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明道, 1900-1991-

‘혁명시대’ 의 ‘반혁명분자’ 왕밍따오(1)

 

王明道·劉景文 暫息之所

왕밍따오·리우징원 잠시 쉬는 곳’(21:4)

▲ 이병길 목사

중국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의 동산화교묘원(東山華僑公墓) (1)에 안치된 왕밍따오 부부의 합장묘 비문(2), 리우징원(劉景文, Liu Jingwen, 1909-1992) 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내 인생의 임무는 왕밍따오를 내조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 임무를 완성했으니 나도 곧 떠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리우징원은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순결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18년 간 수형생활을 했으며, 1992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 4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밍따오· 리우징원 부부의 비문은 영원한 미래 소망에 대한 그들의 신앙 고백이 그대로 반영된 것 같다.

 

왕밍따오는,

중국 베이징 인(北京人),

20세기 중국기독교 자립교회(Independent Chinese Protestant pastor) 대표인물,

중국공산당의 반혁명분자’,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

중국 기독교의 위인’(巨人)...

195589~19791229일까지, 왕밍따오는 두 차례의 구금을 통하여 반혁명분자’(反革命分子) 죄명을 쓰고 2210개월 간 모진 옥고를 치렀다. 그에게 씌워진 죄명은 중국 공산당 정부의 종교 국영기업체 (3)인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가입을 거부한 죄, 삼자회를 저지한 반혁명죄였다. 이는 마치 한국교회가 일본 제국주의 식민치하에서 강요된 신사(神社) 참배를 거부한 것을 연상케 한다.

중국 공산당치하에서 왕밍따오의 일생은 천추백련’(千錘百鍊) 의 생애, 망치로 천 번을 두드리고 불로 백번 달군 생애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왕밍따오는 마치 불로 연단한 금”(3:18), 단련한 순금”(23:10) 같은 신앙의 삶을 살았다. 왕밍따오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무신론 공산주의와 투쟁하는데 소진했다. 공산주의와는 타협할 수 없다는 그의 확고한 신앙 때문이었다.

왕밍따오는 중국 교회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중국내지회 선교사·교회사가 레슬리 라이얼(賴恩融, Leslie Theodore Lyall, 1905-1996, 영국) 이 쓴中国教会三巨人(Three of China's Mighty Men, 1973) 에서는 왕밍따오(Wang Mingdao) 를 그 첫 번째 인물로 꼽았다. 다른 두 사람은 양사오탕(楊昭唐, Shao-Tʻang Yang, 1898-1969, 山西省曲), 니투오성(倪柝聲, Watchman Nee, 1903-1972, 廣東汕頭人) 이다. 왕밍따오는 1991728일 상하이에서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 화교 기독교인들은 왕밍따오를 함께 애도했다..

필자는 왕밍따오와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자서전五十年來(My Fifty Years, HK. 晨星, 1950)과 저작물, 그리고 중국 기독교와 관련된 책을 통하여 그의 의미 있는 삶을 찬찬히 새겨볼 수 있었고, 중국 교회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를 넌지시 알게 되었다. 왕밍따오는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반혁명분자로 낙인 받고 중국 공민권을 박탈당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당당한 시민권자’(3:20, 天上的國民)로서 중국기독교 역사의 증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글은 중국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필요로 하는 독자들을 위해, 필자가 1990년대에 감명 깊게 읽었던 레슬리 라이얼의中国教会三巨人, 왕명도의 자서전五十年來(My Fifty Years香港晨星书屋1950), 莫忘中華守望禱告網(Pray for China), 린롱홍(林榮洪, 廣東東莞人, 1946, 香港) 박사의風潮中奮起的中國敎會(天道書樓, 1980) 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1)江蘇省 民政廳(81) 6문건에 근거하여 쑤저우(蘇州) 지구에 조성한 홍콩(), 마카오(), 타이완() 해외 교포들의 유해 안치 공원묘지

(2)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2012.8.31, ‘王明道

(3)중국 가정교회(지하교회)는 중국 교회를 관리하는 중국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중국 국영기업체라 부름.

 

왕밍따오의 생애배경

왕밍따오는 1900725(光緖26) 중국 베이징에 있는 외국 공사관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영원히 창성하라는 뜻으로 용청’(永盛)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 혁명시대에 시대에 태어나 스스로 거친 삶을 살면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가를 후대 교회에 보여주었다.

시대배경: 왕밍밍따오가 태어난 시대는 청조(淸朝) , 이른바 청나라를 도와 서양인을 멸한다.’ 푸칭미에양’(扶清滅洋) 구호아래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혹은 庚子變亂, the Boxer Rebellion, 1899-1901. 9.7) 이 폭발, 중국인들의 배외(排外) 감정이 극도에 달하고 있을 때였다. ‘쵄페이’(拳匪)라고도 부르는 의화단은 반제국주의 민간비밀결사를 일컫는다. 변란은 19세기 이래 열강들의 불평등조약’(不平等條約) 에 의한 중국 침탈에 대한 누적된 중국인들의 배외감정이 표출된 것이었다.

