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생모 공동체에서 열린 새로운 교회를 위한 포럼

지난 819일 용문의 농생모 공동체에서 우리 시대에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렸다. 발제는 박득훈 목사(새맘교회 목회, 교회 개혁실천연대, 복음주의 연합등)와 최철호 목사(마을 공동체, 대안학교 교장) 그리고 김준제 목사(서울지역 SFC 대표간사)가 맡았다. 최갑주 간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 박득훈 목가사 발제를 하고 있다.

발제 1. 도대체 교황의 방문이 개신교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박득훈 목사 

교황의 방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여기에는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있다. 약 백만명이 빠져나갈 것이라는 추산이 오간다.

오늘 우리는 돈 문제를 다루려 한다. 이것은 성경의 관심사의 다양한 영역중에 하나의 영역이다. 가장 중요한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돈 문제를 잘 다루느냐에 따라서 기독교의 본질이 연결되고 결정된다.

한국사회와 교회는 경제 대통령을 좋아했다. 티브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가치에 밀렸다.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 진실이 밀리는 현실이다.

인류역사를 보면, 계몽기에 인간 사고 즉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19세기가 되어서, 실천의 필요를 각성한다. 나는 실천한다 고로 존재한다. 마르크스의 태도이다. 그러나 현대는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현대인의 사고는 쇼핑을 통해서 명품등으로 자신을 구별한다. 상류층, 성공한 사람으로 구별한다. 소비를 통해서 어떤 존재인가의 자의식이 생긴다. 상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를 산다. 풍요의 문제에 해답을 가지지 못하면 중요한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다.

 

세습, 재정비리, 성문제

교황이 한 발언 중에 한국교회가 성장해 왔는데, 부자교회가 되는 유혹이 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카톨릭 교회가 개신교 보다 휼륭한 부분이 있다. 중요한 부분에서.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그러하다.

한국교회는 성공의 역설에 걸려있다. 원래는 서민과 낮은 자들의 교회였다. 바닥에 서있었던 신앙의 역사가 있다. 그런데 성공함으로 부자가 됨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리고 부에 매료 당했다. 사람들의 주목, , 권력에 빠져있다. 교회가 교회됨을 잃어버렸다. 부자들을 위한 부자 교회가 되었다. 여러모로 가난한 자들이 불편하다. 가난한 자들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 부자들은 발언 기회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려면 부에 의해서 복음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반성하면서 돌이켜야 한다. 교회의 다양한 그림들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교회의 현실이다. 원래의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돈과의 관계에 걸려있다.

 

문창극 장로의 경우

그의 논지는 일본 강점기가 비록 고통스러웠지만 그러나 다 통틀어서 감사할 일이다. 이유는 양반의 착취로 게을러졌는데, 복음으로 미국처럼 기회의 나라로 나아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귀가 도덕을 택한 것이다. 선악의 지혜를 알도록 도덕적 존재가 되도록 유혹했다. 그래서 달콤하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거기서 모든 선악의 분별이 따른다. 사악한 짓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가 선과 악을 나누는 지혜를 가지라고 유혹한다. 그로 인해서 중요한 가치를 무너뜨린다.

근면하는 것도 가치가 있지만 그러나 최고의 가치는 정의와 평화이다. 32:17, 평화는 정의의 열매다.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언약의 성취를 하려면 하나님의 도를 잘 행하는 것이다. 도는 길인데, 그 길의 이름은 정의와 공평이다. 미쉬파트와 체데카이다.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이다. 18:19.

정의와 공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평화가 이루어진다. 약하고 고통당하고 슬픈 자들, 나그네, 과부들을 돌보아주는 것이다. 이것은 공감이다. 이런 공감은 이웃사랑에서 나온다. 어려운 사람을 보고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돈 몇푼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왜 그런지 근원적으로 문제를 찾게 된다. 교양으로 포장된 야만이 있다. 공감능력. 구조를 보게 된다.

교황; 세월호 리본을 달고 있는 것; 정치적 이용당한다. 김영호씨에게 가까이 가려고 할때도 중립적이지 못하다는 질문에 대해서, 교황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중립적일수 없다고 답변했다.

세월호 법은 정치적인 행위이다. 편파적일수 밖에 없다. 정의와 공의의 핵심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정말 공감하는 것이다. 정치 문제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한국교회는 자본주의에 너무 물들어버렸다. 근면이 가치가 사회 정의 가치보다 높아졌다. 일, 공산당, 군부 독재의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 근면과 부자되는 것이 중요하다. 문창극 사태에 개신교 지도자들이 다 지지했다. 한국교회의 진실이다.

