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수인(囚人)돌봄이 김차숙 여사의 헌신적 삶 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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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들어가는 말∣ 지난해 2014년 12월 24일 성탄 전날 오후였다. 필자와 오래전부터 약속된 가운데 이근삼 박사의 부인 조용진 사모를 거처가 가까운 송도 고신의대 교정에서 뵈옵고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인터뷰를 하였다. 이 글은 조용진 사모님이 작성한 원고와 취재 중 증언하신 내용과 기타 취득한 각종 자료에 근거하여 작성된 글이다. 많은 분들의 지도와 협조에 감사를 드린다.(1)
1. 연구 목적∣
이 연구는 대한예수교 장로회(고려파)교회의 태동에 얽힌 현대사 연구와 한국교회사적 조명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한국교회가 알아야할 권리와 그리스도의 몸된 한국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연구한 글이다. 이글은 어느 개인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밝혀 왜곡된 고신교회의 현대사를 바르게 기술하고, 후대에 정확하게 전수토록 하기 위해 이글을 써노라. 이 글은 학술적 연구를 목표로 하는 만큼, 공감하지 않는 부문에 대해서는 반론을 통해 수정, 보완도 가능하다.
사도 바울같이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아 온전히 변화된 삶을 영위하는 자가 있었던 반면, 대개의 인간은 성장 시 형성된 관습이나 사고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외적 환경에 의한 신앙과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신학적 기초, 교육학적 기초, 철학적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학문은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진실은 거짓됨과 대립된다. 진실은 사실을 의미하며 거짓이 아닌, 왜곡이나 은폐나 착오를 모두 배제했을 때에 밝혀지는 올바른 것을 의미한다. 역사는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역사가는 진실을 정직히 전하고 말해야 한다.
논리나 형이상학에서는 진실을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충족이유율과 같은 사유법칙과 논리에 어긋나지 않는 정당한 사고를 말한다. 여기에는 참된 이치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참된 진리이심을 믿는다. 또한 불의로는 진리를 막을 수가 없다.(롬 2:8) 나아가 인간史에 있어서도 진실은 하나뿐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그것은 불변한다.
2. 한상동의 결혼∣
2.1 김차숙 여사의 출생과 입교
한상동의 처 김차숙은 1902년 11월 20일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 238번지에서 김두천 씨와 이택숙 씨 사이에 1남 3녀 중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 김두천 씨는 당시에 양반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김차숙의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아주 뛰어나서 바느질로 가족 생계를 유지하였다. 차숙은 20세가 되던 해 1921년 5월 31일 다대포에 거주는 한상동과 결혼을 하였다. 한상동은 어린 나이 6세에 이미 5촌 당숙 한금출 댁으로 입양된 상태이므로 내외는 양부모님을 모시고 신혼살림을 꾸렸다.갓 시집온 한상동의 처는 어머니께 배운 솜씨가 있어서 길쌈(바느질)을 잘 하였으며, 음식 만드는 솜씨도 뛰어나서 양부모님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잘 봉양하였다.
차숙이는 결혼 후 처음으로 친정에 갔는데 친정 동생 인숙이가 기장교회(당회장 이약신 목사)에서 부흥회가 있으니 예배당에 같이 가보자고 권유하여, 생전 처음으로 교회를 가게 되었다. 차숙이는 그날 부흥회 강사가 전하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그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한상동은 기장의 처가에 갈 때마다, 처제들로부터“형부도 예수를 믿으십시오.”라는 권유를 받았다. 처제 예숙이는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전도를 하였다.
마침 1924년 2월 박찬근 전도사가 다대포로 와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 무렵 한상동은 인생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든 시기였는데, 박 전도사의 전도로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곧장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한상동 부부가 교회에 나가고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는 소문은 금방 온 동네에 퍼졌다. 결국 양부모님을 비롯한 일가친지들까지도 모두 알게 되었다.
이들 한상동 부부에게 어려움은 바로 닥쳐왔다. 1926년 연초에 한씨 가문 문중회의가 열렸다. 문중 어른 34명이 한데 모여서 한상동과 김차숙 부부가“예수를 믿는다.”는 점을 이유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문중회의가 열렸던 것이다. 문중회의는 한상동에게 파양(양자관계의 인연을 끊음) 선고를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한상동 부부는 그 즉시로 양부모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한상동은 엄청난 시련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1927년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진주에 소재한 광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부인 김차숙은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두 부부는 그래도 조금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신앙심은 날이 갈수록 더욱 돈독해져 갔다.
