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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며,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시작은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도 한국 초대교회의 부흥운동을 간절히 사모하며 꿈꾼다. 이 부흥운동은 교회를 참 교회되게 만들고, 개인 신앙의 각성 뿐 아니라, 교회와 성도가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던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을 살펴보고자 한다.

 

.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 운동

1.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로 시작된 평양 대각성운동

길선주 목사님의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1869년 평안북도 안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자신의 병도 고치고 도()를 닦기 위해 관성교에 심취하기도 하고, 21세부터는 선도(仙道) 수련에 몰두하였으나 모두 영적인 만족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마포삼열 목사님과 교분을 가지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탐구해 보라고 몇 가지 교리서를 전해 받아 그 책들을 탐독하면서 차차 기독교 진리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길선주 목사님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은 바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거쳐 왔던 어떤 종교도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죄를 말하는 것은 기독교뿐이다. 도적질, 간음, 살인 같은 죄는 거의 모든 민족이 죄로 치부하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죄, 즉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죄임을 주장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처음이었다. 길선주의 회개는 바로 이 핵심적인 기독교 진리에 관한 것이었다. 1897712, 30세에 그는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길선주 목사님은 33세에 장대현교회에 장로로 선출되었고, 마포삼열 선교사는 그에게 장대현교회와 황해도 각 교회에서 목사를 돕는 조사(助事)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03년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해 새로 시작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제 1회 졸업생이 되어 그 해 설립된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장대현교회에서 시무를 시작하여 20년 동안 시무하다가 교회의 분규로 이향리교회로 나와 목회하면서 전국 교회의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다.

부흥운동은 일찍이 1903년 원산 지방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이 한 주간 성경공부를 겸한 기도회를 가질 때, 이 지방에서 선교하고 있던 남감리회 소속 하디(R. A. Hardie) 선교사가 선교 사역의 결과가 없는 것을 통한히 여기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한데서 발단이 되었다.

그 후 1906년부터 장대현교회에서 친구인 박치록 장로와 함께 규칙적으로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교인들이 계속 모이면서 300~500명이 매일 모이는 집회로 변했다. 장대현교회의 시무장로였던 길선주는 당회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다. 이때가 1906년 가을로 이것이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기도회 중 하나인 새벽기도회가 비롯된 시점이다.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겨울 남자 도사경회기간에 일어났다. 190712일부터 약 2주간 동안 사경회가 진행되었다. 사경회 마지막 날인 15일 밤 길선주가 회개하는 모습을 그의 아들 길진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와 몇몇 선교사들은 길씨와 주씨 두 사람을 위해 특별 기도를 했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에서 회개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길씨가 일어나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방위량(W. N. Blair)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음을 회개한다고 하며 보기에도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굴렀다.... 한 교인이 또 일어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음란과 증오, 특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뿐만 아니라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는 온갖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었고, 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 (길진경, 靈溪吉善宙, 192.)

길선주의 회개는 우리가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의 시무 장로였고, 또 장로회신학교 졸업반으로 6개월 후면 졸업을 하고, 그해 9월 목사 안수를 받아 한국인 최초 7인 목사 중 1인이 되는 분이다. 그런데 그의 회개의 내용이 형제들을 질시했고, 방위량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다는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 시에 고백된 일반적인 죄는 도적질, 간음, 심지어 살인 등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길선주는 그런 원초적인 죄가 아니라, 형제를 질시하고 미워한 죄를 회개했다는 점에서 그분의 위대함을 보게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러한 죄는 강력한 회개를 일으킬 만한 죄가 아니라고 생각할 텐데,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서는 바늘 끝 같은 작은 죄라도 참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2. 확산되는 회개운동

길선주의 회개는 일종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사경회에 참석했던 다수의 교인들이 그 뒤를 따라 집단적으로 크고 작은 죄를 회개하였다. ‘집단 회개는 평양 대각성부흥운동의 중심 알맹이였다.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 일어난 죄 고백 사건은 장대현교회 뿐만 아니라 같은 기간에 사경회가 열리는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 여성들은 여러 교회로 각각 나뉘어 사경회로 모였고, 나이 어린 남학생들은 숭실대학 예배 실에서 사경회로 모였다. 성령의 역사 속에 지은 죄를 고백하였다.

