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
한국은 다종교 사회이면서도 종교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은 나라 가운데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한국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주도적인 종교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19세기말 20세기초 유교 국가가 무너지면서 지배적 종교가 이 땅에는 없었습니다. 종교는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이제 불교와 기독교 인구가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수적으로는 불교 신자가 조금 많다고 하지만 사회적 영향력이나 노출의 정도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우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충돌 가능성은 과거보다 훨씬 크진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불교인이든 그리스도인들 다른 생각, 다른 태도,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러 사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는 서로 거래하고 삶을 나누면서도 타종교 문제가 거론되거나 얘기될 때는 대부분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불교 신자나 기독교 신자에게 다같이 볼 수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종교 다원주의’를 대안으로 제안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교학자들이나 일부 신학자들의 연구와 토론에 제한되었으나 이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정한 태도 결정을 요구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종교 다원주의 수용을 해결안으로 보는 이유는 갈등의 소지를 기독교의 이른바 ‘배타주의’에서 찾기 때문입니다(‘배타주의’란 이름이 다원주의의 관점에서 붙여진 이름임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배타주의를 벗어나 다원주의의 입장을 취해야 하고, 다원주의 입장을 취할 때 종교 간의 평화가 보장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취할 길인가, 그리고 현실적으로 평화를 가져다 줄 길인가를 생각해 보기 전에 ‘다원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를 먼저 해 봅시다. 그 다음, 종교 다원주의가 기독교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태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먼저 '다원주의'(pluralism)란 말을 봅시다. 다원주의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 이상’, ‘여럿’이 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단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가 있다는 일종의 ‘복수주의’(many-ism)가 다원주의입니다. 분야에 따라서 인식론적 다원주의, 윤리적 다원주의, 종교적 다원주의, 미적 다원주의, 사회적 다원주의 여러 가지 다원주의 형태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다원주의의 공통적인 것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 다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타당한 지식 체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 이상 있다고 보면 인식론적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고, 윤리 체계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있다고 보면 윤리적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와 구원의 길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보면 종교 다원주의가 됩니다.
다원주의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느냐, 아니면 그렇게 되어야 할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서술적(descriptive)인 의미의 다원주의와 규범적(prescriptive)인 의미의 다원주의로 나뉘게 됩니다. 서술적 다원주의란 현실적 상황을 볼 때 여러 가지 종교, 여러 가지 인식 체계, 여러 가지 윤리 규범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곳에는 일부일처제가, 또 어떤 곳에는 일부다처제가 있다고 할 때 가족 형성의 방식에서 다원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주어진 현실이 그렇다고 서술해 낸다는 의미에서 서술적 다원주의라 부를 수 있습니다. 가족 형성의 방식은 일부일처보다는 일부다처제, 또는 다부일처제 등도 바람직하다고 말하면 규범적 의미가 되므로 규범적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종교도 하나가 아니라 불교, 기독교, 이슬람 등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단지 서술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서술적 의미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된다. 그런데 “종교가 여럿 있는 것이 좋다”, “어떤 종교를 통해서나 구원받을 수 있다”,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규범적 의미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됩니다. 어떤 차원에서 다원주의를 말하는가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종교를 통해서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는 ‘종교 다원주의’는 규범적 의미에 한정하고, 서술적 의미의 다원주의, 곧 우리는 현재 다양한 종교들이 주어진 상황에 살고 있다는 의미의 다원주의는 차라리 ‘종교 다원적 상황’으로 표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종교 다원주의의 경우, 종교가 여럿 있다는 자체를 서술하는 서술적 의미의 다원주의, 곧 우리가 “종교 다원적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보는 입장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이 종교가 여럿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되는 다원주의는 세계관과 가치관과 관련해서 규범적으로 그와 같은 다원주의가 바람직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종교 다원주의가 종교 다원적 상황에서 가능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안되고 있음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종교 다원주의 주장을 따른다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 6)라고 하신 말씀을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다원주의가 옳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준 여러 통로 가운데 하나의 통로일 뿐 유일한 통로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시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죄를 대속한 대속주로 볼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무엇이고, 복음은 무엇입니까?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것을 삭제하고도 종교로서 남아 타종교와의 공동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나는 계시의 역사적 제약성이라든지, 하나님은 어느 종교에나 계신다든지, 인간 이해의 유한성이라든지 하는, 근대 철학과 더불어 등장한 생각들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의 오류 가능성이라든지, 역사상에 보인 교회의 배타성이라든지 억압성 등도 인정합니다. 서구 기독교를 포함하여 기독교가 때로는 타문화에 대해 배타적이고 억압적으로 나타난 경우도 인정합니다. 역사상의 기독교는 칭찬받을 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면도 많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일을 포기하고, 자신의 관점과 신앙이 상대적임을 인정하고 타종교와의 대화와 공존을 요구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의 동기 가운데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 간의 평화를 통해 세계의 평화를 이루자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는 없다”는 한스 큉의 말을 이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서 납득할 수 없는 일은 과연 한 종교의 핵심을 이루는 믿음을 제거하고서 종교가 가능하며, 그렇게 거세된 종교간의 평화가 인류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 물어보게 됩니다. 종교는 위안을 주기도 하지만 갈등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하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적 갈등이라는 것은 심하게 정치화된 종교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 아닌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정치화된 종교의 폭력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 가르침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가정이고 지나친 비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교 중에서 가장 포용주의적인 종교인 힌두교를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40년 간 선교사로 활동했던 레슬리 뉴비긴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원주의와 포용주의를 주장하는 이유는 보통 인류의 하나됨에 최우선을 두기 때문이다. 특히 핵전쟁과 환경 파괴의 위협으로 인해 그 필요성이 더욱 증대 되었다. 물론 우리도 그런 필요성에 공감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게 공감한다고 해서 그런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실마리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며, 종교가 그것을 이룩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의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중략) 우리는 인류 공동체로서 함께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만큼 갈 길을 알아야 한다. 모든 길이 동일한 산꼭대기로 통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절벽으로 향하는 길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길을 발견했다. 이 지식을 그저 우리만을 위한 사적인 문제로 취급할 수 없다. 인류 가족 전체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민족의 구원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를 감히 제한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계시되느라 값비싼 대가가 치러졌고 또 그 화해의 사역이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준만큼, 우리도 그 길과 그 목표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안목을 동료 순례자들과 함께 나누어야 마땅하다.