Ⅱ. 한상동의 수난
3. 한상동과 이인재, 동지들의 환난 노정∣
3.1 한상동 목사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과 고난의 여정
한상동은 7세에 다대포에서 서당 공부를 하였으며, 이후 다대포 실용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1916년에 동래고보에 입학하였으나 1918년 중퇴한다. 이후 일본으로 공부를 하러 갔으나, 양부모님의 반대로 다시 귀국하여 다대포 실용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27년 진주 광림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나 1928년 사임한다. 그해 바로 피어선 성경고등학교에 입학 하였지만 폐병에 걸려 1929년 중퇴를 하게 된다.
한상동은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하여, 193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3월20일 졸업을 하였다. 1937년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문창교회에 부임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압력과 교회에의 조직적 회유로 결국 문창교회를 사임하게 된다.
이후 한상동 목사는 이인재 전도사의 권유로 밀양마산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이인재 목사 전기(박시영 목사 저)에 의하면, 이때부터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펼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경상남도에서는 한상동, 이인재, 주남선 목사가 중심이 되어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펼쳐 나갔다.(2)
3.2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와의 만남과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이렇게 기술한다.∣
3.2.1 이인재 전도사와 한상동 목사의 만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 못지않게 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는 한상동 목사(1901~ 1976)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죽어간 개혁주의 신학을 다시 부활시키며, 보수 신앙의 밑거름이 된 한상동 목사는 침묵의 성자이다. 큰 나무는 바람도 센 법, 그러나 그는 어떤 바람에도 요동치 않았다.
한 목사는 1934년 평양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졸업, 1938년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부산 초량교회에 부임하였다. 이때는 벌써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하여 소위 시국강연회라는 것을 개최하여 교회 지도자들에게 참배를 유도하고 있을 때였다.
한 목사는 1938년 10월 24일 ⌈현 정부는 정의 및 신의(神意)에 위반한 우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 참배해서는 안 된다.⌋라고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마산 문창교회가 한상동 목사를 청빙하므로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문창교회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다가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자, 그 후임으로 한 목사를 청빙한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의 설교는 은혜가 충만하였고, 교회 또한 늘 평온하였다. 그러나 그곳에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공공연히 밀려왔다. 1938년 3월 6일 한상동 목사는‘3대 탄식’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선의로 창조한 만물을 국가가 악의로 사용하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탄식 한다.”고 설교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루는 경찰서에서 잠시 좀 와 달라는 통지를 받았다. 일경은 한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하지 못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한 목사는 십계명에 위배되는 점 등 6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참배에 응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 일로 한 목사는 교회를 사면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으며, 문창교회에는 더 이상 시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시무를 사면하고 나온 한상동 목사는 이때부터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다.
이인재 전도사는 밀양 예림교회에 시무하는 윤술용 목사를 자주 만났다. 윤 목사도 강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신앙의 교제를 나누며 피차 권면을 하기도 하였다. 이인재 전도사는 윤술용 목사와 함께 신앙의 선배인 한상동 목사를 자주 만났다. 이 들은 어려운 시기에 닥쳐오는 큰 시련을 어떻게 이겨 낼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결국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 사람은 김해 무척산으로 올라갔다. 그 곳에서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셋은 무척산에서 며칠 동안 흩어져 기도를 하였다. 하루는 한상동 목사가 말했다.
“앞으로 신사참배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죽어갈 것 같은데 이대로 기도만 하고 있어서는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힘을 합하여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일으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에 그냥 있을 것이 아니라, 기도 장소를 수영 해수욕장으로 옮기도록 합시다. 그 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반대 운동을 구체적으로 펼쳐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한상동 목사의 판단은 참으로 옳았다. 모두는 그렇게 해야 된다고 보았다. 이인재 전도사와 윤술용 목사는 한 목사의 말에 동의하였다.
3.3 수영 해수욕장의 수양회∣
3.3.1 무척산 기도회∣ 1939년 여름이었다. 한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말경 우리 셋은 무척산에서 내려왔다. 수영 해수욕장으로 갔다. 우리는 밤에 후미진 곳에서 모여 기도회를 가졌다. 소식을 듣고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조수옥 전도사가 백영옥, 박인순을 비롯한 십여 명을 데리고 찾아왔다.기도회 열기는 여름 햇살에 달아오른 백사장만큼 뜨거워졌다.
