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를 통해 본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

한국교회와 신학에 새 물결을 일으키기 원하는 새물결 아카데미가 지난 19일 개원 예배를 드리고 출발했다. 새물결 아카데미 최경환 연구원에 의하면, 새물결 아카데미는 당산동에 위치한 새물결 아카데미 북 카페에서 저자와 번역가 그리고 독자들이 만나 이야기하고 토론함으로 새로운 출판물들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물들을 유통시키는 종합적인 지식 생태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식 공동체라고 한다. 시니어 학자들과 주니어 학자들, 은퇴 교수님들과 대학원 학생들이 만나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젊은 친구들이 세미나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오픈하고, 대중들을 위한 기독교 지식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에 힘을 보태는 새물결 아카데미가 되겠다고 소개했다.

▲ 개원 인사하는 김요한 대표

하천운 목사(자유교회)의 사회 시작된 개원예배는 이철규 박사(치의학 박사)가 기도하고 전도서1212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강영안 교수(고려학원이사장)공부론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M&P 챔버 오케스트라의 축가에 이어, 이장호 목사(높은뜻광성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예배 후에 김요한 대표(새물결아카데미 원장)가 다음과 같이 인사했다. “요즈음 다 어렵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 있는데 출판업이 어렵고, 학술 기관들이 어렵고, 카페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일 어렵다는 세가지를 모두 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정말 어렵다고 합니다. 탈탈 털어서 독립운동 하는 마음으로 한국교회를 위해서 의미 있는 징검다리가 되고자 30년을 내다 보고 시작합니다. 우리는 지나갈지라도 우리 후대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있기를 바랍니다.”

▲ 전도서 강론하는 강영안 교수

공부하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강영안 교수는 전도서 강론을 통해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피력함으로 참가한 크리스천들의 인문학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강 교수는 “‘공부하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라고 질문하며 다음과 같이 강론을 시작했다.

여러분 공부하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 했던 그런 공부를 떠올리실 것입니다. 한번은 집에서 제 아이들과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유튜브(youtube)에서 어떤 어린 천재 기타리스트의 연주 동영상을 보면서 제는 공부 안 해도 되겠다!”라며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유튜브에 나오는 저 아이도 공부해야 한다고 시비를 걸면서, 새벽 3시 까지 아이들과 토론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토론을 하면서 아이들이 생각하는 공부와 제가 생각하는 공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공부는 글공부, 말 공부, 마음 공부, 인생 공부 등을 포함하여 평생 공부해야 하는 인문학적 공부를 의미하는 데, 아이들이 생각하는 공부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소위 국··수 위주의 단편적 공부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공부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사실 제가 말씀드리는 큰 틀의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빠는 것도 공부고, 어린 아이가 3000번 넘어지면서 걷기 위해 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입니다. 피아제(Piaget)의 책을 보면 아이들이 세계를 배워가고 점령해 나가는 과정이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피아제는 아이가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단계별로 세세하게 서술하면서 그런 것들을 공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근면, 노력, 열심을 뜻하는 라틴어 스튜디오(stúdio)에서 학생을 뜻하는 스튜던트(student)라는 말이 나왔는데 노력하는 사람이고 힘써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장례식에 가면 학생들이 많이 죽어서 이해를 못했습니다. 유교전통에서 학생은 누구입니까? 벼슬하지 못한 사람들은 평생 학생이기 때문에 관 뚜겅에 學生 □□□ 라고 씁니다.

 

