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적으로 메가쳐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2일 열린 한국조직신학회(회장 허호익 박사) 56차 신진학자 학술발표회에서의 논문 발표에서 “Megachurch 현상에 대한 교회론적 고찰에 대해 신광은 박사(대전 침례신학대학교)가 발표한 논문을 요약해 본다. 

Megachurch 현상에 대한 교회론적 고찰 /신광은 박사

Megachurch 현상은 20세기 중반 이후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던 특이한 종교사회적 현상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출현했다는 점과 거대해서 우리의 시각을 사로잡았다는 점,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이런 모든 것을 Megachurch 현상이라고 한다.

메가쳐치와 메가쳐치 현상: (1)메가쳐치란? 큰 교회라는 뜻인 메가쳐치는 통상 주일예배에 2천 명 이상 모이는 교회를 가리킨다. 메가쳐치는 대략 1970-1980년대쯤 미국에서 생겨난 신조어로 보인다. 이전에는 빅쳐치, 라지 쳐치 등의 용어가 있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현상이 출현했기에 메가쳐치라는 신조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초기 300년까지는 가정교회 형태로 모였다. 교인 수는 15-20명 수준이었다. 4세기 이후에는 종교적 건물에 2-300명의 회중이 모이는 성당-회당 시스템의 교회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20세기 중만 이후 출석 신자가 2천명이 넘어가는 교회가 여기저기 생겨나게 된다. 메가쳐치는 큰교회 대형교회라는 용어로 대체되기 어려워서 생겨난 용어가 아닌가 한다. (2)메가쳐치 현상이란? 메가쳐치는 전체 교회의 약 1.7%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교회가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메가쳐치 현상이란 메가쳐치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포괄적인 종교사회적 역동현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메가쳐치는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메가쳐치 현상은 1970년 대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개신교적 현상이며 교단이 중심이 되는 현상이 아니라 개 교회적인 현상이다. 메가쳐치 현상으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브랜드 가치로 치환되고 이것이 신자들의 수평이동의 종착지가 되도록 만든다. 또한 메가쳐치의 현상은 모든 교회들을 강력한 목적지향적 교회가 되도록 만드는데, 이로 인하여 거의 모든 교회가 메가쳐치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런 힘들이 결국은 사회와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런 모든 현상을 메가쳐치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메가쳐치 현상의 구조 이해: 메가쳐치 현상은 말 그대로 현상(phenomenon)이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를 이해하기 위해 팝콘의 유비를 제안한다. 냄비에 옥수수 알을 넣고 계속 열을 가하면 임계점을 넘어서자 일제히 폭발하여 팝콘이 된다. 메가쳐치 현상도 그와 비슷한 현상으로 도래했다. (1)내적 팽창력의 축척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꾸준히 팽창해 왔다. 아마 그것은 기독교가 선교적 종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18-19세기의 두 번에 걸친 대부흥운동이 있다. 전도와 선교는 교회의 지상명령으로 받았고 개 교회에서 점차 지역으로 국가로 나아가 세계를 복음화 하려는 목적지향을 가지게 된다. (2)외적 억제력의 약화 내적으로 팽창을 하는 동안 외적인 억제력이 해체되었다. 세계대전 이후 베이비붐 등, 인구학적인 빗장이 열렸고 도시집중의 사회현상은 인구밀도를 높임으로써 개교회의 성장을 막는 인구학적 장벽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이전에는 큰 건물을 짓는 다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지만 기술의 도움으로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의 한계를 확장할 수 있었다. 교통수단의 발전 또한 한 몫을 거들었다. 음향시설이나 영상 등은 이를 가능하도록 하였다. 인터넷도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했다.

메가쳐치 현상의 신학적 원인(교회론적 개인주의): (1) 가톨릭교회 및 아나뱁티스트 교회와 메가쳐치 현상 가톨릭교회들에도 2천 명이 넘게 모이는 교회들이 있다. 그들 속에서도 경계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개신교의 메가쳐치 현상에 필적할 만한 현상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것은 개별 본당이 주임 신부에 의해 사사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당의 성장이 주임 신부에게 가져다주는 유익은 없다. 교구제는 원천적으로 본당들 간의 성장 경쟁을 차단하고 있다. 이러한 가톨릭의 상황은 가톨릭 교회론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통일성과 공교회성을 굳게 수호하고자 한다. 개 교회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전체 교회들이 하나의 가톨릭교회 안에 연합하고 교황을 첨단으로 하는 일사분란한 교권체제를 이루고 있다. 교회론이 메가쳐치 현상을 저지하고 있는 것이다.