제가 제안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불교 신자와 무교 신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 즉 종교 다원적 상황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의 다름을 현실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입니다. 타종교인들의 신앙과 종교 행위를 그들의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갈등의 소지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서로 지향하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음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동시에 인정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나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말하듯이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무교가 같은 구원을 찾아,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른 길을 통해 동일한 목적에 도달하는 종교인가 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각 종교들이 다 같이 구원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만일 구원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다릅니다. 예컨대 유교가 지향하는 구원은, 만일 구원이란 말을 붙인다면, '내성외왕'(內聖外王), 안으로는 성인이 되고 밖으로는 사람을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 다시 말해 '수기치인'(修己治人)입니다.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선불교 용어로 이야기하면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율법과 사망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각 종교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방식도 다릅니다.
그런데 이 종교들을 각각 동일한 목적을 향해 나가는 다른 길이라는 명분아래 만일 각각 다른 종교와 상충되는 주장에 대해서는 침묵하게 한다면 그것은 어느 종교에 대해서도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 종교는 자신들의 종교를 공적으로 선포하고, 증언하되, 증언하는 방식은 앞 장에서 공통의 도덕을 다룰 때 주장한 것처럼 황금률을 따라 평화롭게 진행하면 됩니다. 토론은 열려 있어야 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바람직한 태도로 다음 세 가지를 얘기하고자 합니다.
1. 우선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는 태도는 타종교에 대한 존경입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에서 16절 말씀을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온유한 태도요 마음입니다. 부드럽고 신사적인 태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온유는 예수의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두려움, 곧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선한 양심을 가지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불상을 훼손한다든지 집회를 방해한다든지, 절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규모 있고, 평화롭게, 상식을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자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원하시는 것은 화평이요 평화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2절을 보면 화평함, 곧 평화를 나눔과 과 거룩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아는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나라의 화평(평화)을 위해 기도할 것을 당부합니다.
2. 두 번째는 “너희의 소망을 두고 있는 것에 관한 이유”(logon peri tes en humin elpidos)를 묻는 자에게 대답(apologia)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라는 말씀처럼, 믿는 근거, 믿는 이유(logos)를 만일 타종교인이 원한다면 증거하고, 설명하고, 토론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일입니다. 불자와 기독 신자는 자신이 믿는 바를 서로 얘기하고, 서로 경청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자든 기독신자든 먼저 윤리적으로 타자(他者)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자신이 소망을 둔 바에 대해서 만일 근거와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종교 다원주의가 전제하는 인간 존재의 역사성과 유한성 때문에 상호간의 증거와 논증, 토론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의존하는 경전이 다르고 전통이 다르지만 참된 것에 대한 갈망, 선한 것에 대한 갈망,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갈망은 기독 신자나 불자에게 다 같이 있기 때문에 서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이 주어져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한국 기독교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반지성주의가 극복되지 않으면 이러한 태도로 임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무조건 믿는 것이 신앙인줄 압니다. 그러나 이제는 “믿었으면 힘써 알아야지!”하는 신앙 태도를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가져야 합니다.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말에 이어 안셀무스는 ‘알고자 하는 신앙’,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이 단계에서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이 힘써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 세 번째는 베드로 전서 3장 15절에서 “너희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일상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입니다. 구원은 죄로 왜곡된 삶의 회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일상적 삶을 회복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 정서는 감사일 것입니다. 만일 일상의 삶을 감사(eucharistia)하는 마음으로 회복하는 삶을 산다면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삶을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 곧 은혜(charis)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의 거룩성의 회복, 이것이 제자도를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절실한 요청입니다. 다원적 상황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참됨을 증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빛의 열매(선함과 공정함과 진실함)를 맺음으로 거룩성을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 다원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저의 결론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1) 여러 종교들이 함께 주어져 있는 종교 다원적 상황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2) 삶의 모든 부분에서 선하고 의롭고, 진실된 삶을 실천하여 주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3) 자신이 소망을 두고 있는 근거,이유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변호할 수 있는 준비를 하되, (4) 이 모든 증거와 설득을 온유와 존경심,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확신을 갖되, 시민적 교양과 상식을 가지고 타인과 타종교를 대하는 그리스도인. 타인을 용납하고 관용을 보이되, 그럼에도 확신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 이것이 다원 사회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