교회와 아카데미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오늘 본문의 공부(לַהַג)라는 히브리 표현도 애쓰다, 힘쓰다, 땀흘리다 는 뜻입니다. 히브리 전통에서도 공부는 애쓰고 힘쓰는 일입니다. 전도서에도 책을 가지고 공부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책을 쓰려면 글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은 글에 대해서 애매한 입장을 취합니다. 디모데 후서3:16의 말씀에서 바울은 모든 성경(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말씀하면서 성경을 기록한 글자를 하나님의 감동의 결과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3:16에서는 의문(문자)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함으로 글자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부정적 표현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플라톤(Plato)에게서도 똑같은 입장이 발견됩니다. 플라톤은 문자는 망각의 도구라고 하며, 문자를 사용하면 외우지 못하고 따라서 제대로 전승받지 못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플라톤이 글을 쓸 때 대부분 대화 형태로 썼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대화 속에 영이 깃들고 그래야 참된 것을 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도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하면서 글 혹은 문자, 책이 죽이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자 혹은 철학이나 학문에 극단적 입장을 취한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교회와 아카데미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글 혹은 문자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으로부터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플라톤이 사용한 희랍어 아카데미아(academia) 라는 말은 사실 지명이었습니다. 아카데미아는 선생과 학생들이 같이 공부하는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선배와 후배들이 함께 살며 공부하는 학문과 생활의 공동체였습니다. 삶의 공동체이고 학문 공동체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였습니다. 그래서 아카데미아에는 교재가 없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질문, 즉 문제였습니다. 아카데미아는 어떤 문제를 탐구하는 학문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와 아카데미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터툴리안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전도서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도서1212절은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글을 구상하고, 원고를 쓰고, 일관된 모습을 갖춘 형태의 책으로 만들어 내고 출판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이런 책들을 공부하는 것이 몸을 피곤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전도서12:12의 책과 공부에 대한 말씀은 전도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두 가지 모티브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전도서의 첫 번째 모티브는 전도서1:2부터 시작되는 헛되다는 모티브입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2:17에서는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전도서 12:8에서도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저도 많은 책을 출판하고, 100편이 넘는 논문을 썼는데 지금 와서 보면 전도서의 말씀처럼 헛되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다 헛된 것입니까? 여기서 전도서의 또 다른 모티브가 등장합니다. 전도서2:10 말씀에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전도자는 모든 수고를 기뻐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저도 논문 한편을 쓰기 위해서 책을 한가득 싣고 서울 근교의 수도원에 가서 일주일 내개 책과 씨름하며 논문을 한편 써서 내러 오면서 기뻐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라는 전도서3:13의 말씀처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새물결 아카데미 개원 예배 현장

인문학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지나가는 헛된 것

글과 책으로 사람과 세상을 공부하며 논하는 것을 인문학이라 할 때, 인문학에 대한 전도서의 관점은 크게 두 가지의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헛되다는 관점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관점입니다. 불가타(Vulgate) 성경을 번역한 제롬(Jerome)은 이 세상의 수고를 멸시하면서 인문학과 같은 세상의 수고는 모두 헛되다고 단정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기 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런 사상이 중세 1000년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종교 개혁자 루터가 이것을 뒤집은 것입니다. 루터는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전도서의 가르침이라고 해석함으로 신학과 인문학의 연결 고리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둘 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책을 내고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즐거워하고 기뻐해야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대단한 것이 아니고, 지나가는 것이고 헛된 것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공부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크리스천들에게 인문학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지나가는 헛된 것입니다.

 

전국을 강타하는 인문학 열풍의 원인을 찾아라!

요즈음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 인문학 열풍이 전국적으로 불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첫째는 스티브 잡스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이 자신의 회사에서 기술과 인문학의 접촉을 강조하면서, “인문학 하면 스티브 잡스처럼 돈 버는 거 구나!”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문(humanities)이라는 것은 돈버는 방법이 아니라 사람이 남긴 그 무엇을 의미합니다.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인문학을 해야 돈을 번다고 생각했던 기업인들이 근본적으로 사람을 알고 사람을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이 점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단순히 신학과 인문학은 다르다는 것이 교회의 의견처럼 보이는데,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신학을 하겠습니까?

두 번째는 전국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의 원인은 한국의 피로사회와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노동과 업적 중심의 문화에 지친 사람들이 이제 좀 쉬고 싶다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을 주도하는 큰 관점은 내려놓아라’ ‘하지 말아라는 노장철학의 입장입니다. 이것만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이 있습니다. 기독교적 인문학 성찰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신학과 인문학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이유는 개발 세대 산업화 일군들이 이제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땀 흘리며 수고하며 살아온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에 대한 답을 인문학에서 찾아보려는 시도 때문에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새물결 아카데미가 기독교 인문학을 통해서 이런 일들을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피로사회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돈을 따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성경이 말씀하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제시하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 할 수 있는 인문학이 필요합니다. 새물결 아카데미가 한국교회를 위해서 이 일을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영안 교수는 전도서 강론을 통해, 하나님 없는 인문학은 헛된 것이라고 단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인문학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피로한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헤메는 현대인들에게 인문학을 통해 다가가 성경이 말씀하는 삶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며 하나님을 만나게하는 지혜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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