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교수의 기독교보 기고 중> 개혁교회의 직분 무엇이 다른가? 분석 및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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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순수한 기고자의 주장임을 알려드립니다. -코닷-

 

▲ 김영수 장로고신대 前사무처장부산노회 부평교회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총회의 기관지 기독교보(1149, 2015117, 2)한국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여 8회에 걸쳐 연제를 한다고 한다. 매우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이번에 그 첫 번째로교회를 세우는 직분에 대한 내용을 보도했다. 지금까지 이 교수님은 교단지와 코닷, 개혁정론 등에 좋은 글들을 발표하여 상당한 호응과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이번에 발표한개혁주의 직분론내용은 대부분 공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조금 미흡한 점이 있으므로 약간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이를 바로 잡지 않고 그냥 묵인하고 지나가면 그것이 마치 고려파 교회의 교회론이며, 직분론인 것처럼 인식되고 정착되기 때문에 토론과 바로 잡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기독교보사가 개혁신학의 전통을 수호한다는 경영 방침에 상반되는 집필자들의 글을 감수하고 걸러내는 시스템이나 자정 능력에 한계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 이성호 교수의 개혁주의 직분론 분석 및 서평

1. 직분과 예배

예배 확립 종교개혁으로 인해 말씀(설교) 중심의 예배가 확립되었다. 보는 예배에서 듣는 예배로 바뀐 것이다.”고 한 것은 단순히보는 예배와 듣는 예배로 구분 짓는 것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우리가 시장을 본다고 할 때 그냥 단순히 아이쇼핑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를 본다고 말하는 것을 통용해 온 것이다.

장로와 집사 직분 그렇다면, 장로를 집사 중에서 선출하는 한국장로교회의 관행은 하루 속히 시정돼야 할 것이다. 집사는 계속 집사를 잘 할 사람을, 장로는 계속 장로의 일을 잘할 사람을 선출하는 것이 개혁교회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

위 글에서 한국교회의 관행이 시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부적절하고 전혀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교수의 주장 자체를 종교개혁 정신과 결부시키는 것은 조금 어색하다. 교회의 직분자는 부르심에 대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직임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칼빈이 세운 제네바의 개혁교회는 하나의 모델은 될 수가 있지만,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분자를 세우는 자연스런 절차와 방법 등을 송두리 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이는 교과서적인 학문적 종교개혁 이론을 부연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교수의 착오라고 본다.

한 인간이 유 소년기를 거쳐 청년, 장년으로 성장하듯이, 한 사람의 성도가 원입, 입교, 학습, 세례 등을 거쳐 교사로 서리집사로 봉사하다가 항존직 직분을 갖게 되는 것은 하나의 절차이며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이 교수가 한국교회의 관행이라고 꼬집는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 집사는 계속 집사를 잘 할 사람을, 장로는 계속 장로의 일을 잘할 사람을 어떻게 선출한단 말인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 보라. 그것은 평등사상에도 배치되는 것이다.

 

2. 임직과 피택

직분자의 부르심 직임자의 내적 부르심과 외적 부르심에 있어서, 개혁교회에 있어서 교회 회중의 부르심이 하나님의 외적인 부르심이다."

이는 직임자의 내적 부르심과 외적 부르심에 있어서, 회중의 선택(being elected)을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calling)으로 이해된다. 라고 표현했으면 한다.

이단을 포함해 기독교라고 자처하는 모든 교회는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세워졌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빼야 되는 말은이단을 포함한 기독교라고 자처하는 모든 교회는라고 한 이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그냥모든 그리스도 교회의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자신이 세워졌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로 했으면 한다.

참 교회와 거짓교회 이단을 한 묶음으로 하여 무엇을 논한다는 것 자체는 심각한 혼동이 야기된다. 개혁교회 직분론을 말하면서기독교라고 자처하는 모든 교회의 직분론까지 정의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직분의 평등성 직분의 평등성 논리는 총론적 입장에서 보면 옳은 말이다. 그러나 보충 설명을 하면서 쉽게 말하면, 목사가 장로를 해임할 수 없고, 장로가 집사를 임명할 수가 없다.”는 부연 설명(쉽게 말하면 이후는)은 오히려 불필요한 말이며,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다고 본다.

우리 장로교회는 원칙적으로 장로의 신분 안에 목사가 속해있다. 다만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를 구분하면서 목사라는 별칭을 가지는 것뿐이다. 왜 대한예수교 장로회라고 하는가?

