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진 목사

교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뼈대와 같습니다.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가장 근접한 교리는 잘못된 것일 뿐입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교리만이 바른 교리입니다.

교리는 인식하든지 않든지 간에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교리는 삶에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저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속죄 교리에 대해 생각하여야 할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Charles Hodge는 ‘Systematic Theology’(Phillipsburg:R &R, pp.398-399)에서 속죄의 범위에 대해 "There is a sense, therefore, in which He died for all, and there is a sense in which He died for the elect alone" (chapter 8)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택자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 효력이 택자에게만 미친다는 것입니다.

속죄의 범위에 있어서는 모두이고 속죄의 효력에 있어서는 택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두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모든 사람이 되고 세상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모든 세상, 만물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죄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됩니다.

Charles Hodge는 그의 결론을 진술하기 이전에 어거스틴의 견해를 인용하였습니다.

G.I. 윌리암슨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에서 미국 연합장로교회를 언급합니다.

그들이 1925년에 새 신조를 작성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다”(14항)고 한 것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제쳐 놓고서”라고 적고 있습니다(136페이지).

그는 이 ‘새 신조’의 저자들이 알미니안주의를 싫어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지만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다르게 속죄에 대하여 진술하였다는 것입니다.

G.I. 윌리암슨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다르며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하이델베르그 교리 문답 그리고 도르트 신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만을 위하여 죽으셨고 택자에게만 그 효력이 미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칼빈주의자 사이에서도 속죄의 범위에 있어서 견해 차이가 있으며 둘 다 옳을 수는 없습니다.

속죄에 있어서 일반적인 견해는 보편 속죄(알미니안)와 제한 속죄(칼빈주의)입니다.

속죄의 효력에 있어서 알미니안은 ‘믿는 자’로 이야기하고 있고 칼빈주의는 ‘택자’라고 하여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두 주장이 구분되어 불리는 이유는 속죄의 범위에 대한 이해 차이 때문입니다.

알미니안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주장하기에 보편 속죄라고 불립니다.

칼빈주의에서는 그것을 반대하여 제한 속죄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 택자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속죄의 범위에 있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속죄와 관련하여 성경의 기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택한 자들만을 언급하는 경우입니다(마 1:21, 롬 8:32, 딛 2:14, 요일 4:10 등). 둘째는 모든 사람을 언급하는 경우입니다(롬 11:32, 딤전 2:6, 4:10, 딛 2:11, 히 2:9). 셋째로 속죄의 범위와 실제적인 효력을 누리는 택한 백성들을 함께 언급하는 경우입니다(벧전 3:18, 요일 2: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순종치 않은 모든 사람과 긍휼을 베풀려고 하시는 모든 사람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이란 죄 자체에 대한 값을 지불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이러한 말씀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그 원하심과 달리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서 속죄 사역의 은혜를 거부하는 인간들의 문제는 여전합니다만.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속죄물-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딤전 2:6).

여기에서의 기약이란 궁극적으로 최종 심판 때일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든 것들이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빌 2:10-11). 자신들을 위하여 스스로를 속전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이 죄이며 심판의 근거입니다. 자신들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는 전혀 없는 존재를 믿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제한 속죄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택한 자들 이외의 존재를 위하여 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위하여 한 일은 전혀 없으면서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에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 4:10).

여기에서 믿는 사람과 모든 사람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사람만의 구주이시지 않고 모든 사람의 구주이십니다. 그분이 그들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딛 2:11).

모든 사람을 택함 받은 사람들 모두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모든 사람들의 죄의 값을 지불하신 것이기에 가능한 말씀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보편 속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이렇게 많은데도 제한 속죄를 말하게 되었을까요?

속죄의 실제적인 효력을 누리는 내용을 말씀하는 본문들을 속죄에 대한 모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조점의 차이인데 말입니다.

또한 너무 논리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성경의 기록을 쓰여진 그대로 밝히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였는데, 논리를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선택이 있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이 택자로 제한되기에 속죄의 범위에 동일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반대하는 데에 너무 집중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알미니우스의 주장이 칼빈주의의 모든 것을 허문다고 판단하고서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 것 같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저의 추측입니다.

속죄에 대한 교리는 성경의 다른 주제와도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통일성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들을 통한 피조물의 회복입니다(롬 8:19-22).

피조물이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피조물의 회복을 꾀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전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무관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사역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만물의 통일과 충만입니다.

만물의 통일과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하여서 말씀되는 것입니다(골 1:20).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만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면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세 번째로 온 세상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불신자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못에 있게 됩니다.

죄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않고 섬기지도 않는 것으로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음이 죄가 되는 이유는 그분이 그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고 그 사역에 기초하여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통한 피조물의 회복, 만물의 통일과 충만, 세상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무관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목사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속죄 교리에서는 택자만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뼈대인 교리를 바르게 하는 것은 그 어떤 사안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코닷에는 총회의 총대로 참여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교리를 가지기 위한 문제 제기와 신학교수님들을 통한 재점검의 기회를 만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교리를 포함하여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개혁하는 것이 개혁주의자의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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