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한 논문을 그저 조용히 읽어내려 가는 식의 발표였지만 국제회의장을 가득 채운 청중들은 강의에 몰입되고 있었다. 서정운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총장은 신학과 선교신학이 지나치게 학술적 업적 위주로 이론화하면서 소모적인 논쟁에 빠지고 교회가 비선교적으로 세속화하고 경직되면서 노쇠하고 있는데도 선교사의 수나 자랑하고 반복되는 전략회의와 중복되는 프로젝트 제시나 행사에 매달려 시간과 비용과 힘을 탕진하는 경향까지 더해져서 선교를 더욱 악화, 그리고 약화시켰다고 주장했다.

16회 장로회신학대학교 국제학술대회가 “21세기 아시아 태평양 신학과 실천이라는 주제로 지난 512일부터 13일까지 장로회 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에서 열렸다. 김명용 장로회신학대학 총장의 환영사에 이어서 서정운 명예총장이 아시아 선교신학의 모색과 나눔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이어갔다. 서목사의 강의를 간략하게 들어보자.

▲ 서정운 명예총장이 발표하고 있다.

아시아 선교 상황: 마삼락(Samuel Moffett)1996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행한 아시아에서 기독교는 실패했는가?”라는 강연에서 1995년의 통계(IBMR)를 들어 아시아 기독교인의 비율을 7%에 불과하다 했는데, 20년이 지난 현재 같은 기관의 자료는 5.1%에 그치고 있다. 이렇듯 아시아 선교가 부진한 이유에 대해 그동안 적지않은 사람들이 연구했는데 비슷한 사실들을 지적했었다. 예를 들면, 중국 선교에 경험을 가지고 미국에서 선교신학을 가르쳤던 케인(H. Kane)(1)오래된 전통과 발달된 문화의 저항 (2)고등종교들과 오래되고 깊은 사회적, 종교적 관습에서 오는 반대 (3)서양 식민지 통치와 기독교 선교와의 관계로 인한 비서구적, 반기독교적, 민족적, 애국주의적 감정 (4)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한 반발 등을 들었다.

이에 덧붙여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선교사의 문제다. 선교신학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큰 과오로 꼽는 서양 선교사들의 우월감(경제적, 교육적,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이 문제였다. 어느나라 선교사이든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선교의 본질에 철저하지 못한 것이었다. 선교의 근본원리에 바로 서서 직진하지 않고 불완전한 신학과 불확실한 전략과 기획과 낭만적 모험과 이기적 야망까지 섞인 자태로 우왕좌왕해온 경향이 있었다.

우리의 선교신학은 괜찮은가?: 모든 신학은 하나님의 성품과 구원의 목표와 의도와 차원과 그것들을 실천하는 열정과 용기를 뿜어내는 역동성(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 같은 요소가 없는 신학은 살아있는 신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교가 신학의 어머니”(M. Kähler)라는 말이 옳다. 선교신학은 모든 신학의 중심인 그 선교를 탐구하고 실천으로 체득한 바를 나누어 선교를 바로 하게 할 뿐 아니라 기독교신학을 정립(正立)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다음의 몇 가지가 그것의 기본이라 본다.

구원받아야 되는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간은 인간에 불과하고, 우리의 출생과 신분과 처지는 다양해도 우리가 근본적으로 영적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철새와 같다. 인간인 한 우리는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을 주기적으로 왕래한다. ‘여기와 지금이라는 세상에서 초월적이고 신비한 세상으로 움직인다. 만일 이 두 세계 중 한 곳에만 살도록 강요되면 인간은 불안해하고 방향을 잃게 된다라고 했던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의 말이 맞다.

그러므로 알렌(Rolland Allen)이 바로 지적했듯이, 인간 정체성의 근본적인 기초는 문화적이 아니고 신학적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처음과 마지막 대상인 인간의 가장 절실한 구원의 문제와 인간을 위해 독생자를 성육신시켜 속죄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목표가 적중하여 선교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성육신적 선교: 선교의 원리는 이미 제시되었다. 아시아뿐 아니라 천하만민과 열방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복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모든 문화와 시대를 통하여 우리가 추구하는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와 내용으로 하고 그 방식은 성육신적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쉥크(W. Shenk)의 말에 선교의 요체가 농축되어 있다.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교의 모델이다.

그러므로 모든 진정한 선교는 성육신적이며 그것이 유일한 선교의 모델(J. Stott)이고 성육신이 선교의 내용, 방식이기 때문에(D.L. Guder) 선교는 지속적인 성육신(ongoing incarnation)이다(K. Barth).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라 무엇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라는 본회퍼의 질타가 선교신학과 선교에도 가해질 수 있는 것이다

▲ 장로회신학대학교 국제학술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성육신적 선교의 방식: 우리의 방식은 하나님의 선교방식의 기본인 성육신적 선교에 복종하고 동참하는 것이다. 그 예수는 돌로 떡을 만들기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마력적이라기보다, 높은 산에서 본 천하의 영광을 불의하게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들 중에 섬기는 자로 계시다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덮어쓰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다. 세속적 기준으로는 어리석고 약하고 무력한 메시아였다. 그것이 구원자의 힘이었다.