장로가 엄연히 당회원이고 임명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집사를 임명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설명을 한다는 것은 치리장로의 직임을 격하시키는 합당하지 못한 주장이다. 이는 시무장로의 직임을 격하시키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거꾸로 말하면 목사라도 개인이 독단적으로 누구를 직분자로 임명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3. 직분의 평등성

목사 간의 신분 차이 목사들 사이에서 예우의 차이는 있을 수가 있지만 권한에 있어서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교수가 의도하는 바는 이해를 하지만 부연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순수함이 악의로 작용할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의도가 조금 빗나갔다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예우(대우나 존경심)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지만, 직분의 가장 중요한 직무인 말씀을 전파하는 임무와 역할은 동일하다. 소명감은 동일하면서도 교회라는 조직체에서 기능적인 면은 각기 서로 다르다고 본다.

 

4. 로마가톨릭 호칭문제

로마가톨릭에 대한 호칭문제 로마가톨릭을 그냥 천주교로 부르는 것은 호의적인 호칭으로 이해할 수가 있지만, 이 교수가 로마교를 가톨릭으로 호칭하는 것은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나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미를 보다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는 기본 사상의 문제이다. 학문으로서의 종교개혁사를 학습하는 것과 직접 피부로 느끼고 깨닫는 바의 종교개혁 정신의 숭고함을 이해하면서 우리 고려파 교회와는 구분 짓고, 분명한 선을 긋는, 보다 확고한 신앙관, 역사관에 다소 의구심이 가는 부분이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리교회가 가톨릭이지 않는가? 반드시 로마가톨릭이라고 호칭해야 한다.

 

5. 명예 직분

명예 직분 명예권사, 명예장로를 세우는 문제를 지적한 것은 공감한다. 권사 직분이 성경에는 없는 직분이지만, 이제 와서 폐지하기는 어려운 상황인 것 같다. 그러나 헌법상 준항존직으로 분류한 것 자체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6. 직분의 임기

직분자의 임기 자기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성도들을 섬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면 정기적으로 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임기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임기직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에서 직분이 명예직이나 행정직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종신직이 되는 경향이 있다. 직업으로 따지자면 교회의 직분자들은 사무직 종사자들이 아니라 현장 근로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마 목사 이외의 다른 직분자들을 두고 한 말 같아 보인다.

혹 예를 들어서, 화란과 같은 개혁교회는 시무장로가 6년을 봉사하고 안식년을 갖는다고 한다. 한국교회에서도 필요하다면 도입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정도로는 말할 수 있지만, 이 교수가 주장하는 논지는 너무나 원리에 맞지 않고 거리감이 있는 말로 들린다. 

임기직 운운 자체는 사리를 잘 분간하지 못하는 주장 같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에서 장로직은 명예직이나 행정직으로 간주 된다고 말한다면 이는 경솔한 표현이며, 치리회의 시무장로를 무시하는 과소평가하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장로교의 기본 원리도 모른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목사로서 신학교 교수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문제를 포함한 소명의식과 준비된 자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심지어 교회직분을 일개 사무직이나 현장 근로자 노동자로 간주된다는 주장은 반드시 해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말을 듣는 교회 직분자들은 분노를 느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소명의식에 대한 자신의 순박한 진심어린 고백이라고 여겨진다. 이 교수와 같은 이런 사고는 고려파의 심각한 타락이며 교회론, 직분론의 변질이다. 아마 자기 직업을 가진 자는 정기적으로 좀 쉬는 것이 좋겠다는 말은 시무장로를 두고 하는 말 같아 보인다. 제네바 시의회나 칼빈이 섬겼든 교회가 하나의 모델은 될 수가 있지만, 표준(standard)은 될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종교국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지금의 한국적 여건과 16세기 당시와는 여러 가지 상황이 분명히 다르다.


7. 찬양 팀과 소그룹 운영

찬양 팀과 셀 그룹 찬양 팀이나 찬양대가 직분화 되거나, 셀 그룹이 지나치게 활성화되는 것은 직분의 왜곡이다.”

구약시대 때 특히, 다윗 시대에는 찬양대가 엄청났다는 점을 상기해 보았으면 한다. 각종 악기를 다루려면 상당한 기술과 전문성을 요한다. 찬양, 기도, 말씀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가운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셀 그룹과 같은 소그룹의 활성화는 전도 팀 운영이나 새신자반 운영에 꼭 필요하다고 본다. 신학교의 교육 제도는 실천신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며, 교회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 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8. 당회 무용론

당회 무위론 한국교회에서 당회가 교회 갈등의 진원지이다.”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오는지가 의심스럽다. 당회를 없애면 장로교회가 아니며, 개혁교회가 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칼빈의 후예라고 말할 자격이 상실된다. 당회의 임무와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잘 모르는 어리석고 무지한 말이다. 시무장로가 한 사람도 없고 설교를 하는 목사만 있다면 그런 교회는 장로교회가 아니다. 어떻게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우려한다.

