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이용해 자신의 이론을 주장함으로 교회를 혼란케 하고 분열시키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나게 하는 데 누가 책임이 있습니까? 신학자들 아닙니까? 신학자들의 책임입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고도의 학문적 기술을 사용해서 흑을 백으로도 바꾸고 백을 흑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신학자들 아닙니까? 자신의 세력을 위해서 교회를 해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에 대한 책임이 신학자들에게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힘을 위해 물질을 탐하는 자리에 빠지게 된 원인이 바로 신학자인 우리들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의 인도로 지난 411일 한울교회에서 드려진 2015년 봄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서 총신대 전 총장 김인환 목사의 설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인환 박사는 에베소서3:1-3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리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신학자들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함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한국교회를 살려야 할 사명이 있다고 외쳤다. 이 놀라운 비밀을 하나님과 공유하게 하게 된 우리들의 정체성을 바로 깨닫고 영광스런 존재임을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비밀을 위해서 기쁨으로 인생을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구원의 비밀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으로 다른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비밀을 세상에 알려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그리스도의 비밀로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고 습관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서 변화되어야 한다. 신학자들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비밀로 신학자들이 변화되면 신학이 바꾸게 되고, 신학생들이 바뀌고 한국교회가 새롭게 될 것이다. 참석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김인환 교수의 설교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 서철원 박사 서울대학교 및 동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 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와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하나님의 구속경륜』, 『복음과 율법의 관계』, 『하나님의 나라』, 『기독론』, 『성령신학』 등이 있다.

이어서 이어진 주제발표에서 학계 원로인 전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교수 서철원 박사는 장로교 개혁주의(개혁주의와 장로교)”라는 제목으로 개혁되어야 신학적 내용들을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음성으로 전했다. 비록 지면이지만 서박사의 강의를 듣는 심정으로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장로교 개혁주의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다. 서양에는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개혁신앙과 개혁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라는 말은 없다.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용어이이지만 장로교 개혁주의라는 말은 다분히 정치제도와 연관된 칼빈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몇 마디 살피고자 한다.

1. 장로제도

서박사는 사도행전 6장과 디모데전서 5장을 근거로 장로제도의 성경적 근거를 설명했다. 디모데전서에 나와 있는 장로를 목회자와 대조해서 이해하면 말씀을 전하는 장로와 달리 권징하고 권면하고 심방하는 장로가 분리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의 퇴장 후에 주교 혹은 감독들이 목회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직임과 다스리는 직임을 통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르치는 직임과 다스리는 직임의 통합은 감독정치로 변해서 교황제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고대 전통 교회들은 다 교황제를 갖게 되었다. 교황제아래서는 은혜와 믿음이 아니라 교황이 정한 대로 선행과 고행을 해야 구원 얻는 다는 점이 한결같이 강조되었다.

종교개혁은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확정하였다. 개혁교회는 이신칭의 교리를 따라 믿음생활을 말씀대로 하기 위해서 말씀선포에 전력하였다. 그리고 온 교회로 하여금 말씀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권면하는 일을 할 장로들을 세울 필요성을 느겼다. 그래서 감독이 아니라 심방하고 권면하는 일을하는 장로를 세웠다.

장로제도의 온전한 목적은 전체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하는데 있었다. 칼빈이 시작한 장로제도는 죤 낙스에 이해서 영국에 전파되어 장로회란 이름으로 교회를 조직하게 된었다. 장로회는 장로를 대표로 선출하여 대의정치를 하는 제도였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정치가 발생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였다. 그리하며 미국과 아시아 여러 나라 교회들이 장로제를 받아들였다. 한국에 들어온 장로회는 처음에는 미국교회 정신으로 잘 운영되다가 한국인들이 교회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첫째로 장로 선출에 있어서 헌금 많이 하는 재력가를 장로로 세웠다. 이렇게 선출된 장로들은 심방과 권고보다는 교회 제반 행정사항에 관여함으로 교회의 주인행세를 하고, 따라서 교회의 모든 권세가 다 당회로 집중되었다. 더 이상 대의정치가 아니고 소수의 중앙 집중적 정치제가 되었다. 집단 감독제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교회에서 말씀의 권위는 사라지고 당회의 정치적 결정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말씀대로 살도록 권면하는 장로의 직임은 사라지고 행정력을 발휘하는 치리장로의 모습만 강조되었다. 개혁신학의 원리대로 한국교회의 장로제는 치리장로에서 권면장로로 그 무게 중심이 옮겨져야 한다. 장로들로 하여금 본래의 직임 곧 권면하는 일을 하게 하려면 목사들이 복음을 선포해야만 한다. 교회성장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지난 30-40년 동안 강단에서 복음이 사라졌다.