재침례교회들에서도 메가쳐치 현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미쉬의 경우 광대한 정착지에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 이들은 정착지를 교구로 나누어 각 교구가 하나의 지역교회의 개념이 된다. 교회건물이 따로 없고 산자들의 집을 돌아가며 격주로 모인다. 150명 선이 그 적정선이다. (2)개신교회와 메가쳐치 현상 개신교회는 가톨릭이나 아나뱁티스트 교회에 비하여 메가쳐치 현상이 왕성하다. 이는 개신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교회라는 인식을 별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웃 교회는 타자로 여기고 경쟁자 혹은 적으로 간주한다. 홉즈(Hobbes)모든 교회에 대한 모든 교회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햐ㅤㅐㅆ다. 교회성장은 교회분열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해 준다. 교회의 분열은 교파주의가 한 원인이다. 그 교파주의(denominationalism)가 다시 분열됨으로 개 교회중심주의(church individualism)로 발전하여 이런 현상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은 리챠드 니버(Richard Niebuhr)가 말한 대로 창시자의 가르침을 무시함으로써얻은 외견상의 성공이며, 하여 그것은 윤리적 패배인 것이다. 아나뱁티스트가 가진 하나의 공동체라는 인식이 무너져 버린 개신교는 자본주의 논리에 함몰되어 서로가 물고 뜯으며 상대를 잡아먹어 몸집을 늘이려 하는 괴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안적 교회론을 찾아서

온전한 대안의 기본 방향: 목사들이 순전한 동기로 목회를 해야 한다. 메가쳐치들이 자발적으로 성장을 억제하거나 분할해야 한다. 작은교회 운동, 교회의 정관 작성, 세습금지 법안 통과, 담임목사의 권한 제한, 투명한 재정운영 등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정말로 필요한 것은 메가쳐치 현상인바, 이에 대한 방향설정이 시급하다. 메가쳐치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이 들어났기에 메가쳐치를 대체해서 추구할만한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온전한 교회상을 제시하는 것이 그 대안이 될 것이다. 그 대안적 교회론은 반 개인주의적 방향이 되어야 하고 관계적 교회론을 모색함으로써 그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관계론적 교회론: 본회퍼는 인간은 본성상 관계적이며 너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공동체가 개인보다 앞선다. 인간의 자유와 권리는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적 인격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왜곡되고 타락했다. 개인주의는 그 타락의 산물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중심에서 하나님을 내몰고 자아를 세운다.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여 자신의 영역을 확대시킴으로써 타인과 지배적인 관계를 맺으려 한다. 폴력적 관계이다. 인격적 관계는 깨어지고 공동체는 왜곡되고 개인주의가 들어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모든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다.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영광을 버리시고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줌으로 죄인과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제자들은 인격적 친교를 해야하고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관계적 삼위일체론: 개교회의 자유에 대한 극단적인 강조가 교회론적 개인주의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교회론적 개인주의를 치유하기 위해 자유의 억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억제는 강제될 수 없다. 만약 강제로 자유를 억제한다면 그것은 권위주의적 지배체제로 회귀할 뿐이다. 개교회의 자유의 존중과 그 자유의 억제는 어떤 해법이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변증법적 삼위일체론을 통해 묘사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삼위일체론은 하나와 다수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위르겐 몰트만과 레오나르드 보프는 삼위의 하나님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적 얀합을 통해 일체를 이루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관계적 혹은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다.

 

대안적 교회론의 제안:

1. 공교회성의 회복: (1)공교회성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어왔다. 그것은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으로 표지하였다. 종교개혁자들도 일부를 제외하고 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공교회성이 주목받지 못했고 강조되지 않았다. 공교회성의 일차적 의미는 지리적으로 세대적으로 모든 교회가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2)하나와 다수의 균형 하지만 오늘날의 메가쳐치 현상 속에서는 공교회가 아니라 개교회로 나눠져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은 어떤가? 가시적으로 공교회성을 견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교황이라는 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 독재체제 가운데 가두어왔다. 올바른 공교회성은 개신교회의 다수성에 대한 강조와 가톨릭교회의 일체성에 대한 강조 사이에서 균형을 지켜야 한다. 온전한 공교회성은 개교회의 독립과 자유를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자체로 완결체가 아님도 알아야 한다. 지역교회(개교회)는 공교회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2. 공동체성의 회복: (1)개신교 칭의론과 개신자주의 개신교회는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만 보고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라는 점에 대해서 많은 강조를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개신교의 칭의론에 의해 조장된 것일 수 있다. 칭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직적 관계가 강조되면 신자와 신자 사이의 수평적 관계에 대한 교회론적 규정은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약간은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칭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화해만이 아니라 신자와 신자 사이의 수평적 화해를 동반하는 총체적 화해 사건이다. 그렇게 공동체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2)하나와 다수의 균형 오늘날 개신자에게 주어진 자유는 침해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신자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가톨릭이나 아나뱁티스트교회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개신교회에서도 용납한 적이 없는 방종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신자의 자유를 강제로 제한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공동체나 지도자의 권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더 큰 악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적 삼위일체론은 삼위의 독립성과 자유로부터 시작한다. 같은 방식으로 개신자의 독립과 자유를 보장하여야 하지만 그것은 각 개인의 욕망과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자의 자유를 위해서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신자의 자유는 서로를 세우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로는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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