사건은 청조군(淸朝軍)을 비롯한 8개 국 연합군에 의하여 가까스로 진압되었으나 인명 피해는 엄청났다. 연합군 10만 명 중 3천여 명이 사망했고, 의화단의 희생자는 셀 수 없었으며, 특히 중국내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희생이 컸다. 연합군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기독도 민병대가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앞으로 연구해 볼만한 대목이라 생각된다. 의화단의 주 공격대상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외국인과 기독교 선교사였다.

당시 189명의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가 순교를 당했다. 전체 순교자 중 32.8%에 해당하는 62명이 남자, 20.11%38명이 선교사의 가족, 19.85%37명이 여선교사, 전체 여선교사 순교자 중 52명은 선교사의 가족, 1/4은 선교사의 자녀였다. 자녀들 중 1~15세 연령대가 전체의 27.51%에 해당하는 52, 국적별 순교자는 영국 선교사 97, 스웨덴 45, 미국 31명 등이었다.(4) 놀라운 사실은 폭풍 같은 반기독교 정서 속에서 교인수가 계속 증가한 것이다. 의화단운동 와중이었던 1900년에 중국 기독교인 수 96,000명이 1915년에 526,108명으로 증가한 것이 그 실례다.

가정배경: 왕밍따오의 부친 왕쯔호우(王子厚) 는 당시 미국 감리교(美以美会) 선교부가 설립한 동인의원(同仁醫院, 1886)의 의사였다. 왕쯔호우는 30세에 영국 런던선교회가 설립한 미션스쿨에서 수학한 리원이(李文義) 와 혼인, 자녀 5남매를 얻었다. 왕밍따오는 그중 막내로 태어났다. 다른 세 자녀는 어릴 때 요절했다.(5) 부친은 왕밍따오가 태어나기 하루 전, 1900724일 의화단 난중에 의화단이 가족을 잔인하게 죽일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매 죽었다. 왕밍따오는 누나와 함께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4)中國信徒佈道會, 雙月刊, 2008, 121, 11~12, 義和團事件殉道者名單帶來的亮光和啟發, 黃惠玲

(5)和訊, 王明道生平, 2009.10.8

 

신앙배경: 유교문화와 기독교문화 배경에서 자란 왕밍따오는 어릴 때부터 비판 의식이 강했고, 원칙상 타협이 불가능한 성격이었다. 나이 9세 때 런던선교회가 설립한 췌이원(萃文)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진학했고, 그 때 벌써 왕밍따오는 근본주의’(基要派, fundamentalist) 신앙에 자리 잡았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 예배에 참석하면서, 62일 만에 신구약 성경 62()을 했다니 아찔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 때 왕밍따오는 정신적 방황 기를 거치기도 했다. 14세 때 중생의 체험을 했고, 15세 때 전도인이 될 것을 결심했으나 심적 갈등을 겪기도 했다. 정치가가 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되고, 전도인의 길은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마침 왕밍따오는 내심 정치가의 길을 결심하고 갈등을 가라앉혔다. 그 때 왕밍따오의 롤모델은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亞佰拉罕林肯, A. Lincoln, 1809-1865) 대통령이었다. 위대한 정치가가 되어 중국을 구하겠다는 정치적 야망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던 중 19186, 나이 18세의 왕밍따오는 의사가 손사래 친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질병 가운데서 왕밍따오가 깨달은 것이 바로 회개였다.

한 차례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왕밍따오는 1920, 그의 나이 20세 때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그 때 비로소 용청’()이라는 이름을 밍따오’(明道), 하나님이 나를 흑암의 세상에서 사용하여 참 진리를 증거하는 일꾼 되게 하소서라는 뜻으로 바꾸었다. 왕밍따오는 평소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남달랐다. 그런 공포심이 중병을 앓는 중에 회개를 통하여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었다.

학력배경: 때는 오사운동’(五四運動, 1919.5.4) 여파로 학교는 임시 휴교,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오사운동은 중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처리 과정에서 열강들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독일의 중국 산동성 영유권을 일본에게 할양(割讓) 한 데 대한 중국인들의 불만으로 촉발된 반제국주의운동이다. 이 시기를 빙황마루안’(兵荒馬亂), 즉 불안정한 시대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 때 왕밍따오는 췌이원(萃文中學) 중학을 졸업하고, 훼이원(匯文, 1889)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훼이원대학은 현재 옌징(燕京,1952) 대학의 전신으로서 미국, 영국교회가 설립한 기독교대학이다. 훼이원대학은 1916년 화베이(華北)협화여자대학(1864), 텅저우(通州)협화대학(1867)과 합병, 이들 3개 대학이 다시 과별로 베이징(北京)대학과 칭화(淸華)대학으로 각각 분리되었다. 중국 공산화 직전 중국 전역 12개 지역에 13개의 기독교 대학이 있었다.(6) 청조(淸朝) 말엽부터 1949년까지 선교사들이 중국에 세운 기독교 학교는 20여개 대학, 500여개 중등학교, 1천여개의 초등학교, 900여개의 병원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학교는 공산화 이후 문화침략이라는 명분하에 합병 내지는 개편해 버렸다.(7) 공산당 정권이 아니더라도 중국을 바로 이해 해야할 대목이다. 

