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에 붙이는 글-

로이 M. 바이럼과 나는 만주에서 30년 이상 한국인을 대상으로 선교했다.’(The Presbyterian Guardian, 1942.10.10. by Bruce F. Hunt) 브루스 헌트(韓富善, Bruce F. Hunt, 1903-1992) 선교사는 로이 맥 바이럼(Roy Mack Byram, 1893.3.6-1974.10.3) 선교사와의 관계를 이렇게 적었다. 브루스 헌트는 신사참배 거부 혐의로 중국 헤이룽장 성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 로이 M. 바이럼 선교사와 일본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 글은 바이럼 선교사 부부가 안 이숙(安利淑, 1908-1997) 씨의 옥중 얘기를 책으로 써서 미국 교회에 보급,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한 얘기다


자원봉사 활동에서 만난 반려자

▲ 이병길 목사
로이 바이럼 선교사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출신이다. 부친 O. B. 바이럼(O. B. Byram)과 모친 스텔라 맥(Stella Mack) 사이에 태어난 그는 81세에 로스앤젤레스에서 그의 정열적인 삶의 여정을 마쳤다. 부인 베르다 스텐리(Dr. Bertha Elvira, Stanley Byram, 1888-Kansas)1888년 캔자스(Kansas)에서 G. T. 스텐리(Geo T. Stanley)와 메리트 마일스(Merite Miles)의 딸로 태어났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에 해외선교 학생자원봉사 활동을 통하여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대학 졸업 후 두 사람은 191591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혼인했다. 바이럼의 나이 22, 스텐리는 바이럼 보다 다섯 해 연상인 27세 때였다. 두 사람은 텍사스 주 휴스톤에 있는 의과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첫 딸 메리트(Merite, Mrs. Ernie Heimbach) 출산과 인턴십을 위해 캘리포니아 버클리로 옮겼다.

 

북한 강계에서 의료선교 시작

1921년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 독립위원회(IBPFM, The 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s) 소속 의료 선교사로서 강계(江界, 현재 북한 자강도 행정구역, 6.25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임시수도)에 파송되었다.

장로교 해외선교 독립위원회는 1937년 정통장로교(OPC, the Othordox Presbyterian Church)에서 분리, 칼 메킨타이어(Carl McIntire, 1906-2002) 등에 의하여 조직된 성경장로교(the Bible Presbyterian Church) 교단이다. 원래는 1933년에 조직된 선교단체로서 20세기 초 중국 산뚱성(山東省)과 상하이(上海)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 이 선교 단체의 중국 선교에 디딤돌 역할을 한 선교사 중에는 알버트 볼드윈 도드(Albert Baldwin Dodd, 1877-1972)가 있다. 그는 1903년부터 시작하여 32년간 선교 현지에서 활동했으며, 1935-1942년과 1946-1948년 어간에는 상하이, 그리고 1955-1960년까지는 타이완(臺灣)에서 각각 활동했다.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북한 강계에서 병원을 개설하여 의료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9~20세기 초 한국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의료 지원이 절실한 시기였다.朝鮮末日帝 强占期 동안 來韓西洋 宣敎 醫療人活動分析(황상익·기창덕의)에 의하면 1885년 조선에는 3명의 의료 선교사가 있었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1925년에 이르면서 123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당시 내한한 서양 의료 선교사의 최대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분석했다. 논문은 1884-1941 어간 내한하여 활동한 서양 의료 선교사 명단에 바이럼 선교사의 이름과 함께 그의 활동기간을 1921-1935년과 활동 장소를 북한 강계(江界)라고 했으며, 바이럼의 부인 베르다 스텐리는 1911-1935년 북한 강계(江界)에서 활동한 것으로 되어있다. 논문에서 이들 두 부부는 다 같이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되어있다(9,10) 이는 아마도 독립선교 위원회가 바이럼 선교사 부부가 파송된 16년 후 교단 분리가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북한에서의 환경 적응은 육체적 고통이었지만 선교사들은 조선인을 도우는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은 바이럼 선교사 부부에게 치료받은 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것이었고, 베르다 스텐리는 그들을 상대로 두 달 과정의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얼빈으로 선교지 이전

강계(江界)에서 활동하던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1935년 일제가 식민지배하고 있던 중국 만주(滿洲)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으로 선교지를 옮겼다. 당시 한국 교회는 두 가지 역사적인 중대 사안에 봉착해 있었다. 그 하나는 자유주의 신학(Modernism)의 파장, 다른 하나는 일제(日帝)의 신사 참배 강요 문제였다. 이 두 가지 사안은 당시 한국 교회가 공히 강력한 투쟁으로 극복해야 했던 문제였다.

