, 한기총 등 연합단체의 선거는 자리다툼이나 금품선거로 얼룩져 평신도와 사회로부터 걱정이 되고 있는데 반해, 로마 가톨릭은 교황선출권을 지닌 전세계에서 온 120명의 추기경에 의하여 비밀투표로 파격적인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로마 가톨릭이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의 트위터에 있는 기독교인에 대한 정의(定義)는 프란치스코의 신앙이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정신을 보여주는 감동주는 메시지다. ”기독교인이란 그의 마음과 타자의 마음 속에 주님이 풍성하시도록 가난해질 수 있는 자이다“(The Christian is someone who can decrease so that the Lord may increase, in his heart and in the heart of others.)(Pope Francis인증된 계정, @Pontifex, Welcome to the official Twitter p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Vatican City , news.va 20122월에 가입함). 이러한 그의 짧은 메시지는 그가 직업적이고 권위적인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닮은 진실하고 소박한 신앙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 중도좌파 성향의 일간 <라 레푸블리카>의 창립자인 무신론자 스칼파리는 지난해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교황 프란치스코에게 무신론자가 교황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하는가?” “무신론자도 용서받을 수 있는가?” 스칼파리는 신이란 인간의 마음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창조한 매력적인 발명품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답장을 보내왔다. “신앙이란 비타협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타자를 존중하는 공존의 상황 속에서 성장한다.” “하느님은 인간 사유의 결과가 아니다. 대문자로 시작되는 궁극적인 실재다라고 답하고, 무신론자도 용서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따른다.” “진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다. 따라서 진리는 관계이다.” 라고 답했다. 이러한 대답들은 매우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겨레 신문, 무신론자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화, 휴심정, 2014. 07. 14,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교황 프란치스코·에우제니오 스칼파리,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 최수철·윤병언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지난 623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구내 문화관 꼬스트홀에서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사무총장 마리오 토소(Mario Toso) 주교가 강연을 끝낸 후에 운동권에 속한 자들이 던진 질문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이 많다. 한국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은 쌍용차 해고자, 밀양 송전탑과 제주 해군기지 주민 등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교황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방한 때 어떤 말씀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에 대해 토소 주교는 교황께서는 특정 국가와 특정 사안에 대해 가벼이 발언하지 않으며 특히 그것이 그 사회공동체에 갈등을 유발할 소지가 있을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는 원론적 대답을 하였다.(조선일보, 제발 보채지 말자, 김한수 기자, 입력 : 2014.08.12 05:44 조선일보, 2014 08 12 A31.). 최근 발간된 교황의 강론·연설문 번역집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를 찬찬히 읽어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행동가'가 아니라 '영성가'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NGO일 뿐"이란 스스로의 말처럼 프란치스코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온유함에 바탕을 두고 세상살이의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3> 관행을 깨는 겸허한 행보

프란치스코 교황은 스스로 실천해온 가난, 겸손, 섬김을 새 시대정신으로 제시했다.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선진국과 개도국이 겸손하게 나누고 섬기며 함께 살아가야 할 3번째 밀레니엄의 첫 삽을 뜬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관행을 깨고, 교황 관저가 아닌 성 베드로 대성전 근처, 종전의 순례자 숙소 자리에 지어진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머물고 있다. 평소 소탈하고 겸손하게 평온한 일상을 보여주고 있는 교황은 현지 수녀들에게도 깊은 신뢰를 받고 있다. 로마 교황청에 파견 나가있는 요세피나 수녀는 지난 201484월 성녀 마르타의 집을 찾은 교황과 면담했다. 교황은 요세피나 수녀가 자신이 한국에서 왔다고 밝히자 "아 순교자의 땅!"이라는 반응을 그 자리에서 보이며 반가워했다는 것. ‘한국 가톨릭 역사는 순교자의 역사라고 할 만큼 초기 가톨릭이 들어올 때 많은 박해를 받았음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교황이 이번에 유일하게 한국만 방문하는 것도 한국이 순교자의 나라인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프란치스코 교황, “한국은 순교자의 땅디지틀조선일보 이찬란 웹PD 입력 : 2014.08.07 12:09 | 수정 : 2014.08.07 13:51 )