왕밍따오는 예과반에서 전면 휴교조치 상황이 발생하자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타의적 시대 아픔을 성경에서 위로를 찾아야 했다. 그때 왕밍따오가 얻었던 위로가 바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는 성경이었다.

그 때 친구의 소개로 바오딩(保定縣) 현 장로교에서 경영하는 리에쓰텐(烈士田) 초등학교 교직을 잠시 맡을 수 있었다. 교직생활 1년 남짓한 기간에 왕밍따오는 학생들에게 도덕적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고, 교내 기독교 청년회를 조직하여 창의적인 신앙활동을 펴기도 했다.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왕밍따오는 현실 교회의 개혁과 영적 갱신이 절감하다고 느껴졌다.

혼인배경: 192888, 왕밍따오는 쟝수성(江蘇省)의 리우징원(劉景文)과 혼인했다. 리우징원은 쟝인 현(江隂縣) 장로교회 목사 리우더선(劉德森)과 장메이윈(張美雲)31여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 리우더선 목사는 리우징원이 태어나자마자 저장성(浙江省) 더칭 현 (德清縣)에 있는 장로교회로 이동했다. 리우징원은 나이 10세 때 성공회가 항저우(杭州)에 설립한 메리본여학교(Mary Vaughan High School) (8)에 입학, 영어, 음악, 피아노를 배우면서, 그의 특별한 재능을 나타내어 선교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왕밍따오는 19256, 항저우(杭州)에서 일면식(一面識)이 있었던 리우더선 목사의 설교 초청을 받았다. 당시 왕밍따오는 리더우선 목사 집에서 침식을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리우징원을 알게되었고, 두 사람은 192611월에 정혼한 2년 후 혼인, 아들 텐뚜오(天鐸) 를 낳았다. 그 후 리우징원은 왕밍따오의 반려자가 되어 63년간의 혼인 생활을 통하여 공산당의 모진 박해 가운데서도 성실한 내조자 역할을 감당했다. 리우징원은 만년에 시력을 잃고 고생하다가 왕밍따오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 1992418일 세상을 떠났다.

(6)1901년 미국 감리회가 중국 본토에서 첫 번째로 설립한 東吳大學(蘇州)을 시작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대학은 燕京大學(北京), 齊魯大學(山東), 聖約翰大學(上海), 之江大學(杭州), 華西協和大學(成都), 華中大學(武昌), 金陵大學(南京), 華南女子大學(福州), 福建協和大學(福建), 湘雅醫科大學(湘雅 ), 金陵女子大學(南京), 滬江大學(上海), 嶺南大學(广州), 이들 대학은 1949년 중국 공산 때까지 중국내 유수한 기독교 대학으로 손꼽힌다-China Culture.org, 2015.1.9 

(7)開放網WWW.OPEN.hk, 大陸教會學校的消失, 何一平, 2012.9.15 

(8)華典, ‘劉景文

 

왕밍따오의 신앙성장 과정

왕밍따오는 당대 중국 교회의 세속화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신앙사상 형성에는 그의 원칙적이고도 강직한 비타협적인 성격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예컨대 학창시절에 왕밍따오는 친구들로부터 도덕박사’, 따오쉐보스’(道學博士), 그리고 바리새인’(法利賽人) 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개성이 강직하고 도덕적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고려할 때 왕밍따오는 그의 신앙이 엄격한 도덕 생활에 경직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왕밍따오의 도덕적 경직은 작은 실수에도 민감하게 처신했다는 말일 것이다.

20세기 중국 기독교 역사에서 왕밍따오는 근본주의신앙의 지도자로 분류된다. 그 근거는 왕밍따오가 기독교 자유주의신학(9)에 대한 반대 입장이 너무도 완강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중국기독교삼자회에 가입하지 않고 스스로 박해와 고난의 길을 선택한 이유 역시 삼자회가 공산당의 사주에 조종되는 조직이라는 근원적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삼자회운동을 주도하는 인사들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 노선에 경도(傾度)되었다는 판단에서였기 때문이다.