당시 미국 교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한국 교회는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 북장로교가 자유주의 신학 용인과 신앙 전통을 헌신짝처럼 져버린 비극적인 상황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미국 북장로교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약15(1915-1929) 간 신약학 교수로 봉직한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박사를 제명하므로써 프린스톤신학의 정통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이에 메이첸은 프린스톤의 현대신학 수용에 맞서 보수적 혁명과 정통신학의 이상적 보루가 될 웨스트민스터신학 설립을 주도했다. 이로써 북장로교가 분열되었고, 정통장로교(OPC, Orthodox Presbyterian Church)가 새롭게 출범하므로써 선교사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이와 관련, 그동안 북 장로교 소속으로 한국에서 16년 간 의료 활동을 한 황호리(H. C. Whiting, 1865-1945), 배의남(Roy M. Byram, 혹은 바이람’),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를 비롯한 열한 명의 저명한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바이럼의 북한 강계에서 중국 하얼빈으로의 선교지 변경 역시 북장로교의 자유주의신학 용인 배경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기독교의 만주(滿洲) 선교는 당() 태종(太宗) 정관(貞觀A) 9, A.D. 635년 현재 산시성(陝西省) 장안(長安, 西安)에 경교(景敎, Nestorian)가 전래되면서 시작되었다. 경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兩性, 神性人性) 분리를 주장하여 A.D.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적이 있다. 경교의 극동지역 선교와 관련, 1928년 일본의 한 고고학자가 고대 무덤에서 네스토리안이 사용했던 십자가를 출토함으로써 일본에 경교의 선교를 확인할 수 있었고, 경주(慶州)에서도 신라 유물에서 네스토리안의 십자가가 발견된 점들을 고려하면, 경교의 선교 지역이 태평양 연안에까지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만주는 경교 선교를 계기로 1,800여년 간 로마 가톨릭 선교의 독무대였다.

개신교의 만주 선교는 1861년 스코틀랜드 성경공회가 성경을 보급하는 권서(勸書, Colportur)를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영국 장로교, 아일랜드 연합장로교가 만주 선교에 차례로 참여했으며, 1872년 스코틀랜드 성경공회는 만주 선교를 위한 성경 보급에 상당한 경력을 축적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존 로스(John Ross, 1842-1915)1872년에 파송된 만주 선교 개척자며, 최초로 한국어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다. 1891년에는 덴마크 선교회(D.M.S)가 중국 선교를 결의하고, 1893년에 처음으로 세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놀라운 것은 1896년 덴마크,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장로교 등 현재 주재 각 선교 단체가 랴오닝반도(현재 遼東半島) 동남쪽 지역으로 선교지역 확장에 합의를 한 것이다.

개신교의 스코틀랜드 성경공회가 만주 선교를 시작한 지 약50, 19108월부터 만주는 러시아 바이칼 지역에서 발생한 전염병 폐렴(肺炎)이 두 달만에 1,600여 킬로미터를 건너서 철도를 잇는 하얼빈, 장춘(長春), 선양(瀋陽) 등 만주 일대에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당시 19113월까지 만주 일대에서 폐렴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무려 60,000명에 달했다(Contagion) 의료 선교가 절실히 요구되던 시기였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바이럼 선교사 부부의 하얼빈 행은 스스로 고난을 자원한 행보였다. 바이럼은 미국에서 파송된 성경장로교 선교부(the Bible Presbyterian Mission Board) 관할에서, 병원과 교회당이 없는 곳에서 진료소를 개설해서 의료 활동을 하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만주 일대에는 중국인 3,000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중국인 기독교 인구는 1,000명 중 한 명이 꼴이었으니 척박한 기독교 선교 환경이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족은 약100만 명, 동만(東滿洲)노회(1925), 북만노회(1932), 남만노회(1921), 그리고 봉천노회가 이미 조직된 상태였다(선지자문서선교회 중국선교공회, ‘한부선 선교사 평전-만주에서 태양신과 싸우는 한부선’) 봉천에는 19351022일 남만주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한 펑톈’(奉天)노회가 조직되었다(기독신문2010.10.17/고병철, ‘일제강점기 간도지역의 한인 종교와 민족주의’ 29) ‘펑톈1634(淸天總8) ‘청징’(盛京), ‘펑톈’(1657) 만주어음 모커둔’(謨克敦), 영어음 무크던’(Mukden), 1928년 펑톈(奉天)은 다시 선양’(瀋陽)으로 개명, 오늘에 이르렀다.