 

2. 말씀선포

한국교회는 칼빈주의의 가르침대로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모든 성경을 본문 그대로 설교하고 가르쳐야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 전체를 남김없이 다 설교하되 글자대로 가르쳐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칼빈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로 설교할 때 글자대로 풀이하고 가르쳐서 교훈을 주는 것을 바른 설교로 여겨왔다.

그러므로 설교할 때 복음 선포를 해야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성경본문 주해만을 주력하였다. 그래서 설교를 해도 아무런 감동과 변화를 가져올 수 없었다. 설교는 율법적인 문자적 해석에 불과하였다. 성경대로 정통적인 설교를 하였지만 문자적인 해설에 불과하여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제시할 수 없었다.

한국장로교회는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과 삶의 유일한 법칙으로 받았다. 자연히 율법을 지켜야 마땅한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때문에 제사만 하지 않을 뿐이고 모든 의식과 날자와 경절들을 그대로 다 키켜야할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잘 믿는 것은 교회 출석 잘하고 교회봉사를 많이 하며 목사에게 봉사를 많이 하면 되는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이지 예수 믿는 것이 아니었다. 율법과 구약이 설교와 삶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러다가 한국교회는 구약이 약속한 세상적인 복에 착안하였다. 그래서 선행을 많이 하고 교회봉사를 잘하면 목사를 잘 섬기면 세상적으로 복을 받아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물질적인 풍요가 넘쳐나게 되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래서 복음 선포의 자리에 축복설교가 완전히 자리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예수 믿어 어떻게 복을 받아 잘 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정착하였다. 그래서 한국사회가 부요해지고 교회도 돈이 많아져서 목회자들이 돈에 중독되어 돈을 위해서 목회하고 설교하게 되었다. 돈이 많아지면 자연적으로 성적 범죄에 이르게 된다. 지금 한국교회는 사회를 향해서 아무런 선지자적인 외침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교회가 빛을 잃었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발에 밟히는 가증한 존재가 되었다.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설교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사역을 선포하는 것이다. 설교를 바꾸아야한다. 복음만을 선포해야 한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음을 선포하였다. 이 복음 선포에 성령이 역사함으로 듣는 사람들 가운데 기쁨과 감격이 터져 나왔다. 이런 일은 사도들이 선포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 선포에 성령이 역사하시므로 초대교회의 기적이 일어났다. 축복설교와 글자풀이는 이제 중단하고 설교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구원사역을 선포해야한다. 그러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기적들이 일어나 설교자도 놀랄 것이다. 서박사의 선지자적 외침을 경청하는 학자들로 인해 학회장은 조용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3. 예정교리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하신다. 하나님은 홀로 창조사역을 하셨다. 또 하나님은 구원사역도 홀로 이루셨다.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구원을 거저 주신다. 은혜의 주권성의 강조가 개혁신학에서 많이 진행되었다. 은혜의 주권성의 강조는 하나님의 예정 곧 선택교리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결단코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칼빈의 가르침에 타락전 선택설로 이해될 부분이 많다. 죄와 무관하게 사람은 선택되었고 그렇게 선택된 사람들은 구원에 이른다.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을 믿어 구원얻도록 선택하였음은 전혀 고려하지 못하였다. 다 알다시피 한국에 복음이 들어올 때는 나라의 기운이 다 기울었다. 광복 후에도 가난은 쉽게 벗을 수가 없었다. 이런 극한의 삶에서 장로교회가 전하고 가르치는 예정교리는 백성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비록 가난하고 천대받는 상황에 처했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택하셨다는 믿음은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비록 현생에서는 어렵게 살더라도 택함 받은 나는 하나님 나라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영생과 영광을 누리고 살게 될 것이란 소망이 어려운 백성들을 붙들었다.

선택교리 혹은 예정교리가 고난 받는 한국민들을 크게 위로하고 힘이 되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삶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선택교리는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공급하였다. 선택교리를 가르치는 장로교회가 한국에서 크게 번성하고 번창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교리의 가르침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리하여 예정교리가 더욱 강하게 가르쳐졌다.

그러나 예정교리는 많은 혼란과 혼동을 가져왔다. 죄와 상관없이 선택 혹은 예정을 전제하면 복음을 믿는 믿음 없이도 구원에 이른다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예정 혹은 선택된 사람들은 무조건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죄와 무관하게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는 설정이 문제이다.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 죄와 무관하게 선택하셨다고 가르쳤다. 칼빈의 글은 그렇게 전개되고 있다. 칼빈은 죄는 언급도 하지 않으면서 선택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 자체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믿어서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심을 말한다.