선택과 포기: 인생의 존망과 미래에 대한 관심은 왕밍따오에게도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살아있을 때 해결하리라고 다짐했다. 왕밍따오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역시 죽음이었다. 기독교 신앙에 깊은 이해를 하기까지의 왕밍따오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人死留名), 이른바 중국식 영생’(永生) 사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무서워하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깨달은 후에는 그 두려움에서 자유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왕밍따오가 살아서 해결하리라고 한 인생의 심각한 문제였고, 그가 추구하던 영생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왕밍따오는 세속적 영화를 진토(塵土) 같이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결국 왕밍따오로 하여금 대학 복학과 신학교 입학, 영국 유학 계획을 포기하게 했고, 오직 성경 연구에 매진하게 한 이유가 되게 했다. 왕밍따오의 선택과 포기는 향후 그의 삶이 평범하지 않을 것을 예견했다.

신앙의 멘토: 학창시절의 왕밍따오 역시 일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쇄이보쭈리우’(隨波逐流), 즉 특별한 주관 없이 시류에 따라 흘러가는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다. 왕밍따오가 평범한 학생에서 남다른 학생으로 바뀐 것은 1914년이었다. 당시 왕밍따오는 먼저 좋은 멘토를 만났다. 특히 왕밍따오는 기독청년회(YMCA) 작가 셰홍빈(謝洪賓)과 그의 저서를 통하여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 셰홍빈(謝洪賚)1911년 기독교 문단에 등단한 기독교의 보수적 저명 학자로서 사상적 파급이 큰 작품들을 많이 펴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기독교와 과학(基督敎與科學), 이 책에서 셰홍빈은 과학은 본래 우주를 해석할 능력이 없으며, 도덕의 기초가 될 수도 없다고 전제하고, ‘과학은 하나님을 찾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했다. 왕밍따오는 셰홍빈과 그의 많은 저서를 통하여 지식과 사상 체계를 넓힐 수 있었다.(10)

왕밍땅오는 어릴 때부터 도덕적 선악에 민감한 자극을 받고 자랐다. 혹시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양심적 자책감에 빠져 그 자책감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후의 왕밍따오는 사죄의 은총으로 얻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 구원이 왕밍따오 신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왕밍따오 신학사상 형성에서 그의 내적인 개성과 런던선교회의 보수적인 외적 경향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9)중국에서 자유주의신학’(Liberal Christianity, Liberal Protestantism, Liberal Theology), 혹은 자유파기독교는 당대의 기독교 진보주의혹은 현대파로 불리어졌다. ‘자유라는 말은 현대 철학과 과학에 근거한 이성적 성경 해석과 기독교의 다양성을 통한 실용주의적 입장으로 이해했다.

(10)李雪華殷婉芬阮建生劉濟民王明道的屬靈氣質與事奉觀

 

침례사건: 왕밍따오는 성경과 좋은 멘토 셰홍빈을 통하여 인생의 의미와 책임을 깨닫게 되었고, 모든 불의를 미워하고, 거룩하고 선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 것이다. 조금씩 영적인 이해의 수준이 높아갈 즈음 친구의 소개로 장로교에서 설립한 바오딩 현 리에스텐(保定縣, 烈士田小學) 초등학교 교사직을 잠시 맡게 되었다. 교사가 된지 1년 남짓한 시점인 19201121, 그날 밤 왕밍따오는 친구와의 대화중에 사람의 교만과 허영심이 가장 무서운 죄라는 말에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즈음 왕밍따오는 몸담고 있던 장로교 학교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후청(護城河, 紫禁城) 계천에서 베이징 사도회(北京使徒信心會, the Apostolic Faith Mission, 1906)(11)의 주띵천(朱鼎臣) 목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침례사건 후 왕밍따오는 모친과 누나에게 큰 책망을 받고 한 동안 괴로워했다. 이 일로 왕밍따오는 장로교 소속 학교의 교사직까지 그만둬야 했고, 그 길로 3년 간 성경 연구, 기도와 금식으로 자신의 영성을 증진시키는 가운데 비로소 인신칭의’(因信稱義), 즉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상사회: 20세기 전반기 중국의 저명한 학자 우레이쵄(吳雷川, 1870-1944)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희생에 감동하여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신문화운동 기간에 기독교와 중국 문화의 융합 시도를 노력한 학자다. 그러나 우레이쵄은 윤리적으로 기독교에 접근했으나 신앙적으로는 접근하지 못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사후 세계의 천국을 믿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가 추구하는 천국은 곧 이상적 인간사회라고 주장하고, ‘천국은 이 세상 외의 또 다른 세상이 아니며’, 사랑과 공의가 실천되는 윤리적 새로운 사회’, 즉 이상사회가 곧 천국이라고 했다.(12)

그러나 왕밍따오는 인간이 절대 하나의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회의 기본문제는 죄성(罪性) 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이런 관점에서 왕밍따오는 사회의 모든 부조리와 부패가 사회 구성원인 사람의 죄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먼저 사람이 변화되어야 이상적 사회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적 사회는 죽음이 없어야 할 것인데 그런 이상적 사회, 지상천국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죽음은 사탄의 권세아래 있는 것이므로 사탄을 멸할 힘이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왕밍따오는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사회는 공산주의 이념을 추종하는 개인이 변화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확신을 했던 것 같다.