바이럼 선교사 부부가 파송될 때는 제2차 세계대전(1939. 9.1-1945.8.14)이 유럽 일대를 휩쓸고 있었고, 태평양 한 가운데 떠 있는 하와이 진주만이 일본의 기습 공격을 받기 직전(1941.12.7)이었다. 당시 미국의 국력은 유럽 전선에 집중돼 있었고, 태평양은 유럽 전선과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취약 상태였다. 게다가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가 중·(中日)전쟁을 비롯한 동남아에로의 세력 확장 억제를 위해 일본에 경제 제재 조치를 단행했고, 이에 대한 일본의 반발이 진주만 습격으로 폭발했다. 태평양전쟁(1941.12.7-1945.92)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로이 M. 바이럼과 브루스 헌트

바이럼 선교사는 브루스 헌트(Rev. Bruce Hunt, 1903-1992) 선교사보다 열 살 연상이었다. 브루스 헌트는 조선 땅 평양에서 태어나 자란 자칭 한국인으로서 48년 간 조선과 만주를 넘나들면서 선교 활동을 폈다. 그의 부친 윌리엄 B. 헌트(William B. Hunt, 1869-1953)1897년부터 42년 간 조선 땅에서 선교했다. 브루스 헌트의 부인 캐서린 블래어(Katharine Blair, 1904-1994) 역시 조선 땅에서 선교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캐서린 블레어가 영문학 강의 시간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맥베스’(Macbeth)를 을 소개하면서 눈물을 보인 그 기억이 아직도 새롭게 느껴진다. 브루스 헌트 선교사 부부는 두 해 차이로 차례로 세상을 떠나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힐사이드 공원묘지(Hillside Cemetry)에 안장되었다. 묘지 비석에는 한글로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그 아래 영어 ‘NOTHING BUT THE BLOOD O JESUS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브루스 헌트는 미국장로교(PCUSA) 교단에서 탈퇴, 정통장로교(OPC)에 합류, 그레샴 메이첸(J.Gresham Machen,)의 지지하에 장로교독립선교부(PIMB, Presbyterian Independent Mission Board) 소속 선교사로서 1936-1942년까지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바이럼 선교사 부부와 함께 활동했다.

만주는 만주국’(滿洲國, 1932-1934), ‘만주제국’(1934-1945)으로 호칭되었다. 만주는 1931918일 일본 군국주의 관동군(關東軍)이 만주(滿洲)를 범아시아 장악에 전략적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9.18사변을 일으키면서 관동군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일본 군국주의는 1945년까지 만주 일대를 강점, 사실상 식민지화 한 것이다.

만주 일대는 19세기부터 기독교 선교 단체들이 앞다투어 선의의 경쟁을 하리만큼 선교 열정이 대단했다. 캐나다 장로교의 조나단 고포드(顧約拿單, Jonathan Goforth, 1859-1936), 덴마크의 안나 보그 매드슨(Anna Bog Madson, 1888-1973) 여선교사(1919-1946 활동), 그리고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존 로스(John Ross, 1842-1915)1872-1910년까지 활동했으며, 북아일랜드 학생자원운동가 앤드류 웨어(Andrew Weir, 1873-1933)1899년 만주에 도착하여 활동했다. 기독교 만주 선교에서 존 로스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아도 로이 맥 바이럼 선교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감옥의 학교에서 배운 기도

1938년 일본은 종교 통제법을 제정했다. 종교 통제법은 교회와 교회학교 등을 정부에 등록시켜, 일본법에 의하여 일본 황제 숭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위한 식민지 황민화(皇民化, Shinto Shrine Worship Activities) 정책의 일환이다.일제 말기 만주지역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 거부항쟁(김승태)에 의하면 190511월부터 19411월까지 일제가 만주 지역에 세운 신사(神社)는 약180개에 달했다(8) 만주 일대에 조선족 유입은 청() 순치(順治) 10(1653) ‘遼東超民開墾條例반포 이후 약300년 지난 1931년에 630,000(1931)으로 증가했다.