프란치스코의 행보는 연일 파격이다. 교황이 취임 후 보여준 파격이란 정치인이 보이는 권력지향적 행보가 아닌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고 섬기는 목자의 행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 정부까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마피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3살 난 아기를 살해한 마피아 집단을 파문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마피아와 교회의 결탁이 오랜 사회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도주의적 선행만으로 그치지 않고 세상의 구조적 악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지성과 양심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2013413일에는 각 대륙에서 1명씩 뽑은 추기경들로 자문단을 구성해 교황청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프란치스코는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체제야말로 사회 병폐의 뿌리이며,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규정했다. 이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진보를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돼야 한다고 선포했다. “부의 재분배, 가난한 이들의 사회통합 등과 같은 가치들이 위협받을 때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드높여야 한다.”(한겨레신문, 프란치스코 교황에 왜 열광하나? 조현 기자, 2014. 08. 11)

정의채 신부는 다음같이 새 교황을 평가한다. “비대해진 교권을 비판하며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수도원 운동의 대표 인물이 프란치스코 성인이다. 예수회는 선구적 대학 교육과 세계 선교 시대를 열었다. 새 교황은 실천이 전면에 부각되는 시대정신을 드러낸다. 세상엔 한 끼니, 주사 한 대가 없어 굶어 죽고 아파 죽는 사람이 여전하다. 부자도 선진국도 겸손해져야 나눌 때 위세 부리지 않는다. 그것이 시대적 의미의 속죄이고 진정한 섬김이다. 교황은 말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때임을 이름으로도 웅변하는 거다. 그를 통해 이 시대정신은 계속 확산할 것이다.”(정의채 몬시뇰이 본 새 교황, "몸으로 먼저 섬기는 교황이게 새 밀레니엄이 갈 길" 이태훈 기자, 입력 : 2013.04.15. 03:04, 조선일보, 2013. 4.15. A21).

 

<4> 프란치스코 효과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 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올해 320일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지가 선정한 세계 위대한 지도자(Greatest World Leader) 50인 가운데 1위에 선정됐다. 포춘지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뽑힌 교황에 대해 "즉위 후 1년이 지난 지금 교회 쇄신의 새 방향을 제시했고 가톨릭교회 밖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다""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많지만 자선을 실천하는 신자가 늘어나는 등 '프란치스코 효과'가 나타났다"고 평했다.(미 경제전문지 포춘선정, 프란치스코 교황, 세계 지도자 1미 경제전문지 포춘선정, “교회 쇄신 새 방향 제시평가, 2014. 3.).

포춘지는 50인의 선정 기준으로 '리더십이 부족한 시대에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영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을 들었다. 단순히 거대한 조직을 책임지거나 정치적 지도자라는 이유만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교황에 이어 2위에는 '가장 성공한 국가 지도자'로 평가 받은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올랐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50위 안에 들지 못했고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5위로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미 경제전문지 포춘선정, 프란치스코 교황, 세계 지도자 1미 경제전문지 포춘선정, “교회 쇄신 새 방향 제시평가, 2014. 3. ).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오늘날의 교황들은 신앙적 품격이 훌륭하며, 높은 도덕성을 가졌으므로 비단 가톨릭교인들만이 아니라 개신교인들과 일반 무종교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황은 6백년 이전 중세교회와 종교개혁 시기의 교황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로마 교황이 권좌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데는 2천년이 걸렸다. 프란치스코는 2천년 만에 권좌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온 교황이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의 행동이다. 프란치스코도 전임 교황들 못지않은 노인이지만 중세교황처럼 권좌(權座)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종교적 속인(俗人)이 아니라 겸허하게 권좌에서 내려와 서민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사랑의 계명을 오늘날 새로운 행복 10계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자칭 중세 교황권력을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수행한 개혁자들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오늘날 일부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증경총회장들 가운데는 인위적으로 만든 종교적인 권력과 위선이라는 베일 속에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 없다.  