(11)사도믿음회1904-1933년까지 중국에서 선교한 노르웨이계 미국인 번트 번첸(Bernt Berntsen, Brother B. Berntsen, 賁德新, 1863-1933) 선교사가 1906년 중국 허베이 성(河北省) 남부 정딩푸(正定府)에서 설립한 선교단체, 이른바 믿음선교회’, 1914神召會’(A.G, the Assemble of God)와 합병되었다

(12)擧目60, 王明道, 中国教会史, 历史人物/保守与避世-浅析王明道早期的神学思想, 景净, 2013-04-10

 

주관적 위험: 왕밍따오는 일관된 성경 중심적 원칙에서 조금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현대신학파의 이성적 성경 해석에 대한 비판 역시 성경이 표준이었다. 이를테면 왕밍따오는 개인구원의 복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신성, 성경의 권위, 이적의 역사적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현대주의 신학을 포효(咆哮) 하듯 맹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교회의 세상에서 임무를 하나의 인문주의적 종교화하려는 시도에는 정면 대결 양상을 보일만큼 완강했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고 유한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존재다. 왕밍따오의 신학체계에 골간을 이루고 있는 주요 키워드는 성경과 경험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다.

경험을 중요시한 왕밍따오의 사상에는 우려되는 점 역시 잠재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개인주의적 독선적 합리화 신앙에 치우칠 위험성이다. 즉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직선 방향으로 나아가는 신앙 태도다. 다른 하나는 건강한 교회의 유기적 생활에 대한 우려다. 왕밍따오의 기독도회당이 독립교회로 세워진 데는 그의 우려할 만한 신학체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침례를 고집하고 장로교 학교를 떠난 것이나 오랫동안 몸담았던 런던선교회 중국 선교부를 떠난 것 역시 그의 맹점으로 평가된다. 또 다른 하나의 우려는 객관적 교회역사 의식의 결여라 할 수 있다. 왕밍따오는 성경에 적시(摘示)되지 않은 교회의 전통적 관습과 제도를 무시했다.

 

왕밍따오의 사상검색

왕밍따오는 꾸위밍(賈玉銘, 1880-1964, 山東), 니투오성(倪柝聲)과 함께 20세기 중국 기독교 근본주의(Fundamentalism) 신학과 자립교회(Localization) 발전의 대표 인물로 평가된다. 이들 세 사람은 동시대의 각기 다른 성장 배경과 경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교회의 토착화(本色化, Indigenization)(13)에 한하여 견해를 같이한 데 대해서 중국 기독교 역사는 후한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꾸위밍(賈玉銘), 니투오성(倪柝聲), 그리고 양사오탕(楊紹唐) 등은 후에 삼자회를 지지하거나 타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4)19세기 중국이 기독교 선교를 비롯한 외세의 충격에 잠을 깼다고 하면, 20세기 전반기의 중국은 자기 성찰과 자존감 회복의 세기라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 50년은 중국의 자기 성찰을 위한 전환시대, 의화단’(義和團, 1899-1901) 사건,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 ‘반기독교운동’(反基督敎運動), ‘오사운동’(五四運動, 1919.5.4), 그리고 당시 서방 교육을 받았던 후쓰(胡適, 1891-1962), 천뚜시우(陳獨秀, 1979-1942), 루쉰(魯迅, 1881-1936, 周樹人), 첸쉔통(錢玄同, 1887-1939), 리따젠(李大劍, 1889-1927),(15) 루쉰의 친동생 저우쭤런(周作人, 1885-1967)과 같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이어진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 1915-1923)은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가치관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왕밍따오의 사상은 전환기 중국의 역사 환경에서 성경적 비판 시간으로 생성되었던 것이다.

(13)중국에서 교회의 토착화는 선교사들이 말한 자립교회개념과는 다르다. 중국에서 토착화는 두 가지 개념과 형태로 표현, 즉 문화적 토착화와 정치적 토착화로 구분된다. 문화적 토착화는 1920(정확하게 말하면 1919) 이후 5.4운동 정신으로 전개되었고, 정치적 토착화는 1950, 즉 중국 공산화 후 삼자애국운동에 의하여 전개된 것이다. 문화적 토착화는 민족적 색채를 띠고, 정치적 토착화는 공산주의 도구 색채가 강하다.