'황민화정책은 일본 문교부가 관장했고, 위법 자는 일본 치안부 소속 경찰청에 해당하는 경무사’(警務司)가 집행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삼자애국운동’(三自愛國運動)은 과거 일본이 만주 식민지에서 실시한 종교의 황민화(皇民化, 황국신민) 정책과 유사한 종교의 공산화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 무렵, 193899~16, 평양서문외예배당에서는 만주 4개 노회를 포함한 전국 27개 노회 총대 193(선교사 22)이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개회 벽두부터 초긴장 분위기 가운데서 개회되었다. 다음 날(910) 속회된 총회는 총회장 홍택기(洪澤麒, d.950) 목사가 히브리서10:5~7절을 읽고,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다음, 공천부장 함태영(咸台永, 1873-1964) 목사가 상정한 신사참배건을 가결했다. 그날은 한국 기독교 역사상 일대 오점(汚點)을 남긴 날로 기억된다. 이 결의에 고무된 일제는 만주에서 황민화 종교정책 추진에 한층 더 탄력을 받게 되었다.

로이 M. 바이럼(일본 발음은 로오이 에무 비라무’, Bartha Stanley Byram바사 스단누리 비라무’)과 브루스 헌트 선교사 등은 당연히 일본의 반() 황민화(anti-Shinto Shrine Worship Activities) 입장, 그래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다. 일본은 미국 선교사들에게 두 가지 압력을 가했다. 하나는 일본과의 타협을 통하여 종교 정책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추방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일본과의 협상을 벌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OPCThe Prsbyterian Guardian, 1942291쪽에는 브루스 헌트가 쓴 체포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게재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Prisoners of Christ Jesus) 라는 주제 서두에는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3:1), 그리고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10:33)라는 구절이 소개되었다.

19411022, 브루스 헌트는 하얼빈에 있는 그의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집안 일을 돕는 러시아인 소녀가 현관문 쪽의 인기척을 확인하고 경찰관이라는 말과 동시에 일본 경찰관이 들이닥쳤고, 선교사들은 체포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같은 시간에 옆집에 사는 로이 M. 바이럼 선교사 역시 함께 체포되었다. 미국 시민권이 선교사들을 지켜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선교사들은 체포될 때 소지품과 소소한 일용품들까지 압수당했다. 경찰서에는 한국인 30~40명이 이미 먼저 끌려와 있었다. 그날 밤 선교사들은 트럭에 실려 집에서 두 블록 거리에 있는 감옥에 투옥되었다(24)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로이 맥 바이럼과 베르다 스텐리 선교사는 가을이 깊어가는 19411022일 브루스 헌트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4226일까지 일본 감옥에 있었다. 19411026일 그날은 주일이었다. 선교사들은 하얼빈에서 검속된 후 다시 열차편으로 약80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한·(韓滿) 국경지대의 안뚱(遼寧省, 현재 丹東) 감옥으로 이감되었다(TIME, 1941.11.17) 무려 이틀이 걸렸다.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한·(韓滿) 국경지대의 감옥에서 혹독한 겨울을 지내야 했다. 흰 눈이 내리는 날은 작은 창틀 사이로 바람에 날아든 눈발이 감방에 떨어졌지만 쉽게 녹지 않을 만큼 매서운 추위였다. 일본 수사관들은 수사 기법에 의하여 선교사들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물었다. ‘성경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는가?’, 수사관들은 죄증(罪證)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따금씩 성경에 관한 호기심도 보였다고 한다. ‘당신이 온 세상을 다스릴 오실 왕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108일 간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그 감옥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신앙의 학교가 되었다고 했다. 감옥에는 성경이 없었지만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그곳에서 기도를 배웠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잊지 않고 계신다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감옥에서 기도는 바이럼 선교사 부부에게 하늘의 위로가 되었고, 일본 제국주의 법정에 서서 참되신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좁은 감방은 12명이 몸을 부비적거리면서 지내야 했다. 브루스 헌트는 신장이 커서 밤에 감방에 누우면 머리가 벽에 닿았다.’고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그런 정도의 어려움은 견딜 수 있었다.