3.3.2 수영 해수욕장 수양회∣ 우리는 수영 해수욕장(현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한상동 목사와 뜻을 같이 한 신앙동지들이 모여 수양회를 가졌다.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윤용술 목사, 이인재 전도사 외 몇몇 목사님들과 조수옥, 박인순, 백영옥, 임두연, 백금옥, 배학수 등 10여명의 여성도들도 참석했다. 이후 이들 신앙의 동지들은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부산 경남지역에서 심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쳐 나갔다.
3.3.3 한상동과 이인재의 결집∣ 한상동 목사는 함께한 그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우리가 지금까지는 숨어 지내며 음성적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해 왔지만, 이후로는 기본적인 방안을 세워 적극적으로 대처합시다.”
이인재 전도사가 대답하였다. “어떤 방안이 있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적극 따르겠습니다.”이에“좋아요.”그러시면서 한 목사가 제시한 것이 4가지 방안이었다.
① 신사참배 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말 것.
② 신사참배 하는 목사가 집례하는 성례전에 참여하지 말 것.
③ 신사참배 하는 교회에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연보를 내지 말 것.
(대신 연보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일과 교회재건 운동에 쓸 것)
④ 신사참배 하지 않는 교인끼리 모여 예배할 것.(특히 가정예배에 힘쓸 것)
이날 참석한 우리 일행은 한 목사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이 방안을 전국에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경남 전역에 번져 나가게 되었다.(3)
3.4 한상동은 밀양마산교회로, 이인재는 평양으로∣ 이인재 전도사는 밀양으로 돌아와 각 교회에 이 결의문을 전하고, 그렇게 시행하도록 독려하였다. 밀양 마산교회에서는 박수민 장로가 중심이 되어 활발히 이 일에 가담(加擔)하였다. 한편 이인재 전도사는 한상동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문창교회에서 사면을 강요당하고 목회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래서 한상동 목사를 만나 이렇게 말하였다.
“한 목사님, 저가 시무하는 밀양마산교회로 오십시오. 우리 교회는 비록 농촌교회이고, 규모는 작지만 신앙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장로님으로부터 모든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전도사는 어떻게 하려고?” 한상동 목사가 물었다.
“나는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신학교가 폐교되었는데 평양에는 무엇 하러 가겠다는 것이요?”
“언제 다시 문이 열릴지 기다려 보는 것이지요. 비밀리에 평양신학교 교수들을 만나 개인 학습으로 신학공부도 보충해야 하고, 그리고 자녀들 교육 문제 때문이기도 합니다.”이어“자녀들 교육이야 여기서도 시킬 수 있지 않겠소, 아직 초등학교 학생들일 터인데...”하니“예, 아직 어립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학교에서 강요하니 안 되겠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께 아이들 문제를 상의하였더니 그 곳엔 빈민학원이 있는데 애국지사 자녀들과 신사참배 반대하는 교역자들 자녀들이 비밀리에 공부를 하고 있답니다. 주 목사님 아들도 그 곳에 다닌다고 하니 우리 아이들도 그 학원에 넣어야 하겠습니다.”“나는 밀양 마산교회에 가면 좋지만 이 전도사는 고생이 많겠어요.” 하니 “시대가 그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3.5 항일 신사참배 거부의 요람 밀양마산교회∣ 이리하여 한상동 목사는 밀양 마산교회로 부임하게 되었고(제9대 담임교역자로 부임) 이 인재 전도사는 평양으로 떠나게 되었다. 사실 일경의 간악한 사술(邪術)로 인해 마산 문창교회를 사임한 한상동 목사를 밀양마산교회 목사로 모셔온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할 모험이었다. 그러나 박수민 장로와 이인재 전도사는 당당하게 이일을 추진하였고 이후 밀양마산교회는 신사참배반대 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또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숱한 핍박(逼迫)과 박해(迫害)도 뒤따르게 되었다.
4. 한상동 목사의 수난과 김차숙 여사의 헌신적 삶∣
1940년 7월 3일 한상동 목사는 일제 순사에 붙잡혀 경남도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때부터 김차숙 여사는 갖은 고문을 받는 남편이 가는 곳을 따라다니면서 보살피고, 남편을 수종들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1941년 7월 10일 한상동 목사는 강제로 평양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김차숙 여사는 일제 형사들의 제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양까지 동행을 하게 된다. 마침,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 부인 오정모 사모와 안이숙 선생의 어머니가 김차숙 여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평양감옥 내의 사정과 정보를 잘 파악하게 되었다.