(14)王怡屬靈復興與世俗化-對中國家庭教會的一個評價-July 19, 2012 

(15)河北, 東亭人, 東京早稻田大学政治本科, 1916北京大學도서관 주임 겸 경제학 교수, 1921723-31일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 개최(12명 참석), 중국 공산주의 선구자, 마르크스주의자, 중국공산당 창당의 핵심인물

 

 

시대배경: 전환시대의 중국 사조(思潮)의 특징은 배외적(排外的) 반기독교(反基督敎) 정서(情緖) 에 경도(傾度)되었다. ‘중국역사의 이정표’(里程碑)로 자리매김한 신문화운동17세기 유럽의 계몽운동에 비교되리 만큼 중국인의 각성을 촉진시킨 운동이다. 신문화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장구한 역사의 봉건적속박에서 민주화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반전통, 반유교, 반문언(反文言) 적 신문화운동은 계몽적으로 중국인의 세계를 향한 시야를 넓힌 매우 중요한 운동이다.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하여 중국 미래 역사의 방향을 설계했고, 심지어 일부 급진적 종교계 인사들은 무정부주의까지 주장했다. 특히 신문화운동 기간에 대립각을 세웠던 중국 기독교 근본주의’(Fundamentalist)현대파’(Modernist) 간의 충돌은 결과적으로 중국 땅에 공산주의 역사를 숙성시킨 요인이기도 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런 시대사조를 배경으로 왕밍따오의 사상이 생성된 점을 주목한다.

사회개혁: 신문화운동 사조는 당시 중국이 당면한 전환기 중국 역사의 진로에 대한 위기의식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191710월 레닌의 볼셰비키혁명 성공을 동경하는 분위기였다. 진보적 지식인들 가운데는 러시아의 혁명이 중국에서도 변화를 초래할 것을 기대했다. 전환기 위기의식에 대한 구국 해법은 중국 민족성 개량과 사회개혁이라는 공감대가 모아지긴 했으나, 위기 해법은 계층마다 각기 다른 이상을 펼쳤다. 신문화 주류의 지식인들은 정치와 사회제도의 혁신을 주장한 반면, 기독교 자유주의 사회복음화에 편중된 우야오쫑(吳耀宗), 우레이쵄(吳雷川, 1870-1944), 쉬바오챈(徐寶謙, 1892-1944), 짜오쯔천(趙紫宸, 1888-1979)등은 기독교의 사회개조를 주창했다.(16) 당시 중국에서 자유주의 사회복음화는 미국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1836)와 컬럼비아(Columbia University, 1754)대학에서(17) 유학한 우야오쫑 등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1949년 공산화 이전 중국 기독교는 이미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로 분열양상 조짐을 보였다. 자유주의파는 기독교 협의회(1922), 중화기독교교회(1927), YMCA가 사회복음화라는 미명하에 의합(意合) 결집하여 중국 위기 해법을 모색, 결과적으로 1949년 이후 중국 공산당에 대한 복음적 저항력을 상실하고 사회적 비극을 초래한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으며, 한편 중국 교회 보수파로 분류된 근본주의는 독립교회와 기독학생연합회(基督徒學生聯合會, 1937-1951)(18) 가 서로 의기투합하여 투쟁 전열을 정비했다. 동시에 1954년 베이핑(北平) 학생연합회는 왕밍따오 박해 반대운동단체를 조직하고 공산당 저항에 나섰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 사가는 중국 기독교 가정교회(지하교회) 역사를 왕밍따오와 베이핑 기독학생연합회에 연원한다는 견해도 있다.(19)

지식인들의 사회제도 혁신과 기독교의 사회개조는 기본적으로 타협의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신문화운동을 주도한 일부 지식인들 가운데는 예수의 정신’, 즉 예수의 도덕적 가치로써 중국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창하기도 했다. 왕밍따오는 신문화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포괄적으로 교회를 중심한 사회개혁 인사 범주에 속했다. 그러나 왕밍따오의 사회개혁은 그의 사상형성 과정에서 추구했던 하나의 이상에 불과했다. 바로 그때 사회개혁주의자 우레이쵄(吳雷川), 우야오쫑(吳耀宗)이 급진적 진보주의로 사상적 가닥을 잡은 것이다. 이들은 기독교 개혁을 혁명적 종교로 둔갑시키는 시도를 주저하지 않았다.

개인구원: 왕밍따오는 한 때 정치적 야망의 시기에 미국의 A. 링컨을 모델로 삼은 적이 있었고, 신문화운동 시기에는 신앙적 시대소명의 열정으로 영국의 존 웨슬리(衛斯理約翰, John Wesley, 1703-1791)를 모델로 삼았다. 왜냐하면 존 웨슬리가 18세기 영국이 사회적 도덕위기에 직면했을 당시 영국 교회를 각성케 하는 활동을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20) 왕밍따오는 당시 중국의 존 웨슬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왕밍따오는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삶을 중요시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현재를 사는 것이라 보고, 그리스도인의 현재 행위와 삶은 그가 가진 신앙을 표현하는 유일한 근거라고 생각했다. 현재의 삶을 중요시한 왕밍따오에게 실천적 신앙은 개인에서 출발한다. 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문화 재정비, 사회개혁, 국가주의, 농촌운동 등과는 차원이 다른 중국 위기 해법이었다. 왕밍따오의 이런 입장은 선() 개인 변화, () 사회개혁, 즉 사회 개혁과 사회구원에 앞서 먼저 개인이 구원받아야 하고, 개인이 변화해야 한다는 말로 정리될 수 있다.