<The Korea Mission Field>에는 성령의 역사로 집단적으로 고백한 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지은 죄가 드러나고’, ‘죄를 자각하고’, ‘죄 짐에 짓눌려서 크게 울고’ ‘(죄로 말미암은) 심한 괴로움에서 - 마룻바닥을 치고 옷을 쥐어뜯으며- 죄를 고백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죄 용서를 탄원하였다. 그리고 나서 죄용서의 기쁨을 얻고, ‘말씀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고, 죄악의 사슬을 끊어 믿음 안에서 평화를 얻게 되었다.’

이들이 모여 고백한 죄는 다양하였다. 마음에 담겨 있던 죄(미움, 시기, 질투, 증오심, 양심, 심술, 교만), 밖으로 드러난 악한 행위(거짓말, 눈속임, 사기행각, , 담배, 도박, 마약), 신앙인으로 삼가야 할 직업(주막집)과 첩살이, 형사 처분을 받을 죄(절도, 강도, 간통, 방화, 살인)까지 낱낱이 고백하여서 마치 지옥이 제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비유되었다.

이러한 죄가 토설되는 회개의 열매로 다양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 첫째는 치유사건이었다. 죄로 인해 병들어 있던 인간의 내면이 그 죄를 고백하면서 밖으로 토해내자 그 영혼이 정화되고 전인적으로 치유되었다. 둘째는 죄의 고백으로 삶이 변화되는 첫 걸음을 내딛게 해주었다. 부적직한 삶에서 정직한 삶으로 돌아선 것이다. 예를 들어 훔친 돈과 물건을 돌려주는 등 죄의 고백이 이렇게 윤리성을 포함하게 되었다. 셋째는 죄의 고백은 이제까지 미워하던 사람들이 서로 얼싸안고 서로가 먼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가운데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관계성의 회복이며, 또한 회개의 사회적 차원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는 중생과 개인의 변화, 윤리의식에 대한 각성, 사회적인 화해를 수반하였다.

 

. 이기풍 목사님의 회개의 신앙

이기풍 목사님의 개심(改心)과 헌신

이기풍 목사님은 18681121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885년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평양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위정척사운동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서양인을 경계하였고, 청년 이기풍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집을 나서다 코 큰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분은 사무엘 마펫 선교사였는데, 이기풍은 그의 도도한 모습이 보기 싫어 친구들과 떼 지어 몰려가 그의 집에 돌을 던졌다. 또한 마펫 선교사가 장터에서 무슨 책을 들고 서툰 조선말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 반사적으로 발밑의 돌을 찾아 힘껏 날렸다. 날아간 돌이 마펫 선교사의 턱에 정통으로 맞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기풍은 쓰러진 그를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시치미를 떼고 그 자리를 떠났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이기풍은 원산으로 갔다. 기거서 스왈른(Swallen) 선교사를 보았는데, 스왈른 선교사를 보고 이기풍은 자신이 돌로 쳐서 피 흘리게 했던 마펫 선교사가 계속 떠오르면서 마음에 괴로워하였다. 하루는 마루에서 그 일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 그분은 너무 환하게 빛나셔서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너무나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고,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과거에 지은 수많은 죄가 자꾸만 머리에 맴돌면서 회개의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분의 증인으로서 어떤 것을 전해야 할지 몰랐다. 그 후 하나님의 은혜로 스왈른 선교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스왈른 선교사는 그의 체험을 듣더니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었다. 복음은 그를 감격시켰고, 그의 내면에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후 이기풍은 스왈른 선교사의 조사 역할을 하며,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설교와 각종 행정업무를 담당했다. 그리고 1898년부터 약 4년간 성경을 판매하고 보급하는 매서인이 되어 복음을 전했다. 1903년 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 후 목사안수를 받고 초대 한국인 목사 7인 중 한 명이 되었다.

목사안수 후, 총회에서 이기풍 목사님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으로 불리는 외국과 같은 땅이었고, 말도 잘 통하지 않았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제주도 사람들은 예수교를 굉장히 꺼렸다. 그러나 윤함애 사모와 마펫 선교사의 격려와 기도로 조선장로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로서 제주도에 파송되었다.