자본주의의 가치는 근면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대부 하이에크는 말하기를 자본주의는 근면보다 운으로 결정된다. 자기 노력보다는 운이다. 근면을 강조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다. 사기이다. 자본주의가 강조하는 근면에 한국교회가 속고 있다. 왜 속고 있는가? 이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잘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이것을 해소하지 않는한 한국교회가 돈과의 관계를 해결하지 않는한 속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복음과 자본과 자본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된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 발제하는 최철호 목사

발제 2,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최철호 목사

현재 교회가 많이 있으니까 서로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특정한 사람이 먹고 사는 것, 소속감을 해소하는 교회가 되는 유혹이 있다. 어떤 교회인가에 대해서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교회를 통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가 필요하다.

성경은 신앙공동체를 하나님이 예수의 몸으로 성육하신 것처럼, 복음을 육화하는 것이다. 성령사건으로. 복음을 삶으로 증언하는 이유이다.

예수의 하나님 운동을 계승하고 증언하는 소명을 가진 것이 교회이다. 성령사건으로 생성된 새로운 모습으로 교회의 근거가 있다.

우리가 강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현재화 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한 이해, 확신이 있다고 해도, 그 신념을 구현되는 장은 강력한 힘이 작동하는 현실이다. 신념을 구현한다는 것은 세상에 작동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힘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길게 잘못 주목하고 있다.

예수님보다 학벌, 부동산, 자본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스마트폰을 사는 것에서 자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런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이 없으면 신념은 있지만 자본이 계속 생산되고 있다. 학벌 등이 만들어진다. 현실의 작동 원리를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공동체를 방문해서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수 있었는가? 답은 누구나 생각해 볼수 있다. 단지 구현이 다른 것이다. 구현을 위한 지혜를 성경에서 철저하게 받아들어야 한다. 신념만 있으면 마음은 뜨겁다. 그러나 이것은 괴리만 만든다. 괴리감으로 패배의식과 무기력이 커진다. 새로운 교회의 전망을 가질 때 주의할 부분이 있다.

교회 공동체의 고유한 존재방식과 운영원리를 국가 방식과 동일하게 그리는 것이다. 신앙공동체가 대화를 하는데 대의적 민주주의, 회계 투명성, 정관 중심을 넘어서 나름의 고유성이 있는가? 국가교회 전통에서 나타나는 측면들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새만금 사태 후에 활동가와 지역이 싸운다. 새만금 사건은 활동가들에게 큰 사건이다. 환경운동가들에게 큰사건이 되었다. 몸과 지역을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전체적으로 생각하면서 자기 몸과는 괴리된 운동이었다. 그래서 지역으로 내려간다. 지역 삶의 현장에서 생태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부안에서 부안 군청운동을 한다. 이것은 국가주의에 부속한다. 마을 공동체 운동도 보면; 국가주의에 포섭된다. 열심히 하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다. 정치 권력에 일임되는 운동을 한다.

국가 단위든, 군청 단위든, 자기가 요구하는 것이 자기 삶이 되어야 한다. 자기 삶이 되어야 한다. 희년운동을 입법을 통해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만에 빠지게 된다. 희년을 자기 몸으로 관계속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그래야 국가 운동이 진정성이 있게 된다.

보수는 말과 현실의 괴리가 적다. 진보는 괴리가 더 크기에 기만을 만든다. 기만을 만드는 것은 가치를 자기 몸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삶으로 구현해야 한다. 선언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신앙공동체는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가치를 가진 것과 삶이 그것을 담고 있는 것과 다르다. 자기 삶을 지켜주는 관계의 망이 없으면 기만에 빠지게 된다. 일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성경은 공동체로 하여금 과거의 자리를 떠나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백성을 만드시고 그것을 통해서 일을 만드신다. 출애굽이다. 애굽에서 떠난다.

우리의 생각은 몸으로 마을로 이루어진다생각이 몸으로 나타날때, 그래서 구현되려고 하는 장은 마을이 필요하다. 사회화 되는 장이 필요하다.

출애굽하여 떠나라. 40년 광야의 과정; 훈련과정, 이행하는 과정이 훈련되는 과정이다. 떠나면 자동적으로 다른 삶을 살수 있을 것이고 생각하면 안된다. 40년이 필요하다. 이 여정에 일관되게 작동하고 있는 사탄의 전략은 금송아지 사건이다.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은 옛날에 하던대로 한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야훼로 섬기자고 한다. 위기만 오면 애굽이 좋았다고 반복한다. 되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일으킨다. 뭐가 편한가? 무엇에 근거해서 선택하는가? 옛날의 방식대로 선택된다. 습관적 관성, 체념적 관성이 무섭다. 떠난지만 위기에서 떠나게 한 가치보다 떠난 가치를 추구한다.

걱정과 근심이 돌아가게 만든다. 출애굽하는 백성이 애굽이 나았다. 40년과정이 만들었다. 롯의 아내도.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지 말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구현을 하지 않으면 옛날로 되돌아간다. 위기의 순간에 옛날로. 대안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되돌아간다.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이라고 했다. 시내산 언약; 거룩하라.