정교분리 원칙: 공산당 치하에서 왕밍따오의 당당한 처세는 정치와 교회의 분리사상이 그의 일관된 두 가지 기본원칙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 원칙 하나는 하나님은 우주 세계의 지고무상(至高無上)하신 분이며, 땅위의 모든 권세가 그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신자는 먼저 하나님에게 순복해야 하고, 다음으로 국가의 권력자에게 순복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에 있어서 양자는 서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국가의 법과 권력자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이유로 인하여 권력자에게 순복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권력자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하나님에게 순복하고, 사람에게 순복할 수 없다고 했다.(21) 이런 신앙과 각오가 왕명도의 23년간의 감옥 생활을 견디게 한 이유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왕밍따오는 삼자애국운동에 대하여 진리냐? 독소냐?’(眞理呢? 毒素呢?)라는 문장으로 비판, 삼자운동은 성경에 부합하지 않으며, 삼자운동은 자유주의(不信派) 자들의 걸작이라고 일갈(一喝) 하기도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삼자운동의 조속한 성과를 위해 왕밍따오와의 줄기찬 타협을 시도했으나 그 때마다 왕밍따오는 불신자와 멍에”(信與不信的不能同負一軛)를 같이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16)基督敎文化硏究所, 9, 超然信仰的社會實效性-王明道社會觀念的再詮釋, 梁壽華, 梁壽華, 中國神學研究院中國文化研究中心研究員

(17)基督敎文化硏究所, 9, 超然信仰的社會實效性-王明道社會觀念的再詮釋, 梁壽華, 梁壽華, 中國神學研究院中國文化研究中心研究員

(18)‘기독학생연합회1885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 졸업생 7명이 허드슨테일러(戴德生, James Hudson Taylor)1865년에 성립한 중국내지회(China Inland Mission)에 가입하면서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학생자원선교운동, 이 운동은 초기 40년 간 10,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파송 선교사 중 중1/3이 중국에 파송되었다. 중국에서는 1937년부터 각 대학에 기독학생회가 조직, 1951년에 강제 해산되었다 -學聯知多少, -學生聯合會的福音事工-劉智欽,校園團契

(19)王怡屬靈復興與世俗化-對中國家庭教會的一個評價, July 19, 2012

(20)基督敎文化硏究所, 9, 超然信仰的社會實效性-王明道社會觀念的再詮釋, 梁壽華, 中國神學研究院中國文化研究中心

(21)和迅, 王明道生平, ‘권세가 누구의 손에 있는가?(權柄在誰的手中呢?)

 

왕밍따오의 복음 전도활동

왕밍따오는 91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중국 공산당과 투쟁하다가 55(1955)세에 투옥되어 23년 간 복역 중 1979년 말, 그의 나이 79세에 석방되었다. 그의 전도활동은 24년 정도다. 그러나 그의 활동 영향은 중국 기독교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다. 왕밍따오의 전도자의 모델은 예레미야 선지자였다. 왕밍따오의 복음 전도활동은 세 가지로 조명할 수 있다. 즉 기독도회당(基督道會堂), 순회활동, 문서 활동이 왕밍따오의 복음 전도 활동으로 대표 된다.

기독도회당: 1924108, 왕밍따오의 나이 24세 때 독립교회(혹은 자립교회) ‘기독도회당’(基督徒會堂, The Christian Tabernacle, 1937) 을 시작했다.(22) 첫 예배는 세 사람이 모였다. 때는 왕밍따오가 구원의 확신과 성경을 깨달은 후 몇 개월만이었다.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성경 공부 반으로 시작했는데, 모여드는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베이징 시 후통(胡同) () 23호 건물을 임대하여 매주 두 번씩 집회를 했다. 집회 인원이 계속 증가하자 후통(胡同) 42호에 교회당 건축을 시작하여 19377월에 준공, 그해 81일 봉헌했다.

기독도회당은 1937년에 이르면서 500명의 교인으로 증가했고, 1949년 중국 공산화 직전까지 700~800명 교인으로 증가했으며, 1933-1949년까지 16년 간 세례 교인만 570여명에 이르렀다.(23)

기독도회당이 중국 기독교 역사상 진정한 삼자교회’, 즉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의 교회의 역사 기록을 남긴 첫 번째 토착교회로 알려지고 있다. 설교는 주로 왕밍따오가 맡았고 외부 설교자는 거의 초청되지 않았다고 한다. 왕밍따오의 설교는 주로 죄를 책망하는 내용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책망하는 설교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당대의 일부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왕밍따오의 설교 방식을 비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밍따오는 자신이 받은 은혜의 방식을 조금도 수정하지 않았다.