밤이면 오정모 사모님 댁에서 잠자리를 마련하게 되었고. 낮이면 평양 감옥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서 동정을 살폈다. 오가는 많은 평양시민들은 김차숙 여사의 모습을 보고 감옥에 갇힌 주의 종의 아내라는 것을 곧장 알아 차렸다. 평양 시민가운데 예수를 믿는 자들이나, 만주를 오가는 상인 성도들은 김차숙 여사에게 물품이나 돈을 가져다주곤 하였다. 김차숙 여사는 여기저기에서 그런 구호 물품을 꾸준히 받고 모아서 신사참배로 투옥된 40여명의 주의 종들을 돌보았다.
간악한 일제는 어느 시점에는 성경책이나, 사식(음식) 등, 기타 물품들을 감옥에 있는 주의 종들에게 허용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철저히 단속하는 등 온갖 유혹과 꾀임을 일삼으면서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된 자들을 유혹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며칠을 굶긴 후 맛있는 음식으로 유혹하기도 하였고, 잠을 재우지 않고 고통을 주기도 하는가 하면, 단순하고 간단한 말 한마디만 하면 석방한다는 유혹을 하기도 한다.
한상동 목사의 옥중기 증언에 의하면 마룻바닥 솔가지 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찬바람이 뼈 속 깊이까지 파고들어, 칼날 같은 북풍은 살을 에이는 차디찬 엄동의 찬공기 바람이었음을 회고하기도 하였다.주의 종들이 감옥에서 당하는 이런 고통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목격한 김차숙 여사는 매월 한 달에 한 번씩은 정기적으로 부산으로 내려와서 친정 가족들의 도움으로 명주 솜 옷을 만들기도 하고,양말이나 속옷을 구해서 평양으로 가져가곤 하였다. 이런 섬김은 6년여 간이나 반복하였다. 남편뿐만이 아니라 일편단심으로 주의 종들을 섬긴 일은 신앙심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일제의 강압적인 고자세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김차숙 여사는 평양 감옥에 갇힌 주의 종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운 힘든 일을 자신이 해야 할 사명으로 생각하였으니, 깊은 신앙심과 믿음이 아니고서는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여겨진다.
김차숙 여사는“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 목사를 순교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면 기꺼이 바칠 수가 있겠지만, 왜정이나 일제 고등계 형사나 재판관이라도 어떤 인간이 한 목사를 해치려고 하면 나는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결코 내어줄 수가 없다.”고 고백하였다고 전한다.
Ⅲ. 김차숙의 헌신과 증언들
5. 김차숙 여사의 평양 형무소(감옥) 면회와 수인 돌봄∣
당시 옥중 성도들에게는 월 1회 면회가 허용되었다. 일제는 일본어 말을 할 수 있는 자에 한하여 면회를 제한하였다. 그리고 매월 2회는 사식을 넣을 수가 있었으나 그것도 일제 형사들의 허락이 있어야 만이 가능했다. 김차숙 여사가 평양 감옥소를 자주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은 주기철 목사의 부인 오정모 사모의 역할이 컸다. 오정모 사모는 교사출신으로 일본어에 능통하였기에 일본순사들을 상대로 면회를 주선하셨고, 김차숙 여사에게 일본말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당시 오정모 사모는 연세가 80세나 되는 시어머님을 봉양하고 있었는데, 전처의 아들 넷을 보살피면서 자녀들 일로 인해 시어머니와의 의견차로 어려움이 조금 있었다고 한다.
김차숙 여사는 자녀가 없어서 조금은 자유로웠다. 때로는 경남지방 일대를 돌면서 투옥된 자들의 가족이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성도들에게 옥중에 있는 주의 종들의 근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많은 분들이 모아준 십일조 헌금, 기타 연보와 물품 등을 거두어서 옥바라지 하는 일에 보태어 사용하였다.
김차숙 여사는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는데, 많은 성도들에게서 받은 돈으로 명주 옷감을 구입하여 솜을 도톰하게 넣은 솜바지 저고리를 직접 손으로 지어서 옥중에 있는 종들이 입을 새 옷을 들여보내곤 하셨다.면회를 가면 입은 헌옷을 받아서 다음 면회를 가실 때는 세탁을 해서 깨끗한 옷을 다시 넣어 들이곤 하였다.