전도 초기에 너무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죽을 만큼 두들겨 맞기도 하고, 제주도 사람을 야만인 취급하였다고 하며 청년들이 목을 졸라 죽이려고도 하였다. 영육이 약해진 이기풍 목사님이 평양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마펫 선교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기풍 목사, 편지는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는 분투노력하시오.” 이 편지를 읽은 이기풍 목사님은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기쁨이 흘러 넘쳤으며 다시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영적 투쟁을 감당했다.

이후 이기풍 목사님은 전남 광구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였고, 조선예수교장로회 10대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전남 순천중앙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였고, 이후 고흥에서 개척을 하다가 다시 제주도 선교를 위해 떠났다.

1934년부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89월에 장로교까지도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는데, 이기풍 목사님 역시 신사참배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성도들에게 죽어도 절하지 말라며 순수한 신앙을 가질 것을 항상 강조했다. 70세 이상은 취조와 고문이 법률로 금지되었지만, 이기풍 목사님은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을 때까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초죽음 상태가 된 이기풍 목사님에게 출감조치가 결정되었지만, 나머지 목사님들이 출감하기 전까지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결국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이기풍 목사님은 여수 남면 우학리 섬에 목사관으로 옮겨졌고, 마지막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일주일 뒤 1942920일에 인생을 마감하였다.

이기풍 목사님이자 선교사로서 복음을 훌륭하게 전한 선구자였지만, 그 이전에 진정한 개심(改心)을 보여준 순교자이셨다.

 

. 회개의 신앙을 사모하며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따른 죄의 고백과 신앙체험을 통해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앙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한국의 전통 종교에서는 죄에 대한 확실하고 명백한 이해도 없고, 그러므로 죄의 고백과 용서에 대한 역동적인 체험은 물론, 그 이후에 찾아오는 기쁨과 평화도 결핍되었다고 선교사 무어(J. z. Moore)가 말했다. 그런데 이런 신앙각성운동을 통해 많은 한국인들이 지은 죄를 깊이 고백하고 크게 뉘우치는 신앙체험을 하자,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놀랐다. 한국의 기독교인들 스스로도 이제야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밝혔다. 선교사 크램(W. G. Cram)에 따르면 신앙각성운동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한국 교회의 성격(character)을 갖추게 하셨다.”고 하였다.

평양의 대각성부흥운동은 전도운동이 아니었다. 이미 기독교인이 된 교인들의 신앙을 새롭게 한 것이었다. 즉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였고, 삶이 바뀌는 윤리적인 결단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 다수의 한국인들 중에는 죄에 대하여 배우기는 했으나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깨닫고 깊이 뉘우쳐 본 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다 이기풍 목사님처럼, 사도바울처럼 강력한 회개와 중생의 체험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회개와 중생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개인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회심은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과 고백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전인적인 돌이킴이 있는 것이다.

죄의 해결이 없이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없음을 배운다.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를 시작으로 일어난 부흥운동은 다른 사람을 향한 회개의 외침이 아닌,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 속에서 자신의 죄를 먼저 참회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죄를 토설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애통하는 마음과 자신의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결단이 동반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 앞에서는 마치 자신이 의인인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죄의 문제보다는 현실적인 필요나 어려움들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참회와 회개가 없는 신앙생활과 봉사는 우리를 견고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어렵다.

내년이면 한국교회 부흥운동 110년을 맞이하게 된다. 길선주 목사님의 회개에서 시작된 부흥운동과 이기풍 목사님의 회심은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서 다시 일어나야 할 신앙운동이다. 이제 교회는, 그리고 지도자는 먼저 그 누구를 향한 외침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울 때, 우리 속에 숨겨진 그릇된 욕망과 거짓됨과 믿음 없음, 불의와 사랑 없음을 참회하게 될 것이다. 크고 작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진정한 돌이킴만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음을 기억하며, 그분들에게 임하셨던 성령님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우리 한국 교회에 뜨겁게 임하기를 간절히 간구하고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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