순회활동: 왕밍따오의 24년간의 복음전도 활동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왕밍따오는 당시 중국 전국의 28개 성() 가운데 24개 성을 순회하면서 전도할 정도로 대단한 열정을 보였고, 전국 30개의 각기 다른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하기도 했다. 왕밍따오가 설교하는 곳은 어디서든지 그의 설교를 듣고자 하는 교인들로 채워졌다고 한다. 그의 설교는 보통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그의 설교를 경청했다고 한다. 1920, 30년대 중국 교회의 대부흥 시기에 왕밍따오는 송상제(宋尚節, 1901-1944), 지쯔원(計志文, 1901-1985), 니투오성(倪柝聲, 1903-1972), 꾸위밍(賈玉銘, 1880-1964) 등과 함께 중국 기독교에 영적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친 인물로 손꼽힌다.

(22)영어 표기의 Tabernacle은 한국인 유재열(柳在烈, 1949) 장막성전’(1966), 이만희(李萬熙, 1931)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1984) 과는 다르며, 교파에 속하지 않는 독립교회를 나타낸다.

(23)和迅, 王明道生平

 

문서활동: 기독도회당과 순회전도, 그리고링쓰지칸(靈食季刊, Spiritual Food Quarterly, 1927-1955)을 통한 문서전도가 왕밍따오의 전도활동을 대표하는 세 가지 방법이었다.링쓰지칸은 누가복음12:42절에 기록된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하여 1927년에 창간되었다. 내용은 주로 왕밍따오의 설교, 신앙생활, 신앙 도리에 관한 것이었다. 이 전도문서는 창간된 후 당시 중국 전국 28개 성에 산재한 기독교 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28년 간 계속 발행되었다. 이는 왕밍따오가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열정의 표현이라 여겨진다.

195111월에 발간된링쓰지칸에서 왕밍따오는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기독교 진보주의 인사들을 서릿발 같은 분노로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다. 그의 필봉(筆鋒)은 예리했다. 당시 삼자회의 규탄 고발을 빗대어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그리스도 안의 형제를 원수시 하고, 모함하는 것은 불충불의라고 비판하면서, 무엇이 두려워 공산당에 대항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로 교회를 잘못 인도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항일시기: 왕밍따오는 의화단 배외 감정이 사나웠던 시대에 태어나 정치적 폭풍이 휘몰아친 청조(淸朝)의 부패와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 항일전쟁시기(1937-1945), 중국국민당(1894-1949) 정부시기, 공산혁명 시대를 경험했다. 특히 194114일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본군이 베이징 시를 점거하고 미·(美英) 선교사들이 설립한 교회당을 패쇠, 이른바 화북기독교연합촉진회’(華北基督教聯合促進會)(24)라는 정치 단체를 조직하여 교회의 가입을 강요했다. 그러나 왕밍따오는 이 단체가 정치적으로 조직되었고, 배후에 일본 군부가 조종하고 있다는 이유로 연합활동에 가담하지 않았다.(25) 더 큰 실제적 이유는 신학적으로 당시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로 분류된 불신파’(不信派) 에 의하여 조직되었다는 판단과 정교 분리 원칙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왕밍따오는 일본군 헌병들에게 여러 차례 위협과 회유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밍따오는 일본의 정치 노름에 휘말리는 가룟 유다의 제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1010, 일본 조사관(武田熙)에게 호출된 왕밍따오는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 원칙을 고백했다. ‘나는 내가 섬기는 하나님에게 순복하고, 내가 믿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는 어떤 사람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 나는 이미 어떤 대가와 희생일지라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선언했다.(26)그후 일본 당국은 왕밍따오에게 사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를 왕밍따오는 하나님의 이적이라고 이해했다.

(24)華北基督教聯合促進會19458, 9월 사이 華北中華基督敎團으로 명칭을 바꿔, 일본 목사 石川四郞이 총간사를 맏았다.

(25)和迅-,明道

(26)和迅-,明道

신중국시기: 중국 공산당이 신중국(1949) 건설을 위한 권력 기반을 다지고 있을 당시에는 왕밍따오와 공산당이 서로 충돌하지 않았다. 충돌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왕밍따오의 기독도회당이 순수 중국인에 의하여 세워졌고, 중국인이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했기 때문에 단순히 종교와 공산당의 긴장 관계만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양자의 긴장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공산당은 명분 적으로는 종교 신앙의 자유를 표방하면서도 얼마 가지 않아 삼자회(三自會)를 조직하여 왕밍따오를 옥죄기 시작했다. 왕밍따오는 끝까지 삼자회를 거부하였고, 19558월에 체포되어 1년 간 감옥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왕밍따오는 강제로 삼자회에 가입 서약서를 쓰고 석방, 그 후 삼자회에 가입하지 않고 계속 설교하다가 다시 채포 구금되었다. 당시 삼자회 역시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목회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왕밍따오는 교회가 정치와 연합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경적 연합은 공학적(工學的) 조직이 아니라 영적(靈的) 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계속, 파일이 너무 커서 왕밍따오의 박해와 말년은 며칠 후에 게재할 것이다. -편집장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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