법정에서 판사는 여호와가 아닌, 일본의 태양신이 만주의 하나님이다.’라고 공언할 때마다 바이럼 선교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외쳤다. 선교는 이 세상에 대한 복음적 도전이다. 그러나 세상 역시 기독교 선교 도전에 만만한 상대만은 아니다. 선교사들은 세상의 도전에 맞서야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끝까지 일본의 종교정책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재판부는 바이럼 선교사에게 결심판결을 2년 연기 했다. 연기 이유는 뚜렷하지 않지만 아마도 처벌 증거 부족 때문이었을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결국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194287일 동료 선교사 그립숄(M.D.M.S. Gripshol)과 함께 만주에서 추방되었다. 사실은 미 국무부의 철수 경고에 따른 것이었다. 만주에서 30년 이상 한국 기독교인들과 복음적 유대관계를 가진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일본의 종교 정책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일본의 만행을 한국인들 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반대하면서 감옥의 길을 택했다.

훗날 바이럼 선교사는 미국으로 추방된 후 그의 감옥 생활을 회고 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당한 것처럼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다. 감옥에서 우리의 발이 착고나 수갑에 채워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구타를 당하지 않았으며, 물리적인 육체의 고통은 견딜 수 있었다. 우리는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당했던 것처럼 추방당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했다. 그 사랑의 열정이 조선인을 위해 선교 헌신을 결심하게 했고, 조선인이 흩어져 사는 하얼빈을 마지막 선교지로 선택하게 했다. 그리고 바이럼 선교사 부부에게 주어진 대가는 감옥이었다. 그러나 바이럼 선교사 부부는 한반도와 중국 땅에서 만행을 저지른 일제(日帝)를 만천하에 고발했다.

바이럼 선교사의 부인 베르다 스텐리(Dr. Bertha Stanley Byram, 1889-Kansas)하나님의 일본 감옥에 임재God's Presence Japanese Prison라는 소책자를 처음 썼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이 책을 출판하여 미국 전국에 배포했다. 책의 내용은 당시 일본의 만행을 미국 교회에 알리는 내용이었다.

베르다 스텐리가 두 번째 쓴 소책자는 관원앞에 끌려간 증거Brought Before Governors for a Testimony, 이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 내용이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10:18)

그리고 베르다 스텐리 선교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 있던 안이숙(安利淑, 1908-1997) 씨의 곧은 신앙절개와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 세 번째의 책 죽으면 죽으리라’(1968)If I Perish, I Perish 는 책을 써서 미국 교회에 보급했다. 이 책 역시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세 번이나 거듭 출판했다. 이 책은 조지아 주 아덴(Adens)의 부호가 로랜드(C.A. Rowland)가 자신의 사비로 수십만 권을 출판해서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 뿌려 일본의 만행을 알렸다. 이 책을 초록(抄錄) 삼아 1968년 안이숙 씨가 한국에서 출판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베스트셀런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옥중 노래Prison Songs19411022~194226일 사이, 바이럼 선교사 부부와 브루스 헌트가 지은 노래 모음집이다. 당시는 선교사들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 힘든 시기에 선교사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 노래를 만들어 함께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마무리 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1910. 8. 29-1945. 8. 15)는 한국인이 일본에게 민족적 고독한 시기를 보내던 암흑기’(日帝暗黑期)였다. 일제의 헌병과 경찰은 선량한 우리의 선조와 이웃의 인류의 보편적 인권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일제는 이 땅의 자원을 송두리째 훑어가다 못해 징용(徵用) 노동력을 갈취했고, 심지어 꽃다운 누이동생들을 전쟁터의 소모품이 되게 했다. 세계인은 당시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차 관심이 없었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치욕을 견디지 못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이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심장을 향하여 권총의 불을 뿜고나서야 세상이 깜짝 놀랐을까? 우리는 그렇게 외로웠던 시절이었다.