프란치스코는 최근 조국 아르헨티나의 주간지 <비바>와 한 인터뷰에서 밝힌 행복에 이르는 비밀 지침 10가지를 소개하였다. 내 방식의 삶을 살되 타인도 자기의 삶을 살게 두자. 마음을 타인에게 열자. 조용히 전진하자. 삶의 여유를 찾자(식사할 때 TV 끄기 등). 일요일을 가족과 함께 쉬자. 젊은 세대들에게 가치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줄 혁신적인 방법을 찾자. 자연을 존중하고 돌보자. 부정적 태도를 버리자. 개종시키려 하지 말자. 평화를 위해 행동하자.(한겨례 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시한 행복 10계명등록 : 2014.08.01. 16:08, 수정 :2014.08.01. 16:10; 프란치스코 교황 <행복 10계명>, blog.naver.com/hasodong/220079658601). 10가지 교황의 행복 메시지는 비단 천주교인들뿐 아니라 개신교인들과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자 모든 자들에게는 수용될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를 통한 복음의 해석이다. 이번 교황 방한이 우리 개신교 지도자들에게는 자신이 이루었다는 대형교회적인 명예의 권좌와 욕망에서 내려와 겸허한 목자의 태도로서 소외된 자들과 낮은 처지의 신자들에게 다가가는 자성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10) 방한 교황을 맞는 자세: 교리의 다름을 인정하는 박애의 신앙

필자의 신앙에 의하면 천국에는 정교회인과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의 구분이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이다. 혹시나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이 이번에 명망이 높은 교황이 와서 양들을 현혹하여 빼앗아가지나 않을가 생각이 든다면 이는 참 목자라기보다는 종교기업가들의 생각으로 알고 쫓아 버려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은 신자들이 자유스럽게 자기의 교회를 선택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고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신자들을 많이 모으는 데 있지 않고 저들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 우리는 중국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하늘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자기 종교 내지 자기 교파 절대주의는 비성경적이다. 스위스의 복음주의 신학자 에밀 브루너(Emil Brunner)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는 로마국교가 된 이후에 초기의 성경적 순수성을 상실하고 점차 제도화되고 절대화 되어 갔다. 그리하여 중세시대에는 교황의 권세가 절대적이 되면서 부패하기에 이르렀다. 교황 우르바노 2(Urbanus II)는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이후 교황들도 교황 무오설, 교황권 절대주의를 주장하면서 타락일변도로 나아갔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교황권 절대주의가 도전받고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종교개혁은 성경만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천주교 교리나 장로교 교리가 절대적이 될 수 없다. 장로교 교리를 기준으로 하여 가톨릭, 정교회, 심지어 개신교 다른 종파의 교리를 비교하면 다른 것들이 있지만 기독교 안에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콘스탄티노블 신경을 고백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정교회나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모두 부분 진리의 교파로서 함께 보완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사도적 교회에 속한다는 것이다.

개신교 교파 가운데 자기 교단만이 절대적이라는 교파는 오만한 자들이며 이들은 아직도 교파절대주의에 노예화되어 있는 것이다. 루터가 주장한 이신칭의의 교리는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믿음과 행위를 주장하는 가톨릭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 것이지, 좋은 교리를 갖는다고 하여 그것이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 약한 자에 대하여 용납하고 포용하는 사랑과 화목이 중요하다. 우리는 오늘날 교리적 다름을 인정해주는 종교적 포용성과 관용성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겸손하여 서로 나누고 섬기고 존경할 때 아름답고 화목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할 때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이번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우리 개신교에서도 높은 인품과 영성을 지닌 지도자들께서 더욱더 이번 기회를 자기 정비의 선한 계기로 삼아 교권 행사나 세상적 명예 추구보다도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의 성품을 개발하기를 기원해 본다.