거룩은 구별되어야한다. 신앙공동체는 자본이 역할하지 않도록 구별해라말씀 앞에 서면 애통해 진다. 정직해진다. 부자청년과의 대화에서 결론은 인간이 할수 없다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할수 있지 않고 성령을 따라서 할수 있다.

명확한 구별이 되고 거룩한 백성으로 제자도로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보내신다. 약속한 성령을 받으라.

구별은 무엇인가? 폐쇄적 공동체인가?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으로 가라고 한다. 구별되지 않는 삶의 양식으로 세상에 나아가면 반드시 진다.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면서 세상도 교회에 들어왔다. 세상의 작동하는 방식이 교회안에 들어왔다. 교회를 어디에서 손을 댈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 몸된 지체로 살아라.

예수는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주다. 지금은 학벌이 주이다일상이 뭐가 지배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기만을 보아야 한다삶의 대안을 만들지 못하면 신념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우상을 재생산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청년들을 평생 훈련한 분이 아픔을 토로한다. 훈련받은 저들이 왜 안바뀌는 가? 그것은 교회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다.

세상 정사와 권세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세상에서 바꿔가는 과정을 쉽게 생각했다. 성령으로 새로운 관계가 필요하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 은사의 문제. 그러면 시간의 문제이다. 은사의 공유와 나눔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증거이다.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에 익숙해야 한다. 성령사건이 뚜렷이 보여주는 것은 물질관계이다. 제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핍절하지 않았다. 이런 세상이 가능하다고 세상에 애기해야 한다.

선포하는 말씀의 설득력은 체득되는 만큼 효력이 있다. 마을 공동체 운동이 어떤 힘이 있어야 한계를 극복하는가?

자기 삶의 일상의 변화로 나아가는가? 마을단위로 구현하는가? 신앙의 힘이다. 교회의 소망임과 동시에 세상의 소망이다. 보혜사는 돕는 배필의 구현이다. 지체를 통해서 서로 돕는 관계가 회복된다. 재물, 권력, 가족의 문제이다. 가족의 문제는 세속화의 가장 첨예한 방식이다.

막스 엥겔스가 쓴 주제이다. 삶의 진정성은 세가지의 틀로 나타난다. 재물, 권력, 가족의 문제로 나타난다. 이주제로 돌아간다. 마을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몸의 실질적인 관계성이다. 도시 문명은 자족기능이 없기에 농촌과 상생해야 한다. 구별된 삶은 몸된 공동체의 소명이다.

 

▲ 발제하는 김준제 목사

불안과 외로운 청년들을 만져주는 교회가 되길/ 김준제 간사

교회가 개인주의의 대안적 삶이 되어야 한다. 현재 학생들이 등록금도 개인이 해결하면서 대략 이천만원의 부채를 진다. 그래서 성공해야 한다는 불안과 외로움이 자리잡고 있다. 복음의 소식에 불안과 외로움을 해체하는 질서가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불안과 외로움이 해결되는 나라가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교회여야 한다. 신앙을 매개로 형성된 관계가 있어야 한다.

교회 추천을 해달라는 말을 듣는다. 답변을 해 줄수가 없다. 추천을 원하는 청년의 정황도 모르고, 딱히 추천할 수 있는 교회가 없는 실정이다.

효과적인 훈련이나 복음이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끝까지 책임을 질수 있는가? 조직체로서의 교회이기 보다는 공동체의 교회가 필요하다. 신앙을 매개로 삶을 공유하는 관계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몸으로말씀을 품은 개인과 공동체 가운데 잘 드러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말씀을 담지해야 한다. 경험해야 한다예배, 직분자, 성도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양식화되지 못했다. 볼프가 기능장애를 말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을 구현하는 삶에 작동하지 못하기에 기능장애로 나타난다. 그래서 다른 우상을 만들어낸다. 게을러지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시킨다. 말씀을 강조하지만 교회안에서 행해지는 가치가 반성경적인 경우가 많다. 오히려 교회에서 세상을 배운다.

신자유주의와 성공을 배운다. 성공의 신화를 뚫기 위해서 베데스타 못가를 떠나지 못한다. 성숙해져야 하는데 삶을 성경대로 살지 못한다. 교회안에서 어른들처럼 살아야 한다.

 

▲ 포럼이 진행되고 있다.

구체적인 제안

학생 단체 간사의 입장에서 사역자보다는 공동체 전체가 주도하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의 사건. 교우들간의 관계가 형성되도록 노력. 질서와 가치의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 신앙과 생활을 지배하는 가치를 확립해야 한다. 교회당 중심이 아니라 부름에 따라서 산다.

외로움과 불안을 해소할 뿐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신앙을 매개로 한 관계와 환승구역이 되어야 한다. 관계를 돈독이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교회로서 성령의 관계가 형성되면 열매가 맺힌다. 믿고 맡길 수 있는 교회가 되며 말씀을 매개로 관계로 육신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교회가 목표를 두고 달려가기보다는 사랑하는 관계로 존재할 때, 열매가 맺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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