그 외로운 시절에 선교사들은 조선인 곁으로 다가와 친구가 되어주었고, 우리의 아픈 얘기를 들어주었다. 선교사들은 일제가 한반도에서 저지른 잔혹상을 눈으로 지켜보면서 그 실상을 전 세계에 알려주었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달래주었고, 이 땅 여성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고, 이 땅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향한 눈을 뜨게 해 주었으며, 선교사들은 그들이 익힌 의술로써 우리의 아픈 상처를 싸매주었다. 특히 선교사들은 조선인에게 주권(主權)의식을 고양시켰고, 독립정신을 일깨워주었으며, 민주주의를 알게 해 주었다.

조선말과 일제 강점기 동안 내한 한 서양 선교 의료인(황상익· 기차기)은 모두 ‘280, 이는 당시 전체 내한 한 의료인 311(비선교인 포함)명 가운데 90%를 차지한다.’ 이들 의료인 중 의사는 133, 치과 의사 5, 약사 6, 간호사 136명이라고 했다. 선교사들은 고난 중에 만난 조선인의 친구들이었다.

1912년 한국에 온 사무엘 도슨(Sammuel Kendrik Dodson, 1884-1997) 선교사는 그의 뜨거운 심장으로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다. ‘코리아, 아침이면 싱그러움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나라/태고적 진귀한 전설들이 차고 넘치고/그 누가 제 아무리 옛적의 찬연함을 뽐내며 으스대다가도/그대 앞에 비추이면 초라하고 너무도 작아지지요’(생략)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역에는 외국인 500여기가 안치되어있다. 그 가운데 109명이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한 외국인 선교사 유해로 알려지고 있다. 양화진 묘역에 처음 안치된 선교사는 존 헤론(John W. Heron, 1856. 6. 15-1890. 7. 26), 그리고 평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고 되뇌인 독립유공자호머 헐버트(Homer Bezleel Hulbert, 1863. 1. 26-1949. 8.5) 선교사 역시 그의 말대로 양화진에 안치되어 있다. 헐버트는 대한민국 국권 회복 공로가 인정되어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보훈처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묘역을 거닐면서 언제나 한 번쯤은 걸음을 멈추게 되는 캔드릭(Miss R. R. Kendrik, 1883. 1. 28-1908. 8. 15)의 묘비, ‘만일 나에게 천 개의 목숨이 있을지라도 그 모두를 조선에 바치리라.’(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는 글귀가 가슴 속을 파고든다.

캔드릭은 1907년 꿈 많은 24세의 미혼 여성으로 한국에 와서 25세에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캔드릭은 죽음을 예감한 듯 병상에서 미국에 있는 부모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가고 싶습니다. (조선인들이) 외국인들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아빠, 엄마 얼굴이 자꾸 제 눈에 아른거립니다. 아빠, 엄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평안 하시기를 기도하면서, 병상에서 올림.’

조선에서의 반평생Half a Life Timein Korea, 1952의 저자 메리 루시 도슨(도마리아, Mary Lucy Dodson, 1881-1972) 선교사는 19129, 서른 한 살의 미혼 여성으로 한국에 와서 379개월(1912-1950) 간 한국인과 함께 일제강점기를 경험했다. 그는 1940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반대하다가 6개월 간 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메리 루시 도슨은 자신의 한국 생활을 책으로 묶어내면서 한국을 마치 애인 상대 하듯 사랑을 고백했다. 그는 책을 쓰는 이유에 대하여 신사적이고 호의적이고 인정 많은 이 사람들의 아름다운 풍습과 특징들을 미래의 세대들이 알 수 있도록 보존하고자 하는 바램에서입니다.’라고 적었다.

선교사들은 일제에게 탄압 받는 이 땅의 순진한 백성들의 아픔에 참여했고, 일본의 만행을 만방에 알렸다. 선교사들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흩어진 곳 만주 벌판까지 쫓아가서 한국인 곁에서 함께 했다.

선교사들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의 뜻의 중심에 있다’(The Safest Place in the World Is At the Center of God’s Will.)라고 한 말을 붙잡고 살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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