11) 종교 절대주의 시대의 종언: 종교 상생과 관용성 요청

교회사가 보여준 것은 자파종교 절대주의란 신화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중세 교황절대주의는 십자군 전쟁 실패, 면죄부 판매로 인한 개신교의 등장, 교황의 도덕적 부패로 인한 신뢰 상실 등을 통하여 점차 무너졌다. 중세의 교황주의에 비하면 오늘날 교황권은 많이 축소된 것이 사실이다. 중세에 천년동안 서방 세계(유럽)를 지배했던 교황주의는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축소되면서 오늘날 명목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황주의는 중세에는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248~258)의 공식을 오늘날 신학적으로 수정하기에 이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는 종교다원주의라는 신학적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인하여 타종교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다. 중세 천년을 거쳐 그 후 960 여년 내려온 가톨릭 절대주의는 교회 밖의 구원교리를 선언하며 가톨릭 보편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개신교에서도 루터 정통주의와 칼빈 정통주의는 18세기에 이르러서 종교개혁 정신을 고갈하면서 제도적으로 교리적으로 자파(自派)를 절대화하기에 이르런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인간 운동이 만든 기구나 제도의 한계였다. 오늘날 개신교 근본주의도 자기 교단의 교리만이 완전하다면서 천주교나 다른 교파들을 이단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의 행태에서 보는 바 같이 종교 절대주의의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종교가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 절대주의가 남아 있는 것은 개신교 내에서 교황방한에 배척운동을 벌이는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러한 근본주의 사고는 보수주의 교단의 일부 극단적 사고를 하는 목회자들 사이에 나타나 있다. 이들이 지난번 WCC 부산 총회를 적그리스도의 모임이라고 했고, 이번 방문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사탄내지 적 그리스도라고 배척하고 있다. 이것은 아직도 일부 목회자들이 이러한 자파종교 절대주의에 갇혀 있다는 너무나 안타까운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종교는 정치와 분리되어야 하고, 종교는 더 이상 절대화되어서는 안된다. 종교가 정치와 연관될 때 이슬람 근본주의처럼 종교를 빙자한 테러가 야기된다. 진정한 종교는 자기 신앙이 귀한 것처럼 다른 종교인의 신앙도 귀한 것으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다. 타종교의 신앙을 귀한 것으로 본다면 전도나 선교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랑의 설득과 감화를 통해 가능하다. 종교 절대주의가 무너지고 종교 상대주의가 되어 버린 시대에 사랑의 설득과 감화만이 새로운 선교와 전도의 방법으로 요청된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신앙에 의하면 종교다원주의는 수용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자유주의적 사상으로 공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이다. 종교인들이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며 서로에 대하여 문을 열고 상대방을 경청할 때 진리와 성령의 능력은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전도와 선교는 강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화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자유스러운 분위기 가운데서 생겨나는 영의 대결에서 이루어진다. 신앙은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스러운 양심의 결단 속에서 감동과 영적 체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맺음말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사람들이 모임이기 때문에 절대적이 될 수 없다. 타종교의 신앙을 존중해 주면서도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온다는 사랑의 간증과 겸허의 설득에 의해서만 오늘날 우리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교리의 신앙은 자기 교파와 타교파를 분리하게 하나, 박애의 신앙은 타종교를 인정하고 타교파와 공존하도록 한다. 타종교와 화목하게 지내도록 한다. 교리는 분리시키나 박애의 신앙은 관용과 화목을 이룬다. 사랑이 없는 교리적 신앙은 종파성에 빠지나 박애의 신앙은 종파성의 울타리를 넘어 공공(公共), 사회적 신뢰로 나아가게 한다.

야고보는 비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4:11).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가르친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13:1-2). 교리는 신앙의 울타리로서 필요하다. 그러나 교리는 항상 사랑과 관용과 함께 가야 한다. 교리는 신앙의 줄기라면, 박애는 신앙의 열매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종교적 관용은 이 사랑에서 나온다. 

종교적 관용이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와 그의 온유한 성품을 닮아가는 성화에서 나온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먼 나라 로마 바티칸에서 우리나라에 손님으로 오신 분이다. 이분을 세계의 영적 지도자들 가운데 한 분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가지고 맞이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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