따스한 봄날이 오면 겨울 옷 빨랫감은 부산으로 붙여 보내고, 그것을 다듬고 세탁하여 다시 손질을 한 후에 평양으로 붙여 가져가곤 하였다. 이렇게 김차숙 여사는 옥중에 계셨던 일곱 분의 종들을 6년여 동안 특별히 섬기셨다. 김차숙 여사는 옥중에서 순교하신 이현숙 전도사, 최상림 목사 등 종들의 장례식을 직접 치루기도 하셨다. 일제는 순교자들의 유족들이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므로, 오정모 사모와 김차숙 여사는 큰 장독 하나를 마당 중앙에 두고, 순사들 몰래 성도들이 밤에 살짝 장례식 물품들을 거기에 같다 놓곤 하였다고 한다.
6. 조용해 장로의 증언∣
5.1 김차숙 여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김차숙 여사의 조카 조용해 장로에 의하면“이모님은 평양에서 옥중에 있는 주의 종들을 뒷바라지 하시다가 공급할 물품이나 돈이 떨어지면 정기적으로 부산으로 내려오셔서 옥바라지에 필요한 옷가지와 내의, 양말, 신발 등 일용품을 구해서 수감된 40여명의 옥중에 있는 주의 종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뜻있는 성도들을 만나기도 하고, 찾아오는 분들을 면담하기도 하셨다. 그때마다 이모님은 부산 서대신동에 있는 외가 집에 오셔서 주로 내 방에 기거하셨다.” 조용해 장로는“이모님은 낮에는 주로 주의 종들이 입을 명주 솜 옷을 만들었다.”고 회고하였다고 한다.
조용해 장로는“방에서 혼자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이모님의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밤이 되면 하나님과 씨름을 하듯, 몸을 좌우로 크게 흔들면서 머리를 벽에 대고 밤이 지새도록 하나님과 씨름을 하듯 기도를 하다가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곤 하셨다.”고 증언한다. 이런 이야기는,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새도록 천사들과 씨름을 하였다는 성경 말씀을 다시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4)
7. 조용진 사모의 증언∣
이런 증언들은 조카인 조용진 사모(이근삼 박사의 처) 역시도 어린 나이에 이모님(김차숙 여사)의 모습을 자주 목격하였다고 한다. 몸이 너무 쇠약해지셔서 잦은 두통으로 머리가 아파서 찰떡을 만들어서 머리에 이고 기도를 하시곤 하였다고 한다. 김차숙 여사의 친동생 예숙이는 형부가 옥중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매일 아침마다, 오랜 기간 하루도 쉬지 않고 금식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예숙이는 언니를 도와 필요한 물품들을 원만히 조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후일 김예숙 권사는 어려운 고려신학교 학생들을 많이 도왔으며, 아들 3형제(안기, 영기, 상기)는 신실한 장로로서 교회를 잘 섬겼다. 김차숙 여사는 옥중의 계시는 종들의 뒷바라지를 주로 친정집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전한다. 이런 증언은 조카인 조용해 장로에 의해 전해졌으며 확인되었다.
조용진 사모의 부친 조명규 씨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하여 진해 웅천에서 백화점을 하고 있었다. 김차숙 여사가 자주 들러 옥중 바라지에 필요한 옷가지와 내의 등을 공급해 주었다.
출옥 성도 이인재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5) 솜털 명주 옷 이야기는 확인이 된 바가 있다. 만주에서 소 구르마. 달구지를 몰았던 청년 이경석(서면교회 시무, 후일 고려학원 이사장 역임)이가 김차숙 여사에게 돈을 가져다 드리곤 했다고도 기록하고 있다.(6)
6.1 환원에 대한 조용진 사모의 증언∣ 조용진 사모는 제2세대를 마감하는 유일한 생존자다. 승동 측과의 합동과 환원에 대해서 김성천 목사 와 동일한 증언을 하였다. 김성천은 당시 신대원 졸업반 학생이었다.