그렇지 않고 선택된 자들은 어떻든지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은 예수 믿지 않고도 구원될 수 있다는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다른 귀결을 낳을 수도 있다. 선택교리를 무조건적인 구원으로의 작정으로 이해하면 안 될 것이다.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작정하심으로 이해해야한다.

 

4. 언약사상

개혁교회는 언약사상을 체계화하여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신학의 요목으로 설정하고 있다.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이 은혜언약을 공식화하였다. 그리고 은혜로 구원얻는 하나님의 섭리에 반해서 구약백성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칼빈은 언약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였지만 언약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한 번도 밝히지 못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이 언약의 바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공식화하였다. 이 언약사상이 17세기 중반에 체계화되어 널리 퍼지고 개혁신학의 중심적인 사상이 되었다. 그 후 거의 소실되었다가 20세기 초에 다시 살아났다. 한국교회에서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라고 가르치는 은혜언약 사상은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행위언약에 대한 가르침도 신학교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경향성이 생겨났다. 구약백성들이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렀으면 지금도 율법을 지키고 행함으로 구원얻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많은 장로교도들의 가슴에 일어났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는다는 교리에 반하여, 율법을 지킴과 행함도 합당한 구원의 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라는 생각이 흐려지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전적으로 허무는 것이다.

그릇된 신학을 고치고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확실하게 세우는 길은 언약사상을 성경대로 바꾸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해 아무런 의식이 없었던 구약백성들은 율법으로 세워진 제사만 드렸다. 그들이 구원 얻은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시간을 역행해서 그들의 제사에 적용됨으로 구원받았다(11:40). 구약 백성들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 것이다. 언약은 행위언약이나 은혜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되기로 한 약정임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적인 언약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만이 사변을 없애고 바른 성경적인 신학을 전개할 수 있다.

 

5. 성화강조

종교개혁은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정하였다. 이신칭의 교리만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들었고 만들고 있다. 루터교회는 이신칭의 교리를 시작한 교회이므로 이신칭의 교리에 전적으로 부착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이신칭의를 불변의 교리로 받지만 성화를 강조하는 자리로 진보하였다. 성화강조에서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세워졌다.

그런데 성경적인 성화법은 제시하지 못하고 성화를 강조하였다. 단지 옛사람을 죽이면 새사람이 살아나고 새사람을 살리면 엣사람이 죽는다고 칼빈이 가르쳤다. 이 가르침을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그대로 반복하였다. 그리하여 죤 오웬도 그대로 반복할 뿐이었다.

한국장로교회에서도 시작단계에서는 성화가 강조되고 엄격하게 주장되어서 범죄하면 합당한 권징을 받았다. 그래서 죄의 욕망으로 떨어지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어떤 설교자도 죄의 욕망으로 넘어가지 않는 법을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믿을 때 은혜로 구원받아 누리는 기쁨과 감격과 평안이 믿음 생활을 하면서 점점 없어졌다. 처음 믿을 때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받아서 기쁘고 즐거웠다. 그러나 믿음의 생활에서는 죄와 싸우느라 기쁨과 평안도 다 없어졌다. 그런 싸움에서 어떤 승리 혹은 이김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단지 옛사람과 싸워 이기는 법이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 뿐이다.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행함으로가 아니고 주의 진리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아버지에게서 온 진리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사도요한은 죄를 이기는 법을 명시한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요일1:7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자로서 죄의 욕망이 일 때 주 예수의 피가 나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선언하므로 우리의 죄욕망이 다 사라지게 한다는 말씀이다.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들어가지 못하게 깨끗하게 한다는 말씀이다. 죄의 욕망이 일 때 주 예수의 피가 나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선언하면 이 말씀에 성령이 역사하므로 죄의 욕망이 다 사라진다. 이 방법으로만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지난 2천년 동안 우리의 힘으로 옛사람을 이기려고 온갖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어떤 영웅적인 힘을 가진 사람도 옛사람의 욕망을 이길 수 없다.

▲ 단체사진

서철원박사는 강의를 이렇게 끝맺는다. “개혁신학에도 성경대로 고칠 부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가 볼 때 그는 정치제도(장로제도)와 설교 뿐만아니라, 예정교리, 언약사상, 성화와 같은 핵심 교리들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조금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안 팎의 대대적인 수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강의 가운데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자주 등장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신학의 문제이고 신학자의 문제라고 분명하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바로 신학의 문제라고 외치는 원로학자의 음성에 현역학자들은 어떻게 반응할지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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