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다음세대를 위한 인재발전소를 추구하는 청어람ARMC(대표:양희송)가 주최하는 제6회 청년사역 컨퍼런스가 “청년을 위한 교회는 없다”라는 주제로 백주년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지난 4월 30일에 열렸다. 주제 강연자로 선 사회학자 엄기호교수(덕성여대)는 오늘날의 청년들을 무기력한 세대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라고 주장했다.
현 사회에 대한 청년세대의 심각한 불만은 사회에 대한 심각한 불만
엄기호교수는 이 시대의 청년들이 무기력하게 보이는 것은 현 사회에 대한 청년세대의 심각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청년들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노력해봤자 쓸모없다는 것이다. 내가 노력한다고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 사회를 과격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바뀔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희망이 없고 기쁨이 없다. 기쁨이 너무도 중요한 가치 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청년들은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덜 괴롭기 위해서 산다. 덜 괴롭기위해서 위축된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냉소적으로 살아간다. 덜 괴롭기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보인다.
1990년 이전 대학 진학률은 10%에서 30% 사이였다. 공부해야 출세하고 공부해야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당시 청년들은 공부했다. 힘들고 어려워도 인내하며 열심히 공부하면 자신으로 인해 부모가 기뻐했고 가족들이 기뻐했다. 기쁨 중에 가장 큰 기쁨이 남을 기쁘게 하는 기쁨인데 그런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 볼 수 있는 세대였다.
1990년에서 1997년에 청년 사역의 초점은 자아실현으로 옮겨갔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서 성공하라고 가르쳤다. 너의 꿈을 찾고 너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지 못한 청년들, 꿈을 찾지 못한 청년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확실한 꿈이 없는 청년들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조급하게 자신의 꿈을 찾아 방황하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자아실현이란 초조하고 조급한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가치이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카이로스의 충만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여유가 없고 초조한 청년들은 자아실현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자아실현은커녕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닥쳤다. 청년들의 가장 큰 이유는 이제 생존이 되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되었지만 뚜렷한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어나올 수 없는 늪과같은 사회에서 그들은 “달관세대”가 되었다. 희망도 꿈도 달관하고 기쁨도 달관하고 속세를 떠나 자시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저 덜 괴롭기 위해 세상을 떠나 위축된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나와 상관있는 몇몇 사람들 속에 살면서 자기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세대가 되었다. 그 주체화는 세상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과잉주체화이다. 작은 예수가 돼서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스스로 예수라고 생각하는 현상이 과잉주체화이다. 세상이 너무 잘못되었으니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소리치지만 스스로 근본이 되고자하는 세대이다.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이아니라 스스로 역사의 근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무기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과격함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 이슬람 과격 테러 단체 IS같은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이슬람의 역사를 거부하면서 스스로를 신화적 주체로 만들며 과격화되었고 점점 더 과격화 될 것이다. 청년세대의 과격화는 전 지구적 현상인데 서구의 경우에는 사회 자체를 적대시하고 날려버리려는(reset) 욕망으로 전환된다. 리셋은 사회를 고치고 변혁하겠다는 욕망과는 다르다. 이 사회는 근본적으로 틀렸기 때문에 가망이 없다. 가능한 것은 개조나 변혁이 아니라 한 번에 날려버리고 다시 원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알카에다나 이슬람 국가 IS에 매료되는 서구사회의 청년들의 욕망은 자신의 인생도,사회도 원점에서부터 다시 출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이런 청년들의 과격화는 사회 곳곳에서 감지되고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일베와 같은 극단적인 공간의 출현이다. 일베는 전라도, 여성, 장애인, 이주자들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를 거리낌 없이 표출함으로써 이를 둘러싸고 사회적 적대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들의 혐오 발언도 그 자체로 문제이지만 동시에 이것이 반대쪽의 분노를 격화시킴으로써 사회적 갈등은 화해불가능한 적대의 양상으로 심화되는 것이다. 이런 양상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이를 통제하고 관리할 능력과 방법은 부재하게 되고 사회는 분노로 가득 찬 위험한 공간이 된다.
무기력하면서도 과격한 이세대의 바닥에 깔려있는 정서는 다 같이 죽자는 물귀신 작전 비슷하다.삶은 살벌하고 나는 너무 힘든데 너는 왜 사회로부터 특혜를 받느냐 너도 힘들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들은 약자보호조치를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여성들 때문에 나의 자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고,장애인들 때문에 세금을 빼앗긴다고 생각하고,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서 적대감을 품고, 심지어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해서도 공격한다. 이들은 혐오와 증오라는 말로 공정함을 설명한다.
무기력함으로 표출되는 과격함이라는 관점에서 청년정책을 재검검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대책은 대체적으로 청년들을 사회에 통합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거나 청년들이 서로 모여 자신들만의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만남과 공간, 그리고 창업이나 취업의 플랫폼(platform)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적인 방향이었다.
이런 청년 대책은 대체로 일하지 않는 청년들, 특히 사회 경제적으로 배제되어 있고 불만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요컨대 불만을 잠재우고 긍정적이 되게 하여 활력을 가지고 사회에 통합시키는 것이 대체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청년 활성화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활성화 프로그램들이 청년들에게 별 효과가 없다고 한다. 왜 그럴까? 대다수의 청년들은 무기력해서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활력화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이런 종류의 경험들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파악해버렸기 때문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과거에는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면 자기들끼리 의기투합하며 뭔가 일이 벌어졌는데 지금은 모이지도 않거니와 모아놓는다고 해서 그 어떤 일도 잘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엄교수는 꼬뮤니타스(comunitas) 즉, 참된 공동체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게토화 되어있는 고립된 자기들만의 유사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참된 공동체가 필요하다. 암세포와 같은 게토화된 유사 공동체에 머물고 있는 청년들을 다른 사람과 협력하며 사회에 참여하여 바꾸어 내는 주체, 즉 시민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엄교수는 청년이라는 용어로 청년세대를 구별하는 시도자체가 별로 좋지 않다고 진단했다.
그러고 보니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청장년층이라고 해서 청년과 장년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관점이 한국교회 내에 있었다. 30대 후반 어떤 경우에는 40대 초반도 청년이라 불렸고 청장년들을 위한 주일학교가 있어서 주일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함께 성경공부를 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20대 후반의 청년이라도 신앙이 좋으면 집사로 임명하고 교회를 이끄는 일원이 되었다. 엄교수는 청년들을 동시대인으로 부르는게 좋다고 하면서, 청년들에게 무슨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청년들을 동시대인으로 당대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시민으로 받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사회학적 통찰은 교회에서도 통한다고 생각한다. 청년을 교회로 세워야 한다. 청년은 교육의 대상이고 교인은 목회의 대상이라는 이중구도를 버려야 한다.
시민을 만드는데 실패한 사회가 지속될 수 없듯이 청년을 교인으로 만들지 못하는 교회는 희망이 없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그 교회의 교인이 아니라 그 교회의 서비스를 받는 손님에 불과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바뀔 것 같지 않아서 무기력해지고 동시에 과격화된 청년들에게 교회는 바뀔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희망이다. 함께 배우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훈련받고, 함께 의논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섬김으로, 청년들과 함께 새로워지는 교회가 이 땅의 희망이요 기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