바울이 그 예수를 배워 내가 약할 때 내가 강하다”(고후 12:10)라고 하였다.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이고 현실이며 선교의 기본적인 규범이다. 용서와 사랑과 평화로 일관하는 어리석고 약하고 힘없는 영성(weak and powerless spirituality)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샬롬 영성(shalom spirituality)이다. 이 같은 영성의 실천이 성육신적 선교방식이다.

현장화(Contextualization): 성육신적인 선교는 현장화와 직결된다. 복음이 불변의 진리이지만 특정지역의 언어와 사고방식과 관습속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수용되기 위해서 현장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창시자의 언어가 없이 확산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의 모국어로 기록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자신의 언어를 포기했는데 그것은 그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네(L. Sanneh)의 정확한 통찰대로 선교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지리적, 인종적, 문화적으로 특정한 전형 없이 진행되었다.

현장을 뜻하는 context란 말은 라틴어 cum이라는 말과 text(동사는 texture)에서 온 것으로 함께 짠다는 뜻이다(O. Costas). 시간과 공간을 합친 개념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같아도 공간이 다르면 현장이 다르고 공간은 같아도 시간이 다르면 그 현장은 같지 않은 것이다. 그 시간, 그 자리가 합친 것이 현장이다. 그러므로 현장과 무관한 선교신학은 무의미하고 무력하고 공허하다.

성령의 능력과 은혜: 성부가 성자를 파송하였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파송하였다. 마지막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교회)를 세상에 파송하였다. 선교는 성령의 지도와 은사와 능력 없이는 작동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고 하면서 숨을 내쉬고 성령을 받으라”(20:22)고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와 내용으로 하고 성육신적 방식으로 현장화하면서 수행하는 선교는 성령의 능력과 인도와 도움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선교가 항상 성령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거룩한 자태와 감화력을 불가결의 요소로 수반해야 할 것이다.

나눔에 대하여: 선교는 동역이다. 일방적인 구조는 없다. 하나님도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누어 역사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사명을 나누어주어 일하신다. 우리도 늘 섬기고 나누면서 함께 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의 나눔을 위해 나눌 것이 있어야 한다. 우선 우리 모두가 우리의 현실 속에서 모범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라일리(Michael C. Reilly)의 말대로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를 초월하여 사역하지만 역사적으로 가시적인 선교의 실현과 지속을 하게 하는 기본적인 기구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동지적 우애형성과 동역: 진정한 일체감은 이지적이고 관념적이라기보다 우선 정서적 차원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냈다. 그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compassion) 여기셨다(9:35).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후 5:14)고 하였다. ()이다. 우리를 전보다 더욱 분주하게 만드는 현대인의 삶과 급속히 발전하는 교통 통신 수단이나 경제적 성장이 한편으로는 우리를 편리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형성이나 감동적인 삶의 체험을 서로 나누고 협조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최근 폭발적으로 늘고있는 한국교회의 단기선교 행태는 대개 일방적이고 피상적인 운행으로서 지속적인 동지적 우애형성을 저해하는 경우가 많다. 근본적인 반성과 탈바꿈이 필요하다.

유랑하라: 교회는 정착하여 축적하고 고정되는 고질병이 있다. 이는 교회가 쇠퇴하는 공식이다. 교회는 유랑해야 한다. 교회가 사도적인 것이라는 말에는 유랑적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도 세상에 왔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나가라고 하였다. 복음은 사도들과 선교사들과 포로들, 개척자, 피란민, 이민자 등 유랑하는 자들에 의해서 세계도처로 퍼졌다. 이렇듯 교회는 항상 안정과 정착과 현상유지와 자원의 축적에 몰두하기 쉬운 세속적 노예근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유동하는 유랑자의 기질과 존재양식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고 복음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마침내 매우 값비싼 은총의 세계로의 진입을 뜻한다. 이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나눔을 통한 자기비움(kenosis)의 실행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선교는 자기가 살면 죽고 자기가 죽으면 사는 오묘한 역설의 길을 가는 거룩한 순례이다.

1999116일 미국 버지니아의 폴스 처치(Falls Church)에서 열렸던 미국장로교 총회선교부가 주관한 선교모임에서 마삼락이 미국교회 대표로 강의했다. 새 천년기(2,000년대) 선교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한국교회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2,000년대의 선교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라!”(Never give up!)고 했다. 그것이 내가 들은 그의 마지막 강의였다. 목청을 높여 간곡하게 부탁한 이 말이 우리에게 유언으로 남았다. 앞으로도 아시아에서 기독교인은 소수자일 것 같고 기독교 이후 시대라는 세속화의 격랑과 인본적 백가쟁명식 신학의 혼미와 온갖 값싼 은혜의 강조와 유행과 사이비종파들의 창궐과 물량주의 횡포와 타종교들의 저항 등으로 선교가 전보다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포기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고 그가 그의 뜻을 따라 이루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겸손하고 단순하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동일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와 함께, 성령의 인도와 위로와 격려와 능력을 의지하여 순종하고 헌신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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