총회(통합)가 WCC를 지지함에 따라 이를 반대하고 분리된 것이 승동측(합동)이다. 당시 상당히 위축된 분위기를 일신하고,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고려파의 순수함과 정통성을 공유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고려파 교회, 고려신학교 지지자들과의 합동을 주선하고 서두르게 된 것이다. 이에 한상동 목사는 순전히 믿고 합동을 하였다. 2, 3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당초 약속 위반, 고려신학교 폐교 조치, 기숙사 학생들이 서로 불화를 일으키는 등 밑바닥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강도사 고시에서 고신출신 17명은 한명이 떨어졌다. 총신측은 한명만 합격하고 70여명 전원 불합격되었다. 총회는 다시 합격점을 60점에서 40점으로 낮춰 고신출신들은 모두 합격되었으나, 합동은 반수 정도만 합격이 되었다. 시험을 칠 때 컨닝은 예사로웠으며, 기숙사에서 화투놀이 같은 심심풀이도 자행되는 분위기 였다. 학생회 선거를 하면 금전이 오가는 등 이질감이 갈수록 심해져서 학생들은 환원과 고려신학교 복교를 강하게 요청하게 되었다고 한다. 교권 독점은 또 다른 양상이지만, 신학생들 간의 이질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런 증언은 김승천 목사, 이금도 목사, 신정순 전도사, 김계초 전도사도 동일한 증언을 한다.(7)
이인제, 조수완, 황철도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2학년까지만 다녀서 다시 고려신학교에서 1년을 수학하고 제1회로 졸업을 하게 된다.(8)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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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조용진은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 여사의 친정 조카이다. 조용진은 1945년 광복이전 진해여고 2학년 이었으나, 광복이후 남은 1년을 수학하고 1946년 9월 30일 여고를 177호로 졸업하였다. 당시 진해여교 교장은 지수성 장로였다. 미군정부 경상남도 장관으로부터 공립국민학교 훈도 6급 자격을 취득하였으며, 웅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조용진은 한상동 목사님께서 광복과 함께 출옥하신 이후 초량교회에서 시무할 당시 초량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당시 초량교회 전도사 이근삼과 결혼했다. 한 목사님이 “조용진 선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었더니 “싫지는 않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이근삼의 은유적 반어법적 청혼은 그래서 유명하다.
(2) 박시영 목사 저, “태양신과 맞서 싸운 신앙의 투사 이인재 목사” 도서출판 영문, 2006. p. 73
이인재 목사 전기ㆍ박시영 목사 저(밀양일보 연속기사, 2005)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 전도사(6) 2. 한상동 목사와의 만남 / (출처: http://www.injaelee.org/K_bio_6.html)
(3) ibid., p.77.
(4) 조용해는 김차숙 여사의 조카이다. 부민국민학교를 졸업, 부산대학 중퇴, 뉴욕 튼튼한교회 장로
(5) 고려신학교 제1회 졸업(1947. 6. 27) 이인재 조수완 황철도(이상 3명)는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어 고려신학교에서 1년을 수학하고 졸업하였다.(오병세 박사 증언)(출처: http://www.kts.ac.kr/www/bbs/board.knf?boid=el_name&wid=2&page=5)
(6) 박시영 목사 저, “태양신과 맞서 싸운 신앙의 투사 이인재 목사” 도서출판 영문, 2006.
이인재 목사 전기, 박시영 목사 저(밀양일보 연속 기사, 2005)
신사참배 반대운동가 이인재 (17) 참고
검찰의 기소와 평양형무소 시절 3. 형무소 입소 후 몇 달 동안 참고
평양 형무소 내에는 40여명의 목사, 장로, 전도사가 수감되어 있었다. 고난은 극심했다.“중략”거의 매일 사식이 들어왔다. 이 사식은 옥문 밖 담벼락에 앉아 있는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여사에게 숨은 여러 성도들이 가져다 준 돈과 쌀 등 정성을 모아 들여 온 것들이다. 김차숙 여사가 공동으로 자금을 모아서 들여보내는 것이다. 이 사식은 신사참배반대로 수감되어 있는 모두에게 공급되었다. 김차숙 여사는 자녀도 없고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남편의 옥바라지가 그의 생활 전부였다.
또한 만주에서 트럭 운전을 하고 있는 청년 이경석(1908년 8월 8일~1990년 4월 8일)은 번 돈을 김차숙 여사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경석은 해방 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서면교회에서 사역하였으며,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을 역임 했다. 그는 옥문 밖의 신실한 봉사자였다. 평양형무소까지 찾아와 자신의 수익금을 김차숙 여사에게 전달하였다. 김 여사는 거의 매일같이 사식을 제공하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시원한 모시옷을 직접 깁어서 그녀의 손을 통해 감옥 안에 모시옷이 들여왔다. 우리 죄수들은 생각지도 않았든 모시옷을 입었다. 감옥 안의 있었던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된 우리 일행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다.
(7) 2014년 1월 30일 복음병원 병실, 증언자 김성천 목사, 제57대 총회장(2007. 9. 10 - 2008. 9. 22)
(8) 오병세 박사 증언(201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