 

9. 직분자 임명 기준

직분자 임명 신앙생활을 한 지가 오래되었다고 직분자로 세우기 시작하면, 당장 시급한 문제는 해결할 수가 있어도 결국 교회의 힘은 약화 될 것이다.”

사실 이 말은 불필요한 언급이다. 그러면 초신자라도 시급한 문제가 있으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분자로 세우라는 말이 아닌가?

 

. 직분론과 정치 원리

1. 종교개혁자들의 직분론

칼빈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조직 가운데, 지상에 있는 교회의 기관과 직분들을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직접 연결시킨다(Inst. ,3,1)고 하였다. 칼빈은 교회의 항존 직분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목사(pastor): 에베소서 411절에 나오는 다섯 가지 직분 가운데 첫 세 가지(사도, 선지자, 전도자)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특별하게 일으킨 직분으로 보고, 나머지 두 가지 직분(목사, 교회 선생)을 교회의 항존직으로 보았다(Inst. ,3,4). 그 주된 사역은 말씀 선포, 성례식 거행, 치리이다. 목사는 또 성경주석에도 힘을 써야 한다.

2) 교회 선생 또는 교사(doctor): 교사는 치리, 성찬, 교인을 돌보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성경을 주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사역으로 삼는다(Inst. ,3,4)

3) 장로: 고린도전서 1228절을 근거로 하여금 선출된 장로들이 교회 치리에 참여함을 말한다(Inst. ,3,8).

4) 집사: 집사가 하는 일은 사도행전 61절 이하와 로마서 128, 그리고 디모데전서 510절을 토대로 삼는다(Inst. ,3,9).

칼빈은 교회를 하나의 유기체(organism)로 이해하고 이 유기체는 상호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교회의 직분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교회는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하나의 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 서로 간에 도우는 공동체(gemeinschaft)이다(Inst. ,1,3). 교회가 바로 세워 지려면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가 필수적이다(Inst. ,3.4,8,9) 라고 한다.

우리 교회의 헌법은 교회의 중요 직분들을 세 가지(목사·장로·집사)로 구분한다. 여기에는 칼빈이 언급한 교회선생(doctor)’은 빠져 있다.

 

2.장로교의 정치원리

장로를 Presbyter 라고 하며, 장로교를 Presbyterian Church 라고 부른다. Presbyter는 헬라어 presbuteros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장로(헬라어 presbuteros, elder)와 감독(헬라어 episkopos, overseer)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동일한 직분을 두고 감독이라고 하기도 하였고, 장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감독이라고 불렀다. 당시 유대인은 장로라고 부르고, 헬라인은 감독으로 부르는 경향이 많았다.

다음은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편지이다. 1:6 에서는 장로로 1:7 에서는 감독으로 호칭하였다.

디도서 1:5 중략내가 너를 크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1:6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 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자라야 할지라.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1: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1: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 20:28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에서치게 하다”(to feed, 헬라어 poimainō)21:15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치라 하시고내 어린 양을 치라하실 때 사용한 치라(to feed, 원어 poimainō)와 동일한 단어이다.

장로의 소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차대한 직분임을포이마이노이 단어에서 찾게 된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 지니라.”5:14

우리 고신 장로교회는 가장 성경적인 교회이며 교파임을 확신하면서 우리는 상당한 긍지와 진정한 자부심을 가진다.

 

맺는 말 우리 고신교회가 개혁주의 교회를 지향하고 있지만, 종교개혁 당시의 제도와 직분을 현실적으로 도입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전부 성경적 원리라고 단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오늘 날에도 우리 고신교회가 개혁자들의 정신을 하나의 모델로 삼고는 있지만, 확고한 표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진정한 성경적 원리를 도외시하는 또 다른 하나의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 역시도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인용하고 근거로 들면서 자주 언급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이번처럼 불필요한 자의적 해석이나 부연 설명을 함부로 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말하자면, 성경 진리보다도 16세기 종교개혁을 상위개념으로 인식한다면 그런 주장은 응당히 배척을 받아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유산물을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부주의하거나 자칫 잘못 해석하게 되면, 이번처럼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말하기를 작금의 여러 상황은 종교개혁 이전의 교황제와 같은 교권이 다시 횡행하고 있음을 우려한다고 한다. 교계의 이런 분위기와 기회를 틈타 편성한 것들이 새로 창안된 직분론과 같은 것으로 등장하게 되면 교계는 변형된 신학이 판을 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심리학자들은 자신이 엘리트 신분이라고 착각하게 되면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고 한다. 우월주의에 빠지기 쉽고, 매사에 자신만만하고, 의견과 주장을 표출시켜 기존의 질서를 무너트리려는 과정에서 선배나 연장자를 배려하지 않게 되며, 겸양과 덕목은 뒤로하고, 늘 도전적이고, 침묵하는 자세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번 사태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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